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출신 철학자 리처드 카니(Richard Kearney)가 쓴 On Stories를 읽었습니다. 최근 서사적 정체성(narrative identity)에 관심이 생겨서 이래저래 조금 찾아봤는데, 역시 폴 리꾀르의 후기 저작을 참고해야겠더라구요. 그런데 제가 『해석의 갈등』 외에는 리꾀르의 책을 읽어본 적이 없는 데다가, 『시간과 이야기』는 3부작이고 각각의 분량도 상당해서 영 엄두가 나지 않네요... 그러던 와중에 리꾀르의 직접적인 제자이면서 『재신론』 등으로 비교적 친숙한 카니가 이야기에 관해 쓴 책이라니, 좋은 입문서가 되겠다 싶어 읽어봤습니다. 일단 비교적 평이한 서술과 짧은 분량은 마음에 들더라구요.
(1) 전체적으로는 카니의 구상에 동의할 만합니다. 카니에게 이야기는 인간이 자신을 이해하는 기본 조건입니다. 우리는 과거의 기억과 미래에 대한 기대에 비추어 현재의 자신을 이야기하고, 흩어져 있는 삶의 사건들을 하나의 플롯으로 구성함으로써 자신이 누구인지를 이해합니다. 이것이 바로 서사적 정체성입니다. 개인뿐만 아니라 민족이나 국가 같은 집단도 공통의 과거와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형성합니다. 역사가 대표적인데, 역사 역시 어떤 사건을 선택하고 그것들을 어떤 순서와 관계 속에 배치하느냐에 따라 하나의 역사적 이야기로 형성되고 전달됩니다. 문제는 역사가 이야기라면, 허구적 서사와 역사적 서사의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카니는 이 둘이 모두 서사성에 기초하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적어도 역사는 여러 허구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언제나 이야기로 매개되더라도 일정 부분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거죠.
(2) 카니는 이 문제를 홀로코스트의 영화적 재현을 둘러싼 논쟁에서 다룹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쉰들러 리스트>와 클로드 란츠만의 <쇼아>는 모두 홀로코스트를 다루지만,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룹니다. 란츠만은 <쉰들러 리스트>를 두고, 도대체 아우슈비츠와 같은 ‘재현할 수 없는’ 사건을 스크린으로 옮기는 일이 가능한 기획인지, 또 그것을 하나의 서사로 재구성하는 일이 끔찍한 사건을 구경거리나 감동적인 구원 이야기로 전락시키는 것은 아닌지 비판합니다.
이에 란츠만 자신은 배우를 통한 극화와 과거의 기록영상을 거부하고, 아홉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생존자와 가해자, 방관자의 증언을 이어가는 방식을 선택하는데요. 스필버그가 어떤 비유대인 영웅과 구원서사를 중심으로 홀로코스트를 극화한 반면, 란츠만은 말해질 수 없는 사건을 하나의 완결된 플롯으로 정리하거나 고통에 구원의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를 끝까지 거부하려고 한 것이죠.
그러나 카니는 영화라는 매체가 지닌 기억과 전달의 힘에 주목합니다. 이를테면 미국 공영방송이 새로운 세대가 홀로코스트를 아예 모를 것을 우려하여 쉰들러리스트를 방영할 것을 결정했다는 사건을 인용하는데요.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에게 어떤 사건을 기억하기를 요청하기 위해서는 어떤 스토리텔링의 미학에 의지할 필요가 있다는 거죠. 특히 홀로코스트처럼 기억 자체가 윤리적으로 요청되는 경우에는 <쉰들러 리스트>같은 작품도 충분히 필요하다고 볼 수 있겠죠. 게다가 카니가 보기에 <쉰들러 리스트>는 단지 홀로코스트를 구경거리로 만든 싸구려 작품이 아니라. 가능한 한 사실적으로 재현하려고 시도하면서도, 여러 영화적 장치를 통해 관객이 과거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공감할 수 있도록 만든 영화였거든요. (저도 동의합니다. 홀로코스트를 가볍게 다루는 다른 작품과 비교하기 미안할 정도로 잘만든 영화라고 생각해요. )
카니는 결국 <쉰들러 리스트>가 지닌 대중적으로 기억을 전달하는 힘, <쇼아>가 지닌 증언의 충실성을 함께 인정합니다. 중요한 것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충실성과 사건을 현재의 청자에게 전달하는 서사적 형상화를 동시에 유지하는 것이라고 보는 거죠.
(3) 여기까지 카니가 제시하는 문제의식과 그 실천적인 필요성에는 충분히 동의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충실성만을 강조하면서 서사적 형상화를 배제해서도 안 되고, 모든 역사를 서로 경쟁하는 이야기로 만들어 상대주의에 빠져서도 안 된다는 것이죠. 다만 카니의 답변은 결국 양쪽 모두가 필요하다는 식의 모호한 절충주의처럼 느껴집니다. 카니의 주장에 윤리적이고 실천적인 필요성이 있다는 점에서 동의하지만, 그것이 인식론적으로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논증은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를테면 카니가 홀로코스트를 다루면서 염두에 두는 것은 ‘홀로코스트가 없었다’는 음모론자들인데, 카니가 보기에 이들은 아예 실증주의적이거나, 아예 상대주의적이라는거죠. 그러니까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증거가 충분하지 않으므로 홀로코스트를 역사적 사실로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거나, 홀로코스트란 결국 승전국이 만들어낸 공식 서사일 뿐이며 다른 이야기보다 우월할 이유가 없다는 주장들인데요. 그러니까 카니가 이것을 반박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주장에 따라 홀로코스트에 관한 역사적 서술 역시 하나의 서사적 구성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다른 경쟁 서사보다 실제 사건을 더 적절하게 설명한다고 주장해야 하는 상황에 놓입니다. 여기서 카니는 역사가 언제나 이야기로 매개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현실에 대한 지시를 포기한다는 뜻은 아니라고 답하는데요. 생존자의 증언과 서사적 기억을 문서와 기록, 법의학적 자료 같은 경험적 증거와 함께 검토함으로써 어떤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보다 더 참에 가깝다고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 대답에는 여전히 빈틈이 있어 보여요. 지금까지 카니는 역사가 언제나 이야기로 전달되고 이해된다고 말했는데, 서로 다른 역사적 서사를 비교하는 단계에서는 갑자기 ‘사실에 가까움’을 판단 기준으로 제시하고 있잖아요. 그렇다면 카니는 이야기를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이 어떻게 다시 이야기를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있는지 제시해줘야할거에요. 게다가 거기서 제시되는게 증언과 기억, 그리고 실증적 증거 등 인데 그것에 대해서도 의문이 들어요. 이를테면 ‘아우슈비츠의 희생자 목록’이라는 증거도 사실은 이미 홀로코스트라는 서사를 전제로 해야 증거가 될 수 있을테니까요. 어떤 이야기를 받아들일지 따지기 위해 증거를 찾았는데, 그 증거 역시 이야기에 의해서만 증거가 된다면 이건 순환논증이죠. 물론 해석학적 순환이라고 처리할 수 있어보이지만, 어쨌든 카니 본인은 여기에 대해 충분히 제시하지 않으니까요. <재신론>에서도 느꼈지만, 카니는 어떤 양극단의 문제에서 제3의 길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면서도, 그 길을 택해야하는 이유를 충분히 제시하지 못한다는 느낌을 주는것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