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vy(2002) 음악철학 입문: 2장

새로운 번역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크립키보다는 훨씬 옮기기 어렵네요. 키비도 어지간한 사람은 아니긴 한데, 확실히 크립키가 정말 글을 잘 씁니다.

Kivy, Peter (2002). Introduction to a philosophy of music. New York: Clarendon Press. pp. 14-30

2장: 간략한 역사

(p. 14) 음악철학에서 가장 오래되고, 꾸준히 반복되어 온 교조는 인간 정서와 음악 간에는, 다른 모든 순수 예술과 있을 법한 관계를 벗어난 어떤, 특수한 연결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때때로 단순한 믿음의 표현으로 나타났고, 때로는 정교한 이론의 수준에 다다르는 데 성공했다. 이 교조는 철학적으로는 플라톤의 <국가>에서 처음 구현되었고, 이미 음악을 통해 야만적인 짐승부터 지하세계의 군주까지도 압도할 수 있었던 오르페우스의 신화에서도 드러난다. 음악철학은 플라톤의 음악과 정서에 대한 이론으로부터 시작한다. 우리의 연구를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플라톤이 살았던 시절의 그리스의 음악이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다. 그러나 그리스 ‘음악’이 어떻게 들릴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적고, 어쩌면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중세시대의 음악도 들을 수 있건만 고대 그리스의 음악을 같은 방식으로 들을 수는 없기 때문에, 우리가 플라톤이, 지금 ‘음악’이라고 주로 번역되는 것을 두고 정확히 무엇에 대해 말하고 있었는지에 대해 확신을 가지기란 어렵다. (p. 15) 우리는 말 그대로, 그가 무엇에 대해 말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따라서 독자들은, 내가 여기서 플라톤, 그리고 마찬가지로 그의 위대한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음악과 정서에 대한 이론의 설명이 완전히 빗나갔을 수 있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후세 사람들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무엇을 말하고 있었다고 여겼는지에 대해서는 알고 있으며, 이것이 그들 자신의 음악과 정서에 대한 이론의 영향을 끼쳤고, 지금까지도 그러하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목적에 있어서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진정으로 무엇을 뜻했는지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에서 음악은, 주로 리라와 같은 현악기가 반주하는 가사를 가지는 가창 선율이었다. 반주가 ‘다성적(polyphonic)’이었다고, 그러니까, 멜로디를 구성하는 음과는 다른 음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보이지는 않는다. 달리 말해, 반주하는 악기는 가창 선율과 거의 같은 음들을 연주했다. 이러한 음악을 ‘단성적(monodic)’이라고 한다.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음악은 일곱 가지 ‘선법(mode)’ 또는 음계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음계는 서로 다른 고정된 음정의 배열이며, 서로 다른 소리와, 그리스인들의 생각에 따르자면, 서로 다른 ‘에토스‘ 또는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달리 말해, 각각의 선법은 서로 다른 정서(또는 일련의 정서들)와 연결지어졌다. (‘선법‘이 무엇인지 감을 잡기 위해, D에서 D까지, 또는 F에서 F까지의 모든 흰 건반을 차례대로 쳐볼 수 있다. 각각 ‘도리안’ 선법과 ‘리디안’ 선법의 근대적 판본이다.)

<국가> 3권에서, 플라톤은 한 선법으로 작곡된 선율은 그 선법에 적절한 정서 또는 성격의 상태를 환기(arouse)하며, 다른 선법으로 작곡된 선율을 또 그 선법에 적합한 정서 또는 성격의 상태를 환기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는, 예를 들어, 사람들에게 용기와 호전적인 정서를 불어넣을 수 있는 선율의 선법이 있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그는 이것이 (p. 16) 해당 선법이 명백히 용감하고, 호전적인 사람의 어조와 억양, 외침과 고함을 모방 또는 재현하고 있는 까닭이라고 여겼다. 달리 말해, 플라톤은 선율이 연설과 절규를 통해 정서를 표현하는 사람들을 모방 또는 재현함으로써 청중의 정서를 환기하는 능력을 가진다고 주장했다고 여겨질 수 있으며, 실제로 많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여겨졌다. 이러한 개념은, 금방 보게 되겠지만, 16세기에 다시 등장했으며,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음악과 정서 간의 관계에 대한 한 가지 추정의 원동력이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 또한 음악과 정서 간의 내적 관계라는 개념을 받아들였다. 확실히, <정치학> 8권 5장에서 그는 음악이 인간 정서의 물리적 표현이 아니라 인간 정서 그 자체를 재현하며, 인간의 영혼은 정서적으로, 그러한 재현과의 공감을 통해 흔들린다는 흥미로운 주장을 펼쳤다.

불행히도, 아리스토텔레스는 음악적 소리가 정서를 모방하거나 재현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명료히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음악적 소리가 인간의 표현적 발화의 소리를 재현한다는 플라톤적 이론이 더욱 쉽게 이해되고, 더욱 설득력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큰 영향력을 발휘했으며, (곧 보게 될 바와 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담한 제안만큼이나 근대적 감수성에도 들어맞았다(물론, 우리가 제대로 이해했다는 전제 하에서).

내가 말해야 하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나는 여기서 거의 2,000년 가까이 건너뛰어 16세기 부근으로 가야 한다. 이는 중세에 음악과 정서에 대한 탐구가 드물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러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하는 이야기는, 후기 르네상스 시대에 그들의 음악의 정서 이론이 부활한 것과 특수한 연속성이 있다. 이와 같은 연속성은 우리의 프로젝트와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이며, 따라서 가장 유익하다.

16세기에 다다를 무렵 피린체에서는, 스스로를 카메라타라고 일컬은 귀족 집단과, 그 도시의 일부 가장 재능 있는 시인, 작곡가, 이론가들이 모여 그들이 그리스 비극 공연의 부활이라고 여겼던 시도를 진행했다. (p. 17) 그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의 권위 아래, 그리스 비극은 가창을 동반하는 음악적 공연이라고 믿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우리가 지금 ‘오페라’라고 알고 있는 예술 형식을 발명했다.

음악철학자들에게 특히 흥미로운 것은 이 새로운 예술적 시도의 이론적 토대이다. 본질적으로, 카메라타의 회원들과 그들의 동료들은 방금 서술된 플라톤적 이론의 한 가지 형태를 옹호했다. 그들은 음악이 인간 정서를 환기하는 힘은 멜로디의 다양한 정서를 표현하는 말소리에 대한 재현에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작곡가는 청중에게 즐거움을 환기하고자 한다면 말로써 즐거움을 표현하는 사람의 어조와 억양을 재현하는 선율을 써야 하며, 우울함의 경우 우울한 말의 어조와 억양을 재현해야 한다는 식이다. (이러한 정서를 환기하는 것이 음악에 있어서 좋은 것이라는 가정은 처음부터 있었다.)

이 시점에서 약간의 용어를 새로 도입하도록 하겠다. 카메라타는 음악이 어떻게 인간 정서에 대해 표현적일 수 있는지에 대한 분석을 제시했다고 하자. 한 음악은 청중에게 슬픔을 환기함으로써 슬픔에 대해 표현적이고, 청중에게 즐거움을 환기함으로써 즐거움에 대해 표현적이며, 등등. 이 책에서 나는 이러한 이론을 음악적 표현성에 대한 ‘환기’ 이론이라고 부르도록 하겠다. 더욱이, 나는 또한 이를 ‘경향적’ 이론이라고 기술할 것인데, 왜냐하면, 이 이론에 따르자면, 아편이 사람들을 잠에 들게 하는 경향적 속성을 가지는 것처럼, 음악은 정서적 속성을 청중에게 정서를 환기하는 ‘경향’으로서 가지기 때문이다.

음악적 표현성에 대한 탐구의 역사에서, 환기 이론의 지지자들은 음악이 환기하는 기제에 대해 다양한 이론을 제시했다. 카메라타의 회원들은 내가 ‘동조’ 기제라고 부를 이론을 제시했다. 그들은, 말하자면, 음악이 정서를 표현하는 행위자의 말소리를 재현하기 때문에 - 이것이 작곡가가 어떻게 극중 인물을 위한 음악을 써야 하는지에 대한 처방이었다는 점을 상기하라 - 청중들이 (p. 18) (상상 속에서) 그 행위자에 동질감을 느끼면서 그 행위자가 표현하고 있다고 재현되는 정서를 느끼는 것을 통해 그 정서를 환기한다고 믿었다. 나는 이를 줄여서 정서적 환기의 ‘동조’ 이론이라고 부르도록 하겠다.

그렇다면, 우리는, 새로 도입된 어휘를 가지고, 음악의 표현성에 대한 카메라타의 이론을 요약할 수 있다. 이는 환기 이론이며, 음악적 표현성에 대한 경향적 이론인 동시에 음악적 환기에 대한 동조 이론이다.

이렇게 기술된 카메라타의 이론에 관해서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다. 여기에는 사실 개의 기획이 있는데, 하나는 우리가 음악을 표현적 어휘 - 슬픔, 기쁨 등 - 로 기술할 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에 대한 분석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음악에 의해 깊게, 정서적으로 감동받았다고 말할 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에 대한 분석이다. 환기 이론과 경향적 이론은 전자에 대해서 말해 주고, 동조 이론은 후자에 대해 말한다. 카메라타의 저작에서 두 기획은, 모두 내가 ‘통상적 정서’라고 부를, 기쁨, 슬픔, 분노, 공포, 사랑 등과 같은 일반적이고, 기초적인 정서의 환기로 환원된다. 그러나 이러한 융합은 피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나중에 보게 되겠지만, 우리가 음악이 통상적 정서에 대해 표현적이라고 할 때와 음악이 깊이 감동적이라고 말할 때 우리가 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필수적이지는 않으며, 추천할 만하지도 않다. 사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가장 잘 표상하는 방법은, 음악이 어떻게 통상적 정서에 대해 표현적인지와, 어떻게 (때때로) 깊이 감동받는 경험을 청자에게 제공할 수 있는지에 대해 꽤나 상이한 설명을 제공하는 것이다.

꽤 긴 시간 동안 음악적 표현성과 우리를 감정적으로 감동시킬 수 있는 음악의 능력에 대한 환기 이론은 지배적이였으며, 동조 이론은 환기의 기제로써 자주 호소되었다. 그러나 17세기 중엽에 음악이 어떻게 통상적 정서를 환기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지에 대한 대안적 설명을 제공한 중요한 발전이 있었다. (p. 19) 이는 위대한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르네 데카르트(1596-1650)이 1649년에 출판한 <정념론>이었다. 지금 우리가 정서의 '생리학적 심리학’이라 칭하는 것에 관한 매우 영향력 있는 이 저작에서, 데카르트는 그가 기초적이라고 생각했던 여섯 정서 또는 정념인 호기심, 사랑, 혐오, 욕망, 즐거움, 슬픔은 소위 생기(vital spirit), 프랑스어 원전을 따르자면 esprits animaux에 의해 경험되도록 야기된다고 주장했다. 데카르트는 신경계를 미세한 휘발성 유체 매질인 생기가 흐르는, 뇌를 사지와 신체 감각기관과 연결하는 작은 파이프로 이루어진 통로 - 사실상 축소된 배관 체계 - 라고 여겼다. 이 유체 매질은 자신을 배열하는 특수한 방식이 있으며, 각각의 배열은 여섯 가지의 기본적 정서를 환기할 수 있다고 가정되었다. 따라서, 예를 들자면, 자신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고 인지한 사람은 신경계가 자극받아 자신에게 공포를 조장하는 생기가 배열되었을 것이며, 그 사람은 공포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정서에 대한 데카르트적 심리학과 생리학은 재빨리 많은 음악 이론가들에게 채택되었으며, 그들은 음악적 소리의 움직임이 직접적으로 생기를 자극하고, 따라서 청자의 정서를 환기한다고 추정하였다. 따라서, 만일 한 작곡가가, 예를 들어 슬픈 음악을 작곡하려 한다면, 그는 곡을 그러한 정서를 환기하는 적합한 생기의 배열과 유사하게끔 써야 한다고 여겨졌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음악이 모든 기본적 정서에 대해 표현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작곡가는 데카르트가 설명한 기본적 정서에 알맞은 생기의 기본적 운동이 무엇인지 알고, 그러한 운동과 부합되는 음악을 쓰기만 하면 되었다. 이 이론은 ‘감정이론(doctrine of the affections)’이라고 알려지게 되었으며, 특히 독일에서 Affektenlehre라고 불린 이 이론은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헨델(1685-1759)와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1685-1750)를 포함한 1675년에서부터 1750년 사이에 활동한 많은 유명한 작곡가들의 작곡 실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또한 철저하게 고수되었다.

(p. 20) 물론 오늘날에는 아무도 데카르트의 생기, 그리고 그에 기반한 심리학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음악에게 정서의 환기를 직접적으로 초래하는 인체의 생리적 기제에 대해 행사하는 힘을 귀속하는 이론은 여전히 생겨나고 있고, 데카르트가 정서의 생리학과 심리학에 있어서 선구적인 작업을 시작한 이래 지속적으로 있어 왔다. 따라서, 우리는 음악이 어떻게 통상적 정서를 환기할 수 있는지에 대한 ‘생리적’ 이론을 한 가지 가능성으로서 동조 이론과 나란히 놓아둘 수 있다.

음악이 어떻게 우리를 정서적으로 감동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환기적, 성향적 이론과 결합된 음악적 표현성의 환기적, 성향적 이론은, 카메라타의 시대에서부터 19세기 초반까지, 200년 넘게 그 자리를 유지해 왔다. 때로는 동조 이론이, 때로는 다소간 데카르트적인 생리적 이론이 이를 구동해 왔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그 둘 중 하나는 계속해서 호소되었다.

이 200년간의 정체를 깬 첫 주요 사건은, 여러모로 음악철학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이었던 1819년, 유력한 독일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1788-1860)의 주요 저작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출판이었다. 쇼펜하우어의 이 걸작은, 본질적으로 모든 것에 대한 이론이었으며, 더 이상 생산적이거나 존경할 만하다고 여겨지지 않았던 거창한 옛 방식이었다. 그러나 그의 거창한 이론이 더 이상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관심을 두었던 많은 특정한 주제에 대해 주목할 만한 말을 하지 못 했다는 것은 아니다. 특히, 음악과 순수예술 체계에서의 음악의 지위에 대한 그의 이론은 많은 철학가들과 음악 이론가들에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성가신 형이상학적 토대를 빼놓고 보자면, 쇼펜하우어의 음악철학은 꽤 말이 된다. 적어도, (p. 21) 이는 음악의 표현성에 대한 이론의 새롭고 효과적인 방향을 가리켰다.

여기서 파고들 필요 없는 이유들로 인해, 쇼펜하우어는 우주 – 원한다면, 궁극적 실재 – 를 분투하는 우주적 인간 의지를 모델로 생각했다. 그는 음악을 다른 순수예술에 비해 뛰어난 것으로 간주했는데, 왜냐하면 음악이 다른 모든 것보다 이 우주적 의지를 더 잘 반영 또는 표상했기 때문이다. 그는 확실히 때때로 음악이 의지의 ‘사본’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결론은 음악철학의 중요한 순간이었는데, 첫째 이유는 쇼펜하우어가 음악을 18세기 철학자들에게 다소 낮다고 여겨졌던 음악의 지위를 다른 모든 순수예술 위로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19세기는 낭만주의의 세기였고, 음악은 최상의 낭만주의 예술로서 기름부음 받았었다.

더욱이, 쇼펜하우어는 두 세기를 넘는 시간 동안 음악적 표현성이라는 현상에 대한 환기 이론의 억압을 깼다. 쇼펜하우어는 음악을 의지의 표상(representation)으로 만들면서, 동시에 그는 음악이 인간 정서의 재현(representation)일 수도 있다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한 음악이 표현성을 가지는 정서는, 단번에 청자에서 음악으로, 대부분의 현대 철학자들이 정서를 귀속시키는 곳으로 옮겨갔다. (만일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의 모호한 구절에서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라면, 이는 드디어, 그 긴 시간 이후에 다시 끌어올려진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또한 명시적으로 표현성을 청자를 정서적으로 감동시키는 음악의 힘과 구분했다. 달리 말해, 쇼펜하우어는 음악은 그 재현적인 힘으로 인해 특정 정서에 대해 표현적이지만, 그것이 재현하는 정서 또는 정서들을 환기하는 것으로써 우리를 정서적으로 감동시키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이러한 결론은 필자 본인을 포함한 몇몇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으나, 곧 보게 되겠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요약하자면, 쇼펜하우어는 음악 전반에 대해, 그리고 특히 음악과 정서 간의 관계에 대한 철학적 사고에 혁명을 가져왔다. (p. 22) 그는, 말하자면, 순수 기악 음악을 철학의 지도 위에 올려놓고, ‘쾌적한’ 예술에서 대단한 중요성을 지닌 예술의 격위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그는 음악적 표현성에 대한 이론을, 한 음악이 표현성을 지닌다고 여겨지는 정서를 음악에, 음악의 지각된 속성으로서 집어넣으면서, 대부분의 사람이 보기에 올바른 방향으로 전환시켰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오직 한 가지 방법만을 구상하였는데, 바로 표현된 속성을 재현된 속성으로 간주하는 것이었다. 현대의 철학적 분석은 또 하나의, 더욱 설득력 있는 다른 방식을 구별해 냈다. 그러나 이는 다음 장에서 소개될 것이다.

음악적 정서의 이론에서 쇼펜하우어의 혁명은 19세기에서 발생한 두 가지 혁명 중 하나였다. 두 번째 것은 1854년에, 빈의 음악가 겸 음악평론가 아두아르드 한스리크(1825-1904)가 쓴 작은 책의 형태로 나타났다. 이는 처음 The Beautiful in Music이라는 제목으로 영문 번역되었으며, 보다 최근에는 On the Musically Beautiful (국문 제목: <음악적 아름다움에 대하여)로 출판되었다. 내게는 이 두 가지 번역보다 On Musical Beauty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욱 원문에 충실한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이 책에서는 그렇게 지칭하도록 하겠다.

<음악적 아름다움에 대하여>에서 한슬리크는 각각 ‘부정적’, 그리고 ‘적극적’이라고 부르는 두 논제를 옹호한다. 적극적 논제는 나중에 다루게 될 것이다. 부정적 논제는 지금 유관하다.

한슬리크의 부정적 논제는 내가 통상적 정서라고 부르던 것을 환기하거나 재현하는 것은 예술로서의 음악의 유일한 목적도, 일차적 목적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 논제에 대한 논증은 간단하고 직설적이다. 예술로서의 음악은, 통상적 정서를 환기하거나 재현할 수 없다 . 따라서 , 통상적 정서를 환기하거나 재현하는 것은 예술로서의 음악의 유일하거나 일차적 목표가 될 수 없다.

한슬리크의 부정적 논제는 그것이 진술된 방식 때문에 끊임없이 주석자들에게 오해되어 왔다. 그의 논제는 통상적 정서를 환기하거나 재현하는 것이 음악의 유일하거나 일차적인 예술적 목표일 수 없다는 것이기 때문에, 한슬리크가 적어도 이차적, 또는 부차적 목표로서는 허용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명백히, 이는 그의 의도일 수 없는데, (p. 23) 왜냐하면 부정적 논제를 위한 그의 논증은 예술로서의 음악은 통상적 정서를 환기하거나 재현할 수 없다는 것이기에, 통상적 정서를 환기하거나 재현하는 것이 예술로서의 음악의 어떤 목표도 될 수 없다는 것이 사소하게 따라나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슬리크는 왜 이렇듯, 음악의 유일하거나 일차적인 예술적 목표가 통상적 정서를 환기하거나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고 부정적 논제를 표현했는가? 단순히, 이것이 한슬리크 이전 사람들의 논제였고, 또한 오직 이것만이 흥미로운 논제였기 때문이다. 통상적 정서를 환기하거나 재현하는 것이 예술로서의 음악의 별로 중요하지 않거나, 심지어 사소한 역할이라 주장하는 사람은 딱히 논박의 귀찮음을 감수할 만한 것을 주장하고 있지 않은데, 왜냐하면 이는 수용의 귀찮음을 감수할 만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간에, 부정적 논제에 있어서 한슬리크의 전략은 음악은 그 어떤 예술적으로 유의미한 방식으로 통상적 정서를 환기하거나 재현할 수 없다고 논증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 전략이 대항하는 것이 정서를 환기 또는 재현하는 것이 음악의 유일한 예술적 기능이라는 이론인지, 일차적 예술적 기능이라는 이론인지, 부차적인 예술적 기능이라는 이론인지는 무관하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은 한슬리크에게 전혀 필요치 않았다. 만일 이 전략이 좋다면, 이는 음악을 통상적 적서의 환기 또는 재현과 연관짓는 모든 이론에 대해 효과적이다. 음악이 전혀 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조금도 할 수 없다.

그러나 한슬리크의 부정적 논제에 대해 주석가들이 그가 이 논제에서 음악과 정서의 어느 정도의 내적인 연관성은 배제하지 않았다고 여겼던 두 번째 이유가 있다. <음악적 아름다움에 대하여>에서, 음악이 통상적 정서를 환기할 수 없다고 증명하는 것을 첫째 과제로 삼았던 그가, 나중에 와서는 말을 바꿔 음악은 통상적 정서를 환기할 수 있고 또한 때때로 그러한다 주장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심스러운 독자들에게, 한슬리크는 그가 두 개의 서로 다른 곳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또한 왜 그 둘이 서로와 일관되는지에 대해 충분히 명료하다. 최초에 (p. 24) 한슬리크는, 음악은 그 어떠한 예술적으로 유관한 방식으로 통상적 정서를 환기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나중에 그가 정서적 환기의 문제로 돌아올 때, 그는 음악은 물론, 통상적 정서를 예술과 무관한 방식들로 환기할 수 있다는 명백한 사실을 지적한다. 음악은 예술적 기능과 무관한 두 가지 방식으로 이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한 사람이 정서적으로 ‘경직’되어 있거나, 또는 어떤 방식으로건 정서적으로 ‘불안정’하거나 ‘비정상적’이라면, 어떤 음악 작품은 그의 분노를 폭발케 하거나,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넣을 수 있겠지만, 이는 민들레나 문고리의 경우에도 그렇다. 이러한 사실은 이 모든 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그 본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음악이, 다른 모든 것처럼 일시적 또는 영구적으로 정서적 ‘문제’ 또는 특이성이 있는 사람들에게 정서적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은 음악의 예술적 본성이나 목표와는 상관이 없으며, 예술철학자의 관심사가 되지 않는다.

진정한 미적 효과로 자주 혼동되기에 더욱 중요한 것은, 한슬리크에 따르자면, 음악은 통상적 정서를 청자와의 ‘개인적 연관’ 때문에 그에게 환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베토벤 5번 교향곡을 나는 인생에서 특히 슬픈 시절에 처음 들었고, 당신은 특히 즐거운 시절에 처음 들었다면, 향후의 감상에서 당신에게 즐거운 사건들을, 그리고 나에게는 슬픈 사건들을 떠올리게 하고, 따라서, ‘연관’을 통해, 당신을 즐겁게 만들고 나를 슬프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우연적 개인적 연관성은 베토벤의 작품의 내용과는 무관하며, 우리의 예술적 감상과도 무관하다.

부정적 논제에 대한 논증은, 우리가 보았듯이, 음악은 그 어떠한 예술적으로 유관한 방식으로 통상적 정서를 환기하거나 재현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음악이 이를 할 수 없다는 주장의 기반은 무엇인가? 한슬리크의 대답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그 전에, 음악미학의 토론, 특히 음악과 정서가 주제일 때 염두에 두어야 하는 한 가지 단순한 점을 언급해야 한다. 한슬리크의 주요 논점에서 고려하고 있는 것은 오직 텍스트나 극적 장치 없는 순수한 기악 음악이며 (p. 25), 한슬리크의 세기에서 ‘절대 음악’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내가 때때로 ‘순수 음악(music alone)’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세계 대부분의 음악은, 예나 지금이나 말이 있는 음악이다. 단일한 예술 형식으로서 절대 음악은 18세기 말 이전에는 철학적 탐구의 대상이 되지 못 했다. 그 당시 한슬리크가 다루었던 문제는, 그가 명료히 밝히듯이 순수한 기악 음악이 적절하게 통상적 정서를 환기하거나 재현할 수 있는가였다. 물론, 텍스트나 극적 장치가 음악에게 함께하도록 주어졌을 때, 이러한 점에 대한 음악의 능력은 극단적으로 변화한다. 말이 있는 음악과 음악극은 말할 것도 없이 음악철학의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이것들은 적절한 때에 논의될 것이다. 그때까지는, 우리가 고려하고 있는 것은 절대 음악뿐이다.

한슬리크는 순수 음악이 적절하게 통상적 정서를 환기할 수 있다는 생각에 반대하여, 설득력과 통찰력 두 측면에서 모두 뛰어난 논증을 제시한다. 이는 나 자신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논증이다. 더욱이, 한슬리크는 <음악적 아름다움에 대하여>에서 통상적 정서가, 일상에서 어떻게 우리에게 환기되는지에 대해 백 년이 넘는 시간 후에야 받아들여진 분석을 활용했다.

지금 ‘정서의 인지적 이론’이라고 알려진 이 분석은, 간단히 말하자면, 통상적 정서, 예를 들어 공포가 환기되기 위해서, 공포를 느끼는 사람은 일반적인 경우 그 정서를 경험하는 데 있어서 적합한 믿음 또는 믿음들을 가져야 한다는 것, 달리 말해, 한 사람에게 공포를 야기할 수 있다고 합리적으로 생각되는 믿음 또는 믿음들(예를 들어, 위험한 광인에게 위협받고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공포는 반드시 대상을 가져야 하는데, 즉 그 사람은 무언가 또는 다른 무언가(이 경우, 그 위험한 광인은 공포의 대상이다) 무서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필수적이지는 않지만 종종, 공포에 놓여 있는 사람이 느끼는 특정한 느낌 – (p. 26) 여러 가지 공포의 느낌 중 하나 – 가 있다.

한슬리크는 위에서 스케치된 바와 같은 정서 환기에 대한 분석을 제공하고, 음악, 즉 절대 음악이 이렇게 이해된 환기에 필요한 재료를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논증한다. 도대체 음악이, 내게 공포, 즐거움, 슬픔과 같은 정서를 환기할 만한 무슨 믿음을 제공할 수 있는가? 또 그 정서의 대상은 무엇이 될 것인가? 이러한 관점에서, 한슬리크는 음악이 적절한 방식으로 통상적 정서를 환기할 수 있다는 생각이 우스꽝스러운 것이라고, 명백히 불합리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동의하지 않기란 어렵다. (물론, 가사를 가지는 음악 또는 음악극이 통상적 정서를 적절하게 환기할 수 있는지는 꽤 다른 문제이고, 알맞은 곳에서 논의될 것이다.)

음악이 적절하게 통상적 정서를 재현할 수 있다는 생각을 반박함에 있어서 한슬리크는 원칙적으로, 철학사에서 흔히 보이는 회의적 전략인 ‘불일치로부터의 논증’이라고 불릴 만한 것에 의존한다. 이 주장은 감상자들이 한 주어진 음악을 올바르게 특징짓는 정서적 용어 또는 기술이 무엇인지애 대해 완전한 불일치에 있다는 것이다. 한슬리크가 보기에 여기에는 혼란뿐이다. 한 감상자는 이 정서를 들어내고, 다른 감상자는 다른 정서를 들어내며, 제삼의 감상자는 그 어떠한 정서도 들어내지 않는다. 여기서 한슬리크는 묻는다. 만일 음악이 감상자들에게 어떠한 정서가 재현되었는지, 재현되었다면 무슨 정서인지에 대한 일치를 끌어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음악이 통상적 정서를 재현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는가? 그가 기대하고, 내세우는 답은 ‘아니오’이다.

한슬리크의 논증 – 불일치로부터의 회의적 논증 – 은 향후 오래 동안의 사고에 강렬한 영향을 끼쳤다. 이 논증은, 만일 성공적이라면, 음악이 통상적 정서를 적절하게 재현할 수 있다는 주장뿐 아니라 통상적 정서를 적절하게 환기하거나 그 어떠한 방식으로건 체계적으로 재현할 수 있다는 주장에 반대되는 논증이다. 한슬리크가 이 점, 그러니까 그의 불일치로부터의 논증이 음악적 표현의 재현 이론뿐 아니라 환기 이론에 대해서도 치명적이라는 점을 지적하지 못했다는 점은 꽤 당혹스럽다.

(p. 27) 어쟀든간에, 이 불일치로부터의 논증은 여러 세대의 음악 이론가들과 철학자들에게 의문 없이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이며, 거의 100년간 음악을 표현적 매체로서, 적어도 통상적 정서에 대해 직접적으로 표현적이라 받아들이는 모든 진지한 철학적 성찰을 기각했다. 이 회의적 통념에서 벗어난 외지지만 중요한 이탈 – 실제로 한슬리크 이후 20세기 중반 이전까지 유일하게 음악적 미학에 있어서 철학적으로 강력한 진전 – 은 에드문드 거니의 <소리의 힘(The Power of Sound)>(1880)이다. 거니(1847-88)는 음악은 때때로 통상적 정서에 대해 표현적일 수 있다고 생각했고, 이 현상을 음악이 감상자들을 깊게 감동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는 것(이 또한 긍정했다)와 구분했다. 그러나 그는 음악이 때때로 통상적 정서에 대해 표현적일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그리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자주 ‘영국의 한슬리크’인 것으로, 한슬리크와 같은 유형의 음악적 ‘순수주의자’인 것으로 여겨졌다. 그는 그뿐인 사람이 아니며, 우리는 더욱 적절한 시기에 다시 돌아와서 그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거니의 위대한 저작 이후,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영미권에서의 음악철학에 대한 부활의 다소 미숙한 첫 단계까지는 황량한 60년간의 갈라짐이 있다. 수잔 랭어(1895-1985)가 1942년에 출판한 <새로운 주제의 철학(Philosophy in a New Key)>는, 음악적 사고에 심오한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예술철학자들에게 있어서 음악은 몹시 주의를 요하는 것이라는 것을 상기시켰다. 특히, 랭어는 음악과 정서 간의 관계의 문제를 부활시켰다.

<새로운 주제의 철학>은 음악철학에 관한 책은 아니며, 오직 그 중 하나의 챕터, <음악의 중요성에 대하여(On significance in Music)>만이 직접적으로 이 주제에 대한 작업이다. 그러나 랭어가 그곳에서 음악의 중요성이 정서적 기호(symbol, ‘상징’으로도 번역됨. 이때 ‘iconic symbol’ – 상징적 기호 – 는 ‘도상적 상징’으로 번역될 수 있음)로서의 잠재력에 있다고 말했던 것은, (p. 28) 근 100년 간의 회의주의 뒤에, 특히 한슬리크의 정서적 회의주의에 대해 점차 회의적으로 되어가지만 적절한 근거를 찾을 수 없던 음악 이론가들과 철학자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랭어는 충분히 근면했다. 그는 쇼펜하우어와 한슬리크, 그리고 18세기의 음악 미학사에 대해서도 많은 배경지식이 있었다. 그는 쇼펜하우어의 음악이 정서의 재현 또는 상징적 기호라는 관념과 더불어 한슬리크의 회의주의의 적어도 일정 부분의 유효성을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어떻게 그것이 모두 참일 수 있는가? 이 점이 그가 마주했던 문제였다.

<새로운 주제의 철학>에서 나타난 대답은, 음악은 개별의 통상적 정서의 상징적 기호또는 재현은 아니라는 것, 달리 말해 이 작품은 슬픔의 기호 또는 재현이며, 저 작품은 즐거움, 또 다른 작품은 분노 또는 공포의 기호 또는 재현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대신에, 그는 음악은 특히, 그녀가 때때로 말하듯이 정서적 삶 일반의 상징적 기호이며, 그것과 ‘동형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 점을 서술하기 위해, 미국 심리학자 캐롤 프랏의 고도로 독창적인 미학적 심리학의 저작 <음악의 의미(The Meaning of Music)> (1931)의 정서적 논제 음악은 정서가 느껴지는 대로 들린다는 말을 인용하였다.

따라서 랭어는 두 가지 모두 취할 수 있었다. 쇼펜하우어를 따라 그는 정서(비록 단수지만)가 청자가 아니라 음악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었으며, 동시에 음악이 개개의 통상적 정서를 재현하거나, 특히 환기할 수 없다는 한슬리크의 회의적 결론을 수용할 수 있었다. 그는 음악이 할 수 있는 것이란, 전체적인 정서적 흥망성쇠를 동형적이 됨으로써 재현하거나 기호가 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에서 말한 음악이 정서를 ‘모방’한다는 수수께끼와 같은 주장으로 뜻한 바일 수 있을까?)

음악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랭어의 이론이 적이었던 점은, 첫째로, 이것이 음악을 일반적, 통상적 정서를 통해 기술하는 것에 대한 그들의 혐오감을 설명해 주었다는 점에 있다. (p. 29) 한슬리크가 불일치로의 논증을 통해 그러한 기술에 객관적 유효성이 없다는 점을 ‘보인’ 이후로, 그들은 이를 잘해야 아이들과 문외한을 위한 방편, 또는 나쁘게는 단순한 헛소리로 보았다. 그러나, 둘째로, 이 이론은 또한 한슬리크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순수 음악, 절대 음악이 올바르게 ‘의미’ 도는 ‘중요성’이라 기술되는 무언가를 가지며, 이 ‘의미’ 또는 ‘중요성’은 인간 정서와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다는 동등하게 강한 직관을 지지해 주었다. 축약하자면, 랭어의 이론은 음악을 슬프거나 즐겁다고 말하는 것은 멍청하지만 그 모든 것에 대한 정서가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러나 철학자들이 랭어가 음악의 정서적 중요성에 대해 말한 것을 평가할 때, 그들은 음악가들보다 이를 받아들이기를 주저했다. 확실히, 그는 쇼펜하우어와 같이, 정서를 음악 안에 집어넣음으로써 음악철학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었다고 평가되었다. 그러나 철학자들은 한슬리크의 검증되지 않은 회의주의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다. 적어도, 기본적인 심리학적 자료는 실제로 음악작품의 한 악구가 어떤 통상적 정서에 대해 표현적인지에 관해 충분한 합의가 있다고 말하며, 수많은 상식에 기반한 고찰 또한 이러한 방향을 가리켰다. 한슬리크와 반대로, 사람들은 음악작품의 한 악구가 슬픈지, 즐거운지 또는 성나 있는지 등등에 관해 대체로 동의한다 . (만일 믿지 못하겠다면, 간단한 사례를 친구들과 함께 들어보라.) 그리고 작곡가들은 어떤 종류의 음악이 슬픈 가사에 걸맞는지, 어떤 종류의 음악이 즐거운 가사에 걸맞는지, 성난 가사에 걸맞는지에 대해 동의한다. 결과적으로, 랭어의 입장이 특정한 통상적 정서의 어휘를 통한 음악 기술을 회피하고, 몇몇 사람들이 보기에는 다소 신비하게, 음악은 정서적 삶 ‘일반’의 기호라고 주장한다는 점은 (그것이 무슨 일 수 있겠는가?) 더 이상 장점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더욱이, 음악이 ‘상징적’이건 ‘도상적’이건 ‘기호’라는 랭어의 생각은 시작에서부터 문제가 있었다. (p. 30) 상징적 기호, ‘닮음으로서의’ 기호 역시 규약에 의해 ‘의미’해야 한다. 내가 내 가게 문앞에 석고 물고기를 달아 둔다면, 이는 생선가게라는 뜻이지 아쿠아리움이라는 뜻이 아니며, 도로 한켠에 ‘S’자 표지가 달려 있다면 이는 ‘커브길’을 뜻하지 ‘뱀 출몰’을 뜻하지 않는다. 이는 모두 ‘의미 규약’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랭어가 말하는 바처럼 음악이 정서적 삶의 상징적 기호가 되는 것에 관해서는, 음악이 동형적이거나 ‘그렇게 들릴’ 수 있는 다른 모든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의 기호라는 의미 규약이 없다. 따라서 음악의 기호적 기능에 대해서는 랭어의 이론은 지지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재현 또는 상징적 기호로서, 정서 또는 정서들을 음악 ‘안’에 놓는 것은 우리가 음악의 정서를 실제로 경험하는 방식을 따라가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내가 보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를 들어 음악 주제 또는 악구에서 슬픔을 들어낼 때, 강아지 사진에서 강아지 사진을 보아내는 방식이 아니라 사과에서 빨간색을 보는 방식으로 한다고 말할 것이다. 달리 말해, 음악의 정서는 재현적 성질이 아니라 단순한 지각적 성질인 것으로 보인다.

랭어는, 쇼펜하우어와 함께 정서를 청자에서부터 빼내 제자리, 즉 음악 안에 돌려보내는 음악적 정서의 현대적 철학적 분석의 길을 텄다. 그러나, 역시 쇼펜하우어를 따라, 그는 정서가 음악 안에 있을 수 있는 오직 하나의 방식만을, 재현적 또는 상징적 기호로서의 방식만을 보았다. 그러나, 현대의 분석은 우리가 음악의 정서를 경험하는 방식과 더욱 가까운 두 번째 방식 또한 구상하고 있다. 이는 음악의 정서를 색이나 맛과 같은 지각적 속성으로 보는 것이다. 내게는 이것이, 음악의 정서에 관해 우리가 이제 관심을 두어야 할 성공적인 새 접근법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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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저는 키비의 글을 하나 둘 정도 밖에 안 읽어봤지만, 굉장히 깔끔했던 기억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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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비의 글을 한국어로 읽어볼 수 있다니 감사하네요.
개인적인 프로젝트인지요?

예 개인적인 취미입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