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 도넬란, 「지시와 한정 기술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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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nellan, Keith (1966). “Reference and Definite Descriptions.” The Philosophical Review. Vol. 75. No. 3. 281-304.

I. 도넬란의 주장은 한정 기술구(definite description)의 두 가지 용법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정 기술구에는 지시적 사용(referential use)과 속성적 사용(attributive use)이 있으며, 두 사용을 구분하지 않을 경우 혼동에 빠진다. 나아가 두 사용은 문장의 형태에 의해 구분되지 않는다. 즉 동일한 문장이 지시적으로도 속성적으로도 사용될 수 있다.

러셀은, 한정 기술구에 해당하는 유일한 대상이 존재할 때 한정 기술구가 대상을 지칭한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러셀은 한정 기술구의 한 가지 용법을 밝혔지만, 다른 용법에 대해서는 아예 간과하고 있다. 도넬란이 보기에, 러셀이 지칭(denote)이라는 말을 통해 뜻하는 바는 속성적 사용에 가까우며, 이는 지시(refer)와 구분되어야 한다. 나아가 러셀이 한정 기술구와 고유명(proper name)을 엄격히 구분한 후 고유명에만 할당했던 용법은 사실 한정 기술구의 지시적 사용 속에서도 마찬가지로 유효하다.

한편 스트로슨은 러셀과는 달리 한정 기술구의 지시적 사용에 주목했지만, 한정 기술구가 지시 외에 다른 기능을 할 수 있음을 간과했다. 물론 그는 한정 기술구의 비지시적 용법에 대해 언급하기는 하지만, 지시적 사용과 비지시적 사용이 문장 구조의 차이에 따라 구분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같은 문장이 지시적으로도 비지시적으로도 사용되는 일이 가능하다.

도넬란은 문장에 포함된 한정 기술구가 둘 중 어떤 기능을 하는지는 맥락으로부터 고립된 문장만을 가지고는 판단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스트로슨과 러셀은 일견 대립되는 논점을 가지고 있지만, 한정 기술구의 용법이 사용 맥락과 독립적으로 정해질 수 있다는 가정을 공유한다. 물론 스트로슨은 러셀에 반하여 언급(mentioning)을 지시(referring)와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는 한정 기술구가 사용 시에만 지시 표현일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도넬란이 보기에 한정 기술구는 사용되지 않는 이상 결코 지시할 수 없다.

이뿐만 아니라 스트로슨과 러셀은, 한정 기술구 사용을 위해서는 무언가가 기술에 들어맞는다는 점을 선제(presuppose)하거나 함축(imply)한다고 주장한다는 가정도 공유한다. 이들은, 기술구에 들어맞는 대상이 없다면 그 기술구가 포함된 문장의 진릿값이 거짓이 되거나 진릿값 공백이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도넬란의 구별을 받아들인다면 이 가정은 속성적 사용에서만 참이며 지시적 사용에서는 부정된다.

II. 한정 기술구가 무언가를 전제하거나 함축하지 않는 몇 가지 경우들이 있다. 예컨대 드골이 프랑스의 왕이 아닌 대통령이라는 점을 지적하기 위해 사용된 문장 “현재 프랑스의 그 왕은 존재하지 않는다.”나, 드골이 왕인지 대통령인지 모르는 사람이 사용한 문장 “드골이 프랑스의 왕인가?”에 포함된 한정 기술구는, 기술에 들어맞는 대상을 선제하거나 함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사례들은 논의에서 차치된다.

III. 이제 속성적 사용과 지시적 사용을 각각 규정하자. 무언가에 대해 이러이러하다고 진술하기 위해 한정 기술구를 사용한다면 그 기술구는 속성적으로 사용된 것이다. 한편 청자로 하여금 논의 대상을 특정하게 하기 위해 한정 기술구가 사용된다면 그것은 지시적 사용이라고 할 수 있다.

속성적 사용과 지시적 사용의 변별 조건은 다음처럼 기술될 수 있다. 한정 기술구가 속성적으로 사용된 문장은, 기술구에 들어맞는 대상이 없을 경우 성공적으로 기능하지 못한다. 한편 한정 기술구가 지시적으로 사용된 문장은, 기술구에 들어맞는 대상이 없더라도 성공적으로 기능할 수 있다.

무더운 여름날 냉장고에 있던 아껴둔 얼음이 없어졌다고 하자. 이때 냉장고를 열어본 사람이 “얼음 도둑이 정말 치사하다”고 말한다면, 여기서 “얼음 도둑”이라는 기술구는 누군가를 특정해서 지시하지는 않지만, 누군가가 얼음 도둑이라고 진술하고 있다. 한편 김유철이 얼음을 훔친 유력한 용의자인데, 김유철이 냉장고에 있던 아이스크림을 다 먹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고 하자. 이 상황에서 말해진 같은 문장 “얼음 도둑이 정말 치사하다”에서 “얼음 도둑”은 김유철을 지시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제 밤새 냉장고가 꺼져서 얼음이 녹아 없어진 것이라 하자. 그렇다면 “얼음 도둑”이라는 기술구에 들어맞는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때 전자의 경우 문장은 어떤 대상에 대해서도 진술하지 못한다. 한편 후자의 경우 기술구는 여전히 대상을 성공적으로 지시할 수 있으며, 따라서 전체 문장도 해당 대상이 치사하다고 성공적으로 진술할 수 있다.

속성적 사용과 지시적 사용의 차이는 의문문에서도, 명령문에서도 드러난다. 한정 기술구가 속성적으로 사용된 의문문/명령문에서는, 기술구의 기술 실패 여부가 질문/명령의 성공 여부를 좌우한다. 한편 지시적으로 사용된 기술구를 포함한 의문문은 기술구의 기술이 부적합하더라도 성공적으로 질문/명령으로서 기능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모임에서 한 사람이 마티니 잔을 들고 있는데, 사실 그 잔에는 마티니가 아닌 물이 들어있다고 하자. 이때 그 사람에 흥미가 생긴 누군가가 “마티니 마시고 있는 사람 누구야?”라고 물어본다면, 이 질문은 “저 사람은 이러이러한 사람이야” 같은 답변이 따라올 수 있다. 반면 이 모임이 금주 모임이고, 금주 모임 회장이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 질문에는 제대로 된 대답이 따라올 수 없다. 특히 서술문의 경우, 속성적으로 사용된 한정 기술구는 기술 실패 시 문장을 거짓으로 만들거나 진릿값 공백을 발생시킨다. 한편 지시적으로 사용된 한정 기술구는 문장의 진릿값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한정 기술구의 지시적 사용과 속성적 사용은 각각의 전제 조건을 통해서도 변별될 수 있다. 속성적 사용은 기술에 해당하는 대상의 존재만을 전제한다. 반면 지시적 사용은 대상의 존재에서 나아가 기술에 해당하는 대상이 구체적으로 특정된다고 전제한다. 따라서 전자의 경우 얼음 도둑의 존재 여부도 얼음 도둑이 김유철인지도 문제 삼을 수 있지만, 후자의 경우 얼음 도둑의 존재만이 문제가 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사용은 맥락을 통해서 구분되지 문장 자체만으로는 구분될 수 없다.

IV. 지시적 사용과 속성적 사용이 화자의 믿음에 의해 변별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는 두 사용의 본질적인 차이는 아니다. 속성적 사용을 하면서도 마음속으로 기술구에 해당하는 특정한 대상을 생각할 수 있으며, 한편 지시적 사용을 하면서도 지시 대상이 기술구에 부적합하다고 믿을 수 있다.

텅 빈 냉장고를 열어보면서 “얼음 도둑이 정말 치사하다”고 말한 사람이 속으로 김유철이 범인이라고 믿더라도, 저 문장의 한정 기술구는 여전히 속성적이다. 김유철이 용의선상에서 벗어나고 진범이 밝혀진다면 저 문장은 여전히 그 범인에게 해당하는 문장이다. 한편 나는 김유철이 범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더라도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김유철의 행방을 묻기 위해 “얼음 도둑이 지금 어디에 있나?”라고 물을 수 있다.

V. 속성적 사용은 기술구에 해당하는 대상이 존재한다고 전제하고, 지시적 사용은 여기서 나아가 구체적인 특정한 대상이 기술구에 해당한다고 전제한다. 두 가지 사용 모두 전제(또는 함축)를 갖지만, 전자와 후자가 각각의 사용에서 전제되는 이유는 다르다. 전자의 조건은, 속성적으로 사용된 기술구를 포함한 문장이 성공적으로 기능하기 위한 전제이다. 한편 지시적 사용에서 후자의 조건이 전제되는 이유는, 대상에 적합한 기술이 대상을 특정하는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술구가 대상을 적합하게 기술하지 못하면서도 여전히 대상을 성공적으로 지시하는 경우가 가능하다.

VI. 도넬란은 이 두 가지 사용의 구분을 가지고 러셀과 스트로슨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먼저 러셀은, 한정 기술구가 사용된 문장이 한정 기술구에 해당하는 대상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필함(entail)한다고 주장한다. 러셀의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는 차치하더라도, 우리는 이 주장이 지시적 사용에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필함에 관한 러셀의 주장이 옳다고 하더라도, 이 주장은 속성적 사용에 대해서만 참일 수 있다.

한편, “한정 기술구에 해당하는 유일한 대상이 존재할 때 한정 기술구가 대상을 지칭한다”는 러셀의 지칭(denoting) 개념은 지시적 사용과 속성적 사용 모두에 적용 가능하다. 두 경우 모두, 한정 기술구가 성공적으로 사용되었을 때 지칭체(denotation)를 갖는다. 그러나 지칭 개념은 속성적 사용에는 충분한 조건일지언정 지시적 사용을 규정하기에는 충분한 조건이 아니다. 기술구에 해당하는 대상이 무엇인지를 특정하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대상을 지칭할 수는 있어도 지시할 수는 없다.

​ 스트로슨은 한정 기술구의 지시적 사용에 주목했지만, 지시적 사용의 정확한 조건을 규명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도넬란은 스트로슨의 주장에 수반하는 다음의 세 가지 명제를 분석한다.

(1) “φ는 ψ이다”라는 문장에서 한정 기술구 φ에 해당하는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문장은 참도 거짓도 아니다.
(2) φ에 해당하는 대상이 없다면 화자는 지시에 실패한다.
(3) 문장이 참도 거짓도 아닌 이유는 문장의 화자가 지시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1)은 속성적 사용에 대해서는 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시적 사용에는 해당되지 않는 명제이다. (2)는 거짓이다. φ에 해당하는 대상이 없어도 지시에 성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3)은 일단 속성적 사용에 대해서는 해당되지 않는다. 속성적 사용에서 한정 기술구는 지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지시적 사용의 경우 (3)은 보다 자세하게 검토할 여지가 있다.

지시적 사용의 경우 네 가지 경우가 있을 수 있다. 내가 멀리서 지팡이를 짚은 사람을 보고는 “지팡이 짚은 저 사람이 역사 교수입니까?”라고 물어봤다고 하자. 이때 네 가지 경우가 있을 수 있다. (a) 대상이 지팡이를 짚은 사람이다. (b) 대상이 지팡이가 아닌 우산을 든 사람이다. (c)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지팡이 짚은 사람처럼 생긴 바위이다. (d)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내가 뭔가를 봤다고 착각했다. 각각의 경우는 다음처럼 정리될 수 있다.

(a)와 (b)는 한정 기술구의 적절성에서 차이가 있지만 모두 지시에 성공했으며, 진릿값을 갖는다. 스트로슨에 따르면 (3)은 (c)와 (d)가 진릿값을 갖지 않는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c)가 진릿값을 갖지 않는 이유는 한정 기술구가 지시에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라, “역사 교수”라는 술어가 바위에는 적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3)이 설명력을 갖는 부분은 완전히 지시에 실패한 극단적인 경우인 (d)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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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넬란의 평가에 따르면 결국 러셀과 스트로슨은 한정 기술구의 사용을 적절히 설명하는 데 실패했다. 러셀은 한정 기술구의 지시적 사용을 무시했으며, 스트로슨은 지시적 사용과 속성적 사용의 구별을 뒤섞었다.

VII. 한정 기술구가 지시적으로 사용되는지 속성적으로 사용되는지의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다름 아닌 실제 발화 상황에서 화자의 의도이지, 한정 기술구 자체 또는 한정 기술구가 포함된 문장의 문법적 구조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한정 기술구는 범주상 지시 표현으로 분류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같은 문장이 지시적 사용인지 속성적 사용인지에 따라 문법적 차이나 의미상의 차이를 보이는 것도 아니다. 한정 기술구가 지니는 지시적 사용과 속성적 사용이라는 애매성은 구문론적이나 의미론적이 아닌 화용론적 애매성이다.

지시적 사용과 속성적 사용에 관한 상기의 논의는, 문장이 단순히 술어, 논리적 연산자, 지시 표현의 결합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문장을 단순히 구문론적, 의미론적 결합체로 보는 시각은 문장의 사용이라는 층위를 놓친다. 스트로슨과 러셀은 이 점에서 한정 기술구가 지니는 애매성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도넬란은 이들이 두 가지 다른 사용의 요소들을 하나로 섞어 놓았다고 비판한다.

VIII. 한정 기술구가 지시적으로 사용된 문장이 참일 때 그 문장은 항상 지시된 대상에 대해 참이다. 이 점은 진술 개념에 관한 의문을 제시한다. 린스키(L. Linsky)는, 한정 기술구에 해당하는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지시가 실패하게 된다는 스트로슨의 주장을 반박하는 과정에서 다음처럼 주장한다.

한정 기술구가 대상을 적절히 기술하지 못함에도 성공적으로 대상을 지시하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밝고 활달한 미혼 여성을 보고 진술된 “저 사람의 남편이 잘해주는구나”에서 “저 사람의 남편”이라는 기술에 해당하는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화자는 그 사람의 남편이라고 믿었던 누군가를 구체적으로 염두에 두고 있을 수도 있다. 이때 기술구는 대상을 성공적으로 지시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기술구에 해당하는 대상은 없기 때문에 “저 사람의 남편이 잘해주는구나”라는 진술은 여전히 참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다.

한정 기술구의 지시 성공 조건으로 린스키가 내세우는 조건은, 화자가 구체적인 누군가가 기술구에 해당한다고(저 사람의 남편이라고)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살펴봤듯 이는 기술구가 지시적 사용의 충분조건도 필요조건도 아니다.

도넬란이 주목하는 부분은, 기술구에 해당하는 대상이 없기 때문에 '진술'이 참도 거짓도 아니라는 린스키의 주장이다. 린스키의 주장이 속성적 사용에서는 옳을 수도 있지만, 지시적 사용에서도 단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 예시에서 기술구를 통해 지시된 그 사람이 그 여성에게 잘해준다는 점이 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저 사람의 남편이 잘해준다는 것은 참이다"라고 말하기는 꺼려진다.

이 꺼림은 진술이라는 개념을 둘러싸고 일어난다. 화자가 말한 진술이 참이라고 해도, 우리는 그 진술을 위의 문장처럼 표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제 우리가 그 진술을 긍정하기 위해 “저 사람의 남편이 잘해준다는 것은 참이다”라고 실제로 발화할 때, 우리는 이 문장의 한정 기술구 역시 속성적으로 또는 지시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기술구가 속성적으로 사용된다면, 우리는 “저 사람의 남편”이라는 기술구를 그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화자의 진술이 참인 것은 한정 기술구가 지시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가 기술구를 지시적으로 사용할 때도 “저 사람의 남편이 잘해준다는 것은 참이다”라고 말하는 일이 꺼려지는 이유는, 우리가 그 기술구를 그대로 사용할 때 화자의 잘못된 믿음에 동조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앞서 서술했듯 지시적 사용에서는, 화자는 지시 대상이 기술구에 들어맞는다고 믿는다는 가정이 자리한다. (그리고 앞서 보았듯 이 가정이 기술구의 지시 성공 여부를 좌우하지는 않는다.) 결국 우리가 위의 문장을 그대로 사용하기 꺼리는 이유는, 우리가 화자처럼 잘못된 믿음을 갖는다는 인상을 주기 싫기 때문이다.

우리는 문제의 기술구를 그대로 차용하는 대신, 우리의 목적에 부합하는 다른 기술구나 이름을 사용하면 된다. “저 사람의 남편”으로 지시된 누군가가 학생회장이거나 존스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면, “학생회장이 저 사람에게 잘해준다는 것은 참이다” 또는 “존스가 저 사람에게 잘해준다는 것은 참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점은 속성적 사용과 지시적 사용의 또 다른 차이점을 명시한다. 대상을 기술하는 데 실패한 한정 기술구 φ를 포함한 문장 “φ가 ψ이다”에서, φ가 속성적으로 사용되었다면 그 어떤 것도 ψ라고 보고될 수 없다. 반면 φ가 지시적으로 사용되었다면 여전히 지시 대상에 대해 ψ라고 보고할 수 있다.

기술에 실패한 한정 기술구를 포함한 문장 “저 사람의 남편이 잘해준다”가 참도 거짓도 아니라는 린스키의 주장은 속성적 사용에서는 설득력을 지닌다. 그러나 지시적 사용에서 린스키의 주장은 설득력을 지니기 어렵다. 지시적으로 사용된 한정 기술구는 기술에 실패하더라도 대상을 성공적으로 지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전체 문장에 진릿값 공백을 발생시키지도 않는다.

IX. 도넬란은 한정 기술구와 지시에 관한 러셀의 두 가지 생각을 간단히 검토하며 논문을 마무리한다.

첫째, 러셀은 진정한 고유명이 지시 대상에 그 어떤 속성도 귀속시키지 않은 채 순수하게 지시 기능만을 한다고 생각했다. 한정 기술구는 기술된 속성들을 귀속시킬 뿐이지 진정한 의미에서 대상을 지시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러셀의 생각이었다. 한편 도넬란의 논의는, 대상에 속성들을 귀속시키지 않은 채 대상을 지시하는 ‘진정한 고유명’에 가까운 기능을 한정 기술구도 수행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둘째, 러셀의 생각에 의하면, 한정 기술구가 사용된 문장은 고유명을 사용한 문장과 달리 일반성을 띤다. 러셀에 따르면, “루이 14세는 대머리이다”는 루이 14세라는 개별 대상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는 반면에, “1650년의 프랑스의 왕은 대머리이다”는 조건을 만족하는 그 어떤 대상이든 겨냥한다. 속성적 사용과 지시적 사용의 구분에 의거하여 이 생각을 들여다본다면, 속성적 사용에서는 (특수성을 결여한다는) 약한 의미에서 지시가 이루어진 셈이다. 한편 지시적 사용에서는 청자와 화자가 곧바로 특정할 수 있는 구체적인 개별 대상을 겨냥한다는 강한 의미에서 지시가 이루어진다.

McGinn, Collin (2019). 「도넬란의 구별」. 『언어철학』. 이승택·박채연 역. 서울: 도서출판b. 119-145.

4.2 지시적 사용과 속성적 사용

III-V 참조.

4.3 지칭하기와 지시하기

VI 참조.

4.4 진릿값 공백

VI, VIII 참조.

4.5 도넬란의 구별에 대한 평가

도넬란이 한정 기술구의 사용에 관해 주장한 구별은 고유명이나 지시사, 또는 어떤 표현에도 적용될 수 있다. 실제 발화 상황에서 화자는 부적합한 고유명을 사용한 경우에도 지시에 성공할 수 있으며, 형용사나 동사 등을 부적합하게 사용했음에도 발화 행위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이소크라테스와 소크라테스를 헷갈리는 사람이 소크라테스의 조각상을 보고 “이소크라테스는 들창코였구나”라고 말할 때, 도넬란의 설명대로라면 “이소크라테스”라는 고유명은 부적합함에도 불구하고 대상을 지시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 사례는 고유명 “이소크라테스”가 의미론적으로 이소크라테스 단 한 명을 지시한다는 점을 반박하지는 못한다. 어떤 표현이 실제로 오용될 수 있다는 점은 그 표현에 관한 의미론을 반박하는 논거가 되지 못한다. 더구나 어떤 표현이 오용되면서도 화자의 의도를 성취할 수 있다는 점 역시 그 표현이 이러이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반박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4.6 함축과 함의

그라이스에 의해 제시된 대화적 함의(conversational implicature)란, 낱말이나 명제가 문자 그대로 갖는 의미와는 별개로 실제 맥락 속에서 가질 수 있는 의도이다. 명제는 자신의 의미를 표현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실제 발화 속에서 화자의 의도를 담는다. 예컨대 치킨집에 들러 치킨을 사오기로 했던 친구가 약속 시간보다 훨씬 늦게 왔을 때, “난 네가 닭을 양계장에서 사와서 튀겨 오는 줄 알았다”고 면박을 주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발화된 문장 자체는 친구가 양계장에서 직접 닭을 사와 치킨을 튀기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적 믿음을 표현하지만, 실제 발화 속에서는 약속 시간에 늦은 친구에 대한 불만을 의도하고 있다. 이처럼 직접 표현되지 않는 맥락 속의 의도를 일컬어 대화적 함의라고 한다. 그리고 예시에서처럼, 문장의 문자적 의미와 대화적 함의 사이에는 어떤 필연적인 논리적 연관도 없다.

닐의 비판에 따르면, 도넬란은 ‘의미된 바’와 ‘의도된 바’의 차이를 무시하고 있다. 도넬란은 한편으로 지시적 사용과 속성적 사용의 구별이 의미론적이 아닌 화용론적 구별임을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이 구별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한정 기술구에 관한 러셀의 의미론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두 가지 주장은 일관적으로 견지될 수 없어 보인다.

지시적 사용과 속성적 사용의 구별을 위해 도넬란이 든 예시는, 그라이스의 구별을 통해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 앞의 예시에서 “저 사람의 남편이 잘해준다”는 문장은 그대로 저 사람의 남편이 잘해준다는 명제를 표현하는 한편, 저 사람 옆에 있는 존스가 그녀에게 잘해준다는 명제를 의도한다. 이는 도넬란의 지시적 사용이 대화적 함의와 일맥상통함을 보여준다.

이제 도넬란의 러셀 비판은 다음처럼 재반박될 수 있다. 도넬란은 속성적 사용에서 러셀의 의미론이 옳다고 인정했다. 그런데 그라이스의 구분에 따르면 우리는 언어 표현의 문자적 의미와 실제 사용 의도를 구별해야 한다. 따라서 러셀의 의미론은 속성적 사용에서도 지시적 사용에서도 옳아야 한다. 결국 도넬란의 논점은 러셀의 의미론에 대한 반박이 되지 못한다.

4.7 러셀의 이론에 대한 추가 반론

도넬란의 비판 외에도 러셀의 한정 기술구 이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반론이 있다. 그 중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아무것도 지칭하지 않는 기술구를 포함한 문장은 거짓이 되기보다 진릿값 공백을 발생시킨다. “프랑스의 그 왕은 대머리이다”라는 문장을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러셀의 주장이 반직관적이라고 스트로슨은 비판한다. 스트로슨에 의하면, 저 문장은 프랑스에 왕이 있고 그가 대머리가 아닐 때 거짓이라고 보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 이런 의미에서 지시 대상의 존재는 한정 기술구 문장에 논리적으로 함축된 것이 아니라, 지시 대상에 관한 명제가 참이나 거짓이 되기 위한 전제이다.

둘째, 러셀처럼 한정 기술구를 분석한다면, 한정 기술구를 그 자체 완전한 문장으로 생각하게 된다. 왜냐하면 “프랑스의 그 왕”이라는 한정 기술구 자체가 “어떤 것이 프랑스를 다스리면서 왕이면서 유일하게 존재한다”라는 문장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정 기술구는 문장이 아닌 구(phrase)이다. 우리는 “프랑스의 그 왕”만을 말함으로써 완전한 문장을 말했다고 생각하지도 않으며, 더구나 기술구 자체는 “사과”가 참도 거짓도 아닌 것처럼 진릿값을 지니지 않는다. 더구나 한정 기술구 자체가 문장을 의미한다고 가정하면 한정 기술구가 사용된 비서술문(non-declarative sentence)을 제대로 설명하기 어렵다.

셋째, 러셀의 이론은 불완전한 기술구에 적용하기 어렵다. 예컨대 “그 탁자는 비어 있다”라는 문장의 기술구인 “그 탁자”는 러셀의 이론에 따르면 “오직 하나이면서 탁자인 것이 존재한다”로 분석된다. 그러나 “그 탁자는 비어 있다”는 세계 내에 단 하나의 탁자만이 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7개의 좋아요
  1. 도넬란의 논문 서론은 정말 서론다운 서론 중에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ㅎㅎ

  2. 예전에 읽었을 때와 비교해보니 생각보다 화용론적 아이디어들이 많아서 읽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제가 들었던 몇 가지 의문을 덧붙이니 답변주셔도 좋고, 스터디 때 공유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2-1) 제가 이해하는 한, 도넬란의 논문에서 한정 기술구의 지시적 사용에 대한 적정조건 같은 것은 제시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도넬란의 예시들은 모두 그럴듯한 착오들의 예시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길을 가다가 아는 사람을 만나서, 동행하는 사람에게 "저 시계탑 아래에 빨간 옷 입은 사람, 내가 아는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상황을 생각해보죠. 이 때 실제로 그 시계탑 아래에 있는 사람은 제 지인이 맞지만 그 사람을 포함해 동행자와 제 시야 안에 있는 그 누구도 빨간 옷을 입고 있지 않다고 한다면, "시계탑 아래에 빨간 옷 입은 사람"이라는 한정 기술구 표현은 지시적으로 적절히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상식적으로는 제가 이상한 말을 하는 사람인 것이겠죠. (혹은 자비의 원리를 적용해주어서 제가 적록색맹이거나 하는 방식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이 반례로 한정 기술구의 지시적 사용이 속성적 사용과 아주 무관한 것일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또 이 반례가 도넬란의 주장에 대한 반례가 될 수 있는지도 고민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ㅎㅎ
+수정) 도넬란의 주장에 대한 적확한 반례라기보단 한정 기술구의 지시적 사용과 속성적 사용 사이에 모호한 측면이 있다는 지적 정도로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2-2) 분석철학회에서 흥미로운 논의가 있었는데요, 한국어에서 "우리 마누라"라는 표현이 "우리"라는 (일반적으로) 1인칭 복수 표현을 사용함에도 화자 자신의 부인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는 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관해 도넬란의 논의가 도입된 바 있습니다.
정대현, (2009), "'우리 마누라'의 문법", 철학적 분석 20, pp.69-83
강진호, (2010), "'우리 마누라'의 의미", 철학적 분석 21, pp.153-164
최성호, (2016), "'우리 마누라'와 험티덤티 문제", 철학적 분석 36, pp.143-167
저는 한국어와 관련된 언어철학적 논의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흥미롭게 읽었는데 (물론 다 이해하진 못했습니다만) 관심 있으신 분들은 이런 논의도 한 번 보시면 좋을 것 같네요!

4개의 좋아요

[...] 한국어에서 "우리 마누라"라는 표현이 "우리"라는 (일반적으로) 1인칭 복수 표현을 사용함에도 화자 자신의 부인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는 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이에 덧붙여 대명사의 비원형적인 사용이 화용적효과를 일으킨다는 연구도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우리 마누라' 와 같이 대명사를 비원형적인 (non-prototypical) 방식으로 사용하는 현상에 대해 현 화용론에서는 Horn (1984,1989)의 R-principle (cf. Levinson’s (2000) M-principle)에 의거하여 설명하곤 합니다. R-principle (i.e. Say no more than you must (given Q).)이란 언어표현을 본래 내포한 무표적인 의미와 다르게 비정형적으로 사용하여 별도의 효과를 거두는 것을 뜻합니다.

  • Horn, Lawrence. 1984. Towards a new taxonomy for pragmatic inference: Q-based and R-based implicature. In Schiffrin, Deborah (ed.), Meaning, form, and use in context: Linguistic applications (Georgetown University Round Table on Languages and Linguistics 1984), 11–42. Washington, D.C.: Georgetown University Press.

  • Horn, Lawrence. 1989. A natural history of negation.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 Levinson, Stephan. 2000. Presumptive meanings: The theory of generalized conversational implicature. Cambridge: The MIT Press.

아래 제시한 학술지 논문은 한국어의 대명사 '나' 와 '우리'에 대해 corpus 연구를 한 최근 문헌으로 이전 선행연구도 짧게 포함하고 있습니다.

Hye-Kyung Lee (2020) The use of the Korean first person possessive pronoun nay vis-à-vis wuli. Language and Linguistics. 21(1) , 33 - 53.

한국어 뿐 아니라 대명사를 비원형적으로 사용하는 현상을 보다 폭넓게 통시적, 공시적 관점에서 연구한 문헌은 다음을 참고하시면 좋습니다.

Helmbrecht, J. (2015). A typology of non-prototypical uses of personal pronouns: Synchrony and diachrony. Journal of pragmatics , 88 , 176-189.

저자는 독일어 예시를 많이 들고 있으며 그 외에 Canadian French, Old Tamil을 포함하여 여러 언어에서 대명사가 가진 본 인칭(person)과 수(number)자질 (feature)과 다르게 사용하는 경우 (e.g. 1인칭 복수 대명사를 2인칭 단수를 지시할 때 사용함)를 요약 및 정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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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용론 연구자료라니 너무 반갑네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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