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드 사이더, 풍요함과 파생적 존재론 (Plenitude and Derivative Ontology)

이 논문은 형이상학의 두 가지 핵심 질문, 즉

(1) 복합 대상과 같은 일부 대상이 어떤 의미에서 '파생적(derivative)'인지, 그리고

(2) 존재론적 풍요함의 원리가 어떻게 공식화되고 사회적 영역으로 확장될 수 있는지에 대해 탐구합니다.

저자인 테드 사이더는 이 두 질문이 깊이 얽혀 있음을 주장하며, 논의를 통해 합성물(composite objects)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근본적으로 재고되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논문은 먼저 '부분론적 풍요함(mereological plenitude)'의 원리를 검토하며 시작합니다. 이 원리는 '무제한적 합성(unrestricted composition)'으로 대표되며, 세상의 경계가 모호하거나 임의적이라는 문제를 피하기 위해 수많은 대상의 존재를 가정합니다. 예를 들어, 호주 아웃백의 경계가 모호한 것은 경계가 불분명한 단일한 '아웃백'이 있어서가 아니라, 약간씩 다른 경계를 가진 수많은 대상들이 존재하고 우리가 '아웃백'이라는 용어로 그중 어느 하나를 특정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이더는 단순히 "임의의 사물 집합은 무언가를 합성한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지적합니다.

이 풍요한 대상들이 우리의 개념적 필요를 충족시키려면, 공간적 속성뿐만 아니라 지질학적 속성과 같은 비공간적 속성도 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그는 '아래로부터 위로' 향하는 접근법을 제안합니다. 즉,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근본적인 '원자(atoms)'와 그것들의 근본적인 속성 및 관계를 가정하고, 합성물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속성의 방대한 배열(array of features)이 이 원자들의 속성과 관계로부터 파생된다고 설명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합성물들은 우리의 언어와 개념에 필요한 다양한 속성들을 가질 수 있음이 보장됩니다. 이 모델은 가능세계를 포함하는 양상적(modal) 차원으로도 확장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논문은 이 논의를 사회적 영역으로 확장합니다. 은행 계좌나 법인과 같은 사회적 대상들은 물리적 '부분(part)'을 갖는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부분론적 풍요함의 원리를 직접 적용할 수 없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이더는 '구성(constitution)'이라는 새로운 핵심 개념을 도입합니다. 구성은 대상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명제(proposition) 사이의 관계입니다. 예를 들어, "은행 계좌가 존재한다"는 명제는 "어떤 사람이 특정 문서를 서명했다"는 근본적인 명제에 의해 '구성'됩니다. 이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nothing over and above)' 환원적인 관계로, 두 명제는 결국 현실의 동일한 측면을 기술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구성적 풍요함(Constitutional Plenitude)' 원리를 제시합니다: "모든 참인 근본 명제에 대해, 그 명제에 의해 존재가 구성되는 어떤 대상이 존재한다." 여기서 사회적 대상의 속성들, 예컨대 '당좌 예금 계좌'라는 속성은, 그 대상을 구성하는 근본 명제가 갖는 고차원적 속성(예: '서명자가 특정 상자를 체크했다'는 내용을 포함하는 명제라는 속성)에 의해 구성된다고 설명됩니다. 이로써 부분-관계에 의존하지 않고도 사회적 대상을 포함한 광범위한 파생적 대상들의 존재와 속성을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사이더는 '파생적 존재론'의 두 가지 의미를 구분합니다. '엄격한(strict)' 의미에서 파생적 대상이란, 그 대상에 대한 모든 사실이 근본적인 사실들에 의해 '구성'되는 대상을 말합니다. 은행 계좌나 평균 가족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반면, '허용적인(permissive)' 의미에서 파생적 대상이란, 단지 다른 대상과 합성(composition) 같은 '구성 관계(building relation)'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파생적으로 간주되는 대상을 말하며, 그 존재가 반드시 근본 사실에 의해 구성될 필요는 없습니다. 사이더는 이 구분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허용적 의미의 파생물(예: 집합)을 존재론에 추가하는 것은 세계에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더하는 중대한 metaphysical commitment인 반면, 엄격한 의미의 파생물을 인정하는 것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논문은 이 구분을 합성된 물질적 대상(예: 테이블, 산)에 적용하여 그 귀결을 탐구합니다. 만약 합성물이 엄격한 의미에서 파생적이지 않다면(허용적 관점), '부분-관계'는 근본적이고 구성되지 않은 관계가 됩니다. 이는 부분-관계가 극도로 우연적일 수 있다는 급진적인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즉, 특정 원자들이 합성물을 이루는지 여부뿐만 아니라, 전체가 부분의 부분이 될 수도 있다는 식의 관계 역전까지도 형이상학적으로 가능해집니다.

반면, 만약 합성물이 엄격한 의미에서 파생적이라면(구성적 관점), 몇 가지 혁명적인 결과가 따릅니다. 첫째, 모든 것이 부분으로 나뉘는 '겅크(gunk)'의 가능성은 배제됩니다. 둘째, 산과 같은 물질적 대상과 은행 계좌 같은 사회적 대상 사이의 근본적인 형이상학적 차이가 사라집니다. 둘 다 결국 근본 '원자'들에 대한 사실들에 의해 구성되는 평행한 구조를 갖기 때문입니다. 셋째, 이 관점은 '양화사 변이(quantifier variance)'를 강력하게 지지하게 됩니다. 즉, "테이블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근본적인 실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원자들이 테이블 방식으로 배열되어 있다"는 근본 명제를 표현하기 위해 우리가 채택한 비근본적인 양화사(quantifier)의 의미에 관한 것입니다.

이 경우, 존재론적 풍요함은 임의성을 피하기 위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으며, 임의성 문제는 세상 자체가 아닌 우리의 언어적 결정의 문제로 해소됩니다. 결국 이 논증은 합성물에 대한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탐구 방법론 자체를 재고하게 만들며, 존재론의 문제를 세계의 구조에 대한 탐구에서 언어의 의미와 사용에 대한 분석으로 일부 전환시킬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이 논문이 갖는 중요한 의의는, 테드 사이더가 자신의 기존 존재론적 실재론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그가 비판했던 양화사 변이론의 핵심 아이디어를 방법론적으로 차용하여 '근본적 실체'와 '파생적 실체'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정교한 하이브리드 모델을 제시했다는 점입니다. 그는 존재론을 근본적인 수준과 파생적인 수준으로 나누고, 파생적 대상의 존재는 근본적 실체에 대한 사실을 표현하기 위해 우리가 채택한 '비근본적인 양화사 의미'의 문제라고 주장합니다. 주목할 점은, 그가 일라이 허쉬가 제안한 양화사 변이론의 방법론을 도구적으로 차용하면서도, 모든 존재론적 논쟁이 무의미한 언어적 다툼이라는 허쉬의 반실재론적 귀결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신 사이더는 이 방법론을 사용하여 전통적인 존재론적 논쟁을

(1) 세상의 객관적 구조에 대한 진지한 탐구로서의 ‘무엇이 근본적인가?’라는 질문과,

(2) 이로부터 파생된 비근본적 변이 문장에 대한 언어적 분석으로, 존재론적 논의를 명확히 구분하고 재구성합니다.

결국 이 논문은 형이상학의 오랜 난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존재론적 실재론과 언어철학적 분석을 결합하는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며 기존의 논쟁 지형의 구조를 재정렬하려는 야심 찬 시도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Sider, T. (2025). Plenitude and derivative ontology. https://tedsider.org/papers/plenitude_and_derivative_ontology.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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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가 최근 철학자를 만나지 못해 최신 철학을 잘 모릅니다. 돌아가신 분들만 만나 인터뷰하는 방식으로 철학사 공부를 했거든요. 이 논문은 존재론 혹은 형이상학을 언어, 양화사와 연결시키려는 정도로 이해됩니다.

그런데 아래 문장과 같은 점을 문제 삼으며 논의를 시작하는군요.

법인이 물리적 부분이 없는가? 법인도 이사회가 있어 이사회를 물리적 부분으로 볼 수 있을텐데. 비슷하게 국가도 사회적 대상이지만 국가의 3요소에서 보면 국토라는 물리적 부분이 있지요.

은행계좌는 대상이라기 보다는 은행의 한 속성이겠지요. 은행도 사회적 대상일 수 있지만 은행장이나 본사의 위치는 물리적 요소가 될 겁니다. 은행을 이끄는 주체가 없다면 고객을 모을 수가 없지요. 은행은 개인과 계좌를 통해 관리하므로 은행계좌는 은행의 속성이 될 수 있고요.

저는 모든 대상은 물질적 부분과 정신적 부분을 동시에 가지고 있지만 사회적 대상은 정신적 영역 비중이 높다고 늘 주장하고 있거든요.

시간이 날 때 사이더가 이런 이이디어를 얻게 되었는지 추적은 해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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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양화사 변이를 둘러싼 논쟁이 2010년대 무렵에 화제였다는 것은 들었지만, 사이더가 최근까지도 꾸준히 이 문제를 다양한 각도에서 다루고 있었다는 것은 이 글을 통해서야 알게 되었네요.

그나저나,

이런 작업은 과거에 논리실증주의가 수행했다가 실패한 작업인데, 여전히 사이더 같은 인물들에 의해 다시 고려되고 있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물론, 한 번 크게 무너졌던 작업들이 철학사에서 다시 부활하지 말라는 법이야 없지만, 저로서는 이런 ‘유사 물리학적‘ 혹은 ‘사이비 물리학적‘ 작업에 언제나 회의감이 들더라고요. ‘그런 원자적 사실이나 구조나 실체가 있다면, 그건 물리학의 탐구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저 시도는 철학자가 어설프게 물리학을 흉내내려는 시도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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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저는 테드 사이더가 결국 물리학의 철학을 하고 있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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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더가 자신의 형이상학을 ‘물리학의 철학‘이라고 생각할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사차원주의를 다루는 텍스트에서는 자기 이론이 민코프스키의 시공간과 정합적이라는 걸 강조하긴 하였고, 자연과학과 위배되는 형이상학은 성립할 수 없다고도 강한 어조로 이야기하였지만, 그렇다고 사이더가 물리학의 형이상학적 함의에 대해 메타적인 담론을 하고 있다고 자신을 이해하였을지는 의문스러워요. 오히려 양화사 변이 이론과 그에 대한 반박은 논리학에 대한 일종의 형이상학적 해석들 사이의 논쟁인데, 사이더는 ‘논리학의 철학‘을 하고 있다고 자기 스스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해요.

*개인적 의견으로는, 형이상학이 ‘개념들‘ 사이의 위계에 대한 학문이라는 프랭크 잭슨의 주장에 동의하는 편이에요. 잭슨은 형이상학이 실재나 사물의 구조에 대한 학문이 아니라,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들 중에서 무엇이 더 근본적이고 덜 근본적인지에 대한 학문이라는 ‘겸손한‘ 입장과 ‘겸손한‘ 형이상학을 강조하거든요. 사이더가 이런 잭슨의 관점에 대해 무엇이라 생각하거나 글을 썼는지 (애초에 그런 사이더의 강연이나 글이 있는지) 저로서는 알지 못하지만, 사이더는 자기 주장이 실제로 ‘자연의 결‘이나 ‘실재의 구조‘에 대응한다고 본다는 점에서 그다지 겸손하지는 않은 형이상학을 지향하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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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지적과 질문 감사합니다. YOUN님께서 제기하신 '유사 물리학적' 작업에 대한 회의감과 논리실증주의와의 비교는 저도 깊이 공감하는 부분입니다. 사이더와 같은 형이상학자의 작업이 과연 철학의 고유한 영역인지, 아니면 과학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저는 이 문제를 약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고 싶습니다.

1.

말씀하신 대로 사이더의 '원자'를 물리학의 기본 입자와 동일시하면, 그의 작업은 '어설픈 물리학 흉내 내기'처럼 보일 위험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사이더의 '원자'를 고대 원자론부터 이어져 온 형이상학적 혹은 논리적 개념물들에 대한 탐구의 연장선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데모크리토스의 원자, 라이프니츠의 모나드처럼, 더 이상 분석되지 않는 세계의 근본 구성 요소를 찾으려는 철학적 전통 속에서 그의 논의를 위치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 논문에서 특히 흥미롭게 본 지점은, 사이더가 왜 자신의 철학적 기반이었던 부분-전체 관계 중심의 설명을 '구성(constitution)' 개념으로 대체 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상징과도 같았던 4차원주의나 무제한적 합성 원리마저도 '비근본적'이고 '파생적'인 지위로 격하될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이 논의를 근본적으로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저는 이 대담한 전환의 동기가, 그가 '필연성(Necessity)'이라는 더 근본적인 문제를 탐구하고 싶어 하기 때문 이라고 추정합니다. 왜냐하면 부분-전체 관계적 설명은 논리적 순환문제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2.

저는 철학적 합리성의 오랜 프로그램을 필연적이고, 변하지 않으며, 보편적인 진리(나아가 이론)를 찾는 과정으로 이해하며, 이 프로그램이 현대 분석 형이상학에도 여전히 어느정도 작동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YOUN님께서 제기하신 "왜 철학이 과학의 영역을 다루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사이더와 같은 합리적 형이상학자들은 이렇게 답할 것 같습니다. "우리의 이론(예: 원자론)이 경험적 대상들로부터 인식적으로는 유추될지라도, 그것은 세상의 근본 구조를 기술하기에 논리적으로는 우선한다"고요.

그리고 저는 이 논리를 한 단계 더 밀어붙여, 저희가 지금 나누고 있는 대화의 핵심에 적용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그들이 자신들의 입장을 끝까지 방어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필연성'이라는 개념을 처음 발견하는 경로는 논리적 분석일 수 있다. 하지만 필연성 자체는, 논리적 분석을 통해 인식적으로 발견되더라도, 모든 논리학을 가능하게 하는 원리로서 형이상학적으로 우선한다."

결국, 사이더의 이 논문은 단순한 존재론 논쟁을 넘어, 필연성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길들여서 합리주의 혹은 형이상학적 철학의 오랜 꿈, 즉 '세계에 대한 완전하고 필연적인 이론'을 구축할 수 있는지에 대한 장대한 시도의 일환으로 읽힐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지금의 시선에서 보면 비상식적으로 보일수도 있지만, 저는 이게 기존 철학 프로그램에 대한 근본적 비평 방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그 시도가 성공할 수 있을지, 혹은 그 과정에서 다른 문제에 빠지게 될지는 더 깊은 논의가 필요한 문제겠지요.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예전 논의들을 사이더가 차근차근 하나씩 정리해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문제를 명료하게 보려면 꼭 필요한 일로 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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