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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는 언어에 관심을 가진다. 왜 그는 (글)쓰기écriture에 집착하는가? 이는 20세기 철학의 언어적 전회라고 불리는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로고스를 가지고 있는’ 존재인 인간을 ‘말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로 재구성했다. 언어적 전회는 서구 사상의 전통을 거스른다. 즉 언어란, 철학에 있어서 진리에 대한 순수한 접근을 방해하는 2차적인 성격을 가졌다고 폄하했던 오랜 전통 말이다. 기호(문자, 음소 등)들은 감각적 현상의 세계에 속한다. 공기와 귀, 문자가 없다면 언어도 없을 것이다.(또한 언어는 관계적 현상이라는 점에서 타자와 연관되어 있다) 서양 철학의 전통은 신체와 물질성, 언어를 평가절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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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에게 있어서 언어는 우리가 형이상학, 존재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 대한 더 넓은 물음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한편으로 서양 철학 전통이 (글)쓰기를 폄하했던 한에서, 데리다는 그들의 더 깊은 철학적 가정들을 ‘발견하는’ 장소로서 (글)쓰기에 관심을 갖는다. 해체의 작동 방식을 염두에 두면서, 데리다는 내부로부터 자신의 철학적 주장들에 도전하는 분열의 지점을 찾는 데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는 (글)쓰기의 재평가를 통해 다른 사유 방식을 개방하기 위한 기획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이고 생산적이다. 우선 데리다의 첫 저작인 후설의 <기하학의 기원> 번역 중 <서론>을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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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철학 전통에서 언어는 변화하는 물질적인 세계, 경험적인 세계와 연관되어왔다. 목소리, 손으로 그린 표시들은 물질적 세계에 속한 신체와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간의 영향을 받아 변화하는 물질적 세계에서는 철학적 지식의 토대를 세울 수 없다. 반면 비물질적이기에 영원불변한 ‘이데아’의 세계에 대한 나의 지식은 변화하지 않는다. 내가 어렸을 때 피타고라스의 정리의 이념(이데아)를 이해한다면, 그것은 지금 나에게 지식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래서 철학의 근본적인 운동은 지식을 이데아의 영역에 위치시킴으로써, 구체화의 변화로부터 보호한다. 이미 철학은 ‘관념주의적’이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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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설은 플라톤주의자는 아니지만, 이데아 또는 그가 ‘이념’이라고 부르는 것에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후설은 우리에게 굴절된 플라톤주의를 제공한다. <기하학의 기원>에서 후설은 이념들의 역사에 대한 연구에 착수한다. 여기서 “기하학”은 후설이 ‘이념들’이라고 부르는 것을 포함한다. 후설에 따르면 ‘이념적’이고 ‘보편적’인 어떤 것에는 ‘역사’가 있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이는 “기하학이 처음으로 역사에서 출현한-출현해야 했던 그 의미”와 관련한다.(IHOG,158) 이는 궁극적으로 전통에 대한 물음이고, 기하학은 여기서 이념들에 대한 일종의 사례연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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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하학에는 전통이 있다. 기하학이 진보와 발전을 겪을 때, 지식은 예측된 지평이 된다. 따라서 기하학의 발전은 예측과 그것의 실현이다. 그런데 “이 예측과 예측을 성공적으로 실현하는 과정은 결국 순수하게 고안자의 주관 안에서 발생하며, 따라서 의미는 오로지 그 전체 내용을 포함하여 현재의 기원자로서 그의 정신적 공간 안에 놓여있다”(IGOH,160). 예컨대 유클리드의 기하학은 유클리드의 주관성에서 시작한다. 후설은 그러나 ‘기하학적 실재’와 ‘심리적 존재’를 혼동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기하학적 현존은 본질적으로 ‘대상적’이다. “실제로, 그것은 그것의 최초 정립에서부터 독특하게 초시간적이고, 확신하건대, 모든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는 현존을 가지고 있다”(IHOG,160). 여기서 우리는 역설적인 사실과 마주한다. 즉 기하학은 역사를 가지면서도 초시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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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하학적 진리로서 이념들은 우리에게 완전하게 주어진다. 예를 들어 나는 책상 위에 놓인 컵의 한 면만을 볼 수 있지만, 피타고라스 정리의 진리는 나에게 완전하게 주어진다. 즉 객관적이다. 그러나 이는 반복될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다. 기하학적 현존은 초시간적이어서 오로지 한 번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플라톤적인 관계로써 영혼과 신체의 관계다. ‘이념적 대상’이라고 불리는 정신적 형태 자체는 감각적 발언과 달리 시공간적 개별화를 갖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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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설은 이념적 대상들은 언어에 의해서만 특정한 방식으로 세계에 객관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후설은 이념적 대상들은 언어의 구체화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 같으면서, 동시에 언어적 구체화가 이념적 대상들의 가능조건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 보인다. 여기에서 후설은 그가 추적하고자 하는 문제와 맞닥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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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기하학적 진리는 개인의 주관성 안에서 시작하여 객관성을 성취하는가? 후설은 기하학적 이념성은 언어를 통해 발생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언어의 구체화가 어떻게 기하학적 진리를 객관적으로 만드는가? 언어는 기하학적 통찰을 공유하기 위한 조건을 제공하는 공동체를 창조한다(IHOG,162). 그래서 기하학적 통찰은 언어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표현될 수 있고, 그것이 언어를 통해 상호주관적으로 소통될 수 있는 한, 그것은 객관적인 의미로 존재한다. 그러나 의식 안에서 구성된 형성물은 어떻게 상호주관성을 성취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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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기하학자는 언어를 통해 자신의 주관적 생산물을 공동체와 공유한다. 즉 기하학자에게 근원적으로 자명한 것은 언어를 통해 타인과 의사소통됨으로써 객관성을 획득한다. 그러나 첫 번째 기하학자와 그의 공동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도, 어떻게 기하학은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는가? 바로 (글)쓰기를 통해서다. (글)쓰기는 언어적 표현을 기록함으로써 직접적이거나 매개적인 개인적 응대 없이 의사소통을 가능케한다. 그래서 이념적 대상은 (글)쓰기에서 ‘침전’된다. 그러나 이 침전은 독자의 의해 제거될 수 있다. 독자는 능동적 이해를 통해 이념적 대상의 자명성을 재활성화할 수 있다. (후설의 용어로는 “사태 그 자체”로 돌아갈 수 있다.) 이렇게 (글)쓰기를 통해 이념적 대상들은 시간의 영향을 받지 않고 객관성을 유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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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 일반들에 대한 사례연구로써) 이러한 후설의 기하학의 고고학은, 플라톤주의에 입장에서는 이단처럼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후설은 (글)쓰기의 물질성이 기하학의 영원한 진리의 조건이라는 점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이는 (플라톤의 유비를 떠올렸을 때) 신체가 영혼의 조건이라는 제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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