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설의 "구성(Konstitution)" 개념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후설의 "구성(Konstitution)" 개념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현재 자하비의 <후설의 현상학>의 "구성 개념"파트(국역본 130~139p)를 읽고 있는데, 구성 개념이 정확히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자하비는 후설의 "구성"을, 세계에 대한 주관의 창조적 과정이 아니라 "(구성은) 나타남과 의미를 허락하는 과정, 즉 구성된 것이 나타나고 펼쳐지고 명확히 표현되고 있는 그대로 자신을 보여주도록 허락하는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132p)" 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감조차 잡기 힘듭니다...

분명 앞(131p)에서 자하비는 "초월론적 주관에 의해 구성되는 차원은 의미의 차원이지 존재의 차원이 아니다"라는 입장을 문제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하비가 구성이 무엇인지 말한 저 문장의 뜻("구성"의 뜻)이 "의미 구성"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파악했습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후설의 "구성"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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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학기에 현상학 듣는 현린이는 와드 박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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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철 교수의 저서-"에드문트 후설: 엄밀한 학문성에 의한 학문의 개혁" (살림)을 참고로 하여 작성한 댓글입니다)

후설에 있어서 '구성(Konstitution)'은 노에시스-노에마 구조에 따른 지향적 의식의 대상 형성작용을 말합니다.

의식은 항상 어떤 것에 대한 의식입니다(의식의 지향성). 따라서 대상이 없는 순수의식 같은 것은 적어도 여기에서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의식은 지향성에 근거하여 세계와 관계를 맺게 되는데요, 이 지향적 의식은 대상성을 추구하고 의식체험과 대상을 연결하려 합니다.

의식체험은 바로 우리가 내적으로 하는 체험이지만, 외부의 대상들은 우리 내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서 일종의 초월적인 성질을 가집니다. 우리는 외부의 대상들을 만지고 보고 맛보는 등 감각적 소여를 통해 감각자료를 얻을 수 있지요. 그런데 이 감각자료를 어떻게든 해서 이를 통해 우리 의식과 우리 의식을 초월(바로 금방 말한 맥락에서의 의미로서의 초월성)한 대상을 연결시키는 것이 바로 위의 지향적 의식이라는 것입니다.

이 대상산출적 의미부여 작용을 '노에시스(Noesis)'라고 하고, 이 노에시스 작용에 의해 형성된 의미의 통일체, 즉 지향적 대상을 '노에마(Noema)'라고 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노에시스-노에마 구조에 따른 지향적 의식의 대상 형성작용을 바로 후설이 "구성(Konstitution)"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자하비가 "초월론적 주관에 의해 구성되는 차원은 의미의 차원이지 존재의 차원이 아니다"라는 입장을 문제 있다고 말했다는 부분을 검토해 보겠습니다. 초월론적 주관에 의한 구성작용에 의해 구성된 세계는 바로 지향적 대상입니다. 이 지향적 대상은 주관에 의해 형성되는 것입니다. 세계가 지향적 대상으로서 초월론적 주관성에 주어짐으로써 세계와 주관은 지향적 연관 내에서 하나로 결합된 것으로 이해됩니다. 따라서 세계는 주관성에 의존하게 됩니다. 후설에 따르면 초월론적 주관에 의해 구성되는 차원, 초월론적 주관성이 보고 의미를 부여한 지향적 대상은 '실재 그 자체'입니다. 실재의 의미적 차원, 혹은 실재의 표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초월론적 주관에 의해 구성되는 차원은 단지 의미의 차원이라고 하는 말은 이런 맥락을 고려해 볼 때 문제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다음으로,

자하비는 후설의 "구성"을, 세계에 대한 주관의 창조적 과정이 아니라 "(구성은) 나타남과 의미를 허락하는 과정, 즉 구성된 것이 나타나고 펼쳐지고 명확히 표현되고 있는 그대로 자신을 보여주도록 허락하는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132p)" 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감조차 잡기 힘듭니다...

이 부분을 검토해 보겠습니다. 구성의 의미가 '노에시스-노에마 구조에 따른 지향적 의식의 대상 형성작용'이라고 위에서 언급했었죠. 이것은 세계가 바로 우리 의식주관에 의해서 비로소 형성/창조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밖의 나무와 풀, 건물들이 바로 우리 의식주관에 의해 (존재하지 않았다가 갑자기) 비로소 창조되어 존재할 수 있게 된다는 극단적인 주관적 관념론이 아니라, 주관과 세계가 지향적 연관 속에서 하나로 결합되어 있고 세계는 초월론적 주관성에 의해 구성된 지향적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세계의 현실적 존재성은 부정되지 않으며, 단지 후설은 세계를 지향적 상관자로 이해하고 해석합니다. 그래서 구성은 세계를 시원적으로 창조하는 것이 아니며, 나타남과 의미를 허락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세계가 모든 사람에게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되고 또 참되게 정당하게 간주되는 그 의미를 밝히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위에서 한번 언급한 문장입니다만) 초월론적 주관에 의해 구성되는 차원, 초월론적 주관성이 보고 의미를 부여한 지향적 대상은 '실재 그 자체'입니다. 실재의 의미적 차원, 혹은 실재의 표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논리에 대해 이후 메를로퐁티는 지각적 신뢰에 의하여 단순히 (초월론적) 환원이 이루어질 수 있는지, 의식에 의해 세계의 현상성이 변할 수 있는지에 대해 비판하고 있기도 합니다...

제대로 답변이 되었을지 모르겠습니다. 부디 평안한 추석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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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감각적 소여를 통해 감각자료를 얻을 수 있지요."라고 하여 감각적 소여와 감각자료를 마치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진 말처럼 사용했는데요, 제가 잠시 착각을 한 것 같습니다. 위의 제 답변의 전체적인 논지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지만, 실수를 해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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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최근에 본 이종훈 교수님의 <후설현상학으로 돌아가기 (한길사/2017년 출간)> 라는 책에서는 후설의 "구성"이

"구성(konstitution) : 칸트에게 '구성'(Konstruktion)은 감성에 잡다하게 주어진 것을 오성의 아프리오리한 사유형식인 범주에 집어넣어 인식을 구축하는 작용이다. 반면 후설현상학에서는 인식의 형식뿐만 아니라 내용도 아프리오리하다. 따라서 그 내용이 우리에게 완성되어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경험의 지평구조를 발생적으로 분석하고 해명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후설의 '구성'은 결코 실재세계를 '창조'하는 형이상학적 개념이 아니라, 침전된 의식 삶의 구조와 존재의미를 역사적으로 '해명' 하는 방법론적 개념이다. 즉 '대상성에 의미를 부여해 명료하게 밝히는 작용' 또는 '대상을 표상하게 만드는 작용'일 뿐이다. 그것은 새로운 세계를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세계를 새로운 관점에서 다층적으로 보고 경험할 수 있는 방식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가 종종 수동적 의미를 띤 재귀동사의 형태로 '구성된다' (sich konstituieren)고 쓰는 것도 인식되는 대상이 지닌 상당한 권리와 우선성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514p)

이렇게 설명되어 있더군요. 구성이 창조를 함축하는 형이상학적 개념이 아닌 것까지는 알겠는데, 이종훈 교수님은후설의 구성(Konstitution)을 "침전된 의식 삶의 구조와 존재의미를 <역사적으로> '해명' 하는 <방법론적 개념>"이라고 설명하십니다. 후설의 구성이 저러한 것이라는 해석이 "구성(Konstitution)'은 노에시스-노에마 구조에 따른 지향적 의식의 대상 형성작용"이라는 해석과 충돌하나요? 혹은 양립 가능할까요?

답변 감사합니다. 즐거운 추석 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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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부족한 글을 읽어주시고 질문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깊이 알지는 못하지만 아는 한 제 생각을 적어보겠습니다.

후설의 이론에서 인식의 형식 및 내용이 모두 아프리오리한데, 후설의 이론을 해석하며 삶, 역사와 같은 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엄밀한 선험성과는 갈등하는 것으로 보여서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인식의 형식 및 내용 자체의 선험성은 보존되고, 단지 '경험의 지평구조를 발생적으로 분석하고 해명하는 것'이 요구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는 모순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침전된 의식, 삶, 이에 대한 역사적 해명이라는 것들은 '구체적 보편성'이라는 면에서 고찰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보편성은 엄밀한 학으로서의 학이라는 현상학의 이상에 기여하는 것이고요.

이런 것을 전제로 해서 검토해 보면...이종훈 선생님께서 언급하신 후설에 있어서 구성에 대한 정의인 '침전된 의식 삶의 구조와 존재의미를 역사적으로 해명하는 방법론적 개념', '대상성에 의미를 부여해 명료하게 밝히는 작용' 또는 '대상을 표상하게 만드는 작용'이라는 것은 후설의 '구성'개념의 실질적 의의를 부각시켜서 설명한 것이라면, '구성(Konstitution)'은 노에시스-노에마 구조에 따른 지향적 의식의 대상 형성작용'이라고 한 것은 '구성'개념의 형식적 해명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두가지 설명방식은 모두 타당하며 충돌하거나 모순되지 않는다고 보입니다.

(하지만 저도 전문가가 아니니, 아주 정확한 설명은 되지 못할 것이고, 앞으로 공부하시다가 제 말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면 지체없이 가르침을 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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