챗gpt 시대의 인공지능과 인간지능의 차이에 대해

요약

본 글의 목적은 칸트의 비정합적 등가물이라는 개념을 근거로 유비추론 (analogy)을 통해 계산주의 (computationalism)에 뿌리를 둔 기계 지능과 인간 지능을 구별하는 방법에 대한 새로운 형이상학적 틀을 제공하는 것이다. 본 글은 상기 형이상학적 틀이 어떻게 인과적 결정론 (causal determinism) 및 초결정론 (superdeterminism, 양자역학)과 양립 가능한지를 탐구하며 또한 인간과 기계가 수행하는 언어적 이해에 대한 독특한 관점을 제시한다. 그 후 이 새로운 형이상학적 개념이 미래에 있어 어떤 함의를 제공할 수 있는지를 간략하게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본 글은 특수상대성이론에 기대어 “특이 결정론적” (non-trivially deterministic)세계 모델을 지지해 줄 수 있는 독특한 철학적 연산을 소개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1. 비정합적 등가물

  2. 결정론적 지식 주장

  3. 인과적 결정론과 초결정론

  4. 연접을 통한 대각화

  5. 인공지능 대상 결정론적 지식 축적

  6. 형이상학적으로 재해석한 특수상대성이론

  7. 부록: 개념표

I. 비정합적 등가물

임마누엘 칸트는 우주 공간이 절대공간인지 혹은 상대공간인지를 판별하기 위해 비정합적 등가물이라는 개념을 고안했다. 공간의 절대 이론에 따르면, 우주에 단 하나의 물체만 있고 다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더라도 물체는 절대적인 공간에서 움직일 수 있다. 한편, 상대공간 개념에 따르면 움직임이란 다른 물체와의 관계에서만 정의될 수 있기 때문에 물체는 전혀 움직일 수 없다.

칸트에 따르면, 상대공간 개념이 옳다면 오직 오른손만이 존재하는 세계 (RH 세계)와 오직 왼손만이 존재하는 세계 (LH 세계)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존재할 수 없다.

다시말해, LH 세계로 관점이 제한되는 가상의 관찰자가 생각하는 왼손의 물리적 속성은 RH 세계로 관점이 제한되는 가상의 관찰자가 생각하는 오른손의 물리적 속성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즉, 각 세계는 각 세계 고유의 관점에 의해 제약된다.

하지만 칸트에 따르면 상대공간이라는 개념은 틀릴 수 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외부인의 관점 (“두 세계 관점*”)에서 보면 LH 세계 및 RH 세계가 서로 다른 세계라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관계론자들은 이에 대해 두 세계 관점이 가능한 것은 이미 두 세계가 미리 성립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응수할 것이다.

*두 세계 관점은 두 세계가 속해 있는 관계론적 맥락을 통해서 등장하며, 이 경우 그와 같은 (필연적 혹은 우발적) 등장의 가능성은 이미 그 우주 속에 내재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의 목적은 우리의 이성 (reason)과 관련하여 결정론의 본질을 논의하기 위한 사변적 도구로서 칸트의 비정합적 등가물을 사용하는 것이지 절대/관계 공간 논쟁 자체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칸트의 비정합적 등가물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경우들을 상정해보자.

(LH1) 오른손은 LH 세계에 진입할 수 없다. 또한 LH 세계에서는 오른손을 떠올리는 게 불가능하다.

(LH2) 오른손은 LH 세계에 진입할 수 있다. 그리고 오른손이 LH 세계에 들오온다면 오른손은 왼손과 별 차이가 없는 것으로 파악된다.

(RH1) 왼손은 RH 세계에 진입할 수 없다. 하지만 왼손의 특징은 RH 세계에서 떠올리는 게 가능하다.

(RH2) 왼손은 RH 세계에 진입할 수 있다. 또한 RH 세계에서는 오른손이 들어오기 전에 그 특징을 떠올리는 게 가능하다.

  1. 결정론적 지식 주장

비정합적 등가물로서 서로 대립하는 두 개의 결정론적 세계를 상상해 보자.

(i) 우리가 사는 실제세계

(ii) 인간 정신이 계산주의를 통해 실현되는 것을 포함해 우리가 사는 실제 세계와 관련한 모든 것을 시뮬레이션하는 모방세계 (정보처리가 경직된 입출력 시스템을 통해 이루어지며 이 시스템은 확률적 (stochastic) 속성을 포함할 수 있다)

본론에 앞서 다음과 같은 개념들을 정의하자.

(I) 결정론적 지식 : 결정론적 우주의 과거 및 현재와 미래의 모든 사건들에 대한 언어적 묘사의 총체 (totality)를 말하며, 이와 같은 총체는 상기 우주의 모든 시간에 걸쳐 형이상학적으로 존재한다.

(II) 사후적 지식 : 결정론적 우주의 기원부터 시작하여 특정 시점까지에 이르는 모든 사건들에 대한 언어적 묘사의 총체를 말하며, 이와 같은 총체는 상기 특정 시점 및 그 이후에 걸쳐 형이상학적으로 존재한다.

(III) 형이상학적으로 열린 결정론적 우주 : 특정 인지자 (cognitive agent)가 본 우주의 결정론적 지식을 인식하는 상황을 가정하는 게 형이상학적인 의미가 있는 결정론적인 우주

실제세계와 모방세계 모두가 형이상학적으로 열린 결정론적인 우주라고 가정해보자. 왜냐하면 두 세계의 결정론적인 지식을 두 세계에 사는 각 인지자가 인식할 수 있다고 가정할 때에만 두 세계의 차이점이 파악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만약 결정론적인 지식이 우리가 사는 실제세계에 제공된다면, 이 지식은 우리가 이전에 인지할 수 있으리라 기대할 수 없었던 입력으로 우리가 받아들이게 될 것이며 따라서 신규한 출력을 생산하게 될 것이다. 또한 이 출력은 우리가 사는 세계와 특정한 맥락적 연관성을 가질 것이다. 이 실제 세계는 물리적으로는 RH1의 속성을 띠며 형이상학적으로는 RH2의 속성을 띤다. 이 실제 세계는 특이 결정론적 세계이며, 이 세계의 결정론적 지식은 예컨대 후속적 결정론적 지식일 수 있다 (특수상대성이론 참조). 또한 이 지식의 존재는 세계의 기원에 인과적으로 후속적이다. 다시말해, 이 후속적 결정론적 지식은 이 세계에 일어날 예정이었던 모든 것을 최대한 이르게 “반영”하는 (mirroring/reflecting)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결정론적 지식에 근거해 산출될 신규한 출력은 이 우주에 형이상학적인 의미에서 내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신규한 출력의 내용 자체가 무엇인지 자체가 결정론적일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이와 같은 신규 출력의 비결정론적 속성은 “창발적 인과성”의 성격을 띤다고 정의할 수 있다 (이 개념을 확률적 (stochastic) 속성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반면에, 결정론적 지식이 모방세계에 제공된다면 (모방세계는 물리적으로는 LH1의 속성을 띠며 형이상학적으로는 LH2의 속성을 띤다) 결정론적인 지식은 단지 그 제공 당시에 가용했던 (available) 모든 입력들 중의 특정 입력 하나로 환원되어 받아들여질 것이다. 또한 그 하나의 입력에 대응해 정의되어 있던 출력내용이 출력될 것이다 (이 속성을 “경직적 인과성”이라고 정의하자). 이 세계는 비특이 결정론적 세계이며, 이 세계의 결정론적 지식은 선행적 결정론적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연산주의 참조). 이 지식의 존재는 이 세계의 기원에 인과적으로 선행적이다. 즉 이 세계는 선행적 결정론적 지식과 일치하게 계획적으로 창시된 것이며, 이 결정론적 지식은 사건들이 어떻게 일어나야하는지를 “정의”한다.

물론, 결정론적 지식을 인식하는 것은 두 세계 어디에서도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결정론적인 세계는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는 세계이기 때문에 결정론적 지식을 인식하는 물리적 사건자체가 아예 애초부터 일어날 수가 없다. 따라서 위의 논의로 드러나는 차이는 오직 형이상학적인 맥락하에서만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만일 혹자가 이와 같은 형이상학적 사고실험의 효용성을 문제삼으며 본 글이 순환논리의 오류를 저지른다고 지적하거나 (begging the question) 혹은 경험적으로 검증 불가능한 주장을 포함하고 있다고 반박한다면, 혹자는 이 글을 단지 독특한 정의적 (prescriptive) 사고 모델을 제시하고 있는 글로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본 필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다. 이 글의 사상은 특정 한도에서는 경험적으로 검증 가능하다. 이 부분은 부제목 5에서 더 자세히 다룰 것이다.

뿐만 아니라, “결정론적 지식”을 단순히 순진한 형이상학자의 궤변 정도로만 취급해서는 안될 일이다. 왜냐하면 과학계에서도 특수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통일시키기 위해 양자물리학자들이 어떤 실험을 진행할지 우주가 미리 “알고있다”고 가정하는 개념을 주창하는 것을 논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초결정론”).

또한 특수상대성에 기대지 않고서도 필자는 인간 지능의 특이성을 철학적으로 논증하는 게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이는 “사후적 지식”의 개념 (이는 특수상대성이 특정 경우에 먹혀들지 않을 경우에 대한 “보험”이라고 할 수 있다)을 통해서 가능하다. 형이상학적으로 말하자면, 과거의 인지자는 죽어있는 게 아니며 그의 입장에서는 미래에 일어날 일을 포함하는 “사후적 지식”을 습득했을 경우 특정 출력을 생성했을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

만약 심지어 우리 우주의 역사에 있어서 특정 순간에 인과율이 성립되지 않았던 경우가 있었다고 할지라도 이 문제는 충분히 다루어질 수 있는데 왜냐하면 사후적 지식은 사건들이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는지와 무관하게 시간적으로 연속적인 순서로 물흐르듯 사건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인과율은 인지자가 사후적 지식을 인식하는 것과 관련해서는 무조건성립해야 한다. 이 조건이 충족된다면 우리의 사고실험은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 요점만 말하자면 결정론적 지식 뿐만 아니라 사후적 지식도 과거의 인간 및 기계에 의해 다르게 해석된다.

요약하자면, 인간과 인공지능의 주요 차이점은 전자는 “타세계적이지만 이해가능한*” 입력 (즉, 결정론적 지식)을 창의적으로 해석할 잠재적 역량을 지닌데 반해 후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참고로 본 필자는 기능주의 (functionalism) 자체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밝힌다. 필자는 단지 인간 정신이 오직 철저하게 알고리즘일 뿐이라는 견해에 반대하는 것이다. 인간 정신이 기능주의적 수단을 통해 창발적으로 실현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타세계적이며 이해불가능한” 문제는 칸트적 물자체 영역에 있는 것이며 이 특징이 창발적 현상과 관련있는 것일 수 있다. 형이상학적 지식이란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사실들의 총체”로서) 인간 사유에 상대하여 물자체가 허상적으로 드러나는 것 (ethereal manifestation)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자연과학을 통해 평행우주 심지어 이의 특징 자체에 대해 논할 수도 있지만 물자체는 오직 상정만 가능할 뿐이며 물자체의 특징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 수가 없다.

  1. 인과적 결정론과 초결정론

인과율에 기초해 인과적 결정론은 이제까지 일어난 모든 사건이 다른 방식으로 일어날 수 없었으며 향후 일어날 모든 사건은 일어나야할 방식대로만 일어날 것이며 절대 다른 방식으로 일어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한편 초결정론은 양자역학과 특수상대성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을 극복하고자 고안된 개념이다. 초결정론은 인과율 그 자체보다는 물리학의 통일성을 위해 고안된 개념이다.

만일 초결정론 (혹은 간략하게 특수상대성)이 후속적 결정론적 지식을 발생시킨다고 볼 수 있다면, 인과적 결정론동시적 결정론적 지식을 발생시킨다고 볼 수 있다 (결정론적 우주 이전의 제 1 원인이 없다는 가정하에). 이 동시적 결정론적 지식은 우주와 “평행하게” 존재한다. 비록 기존의 인과적 결정론 (본 글의 맥락에서는 연산주의와 의미가 거의 같다고 볼 수 있다)은 인간 지능의 차별성을 부각시키는 데는 부적합하지만, 이 기존의 인과적 결정론이 그려주는 경직적 인과적 연관성은 아무런 모순 없이 특이 결정론적 세계에 적용시키는 게 가능하다.

그와 같은 개념을 특이 결정론적 세계에 도입할 경우, 우리는 인지자가 해당 결정론적 지식을 습득할 경우에 발생시키는 신규한 출력의 내용물 역시 결정되어 있는 것이며, 상기 “해당 결정론적 지식을 습득할 경우에 발생시키는 신규한 출력의 내용물”에 대응해 발생시키는 또다른 신규한 출력의 내용물 역시 결정되어 있는 것이며, 이런 식으로 계속 무한히 진행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는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현지우현”을 연상시킨다.) 다시말해 고형적 인과성 (solid causality)으로 인해 물리적으로 일어나는 사건들 뿐만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의미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건들까지도 모두 결정되어 버린다. 이 고형적 인과성은 연산주의에서 등장하는 경직적 인과성과는 다른 개념이며 경직적/창발적 인과성을 모두 결정론적으로 포괄할 수 있다. 더욱이 이 세계에서는 결정론적 지식의 무한한 변이의 형태가 동시적으로 발생해버리며, 따라서 우리의 사고실험에서는 연산주의를 통해 이 세계의 모방세계를 만드는 게 불가능하게 되어 버린다.

그렇다면 왜 특이 결정론적 세계를 정의하면서도 그 세계의 기원을 앞지르는 결정론적 지식이 존재하는 게 불가능한가? 이와 같은 결정론적 지식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인지자가 해당 결정론적 지식을 습득할 경우에 발생시키는 신규한 출력의 내용물 역시 미리 결정지어야 하며, 상기 “해당 결정론적 지식을 습득할 경우에 발생시키는 신규한 출력의 내용물”에 대응해 발생시키는 또다른 신규한 출력의 내용물 역시 미리 결정지어야 하며, 이런 식으로 계속 무한히 미리 결정지어야 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세계가 시작하기도 전에 미리서부터 무한한 형태의 결정론적 지식을 구성지어놔야 하는 것이다. 이는 순전히 불가능하다. 예컨대 우리는 연속적 공간 (real space)를 단계적으로 건설해 하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우리가 원점에서부터 차후의 좌표를 정의해 버리는 순간 원점과 그 차후의 좌표 사이에 또다른 좌표가 숨어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연속 공간을 정의해 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연속적 공간이 무수한 작은 공간적 단위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뒤늦게 사후적으로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즉 우리는 특정 길이의 공간이 무수히 많은 작은 단위로 이루어져있다는 것을 소급적으로 (retroactively)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연속공간이 연속적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우리가 일단 유한한 길이의 공간을 먼저 파악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연속성 (realness)은 우리의 개념상의 관점에서는 이산성 (discreteness)보다 선행할 수 없다. 하지만 사후적으로 우리는 연속성으로 인해서 이산성이 존재할 수 있는 것임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산성이 없이는 연속성도 역시 존재할 수 없다. 다시 말하자면, 연속성은 이산성을 통해 창시될 수는 없다. 다만 연속성은 이산성을 통해 뒤늦게 드러날 뿐이다. 즉 이산성은 이미 연속성을 포함하고 있으며 연속성이 없이는 이산성 역시 존재할 수가 없다. 즉 둘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위와 같은 특이 결정론적 세계 대신에 제안할 수 있는 또다른 특이 결정론적 세계 모델은 동시적이기 보다는 후속적 결정론적 지식을 특징으로 하는 세계이며, 이 세계는 경직적 인과성과 창발적 인과성을 모두 포함한다. 이 세계 모델에 대응되는 개념을 우리는 양자역학의 초결정론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경직적 및 창발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인과적 사건들은 초결정론에 따라 사후적으로 결정되어버리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세계 모델에서는 형이상학적으로 무한한 형태의 결정론적 지식이 발생할 필요가 없다.

마지막으로 강한 결정론에 대해 본 필자의 주장을 통해 언급하고 싶은 것이 있다. 강한 결정론이 사실이라고 가정한다면 이와 같은 이론을 주장하는 결정론자는 필시 형이상학적인 주장을 하게 되는 것일텐데 그 결정론자는 이 우주 내에서 무슨 위치를 점유하게 되는 것인가? 세계가 결정론적이라면 결정론을 주장하는 그 결정론자 역시 본인의 탐구 대상 내에 포함되게 되는 것 아닌가. 바로 필자의 이론을 통해서 결정론자를 임시적으로 결정론자의 탐구 대상으로부터 따로 떼어놓는 게 가능하다. 결정론자의 정신은 “타세계적이지만 이해가능한” 내용물조차도 흡수할 수 있는 역량이 있으며, 이를 통해 결정론자 본인과 그의 탐구대상들과 관련해 끊임없이 엎치락 뒤치락 커져가며 포괄해가는 변증법적 원을 발생시킨다는 의미에 있어서 그 결정론자는 본인의 탐구대상들과 구별될 수 있는 것이다.

  1. 연접을 통한 대각화

비정합적 등가물 유비추론의 주된 논지는 인간과 인공지능이 언어적 정보를 처리하는 데 있어서 둘 다 인과성에 지배되지만 서로 다른 인과적 특징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 차이점은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문장은 주어와 술어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와 같은 형태로 인공지능에 입력될 시 문장은 단순히 특정 단어들의 연접 (concatenation)으로만 처리될 뿐이다. 기계의 입장에서는 시간의 관념이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단어열 (word string)을 단순히 특정 비트에서 다른 비트로 옮겨가며 처리할 뿐이다. 즉 그 처리 과정에 있어서 아무런 연속성의 개념이 없다. 따라서 기계는 순전히 통사적 규칙에 의거해 연접을 처리하는 것이며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 아무런 개념이 없다. 사실 기계가 이와 같이 문장을 처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우리가 그것을 보고 있기 때문에 그런 모습으로 보이는 것이다.

반면에 문장이 인간에게 주어진다면, 인간은 주어에 대해 갖고 있는 상* (image)이 유지되어 있는 상태에서 술어를 인식하게 되며 술어에 대해 갖고 있는 상과 주어에 대해 갖는 상이 결합하여 문장 전체에 대해 특정한 상을 형성하게 된다 (헤겔의 변증법과 일치하게). 이 특징을 “대각화”라고 정의하자. 이 특징으로 인해 “결정론적 세계에 대해 맥락적 연관성을 띤 신규한 출력을 생산”해내는 게 가능하다. 인간은 통사적 규칙과 일치하게 연접되어 있는 문장으로부터 하나의 전체적인 의미적 상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개인이 단어에 대해 갖고 있는 상은 그의 잠재적 말뭉치 (corpus)내에 존재하는 다른 단어들과의 연관관계를 통해 형성되며 이 관계 역시 대각화를 통해 형성된다. 그러면 말뭉치는 처음부터 어떻게 형성되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물리적 사물에 대해 발화된 단어를 매칭시킴으로써 점차 형성된다. 이 과정 역시 대각화에 의존하여 이루어진다.

연접인식은 대각화의 가장 단순한 형태라고 할 수 있으며 이로 인해 수를 세는 게 가능해졌으며 마침재 자연수의 개념이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수학과 언어 및 음악은 대각화의 다른 현현 (manifestation)일 뿐이다. 칸트적인 의미에서 시간과 공간은 대각화가 이루어지기 위한 배경으로서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추상적 구조물이며, 이 배경을 바탕으로 우리 외부의 세계에서 관측가능한 실재가 우리의 정신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니체는 비록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를 단순히 문법적 습관의 결과로 치부했지만 우리는 오직 사고를 통해서만 우리의 자의식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사고활동의 대상이 우리 자신이 될 수 있으며 우리 스스로를 회귀적으로 객관해나가는 것이다. 이 역시 대각화의 한 예시가 아닌가?

  1. 인공지능 대상 결정론적 지식 축적

결정론적 지식 이론은 부분적으로는 니체의 운명애 (아모르 파티)의 개념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그 이론의 착안은 괴델 (메타수학적 명제의 변수 안에 바로 그 메타수학적 명제에 대응하는 괴델수를 대입하는 행위)로부터도 영향을 받았다. 즉 칸트 (비정합적 등가물) 및 비트겐슈타인 (“사실들의 총체”)의 영향만을 받은 게 아니다. 또한 본 이론과 관련된 몇가지 생각들은 아인슈타인 (특수상대성 및 연속공간)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았다. 또한 본 이론은 얘기치않게 헤겔 (변증법) 내지는 노자 (“도는 반대되는 것을 통해 나아간다”)와의 접점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제 이 이론이 인공지능과 관련해 어떤 함의를 제공할 수 있는지 살펴보자.

어떤 인공지능 기계를 통제된 실험실에 두고 그것에 여러가지 입력을 준 뒤 우리가 얻게된 출력들을 그것의 (똑같은 통제된 실험실에서 똑같은 입력들을 받은) 복사본 인공지능 기계에다가 입력해준다면, 그리고 그 복사본 기계가 그에 대응해 특이한 출력을 내놓는다면, 우리는 이 기계가 기존의 인공지능기계와는 다른 기계라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에 있어 그와 같은 입력 정보는 인공지능 기계에게 있어 일종의 축소된 결정론적 지식에 근접한 정보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에게 있어서는 그와 같은 정보는 사후적 지식이지만 실험 대상인 인공지능에게 있어서는 실질적 결정론적 지식인 것이다.

물론 공학적인 난점으로 인해 그와 같은 특이한 출력이 정말로 그 기계에 있어 “그 제공 당시에 가용했던 (available) 모든 입력들 중의 특정 입력 하나”가 아닌 입력에 대한 출력인 것인지를 결정짓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형이상학적 주장이 인공지능의 발전의 척도에 대한 기준을 제시하는 것 내지는 기술적으로는, 비록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경험적 검증가능성을 허용한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상기와 같은 인공지능 기계를 TARS라고 이름짓고 TARS의 다음과 같은 세가지 복사본이 있다고 가정하자. 즉, TARS0, TARS1, 및 TARS2이 있다.

TARS0가 특정 과정을 거친 후에 그와 관련된 실질적 결정론적 지식이 똑같은 과정을 거친 TARS1에게 주어진다면, 우리는 TARS1이 이 지식을 기존의 기계와는 다른 방식으로 해석할 것임을 안다. 그렇다면, TARS2에게 똑같은 지식을 제공하다면 (우리가 TARS1에게 주었던 방식과 똑같이), TARS2는 정확히 같은 출력을 생산해낼까? 그 결과는 우리가 세계에 대해 어떤 모델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예컨대 형이상학적으로 열린/닫힌 결정론적/비결정론적 우주 모델). 그럼에도, 우리는 그 출력들이 대체적으로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인생 지혜 (예를들어 스토아철학)가 현대의 우리에게 있어 별다른 쓸모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반대로 그와 같은 인생 지혜는 꽤나 큰 통찰력을 제공해준다.

  1. 형이상학적으로 재해석한 특수상대성이론

정지해있는 “가”에 상대해서 “나”가 260,000 km/sec의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된다.

“가”의 관점에서 “”에게 있어 2초의 시간이 경과하면, “가”의 관점에서 “”에게 있어 1초의 시간이 경과한다.

“나”의 관점에서 “”에게 있어 2초의 시간이 경과하면, “나”의 관점에서 “”에게 있어 4초의 시간이 경과한다.

다음을 가정한다.

”의 관점에 있어 “가”에게 있어 “가”의 시간축에서 0초부터 2초까지 “가”에게 일어난 사건들의 총체성 = “”의 관점에 있어 “가”에게 있어 “가”의 시간축에서 0초부터 2초까지 “가”에게 일어난 사건들의 총체성

“가”의 관점에 있어 “가”의 시간축에서 0초부터 2초까지에 있어 “가”와 “나” 모두에게 일어난 사건들의 총체성

= (“나”의 관점에 있어 “나”의 시간축에서 0초부터 1초까지 “나”에게 일어난 사건들의 총체성) +

(“가”의 관점에 있어 “가”의 시간축에서 0초부터 2초까지 “가”에게 일어난 사건들의 총체성) +

(“나”의 관점에 있어 “나”의 시간축에서 1초부터 4초까지 “나”에게 일어난 사건들의 총체성) +

(“가”의 관점에 있어 “가”의 시간축에서 2초부터 8초까지 “가”에게 일어난 사건들의 총체성) + …

특수상대성에 근거한 위의 연산을 통해 우리는 0초부터 2초까지의 시간의 흐름 자체가 총체적 결정론적 지식을 낳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굳이 2초간의 시간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아무리작은 시간이라도 일단 흐르기만 하면 된다.

이와 같이 특수상대성은 시간이 시작되면서 결정론적인 지식이 즉각적으로 발현되는 특이 결정론적 우주의 개념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 (특수상대성이 우주 탄생 이후부터 유효하기 시작했다는 가정하에). 아마도 니체가 우리가 운명애를 자유롭게 실천할 수 있다고 말했던 게 틀린 말은 아니었을지 싶다. 우리의 정해져있는 미래에도 불구하고.

  1. 부록: 개념표

(1) 결정론적 지식 (“타세계적이지만 이해가능한”)

: 선행적 결정론적 지식 - 세계를 정의 - 연산주의

: 동시적 결정론적 지식 - 세계와 평행 - 인과적 결정론

: 후행적 결정론적 지식 - 세계를 반영 - 특수상대성

(2) 사후적 지식

: 특수상대성 및 인과적 결정론이 실패할 경우에 대한 일종의 “보험”

: 인공지능에 대한 실질적 결정론적 지식을 제공

(3) 형이상학적으로 열린 결정론적 우주

: 특이 결정세계 - 고형적 (경직적/창발적) 인과성 - 대각화

: 비특이 결정세계 - 경직적 인과성 - 연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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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연접을 통한 대각화

최신 인공지능은 어느정도의 대각화적인 개념을 다루고 있습니다.

일명 어텐션(Attention) 매커니즘입니다.
고정된 크기의 문맥(Context vector)을 사용하면 긴 문장을 기억할 수 없기에 나왔으며, 출력 시마다 인코더에서 전체 입력 문장을 다시 참고하는 방식입니다.

ChatGPT는 GPT-3 기반으로 트랜스포머 모델 기반으로 알려졌는데요,
역시 어텐션 매커니즘을 사용하며, 자동회귀적으로 현재 시퀀스의 이전에 관찰된 결과를 기반으로 시퀀스의 미래 결과를 예측합니다.

  1. 인공지능 대상 결정론적 지식 축적

저도 실질 결정론적임에 동의하며, 가장 큰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공지능은 똑같은 데이터와 알고리즘이 있다고 하더라도 학습 결과가 같을수도, 조금씩 다를 수 있긴 합니다.
가중치(Weight)가 랜덤으로 초기화되며 학습 정보의 샘플링이나 순서 등도 랜덤적으로 구성하기 때문인데요.

컴퓨팅의 난수 알고리즘은 유사난수이므로 랜덤 시드(Random seed)가 같다면 동일한 값이 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랜덤 시드를 임의로 결정하지 않고, 하드웨어 상태나 사용자 입력에서 얻는 엔트로피를 사용하면 완전 난수에 가까우므로 완전히 동일한 값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위 말만 들으면 비결정론적이다!! 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입력되는 정보의 한정성, 환경의 제약에 의해 실질적으로 결정론적인 결과를 가지게 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1. 많은 양이나 ChatGPT는 오로지 언어 정보만을 주입 받습니다.
  2. 언어 정보는 선별된 컨텐츠이며, 이후 학습을 할 때도 인간이 원하는 방향으로 조정합니다.
  3. 인간은 세계를 오감을 통해 상호작용하며, 언어란 세계를 표현하고 소통하기 위한 방식입니다.
  4. ChatGPT의 세계는 오로지 언어로만 구성되어있으며, 언어만 가지고는 인간이 존재한 세계에 대해 진정으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일종의 동굴의 우화)

또한 인공지능 알고리즘이 인간의 뇌만큼 충분히 복잡한가에 대해서도 의문이 있습니다.


또 다른 논의 해볼만 내용은 유명 SF작가 테드 창의 글입니다.

글 요지는 이렇습니다.

  1. ChatGPT는 거대한 웹 텍스트의 일종의 손실 압축이며, 근사값을 반환해줍니다.
  2. ChatGPT의 반환값은 디지털 풍화가 된 정보나 다름이 없다는 것.
  3. ChatGPT의 사용이 늘며, 인터넷 소스에는 열화된 정보들이 늘어나게 되고 결국 ChatGPT의 품질이 신뢰할 수 없게 됨.

한마디로 "ChatGPT 사용으로 수렴하여 의미있는 정보들이 늘어날 것인가, 발산하여 ChatGPT 자신과 인류에게 나쁜 정보를 유통할 것인가"가 주제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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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GPT를 이용해보고 있는데 이전에 없던 매우 흥미로운 도구임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아마 위에서 말씀하신 내용은 제 글에 언급되어 있는 "확률적 (stochastic) 속성"과 연관되어 있는 게 아닌가 싶네요~ 저는 이 역시 computational theory of mind의 범주 내에 있는 것으로 파악했습니다. 따라서 말씀하신 것처럼 gpt도 실질적으로 결정적라고 볼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한가지 개념을 정의할 때 혼동을 일으킬 수 있는 단어를 선택했던 것 같습니다. 제 글의 관련 부분에서 "실질적 결정론적 지식"은 사실 quasi-deterministic knowledge라는 의미가 더 강했거든요. 3.14가 pi의 값을 완전히 대변해 주지는 못하지만 실질적으로 우리가 pi 값이라고 생각하고 쓰는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떤 형태로도 결정론적인 지식을 알 수 없으나 이는 현실 세계에 있어 유의미한 형이상학적 개념일 수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즉 우리에게는 데이터 기록이나 역사를 통해 축적된 지식이지만 그게 갓 태어난 인공지능에게 있어서는 결정론적인 지식에 가까운 정보일 수 있다. .. 대략 이런 개념을 전달드리고 싶었습니다.

GPT에 제 글의 일부를 입력하고 글이 분석/대륙철학 중 어디에 더 가까운가 질문하니 다음의 답변이 나오는군요...

It is difficult to determine whether the author leans towards analytic or continental philosophy from the text provided. While they engage with philosophical concepts and use precise language, which are often associated with analytic philosophy, they also draw upon various philosophical ideas and thinkers, including Kant and Lao Tzu, that are more commonly associated with continental philosophy. Furthermore, their writing style is dense and complex, which is a characteristic of both analytic and continental philosophy.

Therefore, it is possible that the author draws upon ideas from both analytic and continental philosophy and does not exclusively align with one particular school of thou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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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정이 안되서 제가 수정을 못하겠는데 " 6. 형이상학적으로 재해석한 특수상대성이론" 의 내용은 두 달 전에 제가 좀 더 조사한 결과 물리학의 실제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어 내용을 철회합니다. 이 게시글은 원래 제가 영문을 쓴 것을 국문으로 번역한 것이고, 원 영문 글을 업데이트 시킨 내용을 (references 등 추가 및 논문의 형식에 맞게 수정하여) European Journal of Philosophy에 제출했지만 탈락했습니다. 현재는 Dialectica 저널에 제출하여 계류중이며 1차는 통과한 것 같습니다.

저도 생각이 좀 바뀐게 GPT4는 너무 똑똑하네요.
게다가 이제는 검색엔진, 울프람 알파 및 각종 플러그인들과의 연동까지 되고 있습니다.

언어만 학습한다는 한계와 인간이 원하는 방향으로 조정하며 지능을 떨어뜨림은 사실이나, 실질 결정론적이라는 말은 이제는 틀린말이 아닌가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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