R. 피핀, 「존재논리학: 논리적 문제로서의 ‘소여’」 - 1

Pippin, R. (2019). The Logic of Being: The ‘Given’ as a Logical Problem. Hegel’s Realm of Shadows.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pp. 183-215.

시작

헤겔은 이를테면 이 혹은 저 존재가 이러저러한 성질들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경험적 지식임을 인정한다. 반면 성질이 실체에 귀속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실체가 왜 다른 것에 내속할 수 없는지, 성질과 실체가 왜 구별되어야 하는지 등은 경험적으로 알려질 수 없다. 그렇다면 후자의 부류는 어떤 종류의 지식인가? 논리학의 도입부에서 제시되는 순수 존재의 논의는 가장 유명하고도 난해한 비경험적 지식의 예시이다. 순수 존재와 더불어 우리는, 사유할 수 있고 알 수 있으며 존재하는 것은 존재뿐이라는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에 맞닥뜨린다. 헤겔은 파르메니데스와 같은 곳, 여하한 것에 대한 사유(the thought of anything at all)에서 시작하지만, 비존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다다른 파르메니데스와 달리, 비존재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결론짓는다.

헤겔은 시작이 어떤 전제도 갖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절대적인 무전제성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헤겔은 몇몇 전제들, 특히 논리학을 성립시키기 위한 특정한 이론적 및 실천적 전제들을 갖고 시작한다. 예컨대 헤겔은 사유 그 자체, 또 무언가를 그 자체로 사유하기 위한 결단(Entschluß)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논리학의 시작은 “존재를 그 자체로 사유하려고 시도하는 결단”(Pippin, 2019, 185)이다. 이러한 시도는 번번이 실패에 직면하고 스스로를 가지적인 사유이기에는 불완전한 것으로 입증한다. 이 실패로부터 우리는 존재를 사유한다는 것이 이러저러한 것이라는 점을 배운다. 이로부터 우리는 사유가 논변적(discursive)이라는 점, 규정적이고 분절가능성(articulability)을 지닌다는 점 역시 깨닫는다.

다르게는 다음처럼 말할 수도 있다. “단순히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있다는 것이 결국 특정한 어떤 것, 규정적인 것의 있음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그런데 이 존재의 규정성은 사유에 의한 규정가능성에 다름 아니며, 이는 곧 있음을 있지 않음과 구별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일견 이는 우리로 하여금 있지 않은 것의 존재를 인정하도록 하는 듯 보인다. 물론 이는 ‘아무것도 아님’(not being anything)과 ‘~와 다르게 있음’(being other than)을 개념적으로 혼동하는 데에서 기인한다.)

전략

논리학은 그 어떤 규정도 결여한, 여하한 것에 대한 사유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완전한 무규정성 속에서 여하한 것(anything at all)에 대한 사유는 실상 그 무엇에 대한 사유도 아니며, 따라서 무(nothing)에 대한 사유이다. 그러나 “시도된 직접적 무규정성에 대한 사유는, 그러한 규정의 내용이 무라는 점에 대한 사유와 다른 내용을 지닌다.”(Pippin, 2019, 186) 다시 말해 실패한 사유와, 그 사유의 실패에 대한 사유는 서로 다르다. 후자는 전자에 대한 반성이다. 피핀에 따르면 여기서 “사유의 통각적 계기”(Pippin, 2019, 186)가 드러난다. 순수 존재에 대한 사유는 그 사유의 실패에 대한 반성적 사유로 귀결되며, 이를 통해 비로소 논리학은 존재에서 무로, 무에서 생성 등으로 전진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직접적 무규정성이 이미 규정이라는 점, 존재가 무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행했다는 점은 그러한 반성적 규정을 통해 드러난다. 여기서 우리는 『논리의 학』이 개념을 한 번은 “존재적 개념”(seyender Begriff)으로, 또 한 번은 “개념”으로 고찰한다는 점, 즉 이중 구조를 띤다는 점을 볼 수 있다. 사유는 언제나 동시에 사유의 실패에 대한 사유, 혹은 사유이기 실패한 사유를 사유하는 것이다.

순수 존재의 장이 문장 파편으로 시작한다는 점 역시 사유의 논변성에 대한 헤겔의 옹호를 잘 보여준다. 제3장에서 보였듯, 피핀은 논변적 사유가 통각적 성격을 지님을 주장한다. 이는 우리의 사유가 판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면서도 언제나 자기수정적이라는 뜻이다. 다르게 말하면, 판단은 항상 판단 자신에 대한 판단을 내포한다. 칸트가 ‘나는 생각한다’가 모든 표상에 수반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듯이, 모든 판단 p는 ‘나는 p라고 판단한다’라는 자기의식적 판단을 수반한다. 양자는 불가분하다. 사유와 존재의 동일성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제2장 참조). 이러한 맥락에서 봤을 때, 순수 존재가 실상 무로 드러난다는 통찰은, 존재에 대한 사유가 (사유이기를) 실패했다는 점에 대한 통각적 사유를 드러낸다.

칸트 이래로 지식의 조건에 대한 우리의 물음은, 대상에 대한 명석 판명한 포착의 문제로부터 대상에 대한 우리 주장의 권리와 정당성의 문제로 이동했다. 지식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마음과 대상의 관계가 아니라 주장과 근거의 관계이며, 그러므로 항상 판단의 형식을 지녀야 한다. 결국 사물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항상 판단을 단위로 해서 이루어진다. 이때 칸트의 전회에 함께하는 이들은 경험적 지식에서 지각 판단이 근거로 제시될 수 있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지만, 순수 사유와 같은 비경험적 지식에서 지각 판단과 같은 것을 근거로 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피히테적 정식화

사유의 통각적 구조가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은 본질논리학이다. 그러나 존재논리학에서도 이미 이 구조는 암시적으로 밝혀지고 있으며, 헤겔은 피히테의 설명을 빌려옴으로써 이 점을 명확히 한다. 1794년 『학문론』에서 피히테는 ‘A=A’를 ‘A’로부터 구별하는데, 전자는 A의 동일성을 정립하는 자아가 개입한다(‘=’)는 점에서 후자와 다르다. 이 동일성 명제는 자아의 생산적인 자발적 활동에 의해 정립된 것이지만, 이 활동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행해진 것(Tat)이다. 이러한 사태를 표현하기 위해 피히테는 ‘사행’(Tathandlung)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고안해야만 했다.

한편 ‘A=A’는 ‘A≠~A’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즉 A의 동일성은 A와 ~A의 구별을 정립함으로써만 가능하며, 같은 이유에서 자아의 자기정립은 자아와 비아의 구별을 정립함으로써만 가능하다. 헤겔에서 이러한 활동은 존재와 무의 구별의 성립, 즉 생성에 해당한다. 물론 생성, 혹은 운동은 논리적인 과정이지 시간적인 과정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생성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것이다.

헤겔은 피히테가 철학의 시작을 자아로 설정함으로써 주체-객체 대립을 설명하지 않은 채 여전히 남겨두었다고 생각한다. 자아와 비아의 구별은 전제되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정립되어야 한다. 헤겔은 존재와 무, 매개와 직접성, 형식과 질료/내용 등의 구별 역시 정립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양자의 구별을 그 자체로 놓아두기보다 정립하고 부정하는 것이 『논리의 학』의 핵심 과제이다.

다르게 말하면, 아무런 내용을 지니지 않는 공허한 개념이 내용을 갖기 위해 우리는 개념 바깥으로부터 내용을 가져와 이 개념에 외삽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처럼 비개념적인 질료는 그 스스로는 전혀 내용이 아니다. 오히려 내용을 갖기 위해서 요구되는 것은 개념적 구별이다. 이 점에서 개념이 내용을 갖기 위해 요구되는 것은 순전한 직접성이 아니라 매개된 직접성이다.

확장된 유비

헤겔이 『논리의 학』에서 다루고 있는 (논리적) 직접성의 문제는 그가 『정신현상학』의 첫 세 장에서 다루는 (인식론적) 소여의 문제에 해당한다. 『정신현상학』에서 헤겔은 직접적 감각 지각에 기초해 세계에 대한 경험적 지식을 얻으려는 시도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보인다. 헤겔이 논증하는 것은, 의식이 단순한 차별적 반응 성향을 넘어 내용을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능력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헤겔이 『대계』(Enzyklopädie)에서 지적하듯이, 매개와 직접성의 문제는 “‘감각적 의식’의 일반적 문제에 대한 논리적 버전”(Pippin, 2019, 196)이다.

물론 헤겔이 이 문제를 다루는 층위는 감각적 의식의 문제에서보다는 훨씬 추상적이다. 헤겔이 여기서 내놓는 답은 매개된 직접성이다. 헤겔에 의하면, 매개와 직접성은 구별될 수는 있지만 분리될 수는 없다. 여기서 문제는 활동성과 수용성, 능동성과 수동성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이다.

브랜덤의 직접성론

『신뢰의 정신』에서 브랜덤은 두 종류의 직접성을 구별하는데, 이는 포착행위의 직접성과 포착내용의 직접성이다. 포착행위는 비추론적인 것으로 인정될 수 있는 반면, 포착내용의 직접성은 환상에 불과하다. 브랜덤에 의하면 지각적 지식은 직접적으로, 비추론적으로 획득되며, 우리의 지식이 그저 추론적이기만 할 수는 없다는 점, 개념체계에 어떠한 “중대한 균열”(crucial friction)이 있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이는 추론적 지식과 비추론적 지식이라는 두 단계 전략을 통해 이루어지는 브랜덤 자신의 설명에 해당하지, 헤겔이 고민했던 매개된 직접성의 문제와는 궤를 달리한다.

해석을 회상하기

(1) 『논리의 학』에서 다루어지는 순수 사유는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하며, 경험적 지식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순수하다.
(2) 사유의 논리적 형식들, 가지적인 것은 항상 판단의, 특히 술어의 형식을 띠고 있다.
(3) 『논리의 학』의 탐구 대상은 가능한 의미를 구성하는 양상들(modalities)이다. 이때 이 양상들은 어떤 주관적 능력이 아니라 세계의 가능한 모든 의미들을 구성하는 양상들이다.
(4) 헤겔에 의하면, 적절히 이해되었을 시에 일반 논리학은 이미 초월론적 논리학이며, 초월론적 논리학은 이미 형이상학이다.
(5) (1-4)의 모든 함의들이 헤겔 논리학에서 다른 구별이나 보다 포괄적인 개념으로의 이행을 가능케 하는 연산자들(조작자들; operators), “x는 이러저러한 것 없이는 이해될 수 없다(사유될 수 없다)”와 같은 표현들에 내포되어 있다.
(6) 사유는 주관적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실재의 객관적 구조이다. 존재물들을 가지적으로 만드는 개념 혹은 실체적 형식은 그 존재물들이 실재에 있도록 해주는 것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7) 그러나 사유는 단순히 세계의 사물들을 받아들이는 수용적 능력이 아니라 사유 자신의 가능성을 스스로 생산하는 자발적 능력이다. 그렇다고 사유가 단순히 어떤 제약도 받지 않는 고삐 풀린 능력인 것은 아니다. 여기서 뜻해지는 바란, 사유가 오직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제약되고 규제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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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저 논문의 요약본인 건가요?

네 맞습니다. 이 글은 논문 전반부의 요약이고, 후반부 요약은 추후 작성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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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번에도 번역본인 줄 알고 읽다가 인용구가 나와서 당황했는데, 역시나 아니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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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 요약이 정말 좋네요. 헤알못인데 잘 이해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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