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민주주의와 관련된 얘기가 나와서, 예전에 읽은 것들 몇 가지를 업로드해봅니다. 논의 진행에 도움이 되면 좋겠네요.
Rethinking the Public Sphere: A Contribution to the Critique of Actually Existing Democracy(N. Fraser, 1990)
후기 자본주의 사회 속의 민주주의에 대한 한계를 이론화하는 데에 찬동하는 자들이라면 하버마스의 저술에서 등장하는 공론장 이론에 기초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공론장 개념은 국가(state), 공적인 임금 경제(official-economy of paid employment), 그리고 공적 담론의 영역(arenas of public discourse)을 구분하지 못한 과거 맑스주의·사회주의 전통과 페미니즘의 한계를 뛰어넘게 해준다. 공론장 개념은 국가와 시장 경제 그리고 민주적 연합체 개념 사이의 차이를 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현존하는 후기 자본주의 민주주의의 한계를 이해하고 또 대안적 민주주의 모델을 기획해야 한다는 비판 이론 및 민주적 정치 실천에 동참하려는 자들은 하버마스의 공론장 개념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러나 하버마스의 공론장 개념은 완전히 만족스럽지는 못하다. 하버마스는 에서 부르주아·자유주의적 공론장 모델의 탄생과 쇠락을 탐구하며, 그것이 20세기 후반 복지 국가 자본주의에서는 실행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공론장의 비판적 기능을 복구하고 또 민주주의를 제도화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형태의 공론장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버마스는 새로운 형태의 공론장 모델을 개발하지는 않는다. 이에 더해, 그는 결코 부르주아 모델 기저에 있는 의심스러운 몇 가지 가정들을 문제시 삼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이 논문은 다음의 작업을 수행할 예정이다: (1) 하버마스의 공론장의 구조 변동 논의와 근래의 수정주의적 역사 기술들에서 얻어질 수 있는 대안적 논의를 비교·대조를 위해 병렬한다. (2) 최근 새로운 역사 기술들에 의해 의심받고 있는 하버마스가 기술한 부르주아적 공론장의 기저에 있는 네 가지 가정을 확인하고, 네 가정에 대해 규명한다. (3) 마지막으로, 이상의 논의를 통해 대안적인 후기-부르주아적 공론장 개념에 대한 논의를 진행한다.
1절. The Public Sphere: Alternative Histories, Competing Conceptions
하버마스의 부르주아 공론장 이론에 따르면 그것은 ‘공공성’을 통해 국가가 사회에게 소명 책임을 부여함으로써 사회와 국가를 매개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1) 국가 행위를 비판적 감시와 여론의 힘에 종속하고 (2) 법적으로 보장된 free speech/press/assembly 및 의회 제도를 통해 부르주아 사회의 숙고된 일반 이익을 국가에 전달하는 역할을 목표로 했다. 이런 이유로 공론장의 이념은 (1) 국가에 소명 책임을 부여하여 정치적 지배를 합리화하는 제도적 메커니즘이자 (2) 공적 문제에 대한 제한 없는 합리적 담론적 작용을 지칭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때 ‘제한 없다’라는 단서 조항은 다음의 네 가지 조건을 의미한다. (a) open and accessible to all (b) merely private interests were to be inadmissible (c) inequalities of status were to be bracketed (d) discussants were to deliberate as peers.
한편, 하버마스는 위처럼 기술한 부르주아 공론장 개념의 완전히 유토피아적인 힘이 이러저러한 이유로 인해 실제로 완벽히 이루어진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최근의 수정주의적 역사 기술가들에 따르면 애초에 하버마스는 자유주의적 공론장의 어두운 측면을 포착하지 못한 탓에 그것을 이상적인 것으로 그려냈다고 비판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a) 그들에 따르면 하버마스가 부르주아 공론장의 핵심 이념으로 공공성과 접근 가능성은 상당한 수의 배제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들이 지적하는 대표적인 예시가 여성에 대한 배제다.
(b) 그들에 따르면 하버마스는 비-자유주의적이고 비-부르주아적인 다른 공론장을 검토하는 데 실패한 탓에 끝내 자유주의적인 공론장을 이상적인 것으로 그려냈다. 그들에 따르면 부르주아 공론장은 19~20세기에 존재했던 유일한 공론장이 아니며, 여성을 배제하면서 성립한 부르주아 공론장에 의해 소외된 자들이 만든 부르주아 공론장에 대립하는 공론장들이 있었다.
수정주의적 역사 기술의 하버마스 비판이 적절하다면, 우리는 더 이상 하버마스가 제시한 공론장에 대한 부르주아적 개념이 그의 주장대로 실현되지 못한 유토피아적 이상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에 따라 공론장의 이상을 완전히 버려야만 하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하버마스처럼 공론장의 이념이 실현되지 못한 유토피아적 이상이라고 여기지 않으면서도, 또 공론장이 또 다른 지배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수정주의적 역사 기술의 하버마스 비판이 적절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공론장 개념의 정당성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거나 약화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단지, 우리는 하버마스가 제시했으며, 또 남성중심적이고 특수한 계층을 배제함으로써 구성된 형태의 공론장에 대한 암묵적인 가정들을 비판함으로써 여전히 공론장을 유효한 비판 이론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 그 가정들은 다음과 같다:
(1) 공론장 속의 대화자들은 신분 차이를 보류하고, 마치 [as if] 그들이 사회적으로 동등한 것처럼 숙의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사회적 불평등은 정치적 민주주의의 필수 조건이 아니다.
(2) 대중들의 경쟁을 다양하게 확산하는 것은 위대한[더 큰]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더 멀어지는 길이다. 단일한 포괄적 공론장이 언제나 다수의 대중들의 집합체에 선호될 만한 것이다.
(3) 공론장 속의 담론은 공동선에 관한 숙의로 제한되어야만 하고, 사적 이해 관심이나 사적 문제의 등장은 언제나 바람직하지 않다.
(4) 민주적 공론장이 기능하기 위해서는 시민 사회와 국가 사이의 날카로운 구별이 필요하다.
2절. Open Access, Participatory Parity, and Social Equality
하버마스가 제시하는 부르주아 공론장 개념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접근 가능할 것을 강조한다. 그래서 열린 접근은 공공성이라는 규범의 핵심에 있다. 하지만 상술했듯이 그러한 공론장은 이 세상에 없었다. 이에 대해 누군가는 ‘실현되지 못함이 실현할 수 없음을 의미하지 않는다’라며, 누구에게나 열리고 접근될 수 있는 공론장이라는 이상은 실현 가능하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다. 즉, 하버마스의 첫 번째 가정의 핵심인 ‘신분 차이의 보류’가 언젠가 가능할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보류 혹은 괄호 치기가 실질적으로 가능한 것인가? 그러니까 법적으로나 형식적으로 누구에게나 열린 공론장이 가능하더라도, 참여 동등성을 가로막는 비공식적 방해물에 관한 물음이 남아있다. 수정주의 역사 기술가들은 이에 대해 부정적이다. 그들에 따르면 부르주아 공론장 내의 담론적 상호 작용은 의례(protocol)와 예절(decorum)에 지배받는데, 그것들은 신분적 불평등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페미니즘 정치 이론가들은 이러한 문제를 잘 밝혀냈다. 그들에 따르면 숙의 과정에서 여성은 남성에 비해 더 적게 말하고 더 많이 방해받는다. 그리고 소수자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잘 반영할 단어를 찾지 못하고 그저 yes 맨이 되기 십상이다. 이러한 사태는 숙의가 사실상 지배적인 구조를 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만일 숙의 과정에서 사회적 불평등을 보류하는 것이 그것이 마치 없는 것처럼 여기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러한 보류는 참여 상의 동등함을 산출하는 것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그러한 불평등을 없는 것처럼 만드는 것은 지배 집단에 이익을 주고 억압받는 집단에 불이익을 줄 수 있다. 많은 경우에, 오히려 불평등을 보류하지 않는 것이 불평등을 문제로 삼고 숙의하는 데 더 적절할 수도 있다.
사회적 불평등에 더해, 문화적 차이에 대한 보류도 부르주아 공론장에 문제가 된다. 위계화된 사회에서 동등하지 않은 권력을 가진 사회 집단은 문화적 스타일에 동등하지 않은 가치를 부여하려 하기 쉽다. 그 결과, 강력한 비공식적인 억압이 생겨나고, 그것은 예속 집단의 구성원을 일상생활과 공론장 모두에서 주변화하는 기능을 한다. 게다가, 이러한 억압 기능은 정치 경제적 상황, 예컨대 특정 문화에 대한 가치 부여는 미디어의 사적 소유에 의해 강화되기에, 결과적으로 예속된 사회 집단은 대개 동등한 참여를 위한 물질적 수단에 대한 동등한 접근 권한을 잃고 만다.
하버마스의 논의를 다루고 있으나, 이상의 분석을 통해 우리는 자유주의적 정치 이론이 암묵적으로 가정하는 바도 알 수 있다. 그것은 체계적 불평등을 생산하는 사회-경제 구조 그리고 사회-성 구조에 기초한 민주적 형태의 정치적 삶을 구성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이에 따라 그들에게 민주주의에 관한 문제는 정치적 과정을 경제나 성과 같은 비-정치적이거나 전-정치적인 과정들로부터 분리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논한 것처럼, 그러한 분리는 불가능할뿐더러 그저 사회적 불평등을 보류하는 것만으로는 참여 상의 동등함이 획득되지 않는다. 대신 참여 상의 동등성을 위한 필수 조건은 체계적인 사회적 불평등이 제거되는 것이다. 물론 이는 모두가 같은 소득을 얻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적어도 체계적으로 생산되는 지배와 예속 관계와는 상반되는 대략적인 평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존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을 감행하는 비판 이론은 사회적 불평등이 형식적으로 포용적인 공론장과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담론적 상호 작용을 오염시키는 방식을 가시적으로 만드는 것일 테다.
3절. Equality, Diversity, and Multiple Publics
하버마스의 두 번째 가정에 대해서도 따져볼 필요가 있다. 하버마스는 부르주아적 공론장의 단일성을 강조하는데, 이에는 공적 삶을 단일하고 모든 것을 아우르는 공론장에 제도적으로 유폐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진보에 바람직하고 긍정적이며, 그 반대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규범적 가정이 전제되고 있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하버마스의 규범적 가정을 평가하기 위해서 위계화된 사회와 평등적인 다문화 사회라는 두 가지 종류의 근대 사회 속에서 단일하고 포괄적인 공중과 다수의 공중 중 어느 것이 더 이점을 가지는지 따져본다.
우선, 위계화된 사회에서는 복수의 경쟁하는 공중을 수용할 수 있는 공론장이 단일하고 모든 것을 아우르는 공론장보다 동등한 참여의 이상을 더욱 촉진한다. 앞선 2장의 분석에 따르면 (a) 담론장을 사회적 불평등의 영향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b) 사회적 불평등이 존재하는 곳에서 공론장의 숙의 과정은 지배 집단에 이익이 되고 예속 집단에 불이익을 주는 방식으로 작동될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효과는 단일하고 포괄적인 공론장만이 있는 경우에 더욱 증대되는데, 왜냐하면 예속 집단의 구성원들은 그러한 상황에서 자신의 요구, 목표 그리고 전략을 표출할 창구를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자신의 이해 관심을 포괄적 공론장에서 표현하고 옹호하기 힘들게 되고, 또 약자들을 거짓된 ‘우리’로 흡수하는 방식으로 지배를 감추는 숙의 방식을 폭로하기 힘들게 된다.
반면, 위계화된 사회에서 예속 집단이 대안적인 공중을 구성함으로써 기존 공론장에서 얻는 불이익을 감소시키는 효과를 얻는다는 점은 수정주의적 역사 기술을 통해 얻을 수 있다. 예속 집단이 단일한 공중에 속하지 않고 서발턴 집단을 구성할 때, 그들은 자신 요구와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얻을 수 있다. 즉, 그들은 기존의 지배 공중에 대항하는 counterpublics을, inter-public discursive interaction을 구성하게 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기존에 담론 주제로 선정되지 않고 가정된 채로 면제된 것들은 이제 공적으로 규명되게 되므로, 이는 담론적 경쟁을 확대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는 위계화된 사회에서도 좋은 일이다.
평등주의적인 다문화 사회에서도 위계화된 사회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공중이 단일한 공중보다 상대적으로 더 큰 이점을 지닌다. 이는 공론장이 기본적으로 담론적 의견 형성의 장이면서 사회적 정체성을 형성 및 변화하는 장이기 때문이다. 단일하고 포괄적인 공론장이 아니라 다양한 공론장이 존재할 때 문화적으로 다양한 공중들은 자신만의 언어로 자신의 목소리를 표출할 수 있을뿐더러, 다양한 레토릭과 규범은 동화 및 필터링되지 않는다. 그 결과, 평등주의적인 다문화 사회는 문화 다원주의의 이념의 쇠퇴를 막을 수 있다.
이에 대해, 누군가는 문화적으로 다원화된 사회가 참여 민주주의를 해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물론 그런 가능성은 있지만, 그렇다고 원칙적으로 문화 다원주의 사회가 참여 민주주의와 공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는 문화적 정체성이라는 것이 사실 단일한 어떤 것이 아니라 복잡한 것들이 합쳐진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화적 정체성이 다른 사람이나 집단은 그 차이에도 불구하고, 의사소통 나아가 숙의할 수 있다.
이상의 논의로부터 우리가 도출할 수 있는 함축은 다음과 같다: 당신이 비판 이론의 논의에 찬동한다면, 우리는 불평등한 공중이 참여하는 공적 삶의 형태에 대한 비판적인 정치사회학을 만들어야 하고, 그를 통해서 각기 다른 공중/공론장의 경쟁적 상호 작용을 이론화하고 또 누군가를 예속하는 메커니즘을 확인해야 한다.
4절. Public Spheres, Common Concerns, and Private Interest
3절의 논의에 따르면, 위계화된 사회에서 서발턴-대항 공중은 지배 공중과 경쟁적인 관계를 형성한다. 이 경쟁은 ‘적절한’ 공론장의 경계를 대상으로 한다. 그런데 무엇이 공적 문제이고 또 사적 문제인가? 이러한 물음은 공론장이 다루는 문제의 범위와 관련되어 있고, 하버마스의 부르주아 공론장 논의와도 연결되어 있다. 하버마스의 부르주아 공론장 논의에서 공론장은 사적 개인들이 공적 문제에 숙고하는 담론장이어야만 한다고 제시되기 때문이다.
논의에 앞서 ‘공적’이라는 단어와 ‘사적’이라는 단어의 의미에 대해 짚어야 한다. ‘공공성’이라는 단어는 (1) 국가와 관련된 (2) 모두에게 접근 가능한 (3) 모든 사람에 관한 고려 (4) 공동 선이나 공유된 이해 관심과 관계된 정도를 의미한다. 반대로 ‘사적인 것’은 (1) 시장 경제에서의 사적인 재산과 관련된 (2) 개인적인 혹은 친밀한 관계 속의 삶과 관련된 정도의 의미를 지닌다. 지금까지 공공성의 두 번째 의미, 즉 모두에게 접근 가능한/열린을 의미하는 공공성에 대해 다뤘기에, 이하에서는 나머지 의미들에 대해서 조금 논구해야 한다.
공론장의 세 번째 의미, 즉 ‘모든 사람에 대한 고려’라는 것은 (a) 외부자의 시선에서 봤을 때 객관적으로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일 수도 있고 (b) 집단 내부자에 의해 공동의 문제로 인정된 무언가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공론장이라는 개념은 집단적 자기-결정의 장임을 수반하기에, (b)에 대해 다루는 장이다. 따라서 참여자들 자신만이 무엇이 공동의 문제인지 아닌지를 결정할 수 있다. 이는 달리 말하면 공동의 문제에 대한 경계는 경험 독립적으로(a priori)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모든 주제는 담론적 경쟁 과정에서 벗어날 수 없고, 민주적 공공성이란 과거에는 공적인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던 문제를 제기하는 소수자에게 다른 이들을 설득할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공론장의 네 번째 의미, 즉 ‘공동선 혹은 공유된 이해 관심과 관련된’은 하버마스가 부르주아 공론장의 특징으로 제시했던 것이기도 하고, 시민 공화주의 모델이 말하는 공론장의 특징이기도 하다. 시민 공화주의는 정치를 개개인 선호의 단순한 합을 초월하는 공동선을 촉진하기 위해 함께 추론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이 추론 과정을 숙의로 제시한다. 바꿔 말하자면, 시민 공화주의 모델에서 공론장 속의 숙의를 거쳐, 참여자들은 자기 본위적인 사적 개인의 집합체에서 공적인 마음을 지닌 집합체로 변모한다는 것이 시민 공화주의의 주장이다.
그런데 그들 주장의 문제는 숙의와 공동선의 개념을 융합하여, 숙의는 반드시 공동선에 관한 숙의여야만 한다고 가정한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숙의를 단일하고 모든 것을 아우르는 ‘우리’라는 관점에서 짜인 것에 관한 논의로 국한되고, 나머지 것들은 배제된다. 하지만 숙의를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참여자 자신의 이해 관심을 명확히 하는 데 도움을 주는 숙의의 원칙적인 목표에 반하며, 이에 따라 공동선을 발견하는 과정을 무화한다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이러한 비판은 위계화되지 않은 상대적으로 평등한 사회에도 적용되지만, 위계적인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숙의가 지배와 예속 관계로 인해 더럽혀지는 위계적인 사회에서의 공동선이라는 공준은 신비화된 것이다.
이상의 이유로 인해 비판 이론은 ‘공적’ 및 ‘사적’이라는 용어에 더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 두 용어는 사회적 영역에 대한 거짓 없는 지시가 아니다. 정치 담론에서 두 용어는 자주 몇몇 이해 관심, 견해, 그리고 주장을 정당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고 또 다른 것들은 높이 사는 권력을 반영한 문화적·레토릭적인 용어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이에, 우리는 예속 집단에게 불이익을 주는 방식으로 공론장의 범위를 이데올로기적으로 한계 짓는 ‘사적’이라는 용어의 의미를 탐구해야만 할 것이다.
domestic privacy의 레토릭은 몇몇 문제를 개인적인 것으로 혹은 집안적인 문제로 만들면서, economic privacy의 레토릭은 경제적인 문제로 만들면서 몇몇 문제와 이해 관심을 공적 토론에서 배제한다. 이에 따라 해당 문제들은 공적 토론과 경쟁의 장에서 배제되고, 참여자들은 비록 법적으로나 명시적인 제약을 받지 않더라도 충분한 수준으로 공론장 내에 자리 잡지 못하고 배제된다.
5절. Strong Public, Weak Publics; On Civil Society and the State
마지막으로 우리는 부르주아 공론장 개념에 관한 네 번째 가정 ―민주적 공론장이 기능하기 위해서는 시민 사회와 국가 사이의 날카로운 구별이 필요하다―을 다뤄야 한다. 해당 가정은 ‘시민 사회’를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해석상의 차이를 지니게 된다. 만일, 시민 사회가 privately-ordered, capitalist economy를 의미한다면, 위 가정은 고전적인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것으로서, ‘제한된 정부와 자유 방임주의는 공론장의 원활한 기능을 위한 필수 전제이다’로 번역될 수 있다.
하지만 앞서 봤듯이, 참여 상의 동등함은 민주적 공론장의 필수 요소이고, 그 동등함은 대략적인 경제적 평등을 요구한다. 게다가 자유 방임주의는 경제적 평등을 촉진하지도 않고 정치적 개입이 요구되는 경우도 있다. 또한 문제를 ‘사적인 문제’로 치환하는 방식으로 공론장 개념의 핵심인 자유롭고 완전한 논의를 방해할 수도 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시민 사회’가‘privately-ordered, capitalist economy’를 의미한다면, 그러한 시민 사회가 국가가 구별되어야 한다는 식의 부르주아 공론장 개념을 받아들일 수 없고 오히려 두 기관의 상호 중첩을 주장해야 할 것이다.
위와 달리 ‘시민 사회’는 ‘nexus of nongovernmental’ 혹은 ‘secondary associations that are neither economic nor administrative’로, 쉽게 말하면 국가가 아니라 국가에 대항하는 비공식적으로 유통되는 민간 수준의 담론적 의견 조직체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개념 정의에 따라 부르주아 공론장의 네 번째 가정을 해석한다면, 그것은 의사 결정과는 관련이 없고 단지 의견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공중, 말하자면 ‘약한 공중’을 조장한다. 또한 해당 가정은 공중이 의사 결정 권한도 갖게 되면, 공중이 국가가 되고 그들의 비판-담론 기능은 상실하기에, 권한의 확대는 여론의 자율성을 해친다는 주장도 함축한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시민 사회와 국가의 날카로운 구별을 가정하는 부르주아 공론장 개념은 공중의 자기-결정이나 여론의 실천적 힘을 빼앗는다는 점에서 비판 이론에는 적합하지 않은 개념일 것이다.
한편, 공론장의 구조 변동 이후, 의견 형성에 더해 의사 결정의 권한까지 갖춘 이른바 ‘강한 공중’이 탄생하게 됐는데, 이에 따라 국가와 시민 사회의 구분은 흐려졌다. 강한 공중의 탄생은 민주 정치가 진보했다는 점을 보여주는데, 동시에 이 탄생은 의회의 강한 공중과 그들이 책임져야 하는/설명해야 하는[be accountable] 약한 공중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물음들을 우리에게 남기게 됐다. [물음에 관한 논의 생략]
몇 가지 남은 의문에도 불구하고, 이상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시민 사회와 국가의 분리를 요구하는 부르주아 공론장 개념은 민주주의와 평등한 사회의 본질인 자기-관리, 공중 간의 협동, 그리고 정치적 설명 가능성의 형태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그래서 단순히 자율적인 의사 형성의 수준에 머물지 않는 공론장을 계획할 수 있도록 포스트-부르주아적 공론장 개념을 발명해야만 한다. 그를 통해 우리는 (1) 강한 공중, 약한 공중, 그리고 그것의 착종 형태에 대해 논할 수 있고, (2) 그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론을 발명하여 현존하는 민주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는 민주적 가능성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6절. Conclusion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