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단어 good의 한국어 번역에 대해

안녕하세요. 비전공자의 처지에서 여러 책을 두서없이 읽다보니, 많이 봐왔지만 정작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의문이 생겨서... 부끄럽지만 질문을 올려봅니다

제가 그동안 읽어본 (주로 서양철학의) 윤리학사나 윤리학 개론서를 읽다보면 good, Gut, bonum 등등으로 표현되는 개념을 대부분 "선함" 또는 "선"이라고 번역해온 걸 봤었습니다. 그러다 최근에 William Frankena의 윤리학 국역본을 읽다보니, 쾌락주의적 가치론을 다루면서 good을 "좋음"으로 번역하고 있는 걸 봤습니다. 생각해보니 보통 good을 좋다는 뜻으로 쓰니까, 너무 당연한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론 "선함"이란 번역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래서 제 의문은...
(1) 서양철학에서 good, Gut, bonum 등등을 "선"과 "좋음" 중에 어느 단어로 옮기는 게 더 적절한지
(2) 국역본으로 봤을 때는 뭔가 "선함"과 "좋음"은 분명히 다른 개념인 것 같은데, good이란 단어로는 이 두 개념이 구분이 안 되는 것인지, 아니면 순전히 국역본을 보면서 생긴 착각인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혹시 다른 선생님들께서는 어떻게 알고 계시는지요...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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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아는게 얕아서 참 조심스럽습니다만, 윤리학 맥락에서 쓰이는 현대 한국어 "선함"은 "좋음"의 특수한 사례로 보는게 적당하지 않을까요? 이를테면 "선함" = "윤리적 성품의 좋음" 같은 식으로요. 이를테면

그는 좋은 사람이야

처럼 "좋은"과 "선한"이 교환적으로 쓰일 수 있는 맥락도 꽤 있는 것 같습니다.


다른 한편, "선(善)"의 본래 한자 의미는 현대 한국어 "좋은"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디서 들은 풍월이 있어 구글링을 해보니 논어 자한편에서 나오는 "善賈"를 "좋은 가격"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더군요. ...아무쪼록 중국철학을 잘 아시는 분들의 고견을 들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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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디 善은 '좋다'와 '착하다'의 의미를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비단 성품뿐 아니라, 기술/능력/상태가 '좋다'할 때도 선 자가 쓰일 때가 있습니다.

한편 한국어에서도 '좋음'이 때에 따라서 '착하다'는 의미로도 쓰이지 않나요? 예컨대, "걘 성격이 좋다."처럼요.

(2)

굳이 따지자면

좋음 (한국어) = good (영어) = 선(중국어)이고 [성품을 포괄한 어떠한 것이 '좋은'/뛰어난 상태]
이 개념의 보다 하위 범주로 (윤리적인 영역에 국한된) 착함(한국어)이 존재하는 것 같네요.
(아마 살짝 안 맞는 것 같긴하지만, 의로울 의가 중국어로는 [다른 좋음을 배제한] 성품의 선함 - 의로움 - 명분을 따르는 것을 의미하니, 비슷할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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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과 '선'이 교환적으로 쓰일 수 있는 상황도 많지만, 몇몇 특수한 맥락에서는 둘을 반드시 구분해 주어야 하는 상황도 있습니다. 가령, '좋은'이 '유용한(useful)'이나 '실용적인(practical)'이라는 의미로 쓰이고, '선'이 '옳은(right)'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상황에서는 둘을 구분해 주어야죠.

그 대표적인 예가 니체의 『도덕의 계보』 제1장의 제목인 " First essay: 'Good and Evil', 'Good and Bad'"에요. 여기서 니체는 '선/악(good/evil)'이라는 도덕적 구분이 사실 '좋은/나쁜(good/bad)'이라는 더욱 원초적인 구분으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것이라고 주장해요.

즉, 본래 고대 사회에서는 '선/악'이라는 도덕적 구분은 존재하지 않았고, '좋은/나쁜'이라는 실용적 구분만 존재하였다는 것이 니체의 주장이에요. 강하고 고귀한 인간들은 자신에게 더욱 큰 힘을 부여하는 것들을 '좋은' 것들로 명명하였고, 그렇지 않은 것들을 '나쁜' 것들로 명명하였다는 거에요.

그런데 소위 '노예'라고 표현되는 약하고 비천한 인간들이, 강하고 부유한 인간들을 질투한 나머지, '좋은/나쁜'이라는 구분을 뒤집어서 '선/악'이라는 구분을 만들어내었다는 거죠. "부자들은 악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선하다!" 혹은 "힘 있는 자들은 악하고, 약한 자들은 선하다!"라는 식으로, 고귀한 자들의 규범을 무조건 비난하면서 자신들의 비천한 상태를 정당화하였다는 거에요. 그래서 니체는 이렇게 말하죠.

Let us draw to a close. The two opposing values ‘good and bad’, ‘good and evil’ have fought a terrible battle for thousands of years on earth; and although the latter has been dominant for a long time, there is still no lack of places where the battle remains undecided. You could even say that, in the meantime, it has reached ever greater heights but at the same time has become ever deeper and more intellectual: so that there is, today, perhaps no more distinguishing feature of the ‘higher nature’, the intellectual nature, than to be divided in this sense and really and truly a battle ground for these opposites. The symbol of this fight, written in a script which has hitherto remained legible throughout human history, is ‘Rome against Judea, Judea against Rome’: – up to now there has been no greater event than this battle, this question, this contradiction of mortal enemies. (Friedrich Nietzsche, On the Genealogy of Morality, Keith Ansell-Pearson (ed.), Carol Diethe (trans.),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7, pp. 31-32.)

이 부분에서 'good and bad'와 'good and evil'은 각각 '좋은과 나쁜'과 '선과 악'으로 번역해야겠죠. 니체가 분명히 그 둘을 대립시키기 위해 'good'이라는 용어를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으니까요. 전자는 도덕과 상관없는 실용적 구분이고, 후자는 도덕적 구분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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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 bonum-malum의 개념쌍은 애초에 단일한 의미를 지닌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철학사에서 여러 도덕철학적 조류들이 이 bonum 개념을 서로 다르게 해석해왔던 것이죠. 예컨대 칸트는 "다른 무엇을 위해 좋은 것"과 "다른 것을 위해서가 아닌 그 자체로 좋은 것"을 구분하고 후자에 도덕적 위상을 부여하고자 했기 때문에, 후자를 엄밀한 의미의 Gut (Gut-Böse)으로 보았고, 쾌의 감정과 연관된 좋음을 Wohl (Wohl-Übel; 영어로 하면 well-being 정도?)로 구분했습니다.

따라서 bonum, gut, good의 개념들이 애초에 다의적 함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들을 어떻게 번역할지 어렵다는 점은 전혀 착각이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다른 분들은 어떨지 모르지만, 저 역시 "선"과 "좋음"에서 다른 느낌을 받거든요. 개인적으로 "좋음"은 무언가 감정과 연관되어 있고 자연주의적인 냄새가 물씬 나는 반면, "선"은 뭔가 규범적이고 도덕형이상학적인 느낌을 받습니다. 쾌락주의적 가치론에서 good을 "좋음"으로 번역했다면, 아마 이러한 배경에서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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