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k.a. 스미스 <자크 데리다> 서론

제임스 K.A. 스미스의 <자크 데리다> 요약입니다. 서강 올빼미에서 항상 많은 배움을 얻고 있는데, 언제부턴가 요약글이 잘 안올라오는거 같네요. 언젠가 여기서 이 책을 데리다에 대한 좋은 입문서라고 접했던 적이 있어서, 작게나마 도움이 되고자 미약한 요약글 올려봅니다.

<서론>

  1. 해체를 탈신화화하기

데리다는 그를 추종하는 세력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모호하고 어려운 사상가라고 여겨진다. 다른 한편으로는 비평가들에게 대학, 도덕성, 이성들을 위협하는 위험한 사상가로 여겨진다. 데리다를 둘러싼 두 개의 신화에 의해, 해체는 그 모호함으로 인해 합리적 담론을 약화시키기는 악마가 되기도하며, 해석은 모든 기준으로부터 자유롭다는 해석학적 허무주의를 야기하는 악마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데리다의 대중적, 학문적 전유는 잘못됐다.
해체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이 해체가 아닌가를 밝힘으로써 해체를 둘러싼 신화들을 불식시킬 수 있다.

  1. 해체는 어떤 방법이 아니다: 해체는 어떤 단일한 방법론이나 규칙으로 환원될 수 없다. 해체는 텍스트 해석의 결론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외부적인 규칙을 텍스트에 적용한 결과도 아니다. 해체는 텍스트 내부에서 발생한다.

  2. 해체는 단순히 어떤 부정적인 파괴가 아니다: 해체는 분해와 재구축이라는 이중적 운동이다. 해체는 더 정의로운 제도를 위해 기존의 제도의 틀을 부숨으로써 그것을 재구성한다.

  3. 해체는 어떤 만능의 이름이 아니다: ‘해체’라는 용어는 그것의 맥락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 해체는 오직 가능한 대체어들과 그것이 쓰이는 맥락 안에서만 그 가치를 얻기 때문이다. “쓰기écriture”, “차이différance”, “대리보충supplement”, “파르마콘pharmakon”과 같은 용어들의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4. 해체는 허무주의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해체는 어떠한 진리와도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해체는 무 안에 있는 울타리가 아니라, 타자를 향한 개방성이다.” 해체는 또한 상대주의도 아니다.

  5. 해체는 반-철학이 아니다: 해체는 철학의 관행과 제도에 의문을 품기는 하지만, 철학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는다. 해체는 제도를 파괴하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제도적 방식에 동의할 때, 우리가 실제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인식하게 하는 물음이다.

이렇듯 해체는 급진적인 비판의 방식이지만, 동시에 긍정적인 동기를 가진다. 해체는 어떤 것을 비판함으로써, 도래할 타자성의 부름을 받는다. 타자성에 대한 긍정적 동기를 위한 비판이라는 점에서, 해체는 근본적으로 정치적이다. 즉 해체는 무정치적이고 무책임한 작업이 아니라, 그 자체로 정치적이고 실천적인 작업이다. 데리다는 모든 철학적 활동이 곧 정치적 실천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데리다의 사유가 타자성에 대한 정의, 정치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1. 해체와 타자

해체가 타자의 부름에 대한 긍적적 응답이라는 점은 현상학에 대한 데리다의 초기 연구에서도 발견된다. 예를 들어 데리다는 언어의 ‘참조사항reference’를 타자성의 관점에서 서술한다. 해체는 항상 언어의 타자와 깊은 관계가 있다. 언어와 언어의 타자와의 관계를 설정하려는 것이 바로 타자성에 관한 해체의 관심이다.

한편으로 데리다는 레비나스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데리다는 레비나스를 “현상학에 ‘타자’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철학자”라고 언급한다. 데리다 자신이 유대계였으므로, 그의 타자성에 대한 관심은 스스로가 타자가 되는, 배제의 대상이 되는 경험에서 비롯된다. 데리다의 기획은 근본적으로 타자에 대한 의무에 응답하려는 시도다. 그래서 해체는 단순히 부정적인 파괴의 방법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타자를 위한 자리를 만드는 시도이며, 일종의 환대인 긍정적 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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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스가 앞부분에서 해체를 매우 깔끔하게 잘 소개하죠?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스미스의 이 설명에 대해서는 저 책을 처음 읽었을 때부터 다소 양가적인 생각이 들었습니다. 해체가 분명히 특정한 공리를 일괄적용하여 수행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해체가 아예 아무런 '방법'도 아니라는 것은 좀 과하다고 느껴서요.

간단하게 말하자면, 해체는 텍스트 내부에서 자기모순적 균열을 발견해내고자 하는 일종의 '방법'이 맞기는 하다고 저는 이해합니다. 특별히, 그 자기모순적 균열이, 단순히 사소하고 지엽적인 지점에서 발생하는 우발적인 균열이 아니라, 그 텍스트를 성립시키는 가장 근본적인 논제들 사이의 균열일 때, 그 텍스트는 자기 자신을 '구성하는(construct)' 바로 그 논제들로 인해 자기 자신을 '파괴할(destruct)' 수밖에 없는 기묘한 상황에 빠지는데, 바로 이렇게 텍스트를 구성하면서 파괴하는 지점을 발견해내는 방법이 '해체' 혹은 '탈구축'(deconstruction)이죠.

다만, 데리다는 '모든' 텍스트 내부에서 언제나 이런 자기모순적 균열을 찾을 수 있다고 장담하지는 않습니다. 또 '어떻게' 그 균열을 찾아야 하는지에 대한 일반화할 수 있는 이론이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강조합니다. 그런 점에서 특정한 텍스트에 대한 해체가 과연 이루어질 수 있는지 없는지, 그리고 해체가 이루어져야 한다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는, 매 텍스트마다 새롭게 고민되어야 하는 사안일 수밖에 없죠.

그래서 저는 해체가 '방법'이라고 할 수 있는 측면과 '방법'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측면을 둘 다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a) 해체가 그냥 겉멋만 있는 수식어가 아니라 텍스트 내부로부터 명확한 균열 지점을 찾아내고자 하는 뚜렷하고 특징적인 시도라는 점에서는 해체를 '방법'이라고 할 수 있지만, (b) 해체가 모든 텍스트에 대해 일반화할 수 있는 이론 같은 게 아니라는 점에서는 해체를 '방법'이라고 하기는 어렵다고, 두 측면을 모두 강조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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