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의 언어 철학 - 『예나 체계기획 i』 단편 20.1 요약

헤겔이 예나 시기에 쓴 원고들 중에 기억과 언어에 대해 논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 내용이 조금 흥미로워서 요약해 봤습니다. 들어가기에 앞서 그 전에 전개된 내용을 정리해보자면, 의식은 의식하는 자와 의식되는 자, 그리고 그 두 대립을 통일할 '매개항'(Mitte)의 포텐츠로 나뉜다는 것인데, 그 포텐츠는 다시 (1) 기억과 언어 (2) 노동과 도구 (3) 가족과 가산으로 나뉘어지고 지금 보시는 글은 그 첫 번째 포텐츠에 관한 것입니다. 책은 『헤겔의 예나 시기 정신철학』(서정혁 역, 이제이북스)을 바탕으로 했고, GW는 헤겔 전집을 나타냅니다.

[단편 20]¹
1. 기억과 언어
a. "의식은 자신의 관념적인 포텐츠 속에서 '개념으로서', 감각(Empfindung)의 상태에서 벗어나 직접적으로 고양된다. 감각은 관념적이며 지양된 것으로 정립되는 개별적인 성격을 띤다."(GW 6, 283) 이때 이 감각에 대해 타자인 것은 감각이라는 개별성의 '외부에' 존재하는 타자일 뿐, "직접적으로 개별성 그 자체가 될 수는 없다."
감각은 그 자체에 자신의 타자존재를 지니는 대립자가 되며, 이러한 상태에서 감각되는 자와 감각하는 자는 그 자체로 하나의 보편자가 되는데, 이것—즉 개별적 감각이 무한한 보편자가 되는 것—이 감각에서 의식으로의 이행이다.
"개별성은 그 자체로서 무한하므로, 감각은 이 개별성 속에서 전적으로 자신의 특정한 상태에 머문다. 또한 이 개념의 직접적 실존 상태에 있는 분리된 무한성이 바로 공간과 시간이다." 의식은 공간에서는 존립하는 것으로서 개별자들을 직관하지만, 시간 가운데서는 사멸하는 것이자 그 자체로 관념적인 것으로 존재하지만, 단순히 시간 속에서 사라져 버리지 않고, 반성(Reflexion)을 통해 시간 속에 존재한다.
공간과 시간은 그 자체로는—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논한 것처럼—공허한 보편성이다(GW 6, 284). 그러나 그것들은 긍정적 보편자(부정성 없는 보편자)일 뿐만 아니라, "의식에 의해 분화되는(besondern)" 부정적 보편자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식의 형식이 경험적 구상력(empirische Einbildungskraft)이다. 직관(Anschauung)은 공간과 시간의 연속성 속에 있으면서도 그 연속성을 깨뜨리고 특수화한다.
[주석: 칸트와 헤겔의 시간ㆍ공간 개념—공허하고 선험적인 형식적 표상 대 의식에 의한 특수화를 통한 경험]
b. 직관의 개별성들은 의식으로 이행함에 따라 사라지게 되고, 개별성은 보편성이 된다. 그러나 의식은 또한 자신이 지니는 공허한 시ㆍ공간을 특수화하며, 이 분화 과정(Besonderung)은 "최초의 감성적 표상화 과정"(GW 6, 285)이라고 불릴 수 있다. "의식 속에서 감각의 규정성, 즉 시간과 공간의 이것(Dieses)이 소멸되며, 시간의 계기(Sukzession)와 공간의 병렬(Koordination) 상태는 하나의 자유로운 규정으로 현상한다."[Dieses의 소멸에 관해서는 『정신현상학』 "의식" 장 참조]
의식의 이러한 존재는 순전히 형식적인 것으로서, "어떤 참된 실재성도 지니지 않는다." 이것은 순수하게 추상적인 개념의 형식으로서 존재하는 것이고, 따라서 이것은 "하나의 공허한 비진리"일 수밖에 없다[의식의 비진리에 관해서는 『정신현상학』 "의식" 장 참조].
이 의식—경험적 구상력—은 아직 언표 능력이 없는 무언의(stumm) 의식이다. 이 형식적 특수화는 실존을 지녀야 하며 외화되어야만 하는데, 이 외화란 직관하는 자, 직관되는 자, 매개항으로 나타남을 의미한다; 여기서 타자란 그저 자신과는 다른 것, 주관과 대립하는 것, 다시 말해 "주관 자신과는 다르게 존재해야 하는 당위(ein Anderssein sollen)"(GW 6, 286)쯤으로만 어겨진다. 이런 단계의 의식은 주관과 객관의 대립을 지양하기에는 너무나 무력해서, 그 참된 헌실적 통일 상태(wirkliches Einssein)를 표상할 수도 없고, 당위적인 상태 이상의 것일 수 없다. 이러한 매개항으로서의 의식은 단순히 '기호(Zeichen)'라고 불린다.
의식의 이 기호를 통해 직관되는 것은 연관 상태에서 분리된 것이지만, 그럼에도 관념적으로는 연관상태 속에서 존립한다. 표기(Bezeichnung)는 의식 밖에 존재하는 의식의 관념성이며, "이것"(dieses)은 그 자체로 하나의 존립자, 즉 하나의 사물(ein Ding)이다(GW 6, 287). 의식이 어떤 사물을 기호로 표기할 때, 그 기호는 우연적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의식은 더 이상 독자적이지 않고, 기호와의 관계 맺음 속에서만 존립한다. "즉 기호는 주관의 자의에 의존하며, 주관이 생각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주관 자체만이 파악할 수 있다. 기호는 그 자체로 절대적인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이 말은 주관이 기호 속에서 지양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c. 이 무언의 표기는 관념적인 항들의 무차별 상태(Indifferenz)를 절대적으로 지양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대자존재로 이행해야만 한다. 의미(Bedeutung)은 의미하는 것(대상)과 의미 부여자(주관)에 대립해서 독자적으로 존립해야만 한다. 이때 기호는 '현실적인 것으로서는' 사라지게 되고, 의식의 실존에 대한 관념은 [관념성] 기억(Gedächtnis)이고, 의식의 실존 자체는 [실재성] 언어(Sprache)이다(GW 6, 287).
기억(회상[Mnemosyne])은 내용 없는 형식이 아니라, "감성적 직관을 기억 사태로, 하나의 사유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 과정에 대한 서술은 다음과 같다: 시ㆍ공간의 형식 속에서 감성적 직관은 외부에 타자를 지니는데, 감성적 직관은 이것을 "관념적으로만" 지양하며, 동시에 "실재적으로는" 즉자적으로 이 타자를 자신의 타자로 정립한다. 시ㆍ공간 안에서 자신 바깥에 타자를 지니는 실재적 관계가 부정되고, "이제 타자 존재는 대자적이며 관념적으로 정립되어 하나의 이름(Name)이 되어 버린다"(GW 6, 288). 즉 이름이란 하나의 관념적인 것이다. 여기서 경험적인 것은 지양되어 있다. 헤겔은 『창세기』 2:18~20절을 그 예로 제시한다: "아담이 동물들에게 지배력을 행사한 최초의 행위는 그가 동물들에게 이름을 부여해 준 것, 다시 말해 단순한 존재자로서의 동물들을 부정하고 그들을 대자적인 관념물로 만들어 준 것이다."(GW 6, 288) 기호는 주관 속에만 의미를 가지지만, 이름은 사물과 주관이 없어도 그 자체로 지속하는 것이다.
이름은 언어로서 실존한다. 언어는 "보편적으로 전달하는 실존"을 지니며 따라서 공기라는 요소 속에서 "형식이 없는 자유로운 유동성"이라는 외면성으로 실존한다.
동물의 공허한 음성(Stimme)에 관하여: 음성의 순수한 울림, 즉 모음발화(das Vokale)는 그 음성 기관들이 분절화된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구분된다. 그러나 이것은 무언의 자음에 의해서 중도에 단절되는데, 이를 통해 모든 소리는 독자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때 이 음성은 의식의 음성인데, 왜냐하면 각 소리는 의미를 가지고 또 그 각 소리 속에느 하나의 이름이 실존하기 때문이다: "언어는 실존하는 사물의 관념성이며, 실존하는 사물의 직접적인 비실존이다"(GW 6, 289). (언어는 자신이 분절화된 절대적 다양성으로부터 자신을 환수하기도 한다.)
언어는 이름들의 관계 맺음이며, 또한 이름들의 다양성 자체의 관념성이 되는데, 이렇게 언어는 이 관계 맺음, 즉 생성된 보편자[=언어]를 언표하면서 오성(Verstand)이 된다. 즉, 언어는 오성의 발화이다.
이어서 헤겔은 어떻게 오성이 존재의 연속성으로부터 주어를 추상(Abstraktion)하는지를 보인다. 오성은 추상하고 규정한다(규정성[Bestimmtheit]).
의식은 활동적 의식과 수동적 의식의 통일체(Eins)로서, 그것을 한 측면에서만 파악하는 것은 잘못이다: 가령 의식을 주관의 측면에서만(능력, 경향성, 충동 등) 파악하는 칸트적 사유와 그것을 객관적 측면, 즉 사물의 규정으로 고찰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본질적인 측면은 매개항이다"(GW 6, 291).
이러한 대립, 즉 근거가 객관 속에 있는가 주관 속에있는가 하는 대립으로부터 실재론(Realismus)과 관념론(Idealismus)이 형성된다. 이 두 입장의 대립은 서로 지양되어 합일되어야만 한다.
우선 그는 관념론에서 주관을 대립의 한 항으로 취급하는 방식을 "매우 우수꽝스러운 관념론"(GW 6, 293)이라고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만일 주관이 특정한 상태나 외면성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다면, 이때 주관은 주관이기를 그치게 된다. 그러나 진정한 주관은 "대립하는 양 항들의 통일 상태"로서, 정신, 의식, 절대적인 것이다.
이제 그는 오성이 이름으로부터 복귀한 오성개념(Verstandsbegriff)이 되는 과정을 서술한다. 이때 오성개념은 "특정한 개념일 뿐, 의식의 절대적 통일성은 아니다."(GW 6, 295) 이것은 "절대적으로 무규정적이며 사멸된 연관의 규정, 순수 연관, 무한자의 절대적 공허성, 이성성의 형식적인 면, 통일의 단순하며 절대적인 추상, [고립된] 점으로서의 반성"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의식의 절대적인 단순한 점"은 의식의 절대 존재이지만, 아직은 하나의 부정태로서 절대 존재이다.

  1. 단편 15~19에 대한 요약은 다음의 글을 참조: G.W.F. 헤겔, 『예나 체계기획 I』 단편 15~20(1) 요약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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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일목요연한 요약에 핵심이 꽉 들어차있습니다. 특히,

이 강렬한 구절은 라캉의 거울단계와 상징적 거세로 일컬어지는 과정을 연상시키네요! 그 외에도 인식능력들과 언어에 대한 발언 중 아마도 라캉이 영향을 받은 것 같은 부분이 많은데 시대적으로 근대에 속하던 철학자가 이토록 깊다니, 참으로 놀랍습니다.

저도 블로그 글에서 조종화 교수님의 '헤겔의 모순 개념과 객관성'에 대한 논문을 요약하면서 칸트의 통각 개념과 헤겔의 변증법을 엮어서 제 나름대로의 고찰을 해 보았는데, 저는 아래처럼 오락가락하면서 썼지만, 헤겔은 감성부터 시작해서 깔끔하게 나아가다니 역시 대가는 디테일은 물론이고 그 스케일부터가 남다르군요...

여기서 우리는 헤겔의 기획이 칸트의 은폐된 전제인 '인식과 존재는 분리되어있다'에 대한 비판임을 떠올리면 흥미로울 것이다. 즉, 칸트의 초월론적 통각에서 나타나는 '나는 생각한다ich denke'와 그 아래의 표상들에 대한 관계가 헤겔에게선 다른 방식으로 사유된다. 그렇기에 통각의 구조는 일종의 교착 상태이다.

(...) 즉, 두 규정은 지양을 통한 (형식 내에) 최소차이를 갖는다. 물자체-현상 사이의 관계처럼, 초월론적 통각의 구조가 지양을 통해 열어 밝혀져야만 그것이 비로소 [사후적으로] 반성적 자기관계의 구조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와 나의 경험 사이의 간극이 외적 대립으로 경험되는 것은, 이 대립규정된 양자의 차이가 바로 나 자신의 간극[=내적 간극]임을 알지 못하는 상태인 것이다.

이리하여 헤겔이 말하는 반성적 자기관계, 곧 자기Selbst의 자기관계의 구조를 표현하자면 순수한 자신(즉자적 '나')와 타자로서의 자신(대자적 '나')의 대립을 동시에 포함하여 '부정적인 통일'의 구조를 이룬다. 즉, 이러한 자기관계하는 부정성의 구조는 곧 '자기반성적 실체'로서의 '자기부정적 주체'이며, 이는 개념적 주체의 이중적인 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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