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 퀴즈 (or 아도르노에 관한 논문 독해 퀴즈)

This rejection of pleasure and lightheartedness in art is not, however, intended as a rejection of pleasure and lightheartedness as such. Rather Adorno sees art in alliance with both the happiness of sexuality and the childish and lighthearted pleasures offered by the circus, clowns and child’s play. according to Adorno, therefore, art proves its loyalty to the somatic happiness of sexuality precisely by refusing to fulfill and sublimate it. This is what distinguishes art from the culture industry, which betrays this happiness by merely pretending to fulfill it.

(Juliane Rebentisch & Felix Trautmann, "The Idea of the Culture Industry," in Routledge Companion to the Frankfurt School, eds. Peter E. Gordon, Espen Hammer, Axel Honneth (New York/London: Routledge, 2019), p. 22.)

문제의 문장들입니다. 챗 GPT가 제시해준 번역입니다:

그러나, 예술에서 쾌락(pleasure)과 가벼움(lightheartedness)을 거부한다고 해서, 쾌락과 가벼움 그 자체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아도르노는 예술이 성적 행복(sexual happiness), 그리고 서커스, 광대, 어린이 놀이(child’s play)에서 발견되는 유희적이고 가벼운 쾌락(lighthearted pleasures)과 일종의 연대를 맺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아도르노에 따르면 예술이 성적 행복(somatic happiness of sexuality)에 대한 충실성을 증명하는 방식은, 그것을 직접 충족시키거나 승화(sublimate)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것이 문화산업(culture industry)과 예술을 구별하는 핵심적인 차이점이다. 문화산업은 이러한 행복을 단순히 충족시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그것을 배신한다.

제가 제기하고자 하는 문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따라서"라는 연결어가 잘 이해되지 않는다. 예술이 항상 개인이 세계 안에서 느끼는 갈등과 모순만을 표현해야하고 행복한 순간에 대한 묘사를 일체 금지해야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줄리안이 말한 것처럼 "예술이 유희적이고 가벼운 쾌락과 일종의 연대를 맺"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따라서 아도르노에 따르면 예술이 성적 행복에 대한 충실성을 증명하는 방식은, 그것을 직접 충족시키거나 승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약간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것 같다. 여기서 therefore의 번역어로서 "따라서"를 사용하는 것에 약간 의문을 표한다. 만약 이 연결이 "그렇다고는 해도" 내지는 "하지만" 등등으로 이루어졌다면 나름 이해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따라서" 라고 말하려면, 뒤이어 나오는 내용이 "따라서 아도르노에 따르면 예술이 성적 행복에 대한 충실성을 증명하는 방식은 그것을 직접 충족시키거나 승화하는 것이다." 라고 말해야하지 않을까?

여러분들 생각은 어떠신지요.

ps. GPT 결제해서 쓰는데 이거 정말 물건입니다.. 사실 저는 그냥 생각나는대로 구어체로 막 적었는데 제 의문점을 정말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해줘요.. 무섭습니다 솔직히

1개의 좋아요

다시 읽어보니 챗 GPT의 번역이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일 뿐,
틀린 번역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일단 확실히 알아두셔야 할 점은

아도르노에 따르면 예술이 성적 행복(somatic happiness of sexuality)에 대한 충실성을 증명하는 방식은, 그것을 직접 충족시키거나 승화(sublimate)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 문장에서 그것은 '성적 행복'이 아니라 '성적 행복을 충족시키거나 승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문화산업은 이러한 행복을 단순히 충족시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그것을 배신한다

보다는

문화산업은 이러한 행복을 단순히 충족시키는 척함으로써 (그 행복을) 배신한다.

이게 좀 더 적절한 번역 같네요.

아도르노를 잘 모르지만, 적혀있는 원문만 보자면
'따라서'가 딱히 논리적으로 맞지 않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1개의 좋아요

아.. 편안함에 갇혀서 엄밀함을 잃어버렸네요...... 이해가 잘 안 갈때는 번역을 직접 확인한다... 꼭 기억해야겠습니다... 제가 적은 추신이 민망해져버렸네요

어제는 제가 시간이 없어서 간단히 훑어보고 오늘 조금 더 곰곰이 생각해보았는데요, 사실 Dovrak님의 코멘트가 제 의문점의 핵심을 가리키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1. 우선 말씀해주신대로 제가 gpt의 번역을 너무 믿은게 실수인 것 같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직접 원문을 보니 "According to Adorno, therefore, art proves its loyalty to the somatic happiness of sexuality precisely by refusing to fulfill and sublimate it." 이 부분인 것 같더라구요. 이걸 직역하면 "아도르노에 따르면, 따라서, 예술은 그것을 충족시키는 것, 그리고 승화시키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그것의 성의 신체적 행복에 대한 충실성을 증명한다." 정도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문제는 여기서 문제는 두번 등장하는 '그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이느냐는 점인데 일단 두번째 "그것의 성의 신체적 행복에 대한 충실성"에서는 논란의 여지 없이 예술의 충실성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이때 문제는 첫번째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점일텐데, Dvorak님 말씀처럼 여기서의 그것을 "성적 행복을 충족시키거나 승화하는 것"이라고 이해해보자면 이 문장은 다음과 같은 뜻이 되죠: "아도르노에 따르면, 따라서, 예술은 성적 행복을 충족시키거나 승화하는 것을 충족시키는 것, 그리고 승화시키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그것의 성의 신체적 행복에 대한 충실성을 증명한다." 저는 이런 해석은 비문이라고 생각되어서 오히려 여기서의 그것을 "성적 행복"이라고 보는게 더 적절한 듯 싶네요.

  2. 해석의 옳고 그름을 부차적인 문제로 두고, "따라서"라는 연결어가 논리적으로 타당한가, 라는 문제에 대해서도 아직 의문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Dvorak님이 말씀해주신 해석의 문제가 제 의문에 대한 본질적인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이 논리적 결함은 앞문장과의 연결에서 발생하기 때문이에요. 앞문장에서 필자는 "아도르노는 예술이 성적 행복에서 발견되는 유희적이고 가벼운 쾌락과 연대를 맺고 있다고 본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따라서"라는 연결어가 등장하면 그 뒤의 내용은 예술이 성적 행복에 대한 충실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것을 직접 충족시킨다고 말해야 자연스럽지 않을까요? 물론 아도르노가 말하는 예술과 성적 행복의 "alliance"를 어떻게 해석할 것이느냐가 또 다른 문제일 것인데.. 그냥 표면적인 의미로 "예술과 성적 행복이 연합되어있다."라는 의미로 보자면 말이죠.

제가 이해하기로, 지금 줄리안은 두가지 명제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1) 아도르노는 예술이 성적 행복에서 발견되는 유희적이고 가벼운 쾌락과 연대를 맺고 있다고 보았다. 2) 아도르노에 따르면, 따라서, 예술은 성적 행복을 충족시키는 것, 그리고 승화시키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예술의 성의 신체적 행복에 대한 충실성을 증명한다. 저는 이 연결이 이렇게 되어야 자연스러운 것 같아요: 아도르노는 예술이 성적 행복에서 발견되는 유희적이고 가벼운 쾌락과 연대를 맺고 있다고 보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술이 성적 행복을 직접적으로 충족시키거나 혹은 이와는 반대로 승화시킴으로써 예술의 성의 신체적 행복에 대한 충실성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후의 내용들이 이런 충족에 대한 거부나 승화가 어떻게 역설적으로 신체적 행복에 대한 충실성을 증명하는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 나와야겠죠.

하지만 해석을 보자면 ... A와 B는 연대했다. 따라서 A는 B의 요구를 충족하지 않았다 (?). 그리고 그 요구를 소각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Dvorak님과 대화하면서 줄리안의 서술이 서서히 이해되기 시작했어요. 여기서의 "연대"란 그 의미상 "영합"과 분명하게 구분되어야하는 것 같아요. 예술은 성적 행복과 연대하긴 했지만, 이러한 연대가 꼭 성적 행복과의 무조건적인 부합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예술은 성적 행복에 연대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성적 행복을 무조건 직접적으로 충족시키거나 (혹은 그와는 반대로 무조건적으로 승화시키거나) 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문화산업은 성적 행복과 진정한 의미에서의 연대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 단지 성적 행복과의 연합이 가져다주는 이익(포르노그라피와 같은 것들을 예로 들수 있겠죠.)만을 고려했던 것이죠. 어떻게 보면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연대가 아니기 때문에 아도르노는 (문화산업이 아니라) 예술만이 성적 행복과 소위 진짜 연대를 맺고 있으며 따라서, 그것을 직접적으로 충족시키거나 혹은 직접적으로 승화하는, 마치 우는 아이에게 떡 하나 더 주는 식의 포퓰리즘을 수행하지 않았다. 우리 소중한 성적 행복이는 조금 더 강하게 자라야 한다. 라고 말한 것인듯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다면 여전히 줄리안이 "연대"라는 단어의 양가적 의미를 밝히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네요. 음.. 아니면 소위 말하는 '님들... 이정도는 다 알고 있죠...?'의 일환이었을까요.

1개의 좋아요

먼저 (1)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 첫 댓글을 잘못 이해하신 것 같습니다.

According to Adorno, therefore, art proves its loyalty to the somatic happiness of sexuality precisely by refusing to fulfill and sublimate it.

저는 이 문장을 챗 GPT가 해석한 바와 같이

아도르노에 따르면 예술이 성적 행복(somatic happiness of sexuality)에 대한 충실성을 증명하는 방식은, 그것을 직접 충족시키거나 승화(sublimate)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 을 거부하는 것이다

라고 번역하였고, 여기서 그것이 '성적 행복을 충족시키거나 승화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제 번역은 풀어쓰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예술이 성적 행복(somatic happiness of sexuality)에 대한 충실성을 증명하는 방식은, 그것 (그러니까 성적 행복)을 직접 충족시키거나 승화(sublimate)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적 행복을 충족시키거나 승화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Dirtytroll님이 말씀하셨듯

아도르노에 따르면, 따라서, 예술은 성적 행복을 충족시키거나 승화하는 것을 충족시키는 것, 그리고 승화시키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그것의 성의 신체적 행복에 대한 충실성을 증명한다

위 문장이 비문이라는 것은 여지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는 제 첫 댓글에서 위와 같은 해석이 적절하다고 주장한 바가 없습니다.

(2)에 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인용하신 첫 문장을 보시길 바랍니다.

This rejection of pleasure and lightheartedness in art is not, however, intended as a rejection of pleasure and lightheartedness as such.

아무래도 이 인용문 앞에서 아도르노가 예술 안에 쾌락과 가벼움이 있는 것을 (pleasure and lightheartedness in art) 거부 (rejection)한 것 같습니다.

수정: 아무래도 이 인용문 앞에서 아도르노가 예술 안에 쾌락과 가벼움이 있는 것을 (pleasure and lightheartedness in art) 거부 (rejection)한 것에 대해 얘기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거부가 쾌락과 가벼움 그 자체 (pleasure and lightheartedness as such)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라고 인용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수정: 인용문에 따르면) 아도르노는 쾌락과 가벼움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저는

Rather Adorno sees art in alliance with both the happiness of sexuality and the childish and lighthearted pleasures offered by the circus, clowns and child’s play.

위 문장을

아도르노는 예술을 성적 행복과 가벼운 쾌락과 같은 선상에 놓여있는 것으로 본다 = 아도르노는 예술을 성적 행복과 가벼운 쾌락보다 더 우월한 것은 아닌 것으로 여긴다

위와 같이 의역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해석이 옳은지는 모르겠습니다.)

이 문장 뒤에

아도르노에 따르면 예술이 성적 행복(somatic happiness of sexuality)에 대한 충실성을 증명하는 방식은, 그것 (그러니까 성적 행복)을 직접 충족시키거나 승화(sublimate)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적 행복을 충족시키거나 승화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위 문장이 오는 것은 딱히 논리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술이 성적 행복을 직접 충족시키거나 승화하면, 예술은 성적 행복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고, 그러면 둘은 같은 선상에 놓여 있지 않게 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이상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적절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지만 예술에서의 쾌와 근심 없음에 대한 이러한 부인은 쾌와 행복 자체에 대한 부인을 위해 의도된 것은 아니다.
This rejection of pleasure and lightheartedness in art is not, however, intended as a rejection of pleasure and lightheartedness as such.

오히려 아도르노는 예술이 섹슈얼리티에 의한 행복과 서커스·광대 그리고 애들 장난에 의해 제공되는 천진하고 근심 없는 쾌와 연합[in alliance with]되어 있다고 보았다.
Rather Adorno sees art in alliance with both the happiness of sexuality and the childish and lighthearted pleasures offered by the circus, clowns and child’s play.

따라서 아도르노에 따르면 예술은 바로 섹슈얼리티에 의한 육체적 행복을 충족하고 또 승화하길 거부함으로써, 섹슈얼리티에 의한 육체적 행복에 대한 그 자신의 헌신적 애정[loyalty]을 입증한다.
According to Adorno, therefore, art proves its loyalty to the somatic happiness of sexuality precisely by refusing to fulfill and sublimate it.

이것이 예술을 그저 육체적 행복을 충족하는 척함으로써 행복을 배반하는 문화 산업과 구별해주는 점이다.
This is what distinguishes art from the culture industry, which betrays this happiness by merely pretending to fulfill it.

2개의 좋아요

문제의 구절입니다.

According to Adorno, therefore, art proves its loyalty to the somatic happiness of sexuality precisely by refusing to fulfill and sublimate it.

제 생각으로는 위 구절이 들어 있는 챕터의 문맥에든 아도르노의 저작들의 관련 구절들의 문맥에든 위 구절은 그렇게 썩 잘 들어맞지가 않습니다. "... 충족시키는 것과 승화시키는 것을 거부함으로써"가 아니라 "... 충족시키는 것을 거부하고 승화시킴으로써"나 "... 충족시키는 것과 승화시키는 것 둘 다 거부함으로써"라고 옮길 수 있는 구절이었으면 더 좋았을 것입니다. 저는 전자가 더 마음에 듭니다. 간단히 말하면, 아도르노는 "예술가는 승화시키지 않는다"(<미니마 모랄리아>)라며 프로이트의 미적 승화 이론을 거부하지만

"또한 예술작품은 성적인 노출로 구성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것은 [충동이 당한] 그 거부를 부정적인 것으로 형태화함으로써 말하자면 충동의 굴욕을 취소하고 거부당한 것을 매개된 것으로서 구제한다. 이것이 바로 미적 승화의 비밀이다: 충족을 깨진 것으로 제시하기. 문화산업은 승화시키지 않고 억압한다."(<계몽의 변증법>)

라며 승화시키지 않는 문화산업과 승화시키는 예술작품을 대비하기도 합니다. 프로이트의 미적 승화와 아도르노의 미적 승화는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지만 아도르노는 여전히 '승화'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도르노의 미적 승화 개념은 New German Critique에 게재된 마틴 제이의 다음 글에 잘 해설되어 있을 것 같습니다.

https://read.dukeupress.edu/new-german-critique/article-abstract/48/2%20(143)/63/175149/Adorno-and-the-Role-of-Sublimation-in-Artistic?redirectedFrom=fulltext

위 글은 마틴 제이의 가장 최근 출간서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4개의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