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q→r'이나 'p→q&r'은 적형식인가?

(1) 저는 논리학을 야매(?)로 공부한 사람입니다. 체계적으로 논리학을 배웠다기보다는, 명제논리와 술어논리를 사용하기 위한 몇몇 기초적인 '테크닉'만 대강 익혀서 필요할 때마다 써먹는 식으로 공부했죠. 애초에 제가 논리학에 처음 입문할 때 사용했던 김광수의 『논리와 비판적 사고』라는 교재부터가 (어느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본 표현에 따르면,) '논리'보다는 '논리공학'에 초점을 맞춘 책이기도 해서 더욱 그랬던 것도 같습니다. 물론, 저는 이 책도 상당히 좋은 교재라고 여전히 생각하지만, 다른 교재들과 비교해 보면 실용성을 위해 논리학의 여러 세부적인 내용들을 많이 삭제하거나 단순화시켰더라고요. 아무튼, 그래서 저의 논리학적 지식이나 테크닉에는 구멍이 많이 뚫려 있는 편입니다.

(2) 예전에 제가 헤겔학회에 게재한 「매개된 직접성: 지각적 경험의 개념적 성격에 대한 맥도웰과 브랜덤 사이의 논쟁」이라는 논문을 읽다 보니, 각주 33번에서 제가 이런 명제논리식을 썼더라고요.

P1&P2&P3& …… &Pn ⊃ C

'P1'부터 'Pn'까지의 명제를 전제로 'C'라는 결론을 도출하는 논증을 저렇게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논증에서 전제에 해당하는 명제들의 연언을 조건문의 전건으로 삼고, 결론에 해당하는 명제를 조건문의 후건으로 삼은 거죠. 그 당시에는 별 생각 없이 저렇게 쓰고 내용을 잊어버렸는데, 지금 보니 적형식(well-formed formula)을 만들려면 괄호를 써서 조건문을 다음과 같이 표현해야 할 것 같더라고요.

(P1&P2&P3& …… &Pn) ⊃ C

마찬가지로, 해당 각주에서 이런 명제논리식도 썼더라고요.

P1 ⊃ R&-R

이 식은 주어진 전제로부터 모순이 도출되는 논증을 표현하려 했던 건데, 이 식도 적형식으로 만들려면 다음과 같이 고쳐야겠더라고요.

P1 ⊃ (R&-R)

(3) 그래서 '아, 또 이렇게 나의 아마추어스러움이 논문에서 폭로되었구나! 적형식 하나도 제대로 못 만들었다니!'하고 통탄하고 있었는데, 인터넷을 찾아 보니 괄호 없이 조건문을 사용하는 경우가 꽤 많았습니다. 특히, 유명한 철학자들이 괄호를 쓰지 않고서 조건문을 제시하기도 했고, 심지어 논리학 학술지나 교과서에서도 괄호를 쓰지 않는 경우가 있어서요. 제가 찾은 것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Warren Goldfarb, "Frege’s conception of logic", The Cambridge Companion to Frege, M. Potter and T. Ricketts (ed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0, p 67.

Jerry A. Fodor and Zenon W. Pylyshyn, Minds without Meanings: An Essay on the Content of Concepts, Cambridge, Massachusetts: The MIT Press, 2015, p. 52.

Stephen Yablo, Aboutness,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2014, p. 60.

G. H. von Wright, "A Modal Logic of Place", The Philosophy of Nicholas Rescher: Discussion and Replies, E. Sosa (ed.), Dordrecht: D. Reidel Publishing Company, 1979, p. 68.

골드파브, 포더, 야블로, 폰 리히트는 모두 영어권의 유명한 철학자들이죠. 특히, 골드파브는 하버드 대학교 수리논리학 교수이고, Deductive Logic이라는 논리학 교재도 썼죠. 그런데도 괄호 없이 'p&q→q'라는 식을 사용하였더라고요. 그 외에도,

G. Mints and Sh. Steinert-Threlkeld, "ADC method of proof search for intuitionistic propositional natural deduction", Journal of Logic and Computation Vol. 26(1), 2016, p. 396.

C. Allen and M. Hand, Logic Primer, Second Edition, Cambridge, Massachusetts: The MIT Press, 2001, p. 55.

위는 Journal of Logic and Computation라는 저널에 게재된 논문의 일부분이고 아래는 Logic Primer라는 논리학 교재의 증명 연습문제입니다.

(4) 이렇게 논리학 관련 저널과 논리학 교재에서까지 괄호가 없이 조건문이 표현된 걸 보니 의문이 생기더라고요. 제가 '적형식'의 기준을 잘못 알고 있는 건가 해서요. 적형식이 되려면 논리식이 애매하게 해석되어서는 안 되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a) 'p&q→r'이나 'p→q&r'같은 논리식이 그 자체로 적형식인 건지,
(b) 아니면 저런 형태의 논리식들을 사용한 위의 글들이 오류를 범한 건지,
(c) 아니면 논리식 이해에 큰 문제가 없는 한 관용적으로 저런 식들을 허용해 주는 건지

말이에요. 혹시 이런 문제와 관련해서 대답해 주실 수 있으신 분들이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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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c 두 경우가 모두 가능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딱 지켜서 쓰지 않았을 수도 충분히 있구요, 관행적으로 허용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Logic Primer 교재 p.7-9를 보시면 괄호를 포함하는 적형식 구성규칙을 소개하고난 후에 애매성이 없는 한 괄호를 빼고 쓸 수 있고, 그 규칙에 대해서 소개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각각의 논리적 연결사 마다 binding force를 다르게 매겨서 괄호를 빼면서도 애매성이 생기지 않게 하는 방식이고, 아주 예전에 나온 Kleene의 Mathematical Logic에서도 동일한 방식이 소개되는 것으로 보아 일반적으로 허용되는 방식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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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괄호가 포함되어야 적형식에 대한 올바른 정의이고, 중의성이 없는 경우 임의로 괄호를 생략하는 것이 관행 상 허용된다’가 오늘날 논리학 교재에서의 룰인 것 같아요. 그런데 사실 어떤 노테이션을 취할지는 순전히 필자의 선택에 따른 것이어서, 뭐가 적형식인지 아닌지가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괄호의 생략에 있어 가장 통상적인 ‘암묵의 룰’은 위에서 라쿤님이 말씀하신대로인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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