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len Strawson - The depth(s) of the twentieth century

2010년 Analysis Vol. 70, No. 4에 실린 갤런 스트로슨(Galen Strawson)의 논문입니다. (갤런 스트로슨은 피터 스트로슨의 아들이기도 하죠)
갤런 스트로슨의 논문을 좀 찾아보려다가 발견하게 되었는데요, 무려 한 쪽짜리 논문입니다. 어떤 경위로 학술지에 실리게 됐는지 신기하기도 하고 해서 간단히 번역해봅니다.


나는 1972년에 철학을 시작했다. 그리고 '다른 조건이 같다면'(ceteris paribus)이라는 말이 빠지긴 했지만 사실상 아래의 것들이 내가 욕구, 믿음, 의미와 이해, 느낌과 감정, 의식, 사물, 성향적 속성, 인과, 존재에 대해 이해하려 할 때 주어진 것들이었다.

(1) 욕구(Desire, Wanting, Liking, etc.) : 내가 어떤 것을 원하기 때문에 그것을 얻으려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얻으려 노력하기 때문에 그것을 원하는 것이다.

(2) 믿음(Belief) : 나는 어떤 정보가 참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 정보에 기해 행위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그 정보에 기인해서 행위하기 때문에 혹은 행위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참이라고 믿는 것이다.

(3) 의미와 이해(Meaning and Understanding) : 내가 어떤 단어의 의미를 알기 때문에 그것을 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어떤 단어를 올바르게 사용하기 때문에 그것의 의미를 아는 것이다.

(4) 느낌과 감정(Feeling and Emotion) : (예를 들어) 내가 화가 났기(I am angry) 때문에 화를 표출하는 것도(show anger), 화가 났기 때문에 화를 표출하려 하는 것(inclined to show anger)도 아니다. 나는 화를 표출했기 때문에, 혹은 화를 표출하려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화가 난 것이다. (다른 모든 감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5) 의식(Consciousness) : 경험적인 의미에서 내가 나인 무언가가 있기(there is something it is like to be me, experientially speaking) 때문에 내가 의식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관찰가능하게) 이렇게 저렇게 행동하거나 행동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내가 의식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6) 사물(Objects) : 내 앞에 탁자가 있기 때문에 내가 탁자에 대한 경험(tableish experiences)을 갖는 것이 아니다. 내가 특정한 탁자에 대한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내 앞에 탁자가 있는 것이다.

(7) 성향적 속성(Dispositional Properties; power) : 깨지기 쉽기(fragile) 때문에 떨어진다면 깨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떨어진다면 깨질 것이기 때문에 깨지기 쉬운 것이다.

(8) 인과(Causation) : A가 B를 야기하기 때문에 언제나 B가 A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 B가 언제나 A를 따르기 때문에 A가 B를 야기하는 것이다.

(9) 존재(Existence) :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내가 다른 사물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다른 사물들에게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내가 존재하는 것이다.

나에겐 이 모든 주장들이 다 거꾸로 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때문에 나는 철학을 하는 내 능력에 자신이 없었다. 나는 여전히 이 모든 주장들이 다 거꾸로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때만큼 자신감 없지는 않다. 21세기에 들어서는 좀 나아진 것 같다.

(진짜 이게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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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분 이름은 한국어로 참 다양하게 불리는거 같습니다. 게일런 스트로슨이라 쓴 사람도 봤고, raccoon 님처럼 갤런 스트로슨이라 쓰는 사람도 있고, 국내에 번역된 <불면의 이유>에서는 갈렌 스트로슨이라 써져있더군요.

<불면의이유>는 읽다 말았는데 스트로슨이 자기인생을 서사적으로 구축하는 것 반대하는 경향을 보여주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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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말 철학은 여러모로 혼란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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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인도 그렇고, 더밋도 그렇고, 20세기 중반의 주요 분석철학자들에게 행동주의적이거나 검증주의적인 사고가 여전히 많이 남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의미나, 의식이나, 성향 같은 추상적 요소를, 사용이나, 행위나, 결과 같은 구체적인 요소로 환원하려 한 것 같고요. 이 과정에서 전통적 철학이 생각한 우선순위들을 역전시키려는 시도들이 일어난 것이라고 저는 해석합니다.

약간 다른 맥락이지만, 종종 대륙철학의 데리다에게도 유사한 비판이 제기되고는 해요. 데리다는 기의가 기표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전통적 형이상학의 주장에 반대하여, 기표의 연쇄가 기의를 생성한다고 주장하거든요. 기의/기표 관계를 역전시켜버리는 거죠. 그렇지만 이런 논의가 데리다의 반대자들에게는, 단순히 철학적 우선순위를 뒤바꾸어 또 다른 종류의 근거 없는 형이상학을 구축한 것이라고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하죠.

개인적으로는, 행동주의나 검증주의에 빠지지 않고서도, 의미/사용, 의식/행위, 성향/결과, 기의/기표 같은 이분법들을 해체하는 것이 20세기 철학의 주요 성과들을 이해하는 관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작업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에 그 시절 철학들이 오늘날 때로 너무 손쉽게 무시당하거나, 간과되거나, 약화되었다고 봐요. (저에게는 그 대표적 사례가 비트겐슈타인이 아닌가 합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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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신 김영건 선생님 블로그에서 이 논문에 대한 포스팅을 본 기억이 있어 가져와 봤습니다.
https://blog.naver.com/sellars/100129296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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