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 크반테, 「치유로서의 사변철학?」

Quante, M. (2018). Speculative Philosophy as Therapy? In Spirit’s Actuality (pp. 47–64). Mentis.

1. 철학의 입장

헤겔의 철학을 체계로서 고찰할 때 두 가지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첫째는 어떻게 체계 안으로 진입할 수 있는가이고, 둘째는 어떻게 체계 밖으로 나올 수 있는가이다. 헤겔은 첫째 물음에 대해 공들여서 답하려 했으며, 철학의 시작에 대해 다루고 있는 그의 저작의 서문과 서론들은 이 물음에 대해 대답을 내놓으려는 시도이다. 그는 일상적 및 철학적 의식이 필연적으로 사변적 관점에 도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신현상학』에서 잘 드러나듯, 앎의 다양한 형식들은 그 변증론적 도정을 거쳐 마침내는 절대자의 자기인식이라는 관점에서 간주될 수 있다. 한편 헤겔은 자신의 철학을 일상적 및 철학적 입장들이 필연적으로 다다라야 하는 최종점이라고 생각했으며, 이로 말미암아 둘째 물음에 대해 답하지 않는다. 헤겔이 자신의 철학을 필연적이고 완전하며 대안이 없는 유일한 체계라고 생각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반박하기 어렵다.

이 둘째 물음과 관련하여 세 가지 난점이 발생한다. 첫째, 헤겔 체계의 각 부분들은 체계 전체로부터 정당화되는 까닭에, 독자는 헤겔의 체계를 전면적으로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전면적으로 거부한 채 순전히 역사적 관점에서만 접근해야 한다. 둘째, 헤겔 철학을 받아들이지 않는 역사적 접근은 체계라는 기획을 아예 포기하거나 헤겔과는 양립 불가능한 다른 체계에 기초해야 한다. 그런데 이 체계에 접근하는 우리 자신의 입장을 검토할 때 우리는 헤겔의 체계 안으로 다시 빨려 들어간다. 왜냐하면 우리의 입장이 함축하는 전제들에 대한 헤겔의 철학적 논증들을 검토하고 우리의 입장이 정말로 헤겔의 입장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인지 평가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헤겔의 논증이 옳다면, 우리의 대안은 없어진다. 헤겔의 논증이 틀렸다면, 헤겔의 기획은 실패로 입증될 것이다.

우리는 체계에 대한 헤겔의 주장을 단순히 무시하고 지나갈 수 없다. 왜냐하면 정말로 헤겔의 입장이 옳을 경우 우리의 모든 입장은 그의 체계의 부분이거나 그 속에서 지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는 철학적 전제들과 이에 대한 헤겔의 논증을 검토해보는 수밖에 없는 듯하다.

한편 체계의 정당화에 대한 이 과도한 주장을 헤겔에 귀속시키기를 거부하고, 헤겔을 치유적 철학의 일종으로 바라보려는 제안이 있다. 이러한 제안은 헤겔 철학의 몇몇 핵심적인 부분들을 포착한다는 점에서 흥미롭지만 의심스럽다. 이 제안이 실패할 경우 우리는 헤겔의 체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참된 대안이 있는지 검토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검토를 통해 체계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헤겔이 미처 지양하지 못하는 대안적인 입장이 있음을 밝혀내야 하며, 이때 우리는 진정으로 헤겔의 체계 외부에 있는 입장을 획득하게 된다.

이 입장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우리는 헤겔의 체계 이후에도 여전히 적실한 주장과 논증들을 체계로부터 추출해낼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헤겔 철학의 각 부분이 체계 전체에 의해 그리고 체계 전체에 의해서만 정당화되고 있기 때문에 체계 밖에서는 효력을 잃는다는 문제를 벗어나게 된다. 또 우리는 헤겔의 사변적 체계로부터 치유적인 요소들을 취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다음의 두 가지 물음에 답해야 한다. 첫째, 헤겔의 철학은 어떤 의미에서 치유적이고 어떤 의미에서 구성적인가? 둘째, 헤겔은 체계 내 철학적 정당화의 불가피성을 입증할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용어 상의 구별을 도입해야 한다.

2. 치유적 철학과 구성적 철학의 형식들

우리는 ‘치유적 철학’이라는 용어에서 좁은 의미와 넓은 의미를 구분할 수 있으며, ‘구성적 철학’에서 경멸적 의미, 좁은 의미, 넓은 의미, 수정적 의미의 네 가지를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좁은 의미에서 치유적 철학은, 철학의 오해에 의해 발생한 난점들만을 사이비 문제로 밝혀 보여서 해소하고, 그밖에 치유를 필요로 하는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이 입장에는 맥도웰과 P. 해커가 속한다. 반면 넓은 의미에서 치유적 철학은 철학 내부뿐만이 아니라 철학 외부적인 요인들(예컨대 상식 등)에 의해서도 사이비 문제를 만드는 오해들이 발생한다고 보고, 이들을 해소하고자 한다. 여기에는 가령 철학적 논증을 통해 죽음에 대한 공포를 불식시키려는 에피쿠로스의 논증이 속한다.

협의와 광의의 치유적 철학은 모두 철학이 실천적으로 좋은 삶에 기여해야 한다는 목표를 공유한다. 또 후자는 전자의 작업을 포함한다. 양자의 차이는 치유가 필요한 사이비 문제가 철학에 의해서만 촉발된 것으로 보느냐 아니냐의 여부에 있다. 이 두 가지 구분은 구성적 철학의 네 가지 구분의 바탕이 된다.

어떤 문제의 해결에 도움이 되는 기여를 제공할 때 그 해결책은 구성적이다. 한편 해결책이 문제에 자연적으로 들어맞지 않거나 실재와 무관하게 인위적으로 만들어졌을 때 그 해결책은 구성된 것이다. 이 해결책은 그 구성적 성격이 망각될 경우 종종 새로운 철학적 문제들을 추가적으로 생성해내기도 한다. 여기서 구성적 철학의 긍정적 의미와 부정적 의미가 드러난다. 또 여기서 상식은 좁은 의미에서는 일반인의 직관을 가리킬 수도 있지만 나아가서는 자연과학이나 문화적으로 전승되어 온 규약 등으로 확장될 수 있다.

경멸적 의미에서 구성적 철학은, 오해를 불러일으켜서 사이비 문제들을 생산하는 철학을 일컫는다. 그 어떤 철학자들도 자신의 철학을 이러한 의미에서 구성적이라고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아울러 경멸적 의미에서의 구성적 철학은 정확히 협의의 치유적 철학이 겨냥하는 목표이다. 한편 좁은 의미에서 구성적 철학은 상식적 문제들에 대한 구성적 해결책을 제공하는 철학을 일컫는다. 광의의 치유적 철학은 협의의 구성적 철학과 일치한다. 셋째로 넓은 의미에서의 구성적 철학은 상식이 무비판적으로 가정하는 전제들에 대한 철학적 정당화를 행하는 활동이다. 광의의 구성적 철학은 사이비 문제들을 제거하는 치유적 철학을 포함하기는 하지만 여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수정적 의미에서의 구성적 철학은 정당화 없이 가정된 상식적 믿음들을 철학적으로 정당화된 믿음들로 대체하는 활동이다. 만일 상식적 입장을 하나의 문제로 간주하고 이 입장을 정당화된 철학적 체계로 수정하는 일을 치유라고 본다면, 이는 치유적 철학의 한계사례로도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3. 치유로서의 사변철학?

헤겔은 전통적인 철학적 입장들과 이들이 설정했던 문제들을 애초에 잘못 물어진 물음으로 비판하는 작업을 곳곳에서 수행한다. 예컨대 심신관계 문제에 대한 헤겔의 논증이 그 대표적인 예시인데, 『엔치클로페디』 제3권에서 헤겔은 영혼이 물질적인가 아니면 비물질적인가 하는 물음을 사이비 문제로 치부한다. 또 그는 영혼과 신체를 절대적으로 독립적인 것으로 보는 심신이원론적 전제가 양자의 관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도록 하는 거짓된 철학적 전제라고 비판한다. 여기서 나타난 헤겔의 전략은 경멸적 의미에서의 구성적 철학을 비판하는 협의의 철학적 치유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헤겔은 전통 철학의 문제들을 넘어서 당대의 인륜적, 문화적 입장들이 맞닥뜨렸던 대립과 양분 상태를 해소하고자 했다. 헤겔에 의하면 이러한 이분법의 해결, 대립의 화해야말로 철학의 목표에 다름 아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헤겔 철학의 이 궁극적인 목표는 초기 헤겔에서부터 『차이 논문』, 또 후기의 『법철학』에 이르기까지 헤겔 철학을 추동하는 주제동기이다. 이렇게 볼 때 헤겔의 철학은 좁은 의미에서 구성적 철학이며, 넓은 의미에서 치유적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나아가 헤겔의 철학은 광의의 구성적 철학으로 이해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철학의 이 작업이 일상에 파묻혀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유효하다고 생각했으며, 『정신현상학』의 주된 기획은 일상적 의식을 참된 앎의 입장으로 이끄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변철학과 상식은 우리가 사물들을 사유할 수 있고 알 수 있다는 믿음을 공유한다. 상식은 이 믿음을 직접적으로 고수하기는 하지만 그에 대한 세련된 철학적 정당화를 제공하지는 못한다. 사변철학은 이러한 상식적 믿음에 대한 올바른 해석과 정당화를 제공하는 한편, 상식이 이 믿음을 고수하기 위해 암묵적으로 전제하는 가정들을 변형한다. 그러므로 헤겔의 철학은 광의에서 구성적 철학이다. 그는 상식이 견지하는 믿음을 엄밀하게 정당화하기 위해 그 비철학적 가정들을 검토하고 이를 세련된 철학적 논증으로 대체한다. 물론 이는 상식의 입장에서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한에서의 변화에 국한된다.

반면 헤겔은 수정적 의미의 구성적 철학을 명시적으로 배격한다. 자연적 의식에서 시작해서 이를 참된 앎으로 이끌어줄 수 없는 철학적 작업은 부당한 작업이다. 나아가 『법철학』에서 철학적인 도덕적 당위의 추상성을 비판하고 실재하는 인륜에 우선성을 부여한 것 역시 수정적인 구성적 철학에 대한 비판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당대의 셸링, 포이어바흐를 비롯하여 많은 비판자들은 헤겔이 상식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수정적 의미의 구성적 철학을 하고 있다는 비판을 가한다. 헤겔은 이러한 의혹을 물리치고 자신의 체계가 유일하게 가능한 참된 입장이라는 주장을 방어할 수 있는가?

4. 헤겔의 체계에 출구는 없는가?

헤겔이 자신에게 씌워진 이 혐의를 벗으려면 다음의 세 가지를 입증해야 한다. (1) 상식 혹은 자연적 의식의 모든 핵심적 가정들이 그의 체계 안에 보존되어 있다. (2) 상식을 이처럼 지양할 수 있는 입장은 그의 체계뿐이다. (3) 사변철학의 가정들은 광의의 치유적 철학을 위해 필연적으로 도입되어야 한다. 만일 이 세 가지를 모두 입증할 수 있다면, 협의의 구성적 철학과 광의의 구성적 철학 사이의 구별은 무력화된다. 반면 이 점들이 입증될 수 없다면 헤겔의 철학은 치유적 성격을 지니지 않는 것으로 드러나게 된다.

헤겔 철학의 기저에는 광의의 치유적 철학과 광의의 구성적 철학이 일치한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그리고 헤겔은 이 세 가지 논제 중 그 무엇도 입증하지 못한다.

4.1. 고대 회의론과 데카르트

치유적 철학과 구성적 철학에 대한 헤겔의 믿음은 고대 회의론과 데카르트의 철학에 대한 그의 이해에 잘 나타나 있다. 헤겔은 데카르트가 지식의 확실한 토대를 마련하려 했다는 점에서 그에게 회의론적 입장을 귀속시키지 않는다. 또 그는 본유관념이나 선험적 종합판단만을 의심했던 흄이나 슐체의 회의론에 비해, 감각경험이나 심적 상태의 확실성을 의심했던 고대의 회의론이 훨씬 급진적이라고 본다.

헤겔은 고대 회의론과 관련하여 다음 두 가지를 믿는다. 첫째, 고대의 회의론자들은 정당화나 검토 없이 그 어떤 주장도 참이라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들은 예컨대 p를 참으로 만드는 논거들을 반박해서 p의 확실성을 부정할 뿐, p와 양립 불가능한 주장인 q의 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둘째, 한데 단순히 사유를 거부하는 종류의 회의론자와 달리 고대 회의론자들은 합리적 논증을 행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사유를 하고 있으며, 그렇다면 고대의 회의론자들은 사변철학을 철학의 참된 시작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왜냐하면 만일 그 어떤 대안도 생각할 수 없는 원리가 있다면 회의론자는 회의론의 작동 방식에 의해 그 원리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신현상학』에서 주장되는 논제인 이성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주장은 바로 이성에 입각하여 회의론적 논증을 행하는 회의론자를 겨냥하는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 회의론에 대한 이러한 이해가 사변철학에 대한 그의 논제를 뒷받침하는 첫 번째 논거이다.

다음으로 헤겔은 데카르트 철학의 주관성 개념에 주목하는데, 그는 방법적 회의를 통한 무비판적 믿음에 대한 데카르트의 거부와 더불어,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라는 자기의식의 확실성에서 출발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헤겔이 보기에 고대의 회의론과 자기의식은 데카르트에서 그 접점을 찾는다. 이 접점이 두 번째 논거이다.

마지막으로 헤겔은 데카르트가 사유와 존재의 이원론을 견지한다는 점을 포착하고 이를 비판한다. 철학의 진정한 출발점은 사유와 존재의 이 이원론 역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사유와 존재의 구별은 특정한 철학적 맥락 속에서만 제한적으로 적용되어야 하며, 그 적용 범위는 사변철학에 의해 고지되어야 한다. 이것이 세 번째 논거이다.

물론 사유와 존재의 이원론은 자연적 의식이나 상식에 속하는 입장이 아니다. 상식은 사유와 존재의 동일성이라는 진리의 기준을 그 직접적인 형식 속에서 보존하고 있다. 한편 이 직접성은 “순수 사유로서의 나에 대한 구상과 양립 불가능”(Quante, 2018, p. 62)하며, 여기서 그 직접성을 의심에 빠뜨리는 회의론의 역할을 통해 참된 철학적 입장으로의 전개가 이루어진다.

4.2. 체계의 출구

헤겔의 위와 같은 전략은 세 가지 이유에서 실패한다. 첫째, 참된 인식론적 토대를 발견하기 위해 그가 차용하는 회의론적 논증이 정말 일상적 의식이 받아들일 만한 정당화인지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어떤 믿음의 확실성은 단순히 대안적 믿음이 논리적으로 가능할 때가 아니라 이 대안이 설득력을 갖추고 등장할 때 비로소 흔들리기 때문이다. 둘째, 헤겔은 데카르트, 칸트, 피히테 등이 제시했던 자기의식 모형이 오류 불가능한 지식과 정당화를 담보해줄 수 있다고 믿었지만, 이는 지나치게 낙관적인 믿음이다. 그는 이 점에서 “데카르트적 내재주의에 속박되어”(Quante, 2018, p. 64) 있다. 셋째, 헤겔은 유한한 주체들이 정당화나 확신에 관한 주장들을 암시적으로 언질한다고 보고, 이 암시적인 함축들을 드러내는 철학적 논증과 자기의식의 모형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러나 헤겔이 이 작업에 성공했는지는 의심스럽다. 이 작업에 실패한다면, 헤겔은 그의 철학적 논증들을 자연적 의식과 상식에 빚지고 있는 셈이다.

“철학의 과업은 […] 회의론에 대한 대안적 답을 발전시키고 인간의 자기의식에 대한 대안적인 철학적 해석을 내놓는 데에 있다.”(Quante, 2018, p. 64) 이때 우리는 상식의 입장에 머무르면서, 상식이 오직 절대지 속에서만 자기에 대한 진정한 통찰을 얻게 된다는 헤겔의 주장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게 된다.


크반테가 제시하고 있는 “구성적”(constructive)이라는 용어의 정의가 명확하지 않다. 크반테에 의하면 이 용어는 어떤 것이 “문제의 해결에 합당하거나 도움이 되는 기여를 제시할 때”(Quante, 2018, p. 51) 사용할 수 있다. 그런데 이는 그가 염두에 두는 치유적 철학의 정의에 비추어 볼 때 다소 동떨어진 의미처럼 보인다(이런 뜻은 우리가 일상에서 무언가를 “건설적”이라고 말할 때의 그 의미에 가깝다). 구성적 개념을 그렇게 정의한다면 당연히 이 용어는 크반테가 이후에 논한 대로 ‘치유적’과 양립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이 정말로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다는 뜻으로 사용되는가? ‘구성적’이란 오히려 그가 ‘구성된’(constructed)의 정의로 제시한 “목전의 문제에 자연스럽게 들어맞는 안을 제시하지 않는”(Quante, 2018, p. 51)의 뜻을 지니는 듯하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내 생각에 ‘치유적’과 ‘구성적’의 구별은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인 이론적 주장을 언질하냐 언질하지 않느냐의 여부를 기준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특히 그가 ‘치유적’이라는 말로 비트겐슈타인이나 그의 정적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은 맥도웰 등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라면 말이다.) 이 구별은 외부 세계 회의론에 대한 초월론적 해결책과 자연주의적 해결책을 구별함으로써 예시될 수 있다. 초월론적 해결책은 지식 혹은 언어의 의미 등이 성립하기 위한 특정한 조건들을 제시하고, 회의론자가 이 점을 부정할 수 없다는 점을 보임으로써 회의론을 직접적으로 반박하려 한다. 반면 자연주의적 해결책은 지식이나 의미의 가능 조건 등의 주장을 제시함으로써 회의론을 반박하지 않고, 단지 회의론이 세계에 대한 우리의 앎이나 언어 사용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 무력한 것이라고 말한다. 방금 제시된 제안을 적용한다면 초월론적 해결책은 자연스럽게 구성적 작업, 자연주의적 해결책은 치유적 작업에 속하게 된다.

그런데 두 용어를 이렇게 구별한다면 크반테의 제안대로 치유적 철학과 구성적 철학이 중첩되는 부분을 발견하기 어렵게 된다. 치유적 철학이 광의에서 상식이 맞닥뜨릴 수 있는 사이비 문제들을 해결한다고 치더라도, 문제의 해소를 지적하는 일을 넘어서 긍정적으로 철학적인 주장들을 제시하고 승인하지 않는 한 치유는 구성과 양립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의심스러운 부분은 논문 전체가 상정하고 있는 출발점이다. 크반테는 “헤겔이 자신의 체계가 필연적이고, 그 자체로 완전하고, 어떤 대안도 허용하지 않는 것이라고 받아들인다는 점을 반박하기는 어렵다”(Quante, 2018, pp. 47-48)는 주장을 별다른 논증도 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나서, 헤겔의 체계로부터 벗어나는 일을 논문 전체의 과제로 삼는다. 그런데 나는 헤겔이 자신의 철학을 궁극적이고 최종적이며 유일하게 참된 입장이라고 생각했는지에 대해 회의적이다. 왜냐하면 이는 헤겔이 철학사가 자신의 철학에 이르러서 종말을 맞이한다는 주장을 했다는 뜻에 다름 아닌데, 이는 후쿠야마 같은 사람들이 헤겔에게 부당하게 귀속시켰던 이른바 “역사의 종말” 논제의 철학사적 버전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해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반박들이 나와 있다.

헤겔은 그의 서술이 항상 사태의 필연성에 다다르지는 않는다는 점을 부인할 필요가 없으며 그 스스로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상호 병립하는 변증론적 개진의 반복되는 행로들 속에서 계속해서 다른 방식으로 사태의 참된 구분들에 접근하기를 꺼리지 않는다.
Gadamer, H.-G. (1961). Hegel und die antike Dialektik. Hegel-Studien, 1, 173–199.

우리는 그 체계를 어떠한 수정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것으로, 따라서 영원히 변치 않는 저 너머의 최종적인 시간에 나타나는 계시로 취급하는가? 아니다. 그 체계는 결국 헤겔에 있어 단지 논리학, 존재론, 인류학 등등을 제시하려는 시도였을 뿐이었고, 그것은 헤겔 자신의 현재[…]에 대한 적절한 철학적 파악에 고유한 것으로 보였다.
Grier, P. (2018). 「역사의 종말과 역사의 귀환」. J. Stewart (Ed.), & 신재성 (Trans.), 『헤겔의 신화와 전설』 (pp. 309–335). 도서출판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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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반테의 인용은, 헤겔의 체계가 더이상 수정이 필요하지 않은 불변적 상태(역사의 종말)에 들어섰다는 뜻이 아니라, 헤겔의 "체계"가 그 외부에 어떤 다른 경쟁하는 체계를 가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즉 헤겔의 체계를 수정하고 다시 해석하고 지지고 볶고 하는 과정이 체계 외부의 다른 독트린이 아니라 헤겔의 체계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과정이라는 것이죠.

이런 대담한 주장은 헤겔이 초기 시절부터 고대 회의주의 (특히 퓌론주의)와 씨름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체계를 회의주의로부터 immune하게 만들기 위해 채택한 전략입니다. 흔히 회의주의 자체를 끌어안아버렸다라고 하죠. 간략히 말씀드리면, 퓌론주의자는 어떤 명제(P)를 세우든 그것의 반-명제(-P)가 가능하므로 판단중지를 해야한다는 급진적 회의주의를 펼쳤는데, 반대로 말하면 헤겔의 체계(S)가 외부(-S)를 가지지 않으면 이런 퓌론주의 및 여타 회의주의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자세히 보시면 이것이 변증법의 구조와도 유사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적극 추천할만한 매우 탁월한 연구서가 있습니다: Forster, M. N. (1989). Hegel and skepticism . Harvard University Press.
제 감각에 따르면, 아마도 헤겔의 "체계"를 진지하게 연구하는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크반테의 주장에 동의할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이전에 크반테의 해당 글을 읽다가 솔직히 재미가 없어서 읽다가 던졌는데요. 제 입장에서는 크반테야말로 별로 중요하지 않은, 혹은 존재하지도 않는 문제를 장황하게 다루는 것처럼 보였어요.

  1. 헤겔의 체계를 받아들이냐 아니면 전면적으로 거부하냐의 문제에 놓인다는 지적에는 공감합니다. 헤겔은 자신의 체계가 외부를 가지지 않는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all or nothing 게임을 피할 수 없는 것이죠.
  2. 그런데 헤겔의 체계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헤겔이 써재낀 것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라고 저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것이 크반테의 결정적인 오류라고 생각합니다. 크반테는 마치 헤겔의 체계가 스피노자의 실체처럼 절대적인 것에 대한 설명들의 "정태적 총체"라고 여기고 있는 것이죠. 이 경우에는, 체계를 수정한다는 것은 "정채적 총체"를 깨뜨리는 것이 되고 따라서 헤겔의 체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라고 오해하게 되는 것이죠. (따라서 크반테의 이러한 해석이야말로 "철학사의 종언" 해석에 가까워집니다.) 그런데 애초에 헤겔의 체계는 운동하는 "역학적 총체"이기 때문에 헤겔의 체계를 수정하고 손보는 것이 전혀 체계를 파괴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오히려 정신의 자기이해라는 이념에 부합하는 과정이죠.
  3. 따라서 (전면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헤겔의 체계를 받아들이는 소위 헤겔주의자(치유적 헤겔리안 포함)라면 "헤겔의 철학적 논증들을 검토하고 우리의 입장이 정말로 헤겔의 입장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인지 평가"하기 위해 굳이 헤겔의 체계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습니다. 콰인이 즐겨 인용하듯이, 물에 뜬 채로 배 위에서 배를 수리할 수 있고, 따라서 체계가 진정 절대적인 "역학적 총체"라는 것을 인식했다면 체계 안에서 체계를 평가하고 수정하고 할 수 있는 것이죠. 이런 의미에서 헤겔 체계의 "출구"를 찾는 크반테가 별로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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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잘 읽었습니다! 저는 비트겐슈타인과 헤겔을 모두 '치유적' 철학이라는 관점에서 독해하는 것을 선호하다 보니, 저에게는 상당히 흥미로운 글이네요. 아마 아래의

라는 부분을 보니, 크반테도 맥도웰로 대표되는 비트겐슈타인주의자들의 '분석적 헤겔주의'를 염두에 두고 글을 쓴 것 같네요.

(2) 물론, 크반테는 헤겔의 기획을 다소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어서 이 논문의 주장에 제가 모두 동의하기는 어렵네요.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치유적 철학과 구성적 철학의 여러 갈래들을 구분하여서

(a) '협의의 구성적 철학'과 '광의의 치유적 철학'이 일치한다는 점,
(b) '광의의 구성적 철학'이 치유적 철학을 포함할 수 있다는 점,
(c) '수정적 의미에서의 구성적 철학'이 치유적 철학의 한계사례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

을 크반테가 지적한 부분은 통찰력이 있다고 봐요. 나중에 이 주제로 논문을 쓰게 된다면, 이 부분을 인용하고 싶네요.

(3) 또 헤겔의 철학이 어떤 종류의 구성적 철학인지에 대해 논의한 아래의 부분들도, 앞으로 헤겔을 읽을 때 염두에 두어야겠네요.

헤겔은 '넓은 의미의 치유적 철학'을 지향하였고, 이런 철학은 '광의의 구성적 철학'과 다르지 않다는 게 크반테의 해석에서 핵심인 것 같은데, 저는 적어도 이 해석 자체에는 동의합니다. 다만, 이런 해석에도 불구하고, 헤겔의 체계가 제대로 정당화되지 않았다는 크반테의 비판은 받아들이기 어렵지만요.

(4) 저도 크반테에 대한 TheNewHegel님의 비판에 동의해요. 아래의 내용처럼,

이렇게 '초월론적' 접근과 '자연주의적' 접근이 구분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18-19세기 철학자였던 헤겔의 글에서는 이런 명시적인 구분들을 찾기 힘들기 때문에, 결국 헤겔을 옹호하는 작업은 우리 시대의 몫이긴 하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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