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auss, G. (1966). Hegels Parmenides-Deutung. Kant-Studien, 57(1–4), 276–285. HEGELS PARMENIDES-DEUTUNG
- 편의에 따라 요약한 것이라 이해하기 불편할 수 있습니다.
헤겔은 철학사에 대한 자신의 도식화 속에서 파르메니데스에 대한 오해를 했으며, 이 오해를 걷어내야 한다. 헤겔은 개별 철학자들을 오해함으로써 자신의 철학사적 체계를 구성할 수 있었으며, 이에 따라 현대의 연구들은 파르메니데스에 대한 오해를 걷어냄과 더불어서 헤겔의 체계 역시 잘못된 해석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 그런데 잘못된 해석은 굉장히 고착화되어 남아있다. 예컨대 단편 B3은 헤겔 이래 오늘날까지 동일성 논제에 대한 주장으로 해석되고 있다. 헤겔이 사유와 존재의 동일성에 대한 주장을 파르메니데스로부터 찾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편 헤겔의 철학사는 역사 속에 드러난 대로의 철학자들에 대한 연구를 넘어 정신적 형식의 발전을 읽어내기를 의도한다. 그렇다면 파르메니데스에 역사적으로 충실한 해석은 철학사에 대한 헤겔의 의식에 부합하지 않는 것인가?
파르메니데스에서 “제3의 길”이란 구체적인 사물들에 둘러싸여 일상을 살아가는 일반인들 혹은 이오니아 철학자들의 견해를 일컫는데, 그에 의하면 이들은 있음과 있지 않음을 동일한 것으로 또 동일하지 않은 것으로 취급한다. 그러나 사실 일반인들과 이오니아 철학자들은 있음과 있지 않음에 대한 반성을 목표하지 않았고, 제3의 길이라는 정식화가 파르메니데스 자신의 철학적 전제로부터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기술은 부적절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필멸자들의 견해 자체와 그에 대한 파르메니데스의 해석을 구별해야 한다. 일상적인 세계관 그 자체로는 어떤 모순도 지니지 않는다. 파르메니데스의 전제를 통해 세계관에 대한 해석이 이루어지고 나서야 필멸자의 세계관은 비로소 의견(doxa)으로 통용되는 것이다. 필멸자들의 세계관이 그 자체로는 무모순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현존하는 일상적인 세계 역시 그 자체로는 그릇된 것이 아니다. 파르메니데스의 해석이 들어서고 나서야 세계는 그릇되고 불확실한 것으로 이해된다.
파르메니데스는 있음과 있지 않음을 날카롭게 구별함으로써 자기의 입장을 진리로 언명하고 필멸자들의 입장을 의견으로 분류한다. 이 구별이 도입됨으로써, 필멸자들이 있는 것들(ta onta)을 다수의 감각적인 것들로 간주한다는 점, 이로써 있는 것들을 있으면서 있지 않은 것으로 취급한다는 점을 주장할 수 있다. 그래서 제3의 길은 사실 제1의 길(있음을 사유하는 길)과 제2의 길(없음을 사유하는 길)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 점에서 필멸자들의 길과 의견의 길(없음의 길)은 구별된다. 여하간 필멸자들이 갈팡질팡한다는 점을 근거로 파르메니데스는 자신의 대안(제1의 길)을 더 나은 길로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필멸자들은 파르메니데스의 논의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이전처럼 살 것이다.
헤겔은 이 헤맴, 이끌려 다님을 “오류”(Irrtum)로 번역한다. 헤겔의 번역에 의하면, 필멸자들의 오류는 그들이 있음과 있지 않음을 혼동하고(verwechseln) 또(oder) 구별한다(unterscheiden)는 점에 있다. 그런데 이런 해석에 의하면 양자를 혼동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구별하는 것도 오류가 된다. 명백히도 이는 파르메니데스의 입장에 해당하는 것이며 따라서 오류로 분류될 수 없다. 이것은 번역 오류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기초적인 사안이다. 그렇다면 헤겔의 이러한 번역의 바탕에는 어떠한 의도가 있는가?
그에 앞서 ‘오류’의 첫 번째 선택지에 대해 언급하고 넘어가자. 파르메니데스가 있음과 있지 않음을 같은 것으로 간주하는 입장을 필멸자들에게 귀속시켰다면, 이는 그가 자신의 철학적 전제에 따라 필멸자들의 세계관을 하나의 철학적 입장으로서 해석했다는 점을 뜻한다. 왜냐하면 일상의 필멸자들은 파르메니데스의 입장을 거부한다고 해서 그와 반대되는 입장을 철학적으로 주장하지는 않았을 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헤겔은 어떤 이유에서 이 구절을 모호하게 해석했는가?
이에 대한 답은, 철학사 내 등장한 철학들이 서로 잇따르는 관계가 이념들 내 범주들이 서로 잇따르는 관계와 동일하다는 헤겔의 명제에서 찾을 수 있다. 철학사의 시작에 상응하는 논리학의 시작에서, 존재와 무는 동일한 동시에 동일하지 않은 것으로 이해된다. 헤겔에 의하면, 사변적 진리는 양자의 동일성이나 비동일성 중 어느 하나가 아니라 둘의 이율배반으로 표현되며, 생성 속에서의 양자의 통일로 표현된다.
이에 근거해서 문제의 해석에 대한 헤겔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다. 있음과 있지 않음을 “혼동하고” 양자에 “동일한 가치를” 부여하는 머리 둘 달린 자들의 견해는, 헤겔의 이해에 따르면 양자를 동일시(identifizieren)하는 철학적 입장이 아니라, 양자를 무반성적으로 구별하지 않는 비철학적인 관념을 대변한다. 이는 파르메니데스 자신의 정식화 속에서는 미처 표현되지 못하는 어조의 차이이다. 또한 두 번째 길 역시 헤겔의 입장에서 보기에는 오류인데, 양자를 상대적으로 구별하는 헤겔과 달리 두 번째 길은 두 범주를 절대적으로 구별하기 때문이다. 이 절대적 구별은 파르메니데스의 입장이기도 하지만, 필멸자들은 이 입장을 반성적으로가 아니라 그저 강제적으로 따른다.
헤겔은 이처럼 파르메니데스를 자신의 사유체계에 의거해 해석한다. 그런데 이로 말미암아 파르메니데스는 자기 자신이 배격했던 머리 둘 달린 자의 견해를 떠맡게 된다. 실로 헤겔은 존재와 무에 대한 파르메니데스의 추상이 절대적이 아니라 상대적이라고 비판한다.
이제 제2의 길에 대한 헤겔의 해석을 살펴본다면, 헤겔은 해당 구절을 다음처럼 이해한다. “사유되고 말해짐으로써 무는 사실 어떤 것으로 전환된다. 우리는 무를 사유하고 말하고 싶어함에도 어떤 것을 말하고 어떤 것을 사유한다.” 여기서 헤겔은 무가 사유되거나 말해질 수 없다는 자신의 논제를 파르메니데스가 증명해 보이고 있다고 이해한다. 그밖에도 단편 B8, 34-37 부분을 두고 헤겔은 파르메니데스가 사유와 존재의 동일성을 주장했다고 이해한다.
그러나 헤겔이 파르메니데스로부터 이끌어내는 사유와 존재의 동일성이나 무의 언명 불가능성에 대한 정당화는 사실 칸트에 의해 사유의 자발성이 발견되고 나서야 가능한 해석이다. 즉 헤겔이 파르메니데스에게 부여하는 서술은 파르메니데스가 아닌 독일관념론의 것, 헤겔의 것이다.
현대에 이루어진 연구에 의하면, 파르메니데스는 헤겔이 자신에게 부여하는 주장을 승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컨대 파르메니데스는 사유와 존재의 동일성을 논의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해당 구절(B3, B8, 34)의 “to auto”는 주어가 아닌 술어라서, 파르메니데스의 말은 사유될 수 있는 것과 있을 수 있는 것이 존재자로서 동일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존재는 사유에 뿌리박지 않고 오히려 사유가 존재 속에 있다. 또 파르메니데스에게 지성(nous)의 본질은 현대의 용어로는 자발성이 아닌 수용성의 능력, 혹은 직관 능력에 가깝다. 그러므로 존재는 사유에 의해 “생성”되거나 하는 것이 아닌 앞서 주어진 것이다. 비존재를 사유할 수 없는 이유 역시, 존재자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사유 속에서는 비존재를 생각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있는 것이 사유에 귀속되어야만 사유는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파르메니데스가 존재와 비존재를 엄격히 분리함으로써 그 자신이 머리 둘 달린 자가 되어버린다면, 그는 사유의 자발성의 대변자로 잘못 승격되는 것이다.
이제 파르메니데스가 헤겔에 의해 철학의 시작으로 이해된다는 점을 살펴보자. 이 ‘시작’이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째, 파르메니데스는 존재와 비존재를 절대적으로 떨어뜨림으로써 양자 모두를 사유했던 ‘머리 둘 달린 자’가 된다. 둘째, 파르메니데스는 비록 대립 속에서이기는 하지만 존재와 비존재를 모두 사유했던 자라는 점에서 헤겔과 어떤 친연성을 지닌다.
그러나 헤겔의 파르메니데스 해석 속에서 파르메니데스 철학 고유의 독특성과 개별성은 사라져버리고, 그의 사상은 헤겔의 체계 속에서 파괴되고 재구성된다. 재구성을 통해 파르메니데스에게 부여된 개별성 역시 헤겔의 체계에 부합하도록 짜 맞춰진 결과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