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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는 후설이 말과 (글)쓰기 사이의 비의존성을 유지하기 원한다는 점에서 그의 철학에 잔존하는 플라톤주의를 비판한다. 후설은 언어에 대한 이념의 의존성과 비의존성을 동시에 주장하고 있다. “이념적 형성물들은 언어의 사실성과 그것들의 특정한 언어적 육화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언어 자체에만 뿌리를 내리고 있다”(IHOG, 66). 또한 후설은 모든 물질적 연결이 제거된 순수한 이념인 “자유로운 이념”(예컨대 논리수학적 체계들)과 어떤 물질적인 것과 연결되어있는 “속박된 이념”(예컨대 문학적 대상들)을 구분한다. 그러나 데리다는 이러한 구분을 약하게 만들면서, 후설 자신의 주장이 실은 모든 이념들을 “속박된 이념”들로 만드는 방식이라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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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설은 이념들의 순수한 객관성에 이르기 위해, 언어와의 의존성과 비의존성 모두에 기댄다. 기하학적 진리는 개인의 특수한 심리적 삶 안에 갇히지 않고 전시간성(omnitemproality), 즉 객관성을 획득한다. 그러나 이는 바로 언어화를 통해서다. 우리는 여기서 해체의 한 사례를 볼 수 있다. 즉 철학이 배제하고자 하는 것이, 철학이 목표하는 것의 가능조건으로 작동하고 있다. 데리다의 분석에서 철학의 타자(구체화, 물질성, 언어)는 철학의 가능조건으로 기능한다. 후설의 현상학에 대한 데리다의 분석은 언제나 이러한 타자성에 대한 관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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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 연구>에 담겨있는 후설의 기호론에 대한 상세한 비판은 <목소리와 현상>에서 나타난다. 우선 후설의 기호론을 먼저 살펴본다. 후설에 따르면 기호는 표현과 지시로 구분된다. 표현은 어떤 것을 뜻하거나 의미하는 한에서 의미를 가지는 반면, 지시는 단지 무언가를 가리키는 역할만을 한다. 그러나 이 둘은 배타적이지 않다. 기호는 지시적이면서, 표현적인 기능을 충족할 수도 있다. 또한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으면서도 의미를 가지는 기호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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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시는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것, 즉 나타내는 것이다. 예컨대 낙인은 노예에 대한 기호로 기능하거나, 국기는 국가에 대한 기호로 기능한다. 지시 대상과 기호의 부착 관계는 우연적이고 임의적이다. 그러나 어떤 부착 관계는 더 자연스럽다. 예컨대 우리는 화석이 된 뼈는 태고시대에 동물이 현존함에 대한 기호라고 말할 수 있다. 지시는 특정한 결여를 기반으로 작동한다. 지시 대상과 지시적인 기호의 관계는 지시 대상이 부재할 때 작동한다. 지시는 나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지시 대상)을 내가 고려하도록 만든다. 오직 그것이 부재할 때에만. 따라서 지시의 본질은 바로 지시 대상의 부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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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의미한 기호인 표현은 지시적인 기호와 구별된다. 어떠한 기호가 의사소통의 의도를 가진다면, 그것은 유의미한 표현이다. 그런 점에서 얼굴의 표정 같은 경우, 다른 이에게 특정한 생각을 전달할 의도가 없다는 점에서, 즉 의사소통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표현이 아니다. 그래서 후설은 목소리에 초점을 맞춘다. 목소리에 주어진 기호는 청자에게 어떤 것을 전달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목소리에 주어진 표현은 발화자의 의식 속에서 나타나는 경험과 현상학적으로 일치한다. 즉 의도적이다. 그래서 표현은 “의미가 담긴 말소리”로 설명된다. 이렇듯 후설은 표현의 장소로서 말에 특권을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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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모든 목소리가 의사소통적인 것은 아니다. 사실 목소리가 의사소통적이라는 것은, 목소리가 필연적으로 지시와 관련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화자와 청자 사이에는 일종의 본질적 부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목소리에 주어진 표현은 화자의 ‘생각’에 대한 기호로 작동한다. 청자에게 주어지는 말-기호는 청자에게 현전한다. 그러나 그 기호들은 결코 청자에게 현전할 수 없는 화자의 내면의 생각들을 지시한다. 즉 화자의 내면의 생각은 청자에게 부재할 수 밖에 없으므로, 말-기호는 지시적이다. 목소리에는 표현과 지시가 뒤섞여있다. 그러나 후설은 지시와 뒤섞여있지 않은 순수한 표현이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를 “고독한 정신의 삶”에서 의식의 내적 독백에서 알게 된다. 고독한 정신의 삶에서 우리는 내적 경험들을 지시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내적 경험들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현전하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의식의 주인이므로, 우리의 의식에는 결핍이나 부재가 없다. 그러므로 내적인 의식에서 지시는 불필요하다. 바로 이 내적 독백이 순수한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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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가 타자의 부름에 대한 응답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후설 기호학에 대한 데리다의 비판은 윤리적이다. 그는 후설 기호학의 비판을 통해 환원 불가능한 비현전의 구성적 가치를 인식하게 한다. 스스로 현전하는 자아는 어떤 비현전에, 부재에, 다른 말로 하면 타자에 방해 받으며, 사로잡힌다. 더 나아가 근본적으로 현전하는 자아는 비현전에 의해 구성된다. 데리다는 이러한 물음의 지평에서 후설의 기호학을 비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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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에 따르면 후설의 기호론은 “현전의 형이상학”을 상징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레비나스의 사례를 고려해보자. 레비나스에게 철학은 동일자에, 인식하는 주체에 특권을 부여한다. 현상은 잘 알려지기 위해서는 인식 주체에 굴복해야 한다. 따라서 알려진 것은 타자성을 상실하고 동일자의 영역에서 나타나기 위해 자신의 다름을 제거해야 한다. 동일자의 범주에 속하지 않거나 속하기를 거부하는 것들은 부재하는 것이다. 부재하는 것은 이성적 앎 또는 현상학적 앎의 범주에서 벗어난다. 이렇듯 ‘현전의 형이상학’은 낯선 것, 즉 타자에 대한 혐오를 명명하기 위한 약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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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설은 지시를 부재와 연결시킨다. 지시는 지시하는 대상이 부재할 때 우리가 가지는 일종의 암시다. 지시와 부재의 연결 때문에, 후설은 지시가 의미를 결여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의미는 현전과 연결된다. 따라서 표현만이 의미를 가진다. 후설은 지시와 표현이 종종 뒤얽힌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지시라는 오염이 제거된 표현의 영역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내적인 정신적 삶의 독백에서 발견되는 순수한 자기-현전의 영역이 바로 그곳이다. 이렇게 후설은 부재를 거부하고 현전을 확보하기 위해 타자를 차단하며 사적인 내면성의 영역으로 후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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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는 <목소리와 현상>에서 지시와 표현의 뒤얽힘을 제거할 수 있다는 믿음에 의문을 제기한다. 데리다의 비판에 대한 첫 번째 층위는 표현과 말 사이의 본질적 연결에 대한 주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후설에 따르면 “의미하는 것은 말하고자 하는 것을 그가 말하는 한에서, 말하고 있는 그에 의해 결정된다”(SP,34). 그래서 모든 말은 표현으로 간주된다. 의미는 구술적 담론 바깥에서 발생하지 않으므로, 의미의 물질적 육화는 표현 그 자체의 본성과는 다르다. 즉 의미의 물질적 육화는 지시로 격하된다. 신체적인 몸짓이 실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는 후설의 설명처럼 말이다. 말은 실제로 발화되지 않아도 의미를 가진다. 오히려 발화되는 순간, 즉 말이 물질적으로 육화된 순간, 그것은 화자의 통제를 벗어난다. 그래서 후설은 표정과 몸짓을 배제한다. 그것은 신체와 연관되어 있으며, 가시적이고 공간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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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기서 신체와 영혼의 대립에 대한 플라톤주의의 메아리를 엿볼 수 있다. 가시성과 공간성은 자기-현전의 죽음과 같다. 신체적인 지시인 몸짓과 표정은 의미를 결여한다. 그래서 후설은 순수한 의미의 확보를 위해 고독한 정신의 삶의 내적인 장소로 도피한다. 고독한 정신의 삶에 도달하기 위해 타자는 괄호 쳐진다. 후설은 고독한 정신의 삶에서 기호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우리의 내적 경험들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현전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후설은 오직 지시만을 기호라고 간주했음이 드러난다. 지시적 기호와 표현적 기호의 구분에도 불구하고 순수한 의미의 영역에서 배제되는 기호는 지시뿐이기 때문이다. 즉 표현은 어떤 의미에서는 기호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표현은 말과 목소리에 연결되어 있다. 목소리는 직접적이고, 현전을 손상시키지 않는 매개적이지 않은 ‘매개’로 취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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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데리다가 비판하는 음성 중심주의, 또는 현전의 장소로서 말과 목소리의 특권화이다. 데리다의 기획은 모든 기표에 대한 목소리의 초월적 가치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목소리는 어떻게 직접적 현전의 특권을 부여받는가? 우선 첫 번째, 기표의 신체는 생산되는 순간 사라지고, 실은 그것이 이미 이념성의 요소에 속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소리의 물질성은 쓰기의 물질성보다 더 천상적이어서 비물질적이고 순수한 지식이라는 철학의 이념과 더 잘 어울리며, 들을 수 있는 말은 더 이상 감각 가능한 것으로 생각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이는 목소리의 근본적인 감각성을 무시하는 것이다. 두 번째, 소리는 구술 담론과 연관된 잘못 지각된 현전 때문에 이념성과 연관된다. 예를 들어 나는 데리다와 멀리 떨어져 그의 책을 볼 수 있지만, 그에게서 생생하게 말을 듣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말하는 주체는 내게 현존한다고 여겨진다. 그래서 말은 직접적 현전의 특권을 부여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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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설은 누구보다 타자가 나의 의식에 부재하기 때문에 현존하지 않고, 단지 간접 현존하는 방식을 강조한다. 그래서 데리다는 음성 중심주의의 이러한 순진한 관념에 의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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