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Justifying Democracy (Chambers 2024, ch.2)

무슨 생각으로 갑자기 번역을 했는지 모르겠는데 결과를 공유합니다. 역시나 번역은 참 어렵네요.


S. Chambers, 2024, Ch.2

현대 민주주의 이론 내에서 민주주의의 최선의 형태나 모델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보다 우리가 왜 민주주의를 가치 있게 여기는지에 대한 질문이 더 중요하게 다뤄지기 시작했다. 어떤 면에서 이는 훨씬 더 오래된 논의로의 회귀에 해당한다. 민주주의 이론의 역사는 민주주의 정당화의 역사이므로, 다른 대안들과 비교하여 민주주의의 우월성이나 열등성을 논하는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정당화의 맥락은 두 가지 중요한 측면에서 새롭다. 첫째, 우리는 오늘날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실제 세계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작동하고, 번성하며, 실패하는지에 대해 훨씬 더 많이 안다. 둘째,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가 확산되고 성장하던 시기가 지난 후, 민주주의는 곤경에 처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지만, 분명한 상승 궤도를 그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 궤도는 상승에서 하강으로 바뀐 듯하다. “왜 민주주의인가?”라는 규범적 이론의 질문은 민주주의에 대한 방대한 양의 경험적 연구와 이상으로서의 민주주의에 대한 전 지구적 열광에도 불구하고 나타나는 명백한 불안정성의 징후들을 무시할 수 없다.

현대의 논쟁들이 민주주의를 최선의 상태로 만들려는 시도를 포기한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의 핵심적인 매력을 규명하는 것은 개혁과 ‘어떻게 민주주의를 더 좋게 만들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초래할 것이다. 그러나 논쟁의 대부분은 특정 유형의 민주주의를 다른 유형과 대비하여 옹호하는 방식으로 짜여 있지 않다. 현저하게도 그 대비는 대개 왜 우리가 더 권위주의적이거나, 기술관료주의적이거나, 능력주의적이거나, 에피스토크라시적적이거나, 과두제적이거나, 시장 기반의 대안들보다 민주주의를 가치 있게 여겨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내가 서론에서 제안했듯이, 이는 21세기 민주주의의 회복력에 대한 깊은 우려와 관련이 있다. 철학자들이 민주주의를 완전히 폐기해야 한다고 제안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민주주의를 더 많이 하기보다는 덜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주장(Bell 2015; Brennan 2016; Jones 2020)이나 민주주의가 달성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자고 제안하는 것(Achen and Bartels 2016)은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민주주의의 미덕에 대한 학문적 의심과 회의에 더하여, 일반 시민들은 민주적 제도에 대한 신뢰를 잃고 있으며, 민주적 퇴행—민주주의의 건강함에 관한 전통적 척도를 이루는 제도와 규범을 약화시키고 훼손하는—을 조장하는 정당과 지도자들에게 기꺼이 투표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맥락은 왜 논의의 초점이 경쟁하는 민주주의 모델들에서 민주주의의 정당화로 이동했는지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 장과 다음 다섯 개의 장에서 나는 이 논쟁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는 다양한 주장들과 입장들, 그리고 민주주의의 가치에 관한 질문이 중요한 이유를 분석할 것이다. 이 예비적 장에서는 경쟁하는 주장들을 구분하는 지점들을 소개하고, 문헌 도처에서 등장하는 “내재적”, “절차적”, “결과 기반”, “도구적”이라는 용어에 대한 해설을 제공하며, 정당성과 관련하여 “가치”의 의미를 다룬다. 마지막으로는 민주주의의 가치 논쟁에서 무엇이 관건인지를 가늠할 것이다.

1절. A new vocabulary

민주주의의 좋은 점은 무엇인가? 왜 우리는 다른 통치 형태보다 민주주의를 가치 있게 여기거나 여겨야만 하는가? 이 논쟁은 두 가지 유형의 답변을 내놓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한 가지 유형의 답변은 민주주의의 가치가 절차에서 나오는 실질적인 결과보다는 절차 그 자체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민주주의가 무엇을 결정하는가보다 어떻게 결정을 내리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항상 최선의 정책을 산출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계몽 군주나 선의의 기술 관료가 대중보다 더 자주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도 있고, 여하간에 모두가 동의하는 척도로 삼을 수 있는, 좋은 결과가 무엇인지 따지기 위한 독립적 기준을 우리가 갖고 있기나 한가? 그러나 민주주의는 스스로를 자유롭고 평등하다고 여기거나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결정을 내리는 유일하게 공정한 방법이라고 주장된다. 이러한 유형의 이론은 민주주의 내재적 가치를 찾는다고 말해지거나 절차주의적이라고 묘사된다.

다른 편의 주장들은 민주적 절차를 도구적으로 또는 결과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여기서 민주주의의 가치는 그것이 다른 형태의 의사 결정 방식보다 평화, 번영, 안정, 또는 더 나은 정책, 법, 통치를 산출한다는 점에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도구적 및 결과 기반 관점은 잠재적으로 민주주의를 과대평가하는 것에 회의적인 이론을 낳는다. 어쩌면 민주주의가 항상 최선의 의사 결정 방식은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민주주의는 많은 잘못을 저지르고 나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엄격한 도구주의자는 이러한 경우에 민주주의에 대한 무조건적인 열광을 재고해야 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물론 내재적 이유와 도구적 이유를 통해 민주주의를 가치 있게 여기는 것도 가능하다. 그리고 많은 민주주의 이론가들이 그 범주에 속한다(Anderson 2009; Habermas 1996). 하지만 일부 철학자들이 이 관점들 중 오직 하나만이 옹호될 수 있다고 주장하여 이 논쟁에 흥미로운 전개가 발생했다. 이를테면 내재적 가치 옹호자들은 때때로 좋은 결과에 대한 객관적이거나 합의된 척도가 없다며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민주주의에서 논쟁하는 지점이다), 우리는 좋은 결과 접근법을 완전히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Christiano 2008; Waldron 1999). [반면] 엄격한 도구주의자들은 만약 의사 결정 절차가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묻는다(Arneson 2003; Wall 2007). 만일 민주주의가 우리의 삶을 더 낫게 만들고 시급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면, 그 어떤 양의 (어차피 확인하고 측정하기도 어려운) 내재적 가치도 그 사실을 메울 수는 없다.

민주주의의 정당화를 이렇게—내재적, 절차, 결과 그리고 도구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분석하는 것은 널리 퍼진 방식이다. 엘라나 질리오티(Elana Ziliotti)는 “Democracy’s Value: A Conceptual Map”라는 제목의 에세이 첫 두 페이지에서 이러한 어휘를 사용하는 50개가 넘는 현대 저작을 인용한다. 그리고 이 목록은 전체를 망라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녀는 “논쟁의 기본 용어들은 매우 분명치 않고, 이 용어들에 부여된 합의된 의미가 없다”라고 인정한다(Ziliotti 2020: 408). 한편으로, 이론가들마다 이 용어들을 다르게 사용해서 혼란이 벌어졌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용어들에 대한 분석적 정확성을 추구하려는 시도들은 논쟁을 실제 세계의 정치적 문제에서 벗어나 분석 철학의 형식적 문제라는 곁길로 새게 만드는 경향이 있었다. 나는 여기서 가능한 한 일상 언어의 의미에 충실하면서 중도를 지키고자 한다. 그럼에도 이어질 논의는 다소 추상적이지만, 나는 그 논의가 3장에서 7장까지 설명하고 분석할 구체적인 이론들에 깊이 파고들 때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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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절. Intrinsic Value

내재적 가치는 어떤 결과나 그것이 산출할지 모를 다른 좋음 (good) 때문에 좋은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좋은 것 또는 그 자체를 위해 좋은 것을 의미한다. 내재적 가치는 명백한 이유로 종종 비파생적 가치(non-derivative value)나 (Viehoff 2019), 내용 독립적 가치라고 불리는데, 이는 절차가 그 절차에 의해 산출된 실질적인 결과와 독립적으로 가치를 가진다는 의미다. 내재적 가치의 고전적인 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에 대한 논의에서 찾을 수 있다. 사람들은 행복이 부, 건강, 성공과 같은 다른 선들을 가져다준다는 이유로 행복이 가치 있다고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러한 다른 선들이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이유로 그것들을 원한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행복과 같은 의미에서 내재적 가치를 가진다고 생각하려면, 우리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해야 한다.

우리가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가 좋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것들을 행복처럼 그 자체로 좋다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까? 이는 타당하지 않아 보이는데, 왜냐하면 어떤 내재적 좋음을 침해하지 않고서도 한 지자체에서는 들개 포획인을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로 뽑고, 옆 지자체에서는 임명제로 선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재적 가치는 우리가 민주주의적 통치와 연관 짓는 투표나 선거의 기술적인 절차 이상의 것을 포함해야만 한다. 내재적 가치의 옹호자 대부분은 내재적 가치를 정의, 평등, 또는 자유와 같은 다른 가치와 연결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우리가 민주주의와 평등이 같은 것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민주주의를 그 자체로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평등을 위해 가치 있게 여기는 것처럼 보인다. 더군다나, 만약 어떤 것이 그 자체로 좋다면, 이것이 모든 상황에서 좋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일부 고전 철학자들은 분명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가 민주주의라는 용어로 무엇을 나타낼지 정하기도 전에 민주주의가 모든 상황에서 좋다고 여기는 것은 타당하지 않아 보인다. 민주적 절차나 가치가 바람직하지 않거나, 적절하지 않거나, “좋지” 않은 상황과 환경은 (가족의 위기나 배우자를 선택하는 상황) 분명히 있다.

이러한 종류의 난제는 “가치”나 “내재적”과 같은 용어가 진정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추상적이고 전문적인 논의로 이어졌다(Korsgaard 1996; Ziliotti 2020). 내가 보기에는 그래서 우리(21세기를 살아가는 실제 사람들)는 왜 민주주의를 가치 있게 여겨야 하는가에 관한 질문으로 집중할 수 없게 됐다. [그러나] 우리는 절차—예를 들어, 사람을 공정하게 대하거나 동등하게 존중하는 절차—가 그 절차의 결과와 독립적으로 가치를 가질 수 있다는 핵심적인 직관을 얻기 위해 “내재적”이라는 용어에 대한 전문적으로 빈틈이 없는 관념을 가질 필요는 없다. 우리는 요리에서부터 체스 게임에 이르기까지 아주 자주 결과와 독립적으로 과정과 절차가 가치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경우, 그것은 보통 쾌와 결과에 기반하기보다는 그 실천에 내재하는 도덕적 혹은 윤리적 좋음에 기반한다. 누군가는 사람들을 평등하게 대우하는 것이 좋다고 주장할 수 있다; “1인 1표”는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동등하게 대우하기에, 그것은 우리가 어떤 합리적인 법안에 투표하는지와 관계없이 가치를 지닌다. 따라서 나는 “내재적 가치”라는 용어를 결과보다는 절차 자체에 내재하는 가치 (예를 들어, 그 절차가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대우한다는 점) 를 의미한다는 식으로 느슨하게 사용할 것이다. “내재적 가치”에 대한 철학적 논쟁을 염두에 두면 민주주의의 가치에 관한 논쟁에서 주요한 차이점을 내재적 대 도구적이 아닌 절차 대 결과로 다시 설정하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절차”와 “결과”라는 용어 또한 그것들 나름의 난제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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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절. 절차와 절차주의

절차 기반 이론은 자주 결과 기반 이론과 대조된다. 다만 여기서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순수하게 결과에 기반해 민주주의의 가치를 평가하는 입장은 거의 없으며, 그들 중 다수는 신뢰를 잃었다. 순수 결과 기반 관점은 민주적 가치가 그 결과가 나오게 만든 방식과 무관하게 완전히 일련의 결과에 따라 결정된다고 본다. 그래서 우리는 예컨대 여러 권위주의 체제가 심지어는 전체주의 체제가 민주적 절차에 따랐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국가 정책이 모든 시민의 민주적 평등을 구현하고 그들의 진정한 이익에 부응했다는 이유에서 민주 공화국의 탈을 쓰는 경우를 보게 된다. 예를 들어, 2021년 12월에 중국은 지방 차원 이상의 민주적 의사 결정 과정을 가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China: Democracy that Works”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자신이 민주주의라고 주장했다. (Bradsher and Myers 2021).

현대 민주주의 이론 내에서 소수의 인원만이 민주주의가 통치 절차와 관계없이 전적으로 문화적, 사회적, 그리고 경제적 제도 배열의 집합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우리 모두는 민주주의가 최소한 의사 결정이나 사회·경제적 제도 배열을 선택하기 위한 절차의 집합을 포함한다고 이해한다는 점에서 절차주의자이다. 누군가는 이러한 집단적 의사 결정 방식은 민주적 삶의 방식의 필수 조건이거나 일부라고 덧붙이고 싶을 수도 있다(Anderson 2009; Dewey 1954). 하지만 소수만이 민주적 통치 절차 없이 우리가 민주적인 에토스, 삶의 방식, 혹은 사회적 제도 배열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결국 절차와 결과에 관한 논쟁은 실제로는 왜 우리가 이러한 방식의 의사 결정 방식을 가치 있게 여겨야 하는가 (또는 의심해야만 하는가), 즉 왜 우리는 (절차가 어떻게 정의되든 간에) 민주적 절차를 가치 있다고 여겨야만 하는가에 관한 논쟁이다. 우리는 위에서 봤듯이 절차의 고유한 혹은 내재적 성질로 인해 그것을 가치 있다고 여길 수도 있고, 또는 절차가 올바른 종류의 결과를 산출한다는 이유로 가치 있게 여길 수도 있다. 그런데 올바른 종류의 결과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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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절. 결과 기반 관점

민주적 결정에서 나쁜 결과가 나올 가능성은 절차 대 결과 논쟁에 복잡성을 더한다. 이제 문제는 “결과를 평가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기준을 사용해야 하는가?”가 된다. 우리는 절차 자체를 따라야 하는가, 아니면 절차와 독립적인 실질적인 기준을 도입해야 하는가? 이 물음에 대해 순수 절차주의자는 절차의 결과가 무엇이든 우리는 그것을 따르거나 그것에 구속되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순수 절차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결과를 평가할 독립적인 기준은 없으므로 옳은 혹은 올바른 결과는 오직 절차에 적절하게 따랐느냐에 따라 결정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동전 던지기가 어떤 결정을 내리는 가장 공정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면, 동전 던지기의 결과가 무엇이든 그것이 바로 올바른 결과이고, 그것은 속임수나 간섭 없이 없었다는 의미에서 절차가 적절히 준수됐다는 한에서만 올바르다. 민주주의 이론에서 이는 민주적 절차 (예를 들어,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 를 따르는 것이 결과의 올바름을 평가하는 우리가 가진 유일한 기준이라는 관점으로 해석된다. 이는 돌이켜보면 명백히 재앙적으로 보이는 결과의 사례를 우리가 생각할 수 있다는 점에서 반직관적인 것 같다. 하지만 순수 절차주의자는 우리 모두가 비록 그러한 결정을 내리지만, 좋고 나쁜 결과를 확인하기 위한 공유되거나 합의된 기준의 집합을 우리가 갖고 있지 않다고, 바로 그래서 우리가 투표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순수 절차주의자들에게 있어서 민주주의란 깊은 의견 불일치를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문제가 되는 사안을 결정하기 위한 절차이다. 우리는 이 관점을 3장에서 좀 더 자세히 살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전문 용어에서 오는 혼동 하나를 지적하려 한다. 순수 절차주의가 반드시 민주주의의 가치에 관한 절차 기반 이론이나 일부가 단순히 절차주의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니다. 순수 절차주의는 정당하거나 좋은 결과를 결정하는 근거에 관한 것이다. 절차주의는 민주주의의 더 일반적인 가치를 어디에 둘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매우 혼란스럽게 들리는데, 예를 하나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민주적 절차가 시민들의 평등을 존중하기에 가치가 있다고 믿을 수 있지만, 동시에 민주적 절차가 때때로 (또는 아마도 자주) 절차 독립적인 기준—말하자면 정의—에 따라 나쁜 결정을 낳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 또는 적절히 운영된 국민투표가 다수가 소수의 권리를 제한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으며, 나는 이것이 용납할 수 없는 결과라고 믿는다. 이러한 결정들은 민주적이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나는 헌법적 권리와 사법 심사의 형태로 결과에 대한 실질적인 제한이 필요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민주적으로 제정된 법이 부당하다는 이유로 법원이 그것을 무효화하는 것을 지지할 것이다. 이 사례에서 나는 민주주의의 가치에 대한 절차 기반 이론 (가치는 절차에 내재한다) 을 취하고 있지만, 순수 절차주의자는 아니다 (왜냐하면 단지 절차를 따르는 것이 올바른 결과를 낳았다고 여기기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순수 절차주의는 민주적 결과의 정당성과 수용 가능성을 평가하기 위한 어떠한 절차 독립적인 기준도 거부하기에 절차주의에 꽤나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지금으로서는 순수 절차주의가 민주주의에 대한 절차 기반 이론과 같지 않다는 점을 명심하는 것만이 중요하다; 전자는 결과 평가에 관한 것이고, 후자는 민주주의 전체를 평가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1-4절. 도구적 가치

도구적 가치는 누군가가 민주주의를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그것이 어떤 다른 좋음을 산출하기에 가치 있게 여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종종 그 다른 좋음은 법과 정책으로 이해되는 절차의 좋은 결과로 이해된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따라서 민주주의에 대한 결과 기반 관점은 더 큰 범주인 도구적 가치의 하위 집합이다. 여기 예시가 있다. 일부 현실주의자들은 민주주의가 갈등과 폭력을 줄이고 해소하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Przeworski 1999). 이 현실주의자들은 도구적 이유로 민주주의를 가치 있게 여긴다. 만일 불확실성, 갈등, 폭력을 해소하고 줄이는 데 똑같이 잘하거나 더 잘하는 다른 집단적 의사 결정 절차가 있다면, 우리는 그 의사 결정 형태를—어쩌면 민주주의보다 더—가치 있게 여기거나 여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어떠한 실질적이거나 객관적인 기준에 따라 더 나은 결과 (법과 정책) 를 산출한다는 이유로 민주주의를 가치 있게 여겨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현실주의자들을 인식론적 민주주의의 옹호자들과 대조할 수 있다. “인식론적 [민주주의]”은 지난 25년간 민주주의에 대한 담론에서 중심적인 용어가 된 또 다른 단어다. 인식적이란 앎과 관련된 것을 의미하지만, 민주주의 이론 내에서는 민주적 절차에 따른 결과의 성격과 관련되어 있다. 인식론으로부터 성격을 이끌어내는 한 가지 방법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통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집단적 문제에 관한 올바른 답을 산출할 수 있는가?” 인식론적 민주주의자들은 이 질문에 예라고 답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민주주의가 다른 유형의 집단적 의사 결정 절차보다 인식적으로 더 건전한 (더 참된 혹은 더 올바른) 법률과 정책을 산출한다는 이유로 민주주의를 가치 있게 여긴다(Goodin and Spiekermann 2018). 인식론적 민주주의자들은 도구적인 동시에 결과 기반 [입장인 셈]이다. 그렇다면 차이점은 민주적 절차의 좋은 결과가 성과에 관한 주장과 결부되어 있다고 여기는지 아니면 갈등과 폭력을 해소하고 완화한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고 여기는지에 있다. 나는 4, 5, 그리고 6장에서 이 모두를 좀 더 자세히 다룰 것이다.

이러한 구분들은 예시를 동반한 좀 더 구체화 된 논변을 들여다볼 때 더 명확해질 것이다. 이어지는 다섯 개의 장에서 나는 두 가지 범주의 내재적/절차적 가치 논변과 세 가지 범주의 도구적 논변을 살필 것이다. 그러나 그에 앞서 “민주주의의 가치” 논쟁에 대해 몇 마디 말할 것이 있다.

더 말할 게 있다는데 오늘은 더 이상 힘들어서 못 옮기겠네요. :sweat_smile:

흥미롭군요. 현 시점에서 민주주의를 분석하면 다양한 관점이 나오겠지만 사상의 진보관점에서 혹은 자회의 창발관점에서 보면 간단한 문제일 수도 있지요.
만인대 만인의 투쟁을 방지하기 위해 국가를 만들었다.
이 원칙에 의하면 개인의 자기 자유를 일부 포기하고 이를 국가에 위임합니다.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위임해야하므로 민주 절차가 필요하지요. 그리고 사회창발을 통해 얻는 가치는 타인과의 평화이지요. 사회창발 원리를 위배하는 정치가 왕권 신권 독재 공산당 정치이죠.
민주주의가 위협을 받지만 사회창발 과정을 위협하는 정치형태는 세상의 존재론까지 침범하지요.

2절. 가치 대 정당성

정당성은 민주주의를 이론화하는데 흔히 쓰이는 개념적 렌즈다. 정당성과 가치가 같지는 않으나, 민주주의 이론에서 둘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정당성에 관한 물음은 대개 강제—무엇이 시민과 주체들에 대한 강제적 힘[권력]의 행사를 정당화하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모든 정치적 통치는 집단적 행위를 조율하는 일환으로 힘의 사용을 포함한다. 법, 심지어 우리가 동의하기에 준수하려고 하는 법조차도 그것이 가진 제재로 인해 원칙적으로는 강제적이다. 법은 제안이 아니라 요구 조건이다. 현대 민주주의상의 모든 정치적 통치를 포함하여 거의 모든 정치적 통치는 타인보다 더 많은 통치 (법을 재정하고 집행할) 권력을 가진 일부 사람을 포함한다. 전근대적이든 현대적이든 모든 정치적 통치는 왜 다른 사람이 아니라 이 사람이, 다른 집단이 아니라 이 집단이, 혹은 다른 통치 체제가 아닌 이 통치 체제가 강제하고 복종을 요구할 권리를 가지는지에 관한 설명을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한다. 정당화를 제공하려는 시도 없이 신체적 폭력에 의존하는 임의적인 권력은 언제나 가능하지만, 거의 안정되지 못하며 대개는 정치적 통치로서 인정받지 못한다. 물론 몇몇 정당화는 신체적 폭력에 의존하는 임의적인 권력을 위장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정당한(적법한; legitimate) 통치는 정당화된(justified) 통치 권력이거나 일부 집단에 의해 정당화된 통치이다. 정당화는 기술적인 용어로 혹은 규범적인 용어로 이해될 수 있다. 기술적으로 보자면, 우리는 실제 체제가 이용하는 실질적인 정당화에 관심이 있을 수 있다. 경험적 사회 과학은 때때로 정당성을 순수하게 기술적인 방식으로 접근하고서 “얼마나 많은 사우디아라비아인들이 자신의 체제를 정당하다고 생각하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을 던진다. 그들은 자신의 체제를 정당하다고 여길 좋은 이유를 가져야 하는지 혹은 갖고 있는지에 관한 규범적 판단을 덧붙이지 않고서 말이다. 20세기 초 정당성 개념을 처음 논의한 독일의 사회 이론가 막스 베버는 이러한 경험적 혹은 기술적 초점을 비판적으로 지시하기 위해 정당성에 인용 부호를 붙이며 “소위 정당성”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별로 놀랍지 않게 규범적 민주주의 이론은 보통 규범적 관점을 취한다. 규범 이론가들은 권력과 강제에 대한 좋은, 설득력 있는, 도덕적인 정당화란 무엇인지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 또 놀랍지 않게도,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개 민주주의가 그 대답으로 제시된다. 오직 민주적 통치만이 정당하다는 것이다(Peter 2009). 무엇이 체제를 정당하게 만드냐는 물음은 물론 과거와 현재의 어떤 체제에 대해서도 제기할 수 있는 물음이지만, 규범적 민주주의 이론가들은 현대에서야 그러한 물음이 어렵고 흥미로운 물음이 됐다고 생각하곤 한다. 현대에서 그러한 물음은 단순히 무엇이 이 사람 혹은 저 집단의 강제력 소유를 정당화하는가에 관한 물음이 아니다. 그러한 물음은 무엇이 이 사람 혹은 저 집단이 그들과 평등한 개인들에 대한 강제력을 가지는 것을 정당화하느냐는 물음이다. 현대적 전제—각 개인은 천성적으로 타인의 권위에 종속되지 않으며, 근본적인 전-정치적인 의미에서 자기 자신의 주인이다—에서 출발하는 것은 타인에 대한 강제력과 권력을 정당화하는 작업을 훨씬 더 어렵고 힘든 작업으로 만든다. 이 시점에서 많은 사람들은 오직 민주주의만이 스스로를 자유롭고 평등하다고 여기거나 실제로 그러한 사람들 사이의 강제력 행사를 정당화하는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일부 이론가들은 민주주의를 그것이 정당하다는 이유로 가치 있다고 여기며, 민주주의의 정당성 주장을 정당화하는 다양한 이유를 제시한다. 예를 들어, 오직 민주주의만이 모든 시민들로 하여금 그들을 강제하는 법률을 만드는 데 발언권을 가질 수 있게 한다며 정당화한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는 가치와 정당성이 한데 모이는 것을 보게 된다. 정당성에 관한 많은 논의는 분명히 문헌상으로 무엇이 민주주의를 좋은 것으로 그리고 지킬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가에 관한 논의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이 책처럼 “왜 우리는 민주주의를 가치 있게 여기거나 선호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어떤 측면이 그것을 정당한 것으로 만드냐고 묻는 것보다 더 넓은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오직 민주주의만이 정당하다고 생각하지 않고서도 민주주의를 선호할 수도 있다. 게다가 민주주의는 통치할 권리와 복종할 의무에 관한 문제에 집중하며 종종 민주주의의 가치를 자유주의적인 도덕적 언어로 표현한다. 따라서 나는 민주주의에 대한 정당화를 처음부터 정당성의 측면에서 다루지 않고 가치의 측면에서 다룰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론이나 철학자가 민주주의의 가치를 정당성의 관점에서 이해할 때 이를 언급하고 논의할 것이다.

가치에 관한 언어와 정당성에 관한 언어가 갈라질 수 있는 또 다른 방식이 있다. 칸트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왜 내가 민주주의를 가치 있게 여기는가?”라는 질문은 “왜 내가 도덕적으로 옳은 일을 행하는 것을 가치 있게 여기는가?”라는 질문과 마찬가지로 허위적인 질문일 수 있다. 칸트주의자들에게 있어 옳은 일을 하는 것은 무엇을 선호하고 무엇을 개인적으로 가치 있다고 여기는지와 무관하다.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돕거나 타인을 진솔하게 대하는 것은 단지 도덕성이 우리에게 명령하기 때문이며, 우리가 그 행위를 좋아하는지, 가치 있게 여기는지, 선호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칸트주의자들이 보기에 민주주의는 자유로우며 평등하며 법률의 공동 저자로써의 지위를 서로 존중해야 할 도덕적 의무를 체현한다(Rostbøll 2020). 내가 나의 의지를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은 잘못됐으며, 이상의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우리가 서로가 서로에게 빚지고 있다. 칸트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왜 내가 타인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것을 가치 있다고 여겨야 하냐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는 것은 불필요한 질문이자 도덕적 의무에 대한 도구적 혹은 이차적 질문을 도입하는 것처럼 비추어진다. 내가 민주주의에 대한 칸트주의적 접근을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나는 가치에 관한 언어가 반드시 도덕적 관점을 훼손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게다가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모든 민주주의 이론은 왜 현실에서 살아가는 실제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고수하거나, 지지하거나, 수용해야 하는지 혹은 할 것인지에 관한 질문과 씨름해야만 한다. 따라서 칸트주의자들조차도 “무엇이 행해야 할 옳은 것인가”라는 질문에만 매몰되지 말고 “왜 우리는 옳은 일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내놓아야만 한다. 민주주의가 행해야 할 옳은 것일 수도 있지만, 만일 민주주의가 당신의 불만에 귀를 기울이거나 당신의 도움 요청에 응답하지 못한다면,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그것을 고수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논변이 필요할 것이다.

3절. 결론

나는 지금까지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를 제공하는 것을 참아 왔다. 한 가지 이유는 무엇이 한 체제를 민주적으로 만드는지에 관해 현대 이론들은 너무나 많은 입장차이를 지니고 있고, 그 차이는 대개 무엇이 민주주의의 가치라고 생각하는 지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가치에 관한 각기 다른 논변들을 거치면서, 그것들은 결국 민주주의에 대한 각기 다른 정의들과 연결될 것이다. 우리는 종종 다른 경쟁하는 철학적·이론적 논변들을 표적으로 삼는 철학적·이론적 논변들을 살펴볼 것이다. 그러한 이론들의 청자는 대개 현실 세계의 민주주의를 살아가는 일반 시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나는 가능한 한 그러한 논변들을 일반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고수하고, 방어하고, 혹은 최소한 적극적으로 좌초시키지 않게 할 이유들과 연결하려고 애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