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문트 후설 『논리 연구 ii-1』 제1연구 1~2절 요약

(후설의 『논리 연구 II』중 "제1연구"를 조금씩 읽으며 요약한 글입니다.
추후에 여러 비판적 문헌들을 읽으며 상기하기 위해 정리한 거라, 아주 치밀한 요약은 아닙니다.
페이지 표기는 민음사에서 나온 번역본을 기준으로 했습니다. 나머지 부분인 3~4절도 요약을 하긴 했는데, 그 부분은 너무 대충 해서 올리기가 뭐하네요.
내용적 오류가 있다면 지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1연구 「표현과 의미」(1~2절)

[1절 본질적 구별]

§1 기호라는 용어의 이중 의미
기호(Zeichen)라는 말에는 표현(Ausdruck)과 표시(Anzeichen)라는 두 가지의 서로 상이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기호가 표시의 의미에서 지시하기만 하고 의미충족을 가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는다. 표시는 표현보다 더 외연이 넓은 개념이다. 의미작용은 단순히 기호로 있음(Zeichensein)보다 더 넓은 개념이다. 표시와 다르게, "표현은 그것이 더 이상 표시로서 기능하지 않는 고독한 영혼 삶에서도 그 의미기능을 발휘한다"(44).

§2 지시의 본질
표시의 상황에서 존재하는 관계를 지시(Anzeige)라고 한다. 한 기호가 표시의 의미에서 기호로서 이해되기 위한 조건은, "사물이나 사건 등이 표시로서 기능하기 위한 의도에서 산출되어 여기에 적절하면, 그때 그것이 자신의 기능을 실행하든 않든 상관없이 그것을 기호라 부른다"(45). 결국 '지시하는 의도'로서 쓰인 기호만이 표시의 조건을 충족한다. 이러한 지시의 판단작용에서, 하나의 대상이나 사태는 (다른 쪽 존재에 대한 확신이나 추측을 위한 동기로서) 무언가를 지시하고, 이러한 지시된 것이 판단작용의 기술적 통일성을 수립한다. 판단의 통일체의 '객관적 상관자'로 '통일적 사태'가 존재한다.

§3 앞서 지시함과 증명
또한 지시를 앞서 지시함(Hinweisen)과 추론을 증명함(Beweisen) 역시 근본적으로 다르다. 지시는 통찰될 수 없다. 통찰은 증명하는 활동에서 추론의 문제이다. 추론에는 작용(주관적 추리작용)과 그 내용(객관적 추리)이 상응한다. 이러한 관계는 객관적 관계이다. 판단체험이 아니러 판단체험의 이념적 '내용' 즉 명제가 이념적 통일체를 구성한다. "이 점에서 이념적 합법칙성이 드러난다. 이것은 '지금 여기에'(hic et nunc)에 관해 결합된 판단을 넘어서며, 동일한 내용의 모든 판단을 초경험적 보편성에서 그와 같은 이념적 합법칙성으로서 포괄한다"(46~47). 이러한 법칙 자체는 이념화하는 반성(ideirende Reflexion)을 통해 의식될 수 있다.
그러나 지시에서는 판단내용과의 이념적 연관이 없다. 즉 'A는 B에 대한 표시다'에서 A와 B간의 필연적인 연관 관계가 있지 않다. 후설은 여기에서 지시의 관계가 사회적으로 합의된 경우에 대해서도 말한다. 가령 방정식의 법칙은 마치 필연적 관계를 가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사유의 의식 속에서 논리적 근거로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수행한 증명이나 심지어 권위를 신뢰해 배우는 것과 심리적 확신에서 수립된 연관에 의해서 행하는 것이다"(48). 그리고 이러한 습관적 지식을 통해서도 저 필연적이지 않은 연관은 그대로이다.

§4 연상에서 지시가 성립함에 관한 보충설명
표시라는 개념은 '관념 연상'(Ideenassoziation)이라는 역사적 명칭에서도 파악해볼 수 있다. 관념 연상은 '다시 일깨움'을 통해 관념들을 조직화하는 것뿐만 아니라, 고유한 성격과 통일형식을 만들어 내는 창조적인 역할도 한다. "단순히 함께 존재하는 것에서 함께 속함을 형성하는 것, 즉 함께 존재하는 것에서 함께 속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지향적 통일체를 형성하는 것, 이것은 연상적 기능의 연속적인 작업수행이다"(50~51). "모든 경험의 통일체는 (함께 있음을 통한) 현상적 통일체다".

§5 유의미한 기호로서의 표현. 여기에 속하지 않은 표현의 의미를 분리함
후설은 '표현'의 여러 의미들로부터 몸짓이나 표정을 배제한다. 그에게서 표현은 '모든 논의와 품사'로 한정된다. 그는 표정과 몸짓이 "본의 아니게, 또는 전달하는 의도에서 수반하지 않거나, 그 속에서 함께 하는 논의 없이"(52) 다른 사람에게 하는 표현이 된다는 점에서 이것이 자신의 연구의 의미에서의 표현과는 거리가 멀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이런 표현이 "본래 전혀 의미가 없다"고까지 말한다. "그러한 표명에서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아무것도 전달하지 않으며 어떤 생각을 명확하게 수립할 의도도 전혀 없다". 그러나 이런 배제가 과연 타당한지, 몸짓과 표현을 설명하지 못하는 의미론이 의미 있는지는 남아 있는 문제다.

§6 표현 그 자체에 속한 현상학적 그리고 지향적 구별에 관한 문제
표현에 대한 구별은 이렇게 이루어져 왔다. [1] 물리적 측면의 표현(종이에 쓰인 문자) [2] 표현에 연상적으로 연결된 심리적 체험의 어떤 총체. 이를 보통 뜻(Sinn) 혹은 의미라고 부른다. 그러나 후설은 물리적 기호와 체험 일반을 단순히 분리하는 것은 불충분하다고 지적한다.

§7 의사소통 기능에서의 표현
이어서 후설은 의사소통 상황에 한정하여 표현을 고찰한다. 음성의 복합이 표현이 되기 위해서는 "말하는 사람이 자신을, '무엇에 관해 표명하려는 의도로' 그 음성복합을 산출함으로써, 즉 전달하려는 의미를 그 음성복합에 부여함으로써 비로소 이루어진다"(54). 하지만 이런 전달은 듣는 사람이 정말 말하는 사람의 의도를 이해해야 가능해진다. 또한 듣는 사람이 말하는 사람을 "자신에게 말하는 사람으로서" '파악할 때' 그 의도를 이해한다. 이때 모든 표현은 표시로서* 기능한다. 즉 모든 의사소통 표현은 듣는 사람에게 말하는 사람의 생각에 대한 기호로서* 이바지한다. 이러한 기능이 통지기능이다. 통지기능은 좁은 의미에서 (1) 의미를 부여하는 작용 그리고 넓은 의미에서 (2) 듣는 사람과 말하는 사람의 모든 상호작용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통지를 이해하는 것은 개념적 파악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직관적 파악의 의미에서다. 곧 듣는 사람이 말하는 사람을 그렇게 직관적으로 파악할 때 이루어지는 것이 통지이다.
이어서 후설은 고통의 표현 등의 사례에 관해서도 이야기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본다'. 그러나 이것은 내적 체험에 대한 타자로서의 외적 지각으로서 불충분한 경험이다.

§8 고독한 영혼 삶에서의 표현
의사소통 기능은 본질적으로 표현이 표시로 작동한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이러한 통지, 즉 전달 상황이 아닐 때조차도 표현은 중요하다. "우리의 유일한 관심이 감성적인 것, 즉 단순한 음성에만 향하는 경우, 말은 말로서 존재하기를 그친다"(57). 그러나 우리가 말을 이해하면서 살아가는 자연스러운 태도에서 말은 (그것이 누구에게 향해 있든) 언제나 무엇을 표현한다. 여기에는 통지의 의미에서 표시가 없다. 다만 여기에서도 말은 기호이다. 그러니 이는 표시의 의미에서 지시하지 않는다. 그런 표시로서의 말은 '현존하는 것으로서' 지각되어야 한다. 그러나 독백에는 이런 조건이 적용되지 않는다. 독백에는 "실재의 말 대신 표상된 말에 만족한다"(58). 그것은 상상 속에서 아른거리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상상의 표상'이나 '상상의 내용'은 '상상의 대상'과 결코 혼동되지 않는다. 상상된 말소리 A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A에 대한 상상의 표상이 존재한다. 예컨대 켄타우로스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켄타우로스'에 대한' 표상이 존재하는 것이다.

§9 물리적 표현의 나타남, 의미를 부여하는 작용과 의미를 충족시키는 작용의 현상학적 구별
표현에는 '표현 자체'와 '표현이 표현하는 것' 두 가지가 결합되어 있다. 또한 표현의 현상에서는 '표현의 물리적 현상'과 표현에 의미를 주고 대상성과의 관계를 구성하는 '작용'의 측면이 있다. "이 후자의 작용에 의해 표현은 단순한 [물리적] 말소리 이상의 것이 된다"(59). 표현은 무엇을 뜻함으로써 대상적인 것과 관계한다. 그렇다고 대상적인 것이 표현을 의미 있게 하는 필수적인 요소는 아니다. 그러나 명사 자체처럼 단순한 의미지향만 있는 관계에서는 표현의 관게가 없다. 의미지향의 충족은 현실적 의식 관계로 이루어진다. 의미의 작용에는 두 가지가 있다. 먼저 (1) 표현작용이 말소리로서의 표현에 본질적으로 작용하는 관계인 '의미를 부여하는 작용'이 있고, (2) 표현 그 자체에는 비본질적이지만 그 의미지향을 적절히 충족시키는, (의미부여작용에 기초하는) '의미를 충족시키는 작용'이 있다. 표현이 대상성과 실현된 관계를 가질 때 의미충족이 일어난다. 충족시키는 작용은 완전한 표현을 통해 표현된 작용으로서 나타난다(60).

§10 이러한 작용의 현상학적 통일체
이렇게 표현이 나타나는 작용과 의미부여 및 의미충족 작용은 단순히 의식 속에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통일체를 형성한다. 우리는 의미를 지향하지만, 평소에 우리의 주의(관심)는 이 지향작용에 향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명명된 대상 자체에 향한다. 우리의 자연적 관심은 기본적으로 대상에 있다. 그러나 이 둘이 완전히 분리되어 생각되긴 어렵다. 그럼 말은 말이기를 멈추게 된다. 즉 우리는 "의미를 부여하는 작용 속에서 주의를 사태로만 향한다"(62).

§11 이념적 구별: 우선 이념적 통일체로서의 표현과 의미의 구별
이제 후설은 '표현'에서 작용과 대상성이라는 두 계기 중에서 대상성의 측면을 분리해서 고찰한다. "작용의 실재적 관계에서 그 대상이나 내용의 이념적 관계로 전환하여 주관적 고찰은 객관적 고찰에 길을 내준다"(64). 가령 우리가 '2차 방정식의 나머지'의 의미에 관해 말할 때, 자명하게 '지금 여기에' 표명된 음성 자체는 "일시적이며 결코 동일하게 반복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표현의 대상성 자체, 즉 '2차 방정식의 나머지'라는 표현 자체는 "누가 이것을 표명하더라도 동일한 것이다"(65). 이것이 중요한 차이점이다. 진술이 진술하는 것(의미)은 누가 어디에서 언제 표명하든 동일한 것이다. 그래서 타당성에 관한 진술 또한, 가령 어떤 사태의 객관적 타당성에 대해 주장할 때, 그 사태 자체는 타당성을 주장하든 주장하지 않든 그대로이다. "사태는 타당성의 통일체 그 자체다"(66).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나타났다는' 점에서 우리의 그 작용을 가능하게 한다. "통지함은 심리적 체험 속에 존립하는 반면, 진술 속에 진술된 것은 결코 주관적인 것이 아니다". "나의 판단작용은 생기거나 사라지는 일시적 체험이다. 그러나 진술이 진술하는 것, 즉 '삼각형의 세 수직선은 한 점에서 교차한다'는 이 내용은 생기는 것도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내가 또는 그 누구든, 종종 이 동일한 진술을 같은 뜻으로 표명하듯이, 종종 새롭게 판단된다. 판단하는 작용은 경우마다 다르다. 그러나 판단작용이 판단하는 것, 즉 진술이 말하는 것은 어디에서나 동일하다. 그것은 엄밀한 말의 의미에서 동일한 것이고, 하나의 동일한 기하학적 진리다"(66). 그러나 이러한 판단작용 또한 대상화된다면 이념적 의미통일체로서 존재한다. " '그' 판단을 '그' 진술명제의 의미로서 부를 경우, 우리는 이 이념적 통일체에 주목한다. 단지 판단이라는 말의 근본적 애매함이 이념적 통일체와 실재적 판단작용을 혼동하도록 몰아댈 따름이다"(67). 이런 사실들을 통해 후설은 부정적 명제에 대해서도 현상학적으로 분석한다. 가령 '삼각형의 각의 합은 180도가 아니다'라고 말할 때, 나는 이러한 '같지 않음'이 정말로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것은 무언가를 진술하기는 한다. 그래서 명제에서는 명제가 말하는 것(대상의미)과 명제가 통지하는 것(진술의미)이 완전히 구별된다. 이 명제가 말하는 것은 '~아니다'를 포함한 심리적 작용이 아니라 객관적이고 이념적인 것이다.

§12 계속: 표현된 대상성
"모든 표현은 무엇을 말할 뿐 아니라 무엇에 '관해서도' 말한다. 즉 모든 표현은 자신의 의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어떤 대상에 관계된다"(69). '대상'은 결코 '의미'와 동일한 것이 아니다. 이 둘은 모두 표현에 속하지만, 그 성격은 명백히 구별된다. 예컨대 '예나의 승자'와 '워털루의 패자'는 의미는 완전히 다르지만 모두 '나폴레옹'을 명명한다. '등변삼각형'과 '등각삼각형'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고전적인 예시로는 프레게의 '샛별'과 '개밥바라기'를 들 수 있다. 또한 두 표현이 동일한 의미를 갖지만 서로 다른 대상적 관계를 가지기도 한다. 가령 '저 짐마차를 끄는 말은 말이다'와 '알렉산더 대왕의 군마 부케팔라스는 말이다'는 '말'이라는 표현은 동일한 의미를 갖지만 그 "대상적 관계"는 다르다(70). 예컨대 '하나'라는 명사는 어디서든 동일한 의미이지만, 나이/날짜의 하나와 수량의 하나는 완전히 다르다. 다만 고유명사의 경우에는 동일하게 지칭된다. 가령 '소크라테스'라는 고유명사는 언제나 동일한 의미이다.

§13 의미와 대상적 관계의 연관
표현은 따라서 그 의미와 표현작용의 차이를 명확히 보여준다. 그러나 이 둘은 밀접한 상관관계 속에 있다. 즛 "표현은 오직 그것이 의미하는 것을 통해서만 대상적 관계를 획득하며, 따라서 표현은 그 의미를 매개로 대상을 표시한다"(71). 후설은 사람들에게 "구별되는 '두 측면'에 관한 논의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되고, 오히려 표현의 본질은 오직 의미 속에 있을 뿐이라는 점을 명백히 해야 한다"고 주의시킨다. 그러나 같은 직관이 범주적으로 다르게 파악되거나 다른 직관이 동일한 표현에 충족될 수 있다. 이런 것은 의미에 가능한 충족의 영역이 있기 때문이다.

§14 대상으로서 내용, 충족시키는 의미로서 내용과 의미 또는 의미 그 자체로서 내용
표현 속에 대상 자체의 "이념적 상관자"(73)는 충족시키는 의미이다. 의미와 의미충족이 합치되는 통일체에서의 의미가 바로 표현을 통해 표현된 의미인 '충족시키는 의미'이다. 지각의 경우 이 충족시키는 의미는 "동일한 대상을 게다가 실제로 동일한 대상으로서 지각하는 방식에서 사념하는 가능한 지각작용 전체에 속하는 동일한 내용이다"(74). 따라서 이 내용은 하나의 대상에 대한 이념적 상관자이다. 그러나 그 대상이 허구적 대상이라고 해도 이러한 이념성과 상관성은 변하지 않는다. 후설은 여기서 주관적 의미내용과 객관적 의미내용을 구별하고, 객관적 의미내용의 의미에서 내용을 다음과 같이 구별한다.
(1) 지향하는 의미(의미 그 자체)로서 내용
(2) 충족시키는 의미로서 내용
(3) 대상으로서 내용.

§15 이러한 구별과 연관된 의미와 무의미에 관한 논의의 애매함
그는 여기에서 Bedeutung과 Sinn이 평소에 별 구별 없이 통용되고 있는 습관을 성찰하기를 권유한다.
이러한 현상학적 태도에서 그는 다음의 중요한 사실을 파악한다. (1)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은 표현의 개념에 속한다. 무의미한 표현은 결코 표현이 아니다. (2) 의미 속에 그 대상과의 관계가 구성된다. 표현을 의미와 함께 작용하는 것과 표현하며 그 대상과 관계하는 것은 동일한 말이다. 이때 이 대상과의 관계는 대상의 실존을 함축하지 않는다. 대상이 존재하는지 허구적인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여기서 그는 '황금산'이라는 허구적 대상에 관한 표현을 예로 들면서 이렇게 대상의 실존과 표현이 관계한다는 이론을 논박한다. 그래서 '대상이 없는 것'과 '의미가 없는 것'은 구별되어야 한다. 반면 '둥근 사각형' 등의 모순적 대상은 뜻이 없다(sinnlos). 이는 단순한 단어나열일 뿐이다. 이에 관한 명제는 가능성의 측면에서 그것과 술어와의 결합이 원천적으로 봉쇄된다.
또한 여기에서 후설은 마티(A. Marty)의 주장, 즉 "만일 말에 의미가 없다면 그것이 존재하는지 하는 물음조차 이해할 수 없고 부정할 수도 없을 테니 무의미는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이렇게 반박한다. 그는 '진정한 무의미성'과 [앞의 예시에서 본] '충족시키는 의미가 아프리오리하게 불가능함'이라는 무의미성을 혼동했다는 것이다(79). 그래서 후설은 이렇게 결론짓는다. "그 지향에 가능한 충족이 상응하는 경우에 표현은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이러한 가능성은 명백히 이념적인 본질가능성이다.

§16 계속: 의미와 함축
이어서 후설은 밀(J. S. Mill)의 이론, 즉 '명사의 유의미성의 본질은 함축에 있다'는 그의 생각을 반박한다. 밀은 함축하지 않는 명사를 무의미하다고 말하고, 고유명사는 단지 징표와 같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후설에 따르면 이는 표시와 표현의 차이에 대한 혼동에서 기인하는 오해이다. "그러나 명사는 통지하는 기능 말고도 표현의 기능을 갖는다. 통지하는 기능은 의미기능에 대한 보조수단일 뿐이다. 일차적으로 중요한 문제는 표상이 아니다. 그래서 중요한 문제는 표상이 관계할 수 있는 것과 표상에가 아니라 사념된 대상 또는 명명된 대상으로서 표상된 대상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 표상된 대상 자체를 우리에 대해 내세우는 것이다"(83). 그리고 고유명사는 대상과의 관계에 있어서 결코 표시가 아니다. 명명된 대상은 참으로 존재할 필요가 없다. [이 §16은 특히 이해하기가 어렵다. 나중에 다시 읽어보아야겠다.]

[2절 의미를 부여하는 작용의 성격에 대해]

§17 추정적 의미로서 예시하는 상상의 상
이제 후설은 지배적이었던 표현의 이해 과정에 관한 하나의 견해를 논박하고자 한다. 그 견해란 곧 "어떤 표현을 이해하는 것은 그 표현에 속한 상상의 상을 발견하는 것이라는"(86) 견해이며, 이때 상상의 상이 말의 의미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후설은 이러한 견해가 가능하다는 것 자체가 "기술적 심리학이 낙후된 상태라는 증거"(87)라고 비꼰다. 물론 후설 또한 많은 경우 언어적 표현이 이런 상상의 상에 의해 수반되기도 한다고 인정하지만, 그에 따르면 이는 표현의 이해에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상상의 표상이 현존한다는 것은 표현의 유의미함을 형성하는 조건일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상상의 표상이 중단되었다고 말의 유의미함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대부분의 의미지향은 이런 직관화를 끌어오지 못하기도 한다. 이때 후설은 추상적 지식에 관한 책을 읽고 이해하는 경우와, 수학적인 명제를 이해하는 예시를 든다. 그러나 그는 이를 "추상적인 대상성의 표현뿐 아니라 개별적 객체, 인물이나 도시, 풍경에 대한 명사에도 적용된다"(88)고 다소 비약적으로 확장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18 계속: 논증과 반증
다시 후설은 그러한 견해를 가진 자가 반박하는 경우를 가정한다. 먼저 누군가 '상상은 그러한 경우에도 작동하며 아주 일시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진다'고 말한다면, 후설은 '표현의 완전한 이해와 생생하고 완전한 의미는 상이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존속하며, 그래서 바로 이러한 상 속에 있을 수 없다'고 지적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것 또한 '표현이 지식으로 남음'과 '표현을 그 현재에서 체험함'의 혼동으로서 비판받을 여지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후설은 다음에 '상상의 표상은 어쨌든 명확하게든 명확하지 않게든 현존한다'고 반박당할 경우를 가정하고, 이를 현상학적 무전제성의 원리에 입각하여 과연 그러한 가정이 가치있는 것인지에 의문을 표한다. 또한 그는 의미가 불합리한 경우에 그 표현을 이해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지에도 반론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을 상상할 수 있다면 그것은 생각의 가능성 즉 의미의 정합성을 보증한다는 모순에 빠지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적절함이 과연 의미의 규정일 수 있는지에도 의문을 표한다. 이때 그는 데카르트가 천각형의 예시를 가져온 것을 다시 환기시키며, 상상(imaginatio)과 지성(intellectio)의 차이를 강조한다. 가령 천각형은 삼각형처럼 상상되지 못하고 단지 이해된다. 이러한 것은 적절히 상화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후설은 예시화 대신 구상화를 강조하며, 감성화(illustration)에 대해 언급한다.
후설에 따르면 상은 지성에 대한 발판으로서만 이바지한다. 그리고 이는 기하학적 이념화의 출발점으로서 하나의 범례를 제공할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념화에서 의미는 정의를 가지는 지성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이것이 모든 이해에 필수적이거나, 그 자체 의미인 것은 아니다.
더 나아가 후설은 자신의 견해가 '유명론' 즉 쓰여진 감성적 필적 이외에는 직관적인 비물체는 아무것도 현존하지 않는다는 견해로 오해되는 것에 우려하며 다음과 같이 부연한다. 그는 상징이 아무런 체험 없이 이해된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해가 그 체험에 있다"(91)고 말한다. 결국 후설은 §10의 말소리와 의미의 구별응 환기시킨다. 조금 덧붙여서 이러한 의미로서의 말과 말소리로서의 말은 서로 다른 파악방식에서 완전히 다르게 파악될 수 있다는 점이 지적된다.

§19 직관 없는 이해
여기에서는 표현이 예시하는 직관 없이도 잘 기능한다는 사실을 보여준 가령 직관이 표현의 본질이라면 직관 없는 발언은 뜻이 없는 것이라는 불합리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뜻이 없는 말은 소음과 같은 것, 생각 없는 말이다. 이는 '판단 없는 잡담'으로 이해되는데, 판단의 무가 아니라 판단에 숙고가 없음을 의미한다. 또한 뜻이 없다는 사실은 뜻 속에 구성되기 때문에, 위와 같은 견해는 불합리하다.

§20 직관 없는 사유와 기호의 대리하는 기능
후설에 따르면 사유에서는 직관적 상 없이도 그것이 잘 기능한다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그에게서 기호의 대리하는 기능, 즉 기호 자체가 어떤 것을 대신하는 인식론적 기능을 한다는 사고방식은 비판되어야 한다. "우리는 오히려 수반하는 직관이 전혀 없는 경우에도 의미의식이나 이해의식 속에서 철두철미 살아간다"(94). 따라서 상징적 사유는 단지 특수한 향의 성격일 뿐, 지향성 일반의 성격은 아니다. 이때 그는 자신이 저술했던 『산술철학』에 대해 언급한다. 만일 독자들이 그의 이런 사유가 그 저작에서의 논리와 충돌한다고 생각한다면, 후설은 이렇게 답한다. "어쨌든 산술적 사유에서는 단순한 기호가 실제로 개념을 대신한다". 그러나 그것이 지향성 자체의 일반적 특징일 수는 없다. 게다가 산술적 기호는 물리적 기호와도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때 산술적 기호의 사유는 상징적 조작으로 특징지어지기에, 이것은 직관 없는 사유의 의미에서의 상징적 사유와는 다른 것이다.

§21 의미를 해명하고 그 의미 속에 근거한 진리를 인식하는 경우, 의미에 상응하는 직관으로 되돌아갈 필연성을 고려해 숙고함
이제 후설이 강조하는 점은 혼란을 피하기 위해 직관으로 되돌아가는 것에 관해서이다. 다만 이것이 모든 의미작용이 직관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뜻은 아니다. 후설이 앞서 예로 들었듯이 이러한 생각은 추상적 개념으로 가득 찬 글을 읽고 이해하는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 어쨌든 후설은 "직관화함(Veranschaulichung)은 판명하게 함(Verdeutlichung)의 자연스러운 수단을 제공해 준다"(98)고 말한다. 그리고 판단작용의 모든 명증성은 직관적으로 충족된 의미를 "전제한다". 그러나 이때 그 의미하는 것의 대상의 존재 여부의 문제는 불필요한 것으로 배제된다. 결국 "사념되는 일반적인 말의 의미가 완전한 방식으로 충족을 발견하는 '개념적 본질'을 단순히 현전화하는 것이 그 명증성에 필요한 인식"이며, "이 개념적 본질은 결코 말의 의미 자체는 아니다". 이것은 의미의 이념성, 의미의 극한 같은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개념적 본질은 말의 의미에 대해 충족시킨다는 점에서 구별된되면서 본질적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분석은 공허한 의미지향에 관계하지 않고, 공허한 지향에 충족을 부여하는 대상성과 형식에 관계한다"(98).

§22 서로 다른 이해의 성격과 '이미 알려져 있음의 질(質)'
위의 논의, 즉 직관화 없는 이해라는 중요한 논의를 다시금 환기하면서, 후설은 상징적 표상이 '모든' 표현에 대해 동일한 특성이고 우연적인 감성적 의미를 지닌 말소리만이 표현들 간에 차이를 형성한다는 견해의 뒷부분 주장 또한 반박한다. "기술적 차이는 정말 동일한 것인 감성적 기호일 수 없으며, 바로 종적으로 변경되웅 작용의 성격에 관계해야 한다"(99). 이때 그가 종(種)이라는 논리학적 개념을 통해 본질이론을 정초하고자 하는 점이 보인다. 아무튼 이는 "말이 변화되는 동안에도 그 의미가 동일하게 남는 경우"에서 잘 드러난다. 가령 강세나 속도 같은 것은 의미에 영향을 주지 않으며, 또한 직접적, 간접적 화법처럼 같은 의미가 다른 표현에서 드러날 수 있다.
이때 그는 릴(Riehl)과 회프딩(Höffding)의 견해, 즉 "이해의 성격은 '이미 알려져 있음의 성격' 또는 '이미 알려져 있음의 질' "이라는 견해에 대해 언급하며 그것이 "이해되지 않는 말도 예전에 이미 알려져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다"는 사실에 의해 반박된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해할 수 없었으나 익숙했던 표현이 나중에 이해되는 경우도 그 근거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후설이 언급하는 위의 학자들의 견해가 정확히 무엇인지, 그리고 후설의 비판은 정당한지 알 수 없다.

§23 표현 속의 통각과 직관적 표상 속의 통각
이 부분에서는 후설이 칸트적 표상주의와 구별되는 점이 드러난다. 상론한 '이해하는 파악'은 어떤 점에서 '체험된 감각의 복합체를 매개로 대상의 직관적 표상이 생기는 (객관화하는, 해석하는) 파악'과 유사하지만, 이 둘은 본질적으로 구별된다. 만일 선경험적 의식이 있다고 가정하면, 그 의식은 우리와 같은 감각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것도 직관하지 않으며, 가령 새가 날아가는 것을 지각할 수 없다. 그와 같은 의식에서는 감각이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그 감각은 대상의 속성들에 대한 기호로 간주되지 않는다. 또한 대상 자체에 대한 기호로도 간주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단적으로 체험되지만, 객관화하는 '해석' 없이 체험된다(101). [왜 후설은 이런 상황을 가정하는가? 이런 가정이 보여주는 것은 무엇인가? 아직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
감각 그 자체는 해석의 대상이 아니다. 감각은 오직 심리학적 반성 속에서난 표상의 객체가 된다(102). 그러나 감각은 소박한 직관적 체험 속에서는 표상 체험의 구성 요소이지만 표상의 체험 대상은 아니다. 따라서 칸트적 표상 이론, 즉 감각이 직접적으로 객관화되는 해석 모델은 후설에 따르면 불합리하다.
지각의 표상은 체험된 감각의 복합체가 어떤 작용의 성격에 의해 생기가 불어넣어짐으로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감각복학체에 생기가 불어넣어지면서 지각된 대상이 나타나는 반면, 감각복합체 자체는 평소에는 그렇게 나타나지 않는다.
현상학적 분석은 감각과 지각을 구별한다. 이 둘은 동일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예컨대 공의 균등한 색깔은 감각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파악 또는 '해석'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해석을 후설은 '통각'이라 부른다.
그러나 그는 두 가지 파악을 구별한다. 이러한 해석은 (1) 최초의 파악이다. 그러나 이에 기초해 (2) 체험된 감각의 질료를 완전히 넘어서는 새로운 대상성으로의 파악이 이루어질 수 있다. 이것은 의미작용 속에서 사념되지 감각 속에서는 제시되지 않는다. 즉, 의미하는 작용은 직관적 표상 작용을 어떤 필연적 토대로서 전제하는, 이러저러하게 염색된 작용이다(103). 표현은 기초 지어진 작용을 통해서 비로소 완전한 의미에서의 표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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