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ttes Sein ist im Werden (에버하르트 융엘) 서론 번역

개신교 조직신학자 에버하르트 융엘의 "Gottes Sein ist im Werden" 서론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저서는 여전히 독일어권 조직신학 분야에서 신론을 다룰 때 우선적으로 참고라는 책으로서 바르트 신학을 불트만 학파의 사유와 연결하는 중요한 책입니다. 향후 신간이 될 때마다 나머지도 번역해보려고 합니다.(일단 각주는 빼고 번역해보았습니다.)

서론 I

상황에 대하여

하나님의 존재(Gottes Sein)가 논의되고 있다. 최소한 현재 개신교 신학에서 진행 중인 열정적인 논쟁은 이렇게 묘사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이 논쟁의 대표자들로는 오늘날 헤르베르트 브라운 (Herbert Braun)¹과 헬무트 골비처 (Helmut Gollwitzer)²가 있다. 그러나 이 논쟁은 이미 오래전에 칼 바르트 (Karl Barth), 루돌프 불트만 (Rudolf Bultmann), 그리고 프리드리히 고가르텐 (Friedrich Gogarten)의 작업을 통해 준비된 것이었다.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라는 질문은 루돌프 불트만의 전 작품을 관통하는 질문으로, 그는 이를 이미 1925년에 명시적으로 제기하였고, 이는 그의 가장 최근 출판물에 이르기까지 그의 사고를 분명히 지배하고 있다. 프리드리히 고가르텐의 질문은 불트만의 질문과 상대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반면, 칼 바르트의 질문은 다른 방향으로 지향되어 있다. 바르트는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묻는 대신, "하나님에 대해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에 대해 말해야 하는가"를 묻는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의미 있고 가능한 것은, 모든 인간적 원인을 근본적으로 초월하며, 따라서 인간적으로는 정당화될 수 없고 단지 사실적으로 일어나며 인식될 수 있는 하나님의 지시(anweisung)에 근거한 인간의 언어로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고 전제한다. 따라서 불트만과 바르트의 신학적 접근 방식의 차이는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불트만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언어 자체가 본질적으로 시험되어야 할 주제인 반면, 바르트에게는 하나님의 존재(Sein Gottes)에 대한 언급이 중심이 된다. 하지만 두 신학자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언어는 기독교적 언어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해야 한다.

헬무트 골비처(Helmut Gollwitzer)의 저서 **"신앙 고백에서 하나님의 존재(Existenz Gottes im Bekenntnis des Glaubens)"**는 칼 바르트(Karl Barth) 신학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신학이 하나님의 존재 문제와 관련하여 갖는 함의를 드러내고자 한다. 골비처에 따르면, 불트만 신학의 경향으로 인해 다음과 같은 위험이 발생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존재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인간 존재를 변화시키는 만남의 사건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이라는 것이 이 사건과 경험의 이름일 뿐이라고 여겨질 위험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사건 외부에서 하나님의 실재적 존재를 고백하는 것은 이미 대상화하는 형이상학으로의 타락이라고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골비처는 이러한 위험이 **헤르베르트 브라운(Herbert Braun)**의 사상에서 현실화되었다고 보고 있으며, 바로 이러한 위험을 방어하기 위해 그의 책이 쓰였다.

이 교훈적인 책에 대해 두 가지 주요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

첫째, 골비처(Gollwitzer)는 하나님에 대한 "있다"라는 진술의 필요성을 하나님에 대한 "있다"라는 진술의 부적합성과 변증법적으로 대조시키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속적 의미에서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을 기준으로 보면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존재한다'는 것을 기준으로 보면 세속적 모든 것에는 존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조의 기적은 영원에서 영원까지 홀로 '존재하시는' 분께서 '존재하지 않는 것'을 불러 '존재하게 하시는' 데 있다. ... 그의 존재는 자신과 동일하지 않은 다른 존재를 허락하여, 자신과 나란히 또는 바깥에 두고, 그의 자유로운 베풂을 통해 살아가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Deus manet!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신다!) "

여기서 발생하는 논리적 모순들은 무시될 수도 있지만, 이러한 설명에서 비롯되는 신학적 모순은 간과할 수 없다. 세속적 의미에서 존재라고 말하는 것을 기준으로 할 때,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계 역사 속의 한 부분이 아니고, 역사 속의 주체가 아닌" 이 하나님에 대해 말하자면, 그는 역사 속의 주체로 나타나며, 행동하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역사 속의 주체로서"라는 표현은 "가면을 쓰고"라는 의미가 아니라, "역사 속의 주체라는 존재 방식으로서"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이 경우, "역사 속의 주체라는 존재 방식으로서" 역사 안에서 만나고 존재하는 하나님에게는, "그의 존재라고 말할 수 있는 기준에서 보면...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비존재"가 해당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그의 비존재에 대해 말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게 된다. 이 모순은 더욱 심화되는데, 이는 역사적 주체의 존재가 필연적으로 끝나는 존재, 즉 죽음을 향한 존재라는 점을 고려할 때 그렇다. 만약 하나님께서 역사적 주체라는 존재 방식으로 존재하신다면, 그에게는 단순히 "그의 존재라고 할 수 있는 기준"에서뿐만 아니라, "세속적 의미에서 존재라고 할 수 있는 기준"에서도 비존재가 속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Gollwitzer의 관점에서 하나님이 역사적 주체라는 존재 방식으로 계셨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 모순은 다시 한번 심화되는데, 이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모든 논의가 (적어도 또한) 그리스도론적으로 근거를 두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적 주체"로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논의를 가능하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 "역사적 주체"라는 존재 방식으로 계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경우, 앞서 언급된 모든 문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끝나는 존재, 즉 그의 죽음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갖는 의미라는 그리스도론적 질문으로 모이게 된다. 만약 우리가 가현설적(그리스도의 인성이 단지 겉모습에 불과하다는 주장) 그리스도론을 피하려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고려할 때 하나님의 비존재에 대해 말하는 것이 불가피해 보인다.

이 문제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서의 부활이라는 사실로 성급히 완화하려 하기보다, 오히려 여기에서야말로 헬무트 골비처(H. J. Iwand의 주장에 따라 표현된)에 의해 요구된 바와 같이 “하나님이 계신지에 대한 질문을 끝까지 견뎌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초대교회의 그리스도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제기하는 문제를 고정시키기 위해 “성 삼위 중 하나가 육체로 고난을 겪었다(ἕνα τῆς ἁγίας τριάδος πεπονθέναι σαρκί)”는 신성 고난설(theopaschitism)의 공식을 통해 시도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라는 하나님의 존재를 의문시하는 사건이 삼위일체적 진술을 요구한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헬무트 골비처의 책에 대한 두 번째 반론으로 넘어가기 전에 첫 번째 반론을 요약하는 것이 적절하다. 골비처가 의도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존재를 역사적으로 사고하려는 시도가 충분히 이루어졌는가? 하나님을 인간의 '나-너(I-Thou)' 관계에 유추하여 만나는 "인격"으로 생각하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그리스도론적 관점에서 계시의 개념을 이해한다면, 하나님의 존재가 무(無)에 의해 심각하고도 실제적으로 위협받는다는 점을 다룰 필요가 있지 않은가? 오히려 하나님의 계시를 기독교적으로 이해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기준은 바로 이 계시에서 하나님의 존재가 무에 노출되며, 이러한 노출로 인해 (비로소 결정적으로) 무 또한 하나님의 존재에 노출된다는 사실이 아닌가? 바울은 바로 이 하나님의 존재와 무가 만나는 사건에서 일어난 결과로 부활하신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으로 선포한 것이 아닌가(고린도전서 2:2)? 또한 절규하는 목소리로 숨을 거두신, 아니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하신 예수에 대해 이방인 백부장이 "참으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라고 고백한 것(마가복음 15:39)은 우연이 아닌가?

둘째: 골비처의 책에 제기될 수 있는 또 다른 반론은 첫 번째 반론과는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는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반론이 역사적 존재로서의 한 인간 안에서 하나님의 존재가 나타나는 궁극적 구체화에서, 곧 죽음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존재의 무능력에 초점을 맞춘 반면, 두 번째 반론은 역사적 존재로서 하나님이 존재할 수 있는 그 자체의 능력, 즉 하나님의 고유한 능력에 대해 묻는다. 골비처는 분명히 하나님이 이러한 존재 방식으로 존재하실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존재하심이 자유롭고 무조건적으로 베푸시는 선물"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하나님 자신에게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어떤 필요성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유로운 주권적 결정, 즉 그분의 "근거 없는 자비"에 기초한 것이며, 인간은 이에 대해 단지 전적으로 감사를 드릴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골비처에 따르면 "하나님은 그 자체로 존재하신다"는 명제를 회피하거나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골비처는 "자체로 존재하심(An-und-für-sich-sein)"에 대해 주장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주권적 결정(freie Herrenentscheidung)"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것은 "근거 없는 자비(grundlose Barmherzigkeit)"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하나님의 "자체로 존재하심"과 역사적 존재로서 나타나는 "내재적 주체(innergeschichtliches Subjekt)"로서의 하나님의 존재 방식 간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 제기된다. 골비처는, "내재적 주체로서의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 단지 "인격적인 관계(Ich-Du 관계) 안에서만 규정될 수 있는 존재 방식"임을 강조하며, 이러한 존재 방식의 근거가 "하나님의 본질(Wesen)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Wille)"에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역사 속에서 나타나는 "계시로서의 하나님"의 존재 방식에서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추론은 불가능하며, 단지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추론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역사 속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의지로부터 하나님의 영원한 의지, 곧 하나님의 자유로운 사랑의 의지로 추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문장은 놀랍습니다. 골비처는 문맥에서 분명히 드러나듯이, 칼 바르트를 따르면서 **"존재의 유비(analogia entis)"**를 피하고 대신 **"관계의 유비(analogia relationis)"**를 옹호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그것이 정말로 가능할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됩니다. 특히, 하나님의 본질(Wesen)과 하나님의 의지(Wille)를 구별하는 것, 즉 "하나님의 의지의 본질"과는 다른 "하나님의 본질, 즉 하나님의 속성으로서의 본질"을 구분함으로써, 오히려 하나님의 존재 안에 형이상학적 배경이 남겨지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이 형이상학적 배경은 하나님의 역사적 계시 행위와는 무관한 것으로 간주될 위험이 있습니다.

골비처가 이것을 의도하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유로운 사랑으로 이해되는 **"그분 의지의 본질(Wesen seines Willens)"**이 동시에 **"그분 본질의 의지(Wille seines Wesens)"**로 이해되지 않는다면, 이러한 결과를 피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의지 안에 그분의 본질이 결정된 것이 아닌가요? 따라서 **"자유로운 사랑의 의지로서의 하나님의 영원한 의지"**는 그러한 사랑 안에서 그분의 존재와 본질을 결정하는 자유로운 주권적 결정으로 인해, 이미 하나님의 계시를 향한 방향성을 갖고 있지 않나요? 하나님의 존재가 역사 안에서 그리고 역사로서 드러나는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존재를 계시를 가능하게 하는 힘 안에서 이미 역사적인 존재로 이해하도록 강요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를 그 계시의 역사적 실현을 가능케 하는 힘으로 생각할 때, 이것을 **삼위일체적인 존재(trinitarisches Sein)**로 이해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결론적으로, 골비처가 주장한 **"하나님의 그 자체로 존재(An-und-für-sich-Sein)"**를 기독교적으로, 즉 계시의 관점에서 이해하려 한다면,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든 이미 역사적인 존재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 역사적인 존재 안에서 하나님은 성부(Father) , 성자(Son) , **성령(Spirit)**으로서, 말하자면 이미 "우리의 하나님"이 된 것이 아닌가요? 하나님의 계시의 역사적 능력은 **죽음의 무력함(2 고린도서 13:4)**까지 준비된 상태로, 성부, 성자, 성령으로서 하나님의 존재적 역사적 힘 안에 이미 뿌리를 두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여기서 제기된 골비처(Gollwitzer) 책에 대한 두 가지 반론은 모두 "하나님의 존재"라는 개념을 왜 즉각 삼위일체적으로 구체화하지 않았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귀결됩니다. 특히, 이러한 삼위일체적 구체화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의 역사성을 끝까지 유지하는 주장을 할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골비처가 **"하나님의 존재와 현실성에 대한 기독교적 담론의 의미를 명확히 하는 과정에서, 이를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밝히지 못했다"**고 인정하면서도, 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삼위일체적 구체화를 포기했는지는 설명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만약 삼위일체적 구체화가 기독교적 하나님의 존재 개념에 교리적으로 필수적이라면, 이 구체화를 생략한 것은 더욱 의아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골비처가 제시한 비판적 관점, 즉 **"칸트(Kant)는 삼위일체 교리를 사용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는 언급은 이러한 의문을 더 강하게 합니다.

골비처(Gollwitzer)의 책은 그가 놓친 부분을 보완하도록 독자들에게 자극을 줍니다. 이 글에서는 칼 바르트(Karl Barth)의 관련 사상을 해석함으로써 이를 수행하고자 합니다. 골비처가 자주 인용한 **『교회교의학(Kirchliche Dogmatik)』**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골비처의 흥미로운 저서 **『믿음의 고백 안에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암묵적 비판의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이 글에서 전개할 바르트의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사상 해석은 **『교회교의학』**에만 초점을 맞추며, 바르트의 사상을 풀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현대 신학자들이 이러한 바르트 사상 풀이를 통해 서로 진지하고도 우호적으로 경청하며, 상대방의 입장을 비판하는 동시에 자신의 입장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할 준비를 갖추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성과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아가, 이 해석 방식을 통해 나의 스승인 **에른스트 푹스(Ernst Fuchs)**가 우리를 훈련시킨 해석학적 작업이 어떻게 바르트의 저작에 대해 합당한 이해를 제공하는지를 드러낼 수 있다면, 개인적으로도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현재 교리적 논의에서 다소 침체된 듯한 시대에 복음주의 신학의 기본 조건으로 남아야 할 것입니다.

서론 II

칼 바르트의 하나님 존재에 대한 책임 있는 언설

바르트는 신학자로서 사고합니다. 이 문장이 처음에는 사소해 보일 수 있지만, 바르트에게 있어 **“신학자로서 사고한다”**는 것은 **“철저하고 배타적으로 신학자로서 사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전혀 사소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던지는 질문에서도 드러납니다. 바르트의 질문은 자족적인 사고에서 출발하지 않으며, 어떤 문제를 구성하여 그것을 극단적이고 포괄적인 의심을 통해 검토하려는 시도도 아닙니다. 신학적 관점에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묻는 질문은 그저 하나님의 존재를 따르는 질문일 뿐입니다. 즉, 신학적 질문에서 논의되는 하나님의 존재는 질문에 선행한다는 것입니다. 이 선행성(prävenient)은 본질적으로 엄격히 이해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신학적 질문에 앞서 존재하지만, 단순히 그 질문의 **“전제”**로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모든 진정으로 급진적인 질문은 전제를 뛰어넘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존재를 사고와 질문의 전제로 상정하고 이를 주장하더라도, 이 전제조차 질문과 사고의 도전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존재는 신학적 질문의 전제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존재는 모든 신학적 질문에 앞서며, 질문의 길을 열어주고 질문을 생각의 여정으로 이끕니다. 이 여정에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질문은 하나님의 존재를 따라가며 사유합니다. 이 점에서 하나님의 존재는 **선행적 성격(prävenienter Charakter)**을 가집니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질문이 인도되는 여정은 일반적인 길이 아닙니다. 바르트는 신학이 **“일반적인 사고의 길”**을 다룬다는 생각을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그러한 생각은 신학적 질문이 걷고자 하는 길이 바로 하나님의 존재가 이미 지나간 길, 그리고 그 자체로 길을 만들어준 길이라는 점을 간과하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신학적 질문이 따라가야 할 길은 특별한 길입니다. 바르트가 이 특별한 길을 이해하기 위해 사용한 신학적 개념은 **“계시(Offenbarung)”**입니다.

하나님의 존재가 (인간의 질문에 선행하여) 간다는 주장은 다소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사용하는 표현 방식을 인간 중심적(anthropomorph) 또는 신화적이라고 부르며 그 이상함을 완화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한다면 아무것도 설명되지 않을 뿐 아니라, 문제의 심각성이 과소평가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 이상함을 우선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이상함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필요해 보인다. 그 이상함이 결국에는 귀중한 가치로 드러날 수도 있다. 하나님의 존재가 간다는 것, 그리고 바로 그렇게 해서 모든 인간의 질문에 앞서 나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 글에서 설명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교리를 다루며, 해석학적 문제를 그 가장 극단적인 농도로 직면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는 신학의 해석학적 문제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의 존재가 '간다'는 사실이야말로 해석학적 문제 그 자체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존재가 '간다'는 사실로 인해 비로소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만남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바로 이 하나님의 존재의 움직임에 의해 이루어지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만남 속에서 해석학적 문제는 근본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하나님의 존재의 움직임에 의한 만남은 바르트에 따르면 무엇보다도 선택하시는 하나님과 선택받은 인간 사이의 만남이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따라서 인간 예수의 존재는 우리를 해석학적 문제와 직면하게 한다. 이는 하나님의 이해뿐 아니라 인간 자신과 세계에 대한 이해와도 관련된 문제이다. “우리는 그 어떤 높이나 깊이, 그 어떤 과거나 미래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없으며, 그와 동시에 이 사람, 곧 인간 예수와도 만나야만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이해하지 않고는 우리 자신과 세상을 이해할 수 없으며, 또한 이 사람을, 곧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과 세상을 원하시고 창조하신 은혜로운 뜻을 증언하는 사람으로 이해하지 않고는 우리 자신과 세상을 이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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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융엘이 매우 중요한 신학자인데도 이상하게 국내에서는 아직까지도 거의 논의가 안 되는 것 같더라고요. 이 참에 번역을 하신 다음 정식 출판을 시도해 보시면 어떨까요? 1988년에 나온 백철현 선생님의 아주 오래된 한국어 번역본이 있긴 하지만, 이제 구하기도 어려운 데다 너무 옛날 번역이라 재검토도 필요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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