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문트 후설 『논리 연구 ii-1』 제1연구 3~4절 (完) 요약

(이전 글에 이어서 후설의 「제1연구」의 나머지 부분입니다. 마찬가지로 단순 요약이고, 여러 의문점들이 많아 추후에 따로 글을 써보고 싶은 문헌이네요. 특히 §26의 경우에는 언젠가 제 생각을 밝혀보고 싶습니다.)

[3절 말의 의미가 동요함 그리고 의미통일체의 이념성]

§24 들어가는 말
후설은 체험으로서 의미작용과 이념성으로서의 의미 자체를 다시 구별한다. 그리고 이제 이하의 분석은 우연적이며 모호한 표현, 의미의 동요함과 관련된다고 미리 언급한다.

§25 통지함의 내용과 명명함 사이의 합치관계
표현이 체험과 대상 간의 상관관계인 한에서, '명명하는 것과 통지하는 것이 동시에 합치하는 경우'와 '명명된 내용과 통지된 내용이 분리되는 경우' 또한 구별되어야 한다. 전자의 예는 의문문, 명령문, 소원문에서, 후자는 외적 사물, 과거의 심리적 체험, 수학적 관계 등과 관련된 진술명제에서 볼 수 있다.

§26 본질적인 우발적 표현과 객관적 표현
위의 예비적 언급에서 이어서 후설은 소원의 상황을 예시로 들며 이러한 특수한 경우를 드러낸다. 가령 사람 A가 사람 B에 대해, M이 N에 대해 동일한 것을 소원해도 그 의미는 양자의 관계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 다르다.
후설이 여기서 논의하는 것은 '불가피한' 본질적 다의성이다. 이는 본질적으로 주관적이고 우발적인 표현으로, 객관적 표현과 확연히 구별된다. 객관적 표현은 상황 의존적이지 않고서 이해된다. 물론 대화의 상황은 표현에 본질적이지만, 그 이해가능성은 어러한 상황에 의존하지 않는다. 가령 수학적 명제는 누가 어디서 어떤 상황에 있든 동일한 의미로 이해된다. 반면 본질적으로 우발적인 표현은 상황 의존적이다. 그것은 표명의 사실적 상황을 고려해서만 의미가 듣는 사람에게 이해되고 구성된다.
이에 더해서 후설은 여기서 인칭대명사가 객관적 의미가 없다는 주장을 한다. '나'라는 말이 표명되는 경우마다 다른 사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만일 브라운이 '나는 여기 있습니다' 라고 말한다면, 자기 지시의 주어로서 '나'와 '브라운'은 표현의 의미에서 다르다.
그래서 여기서는 자기 인격의 직접적 표상이 결코 인칭대명사의 의미와 동일한 것일 수 없다. (역시 후설은 같은 맥락에서 후설은 '이것'과 '탁자'는 다르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나'는 무슨 의미인가? 그는 이것이 "듣는 사람에게 마치 '당신의 상대방은 자기 자신을 말한다!'고 소리치고 지시하는 기능을 매개할 것"(110)이라고 추측한다. 물론 수학적 명제에서도 이런 지시어를 사용할 수 있지만, 그 경우에는 그 본질상 위의 객관적 표현의 성격, 즉 상황에 관계없다는 성격을 띤다.
[이 내용에 대해서는 추후에 별도의 글을 써 보고자 한다.]

§27 다른 종류의 동요하는 표현
여기에서는 표현의 생략이라는 상황이 다루어진다.
가령 '비가 온다'는 '일반적으로 비가 온다'는 것이 아니다. 그 누구도 이렇게 이해하지 않는다. "표현에 없는 것은 단순히 말해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전혀 명백하게 사유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확실히 논의 속에 사념된 것에 속한다"(115). 그리고 후설은 위의 구분에 더해 정확한 표현과 모호한 표현도 구분한다. 일상의 표현과 언어들 대부분은 모호하다. "일상의 모호한 표현들은 유형적이지만 단지 부분적으로만 명석하고, 상황에 따라 의미의 방향이 정해진다"(116).

§28 의미하는 작용의 동요함인 의미가 동요함
후설은 명확한 이념성의 표현에서는 이념적 통일체가 서술되고 모호한 표현에서는 단지 일시적인 표현만이 있다는 견해를 거부하며, 동요함이 의미의 본질성 자체를 해치지는 않는다고 해명한다. 그가 근거로 드는 것은 여러 주관적 표현이 순간적 의미를 동일하게 가지는 경우, 그러니까 여러 사람이 '이것!' 을 완전히 같은 의미로서 표현하는 경우이다.
다음으로 그는 자신의 의미론과 그 탐구의 근본적 명제들을 열거한다. "사실상 각각의 주관적 표현이 객관적 표현으로 대체될 수 있다는 우리의 주장은 근본적으로 객관적 이성의 제한없음(Schrankenlosigkeit)을 분명히 할 뿐이다. (1)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자체로' 인식할 수 있고, 그 존재는 이러저러한 진리 그 자체 속에 명시된, 내용적으로 규정된 존재다. (2)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자체로 확고하게 규정된 자신의 성질과 관계를 갖고, 사물적 자연의 의미에서 실재적 존재이며, 공간과 시간 속에 확고하게 규정된 자신의 방식을 가진다. (3) 그렇지만 그런 확고하게 규정된 것들은 반드시 객관적으로 규정될 수 있고, 그렇게 말로 표현될 수 있다. (4) 존재 그 자체에는 진리 그 자체가 상응하고, 진리 그 자체에는 또 확고하고 명백한 진술 그 자체가 상응한다"(118). 그러나 후설이 말하길 우리는 이러한 이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29 순수논리학과 이념적 의미
이 항에서 후설은 순수 논리학의 의미 규정을 시도한다. 순수논리학은 이념적 통일체로서의 의미에 관계하는 학문이다. 이는 의미 그 자체에 관한 학문으로, 법칙론적이고 모든 우연성에서 독립적인 아프리오리한 학문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사람의 우연적 심리적 체험이 고려되지 않는다. 그래서 후설은 자신의 『논리 연구 I』을 언급하며, 심리학주의적 접근방식을 다시 옳지 못한 것으로 지적한다.
또한 학문적 명제와 의미는 누가 언제 말하든 동일한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다만 그러한 언표는 작용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작용과 의미는 본질적으로 구별되어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후설은 모든 학문은 의미의 이념적 복합체로서,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4절 의미체험의 현상학적 내용과 이념적 내용]

§30 심리학적 의미에서 표현하는 체험의 내용과 통일적 의미라는 의미에서 그 체험의 내용
이 절을 시작하며 후설은 다시 한번 체험의 내용과 체험을 구별한다. 가령 의미의 본질은 의미부여의 체험에서가 아니라 그 내용에서 볼 수 있다. 이것은 체험작용과 동일한 속성을 갖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예를 들어 '비스마르크'라는 이름은 그것을 누가 어떻게 상상하든 전혀 상관없이 존재한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이어지는 항에서 그는 이것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동일한 뜻으로 이해된 모든 표현은 동일한 의미지향에 관해 동일하게 규정된 심리적 성격이 부여된다"(128)는, 마치 체험에서 소급하여 그 요소들을 이해할 수 있고 추론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한다. 이는 아마 『이념들 I』의 노에시스-노에마 논의에서 구체화되는 것 같다.

§31 의미하는 작용의 작용적 특성과 이념적으로 하나인 의미
여기에서도 그는 말하는 상황이나 주체나 시간에 관계없이 이념적 의미, 가령 수학적 명제의 의미가 동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즉 실제적 말은 여럿이지만 의미는 하나라는 것이다. 게다가 후설은 이러한 명제가 "사유하는 내가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그것은 그대로 동일하게 존재한다"(130)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의미하는 참된 동일성이란 "종(種)의 동일성"일 뿐이라고 주의한다. 그래서 이념적 통일체로서의 의미는 다양한 개별적 단일성을 포괄한다. 여기에서 그는 형이상학적 '예화' 논의를 끌어온다. 즉 어떤 종이테이프의 빨간색은 개체적 빨간색으로서, 종으로서의 빨간색의 "개별적 사례"(131)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때 이 색깔 종 자체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다소 이상한 말을 한다. 이런 종 자체는 사유작용 속에서도, 다른 세계 속에서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32 의미의 이념성을 결코 규범적 의미의 이념성이 아니다
그는 여기에서 두 가지 이념성을 구별한다. 이념성은 규범적인 것과 종적인 것으로 나뉜다. 통상의 규범적 이념성은 실재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종적 이념성은 실재성에 대립되는 것이다. 후설은 그것이 "결코 가능한 노력의 목표가 아니"(133)라고까지 말한다. "종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종에 속한 개개의 것만이 실천적 이상이다". 이는 §28에서 말한 결론, 즉 우리는 이러한 이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그의 언급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이것이 다시 후설을 그의 의도와는 다르게 인식론적 회의주의로 이끌지는 않는가?]

§33 의미의 개념과 종의 의미에서 개념은 합치하지 않는다
여기에서는 기술구와 주어에 관한 논의가 보이는 것 같다. 가령 '비스마르크'는 '위대한 독일 정치가'와 같은 것이 아니다. 또 '2 다음에 오는 짝수'는 4와 동일한 것이 아니다. 이때 4는 의미이고, 그에 대한 기술적 표현은 그 표상으로 이해된다(133). 또한 이를 후설은 보편자와 개체의 관계라고 본다.

§34 의미는 의미하는 작용 속에 대상적으로 의식되지 않는다
후설은 판단은 그 자체로는 대상이 되지 않으며, 오직 반성을 통해서만 대상적 성격이 된다고 강조한다. 자연적 태도에서 우리는 작용의 대상을 사념하지 작용을 사념하지는 않는다. 이는 『이념들 I』에서도 밝혔던 현상학적 근본 방법론이기도 하다.

§35 의미 그 자체와 명확하게 표현된 의미
결국 위의 고찰들을 통해 두 가지 의미가 구별된다.
하나는 이념적 통일체로서의 의미, 다른 하나는 표현의 상대적 의미이다. 이 둘은 결코 같은 것이 아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후설은 후자의 의미에서 "무수한 의미가 존재하는 반면, 그것들은 인간 인식의 한계 때문에 결코 [전부] 표현될 수 없다"(136)고 말한다.

이 문헌을 읽으며 든 개인적인 의문점들:

  1. 과연 §6에서 표정과 몸짓을 의미론 연구에서 배제하는 것이 타당한 선택인가? 후설의 본질적 의미론이 이를 설명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 이론의 근본적 결함을 내보이는 것이 아닌가?
  2. 이념적 통일체로서의 의미가 어디에도 없다면(§31), 그것은 무엇이라 설명해야 할까? 이러한 설명 거부가 형이상학적 중립성으로 인한 것이라면, 그 중립성은 정당한 태도인가?
  3. §7에서 통지하는 표현의 유의미성의 조건을 전달 의도에 두는 것은 정당한 현상학적 기술의 적합한 이론적 전제일 수 있는가?
  4. 의미 자체를 표현 너머에 존재하는 고찰하는 것은 옳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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