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자들의 칸트 토론 feat. 부분과전체

본 내용은 하이젠베르크의『부분과 전체』내용 중 일부를 각색하여 재구성한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 읽기』내용의 일부입니다. 내용이 재미있어서 공유합니다.

하이젠베르크를 중심으로 하는 라이프치히 서클은 빠른 속도로 확대되어 여러 나라에서 뛰어난 젊은이들이 양자역학의 발전에 참여하거나 양자역학을 물질구조에 응용하는 연구를 하기 위해 라이프치히로 왔다. 라이프치히 서클에서는 자연과학 분야는 물론 철학과 종교에 이르는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토론에 참여하는 젊은이들 중에는 이제 막 18살이 된 프리드리히 폰 바이츠재커도 있었다. 후에 태양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핵융합 반응과 태양계 형성에 관한 연구를 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독일 과학의 재건을 위해 하이젠베르크와 함께 활동한 바이츠재커는 특히 철학적 주제에 관심이 많았다. 하이젠베르크의 라이프치히 서클은 여성 철학자 그레테 헤르만과 함께 칸트 철학과 원자물리학에 대해 진지한 토론할 기회를 가졌다.

양자역학의 확률적 해석이 틀렸다고 굳게 믿고 있던 헤르만은 원자물리학자들과 철학적 토론을 하기 위해 라이프치히를 방문했다. 칸트의 생각을 이어받은 철학자들 중에서도 철학적인 고찰에도 수학에서 요구하는 정도의 엄밀성을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넬슨학파에 속해 있던 헤르만은 칸트가 주장한 인과율에 예외가 있을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헤르만은 양자역학에서 확률을 도입해 설명하는 것은 인과율에 어긋난다고 생각했다. 하이젠베르크와 바이츠재커, 그리고 헤르만 사이의 토론은 헤르만이 먼저 시작했다.

“칸트 철학에서 인과율은 경험에 의해 실증되거나 반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경험을 위한 전제입니다. 인과율은 칸트가 선험적이라고 부른 사고 범주에 속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파악하는 감각인상은 인과율의 법칙이 없으면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어떤 것을 경험했다고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먼저 원인과 결과를 연결하는 인과율을 전제로 해야 합니다. 특히 객관적 경험을 다루는 자연과학은 인과율을 바탕으로 해야만 성립될 수 있습니다. 인과율은 사고의 도구입니다. 양자역학이 인과율의 테두리를 벗어나서도 자연과학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하이젠베르크는 우선 통계물리학에서의 인과율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설명했다.

“말씀하신 내용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원자 세계에서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와는 다른 일들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A라는 동위원소를 가지고 실험을 한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A라는 동위원소가 평균적으로 30분 안에 전자 하나를 방출하고 B라는 동위원소로 붕괴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원자가 30분 안에 붕괴되는 것은 아닙니다. A의 원자 중에는 1초도 안 돼 붕괴하는 것도 있고, 하루가 지난 후에야 붕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기서 평균이라는 말은 많은 A 동위원소로 실험을 했을 때 반이 30분 안에 붕괴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는 인과율이 성립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 원자가 어느 순간 붕괴할 것인지는 전혀 인과율에 따르지 않습니다. 원자가 방사선을 내고 다른 원자로 붕괴되는 과정은 인과율이 아닌 확률을 통해서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헤르만은 조금도 물러서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바로 거기에 원자물리학의 오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결과의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다는 사실만 가지고 원인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양자역학은 원인을 찾을 때까지 아직도 더 많은 연구를 해야 할 것입니다. 전자를 방출하기 전의 A 동위원소에 대해 현재 물리학자들이 알고 있는 지식은 불완전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이젠베르크도 물러서지 않았다.

“아닙니다. 우리는 A 동위원소에 대해 이미 완전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A 동위원소를 이용한 많은 실험에서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것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A 동위원소의 원자 하나가 언제 전자를 방출하는지를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전자가 방출되는 시간을 결정하는 원인을 찾아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원자 하나가 언제 붕괴할지 모른다는 지식이 불완전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헤르만은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은 한편으로는 A 동위원소에 대한 지식으로는 원자 하나가 언제 붕괴될는지 모른다고 하면서, 동시에 당신들의 지식은 완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식이 불완전하면서 동시에 완전할 수 있는 것입니까?”

이 때 바이츠재커가 논쟁에 끼어들었다.

“이런 논쟁을 하게 된 것은 우리가 원자 자체에 대하여 이야기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데서 비롯된 것 같습니다. 그것은 확실한 것도 아니고 옳은 것도 아닙니다. 칸트는 우리가 물자체(Ding an sich)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언명할 수 없고,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지각과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형식과 선지식을 통해 만들어진 표상뿐이라고 했습니다. 칸트는 고전 물리학의 기초를 이루는 경험 구조 안에서 성립하는 인과율을 선천적인 것으로 전제했습니다. 이런 견해에 따르면 세상은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공간 안에서 일정한 규칙에 따라 차례차례 일어나는 사건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양자역학에서는 지각은 대상의 고유한 성질이 아니라 대상과 관찰 행위의 상호작용의 결과입니다, 따라서 A 동위원소의 원자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실체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는 A 동위원소의 붕괴 과정을 측정한 결과만 있습니다.”

이야기가 여기에 이르지 참지 못하고 헤르만이 바이츠재커의 말을 가로챘다.

“당신이 이야기하는 물자체는 칸트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물자체의 개념과 같지 않습니다. 당신은 물자체와 물리학적 대상을 구별해야 합니다. 칸트에 의하면 물자체는 표상 안에 간접적으로라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 까닭은 우리의 지식이 경험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이야기하는 동위원소는 이미 칸트가 객체라고 부른 것입니다. 객체는 표상의 일부입니다. 의자나 책상, 그리고 별과 같이 말입니다.”

“원자와 같이 사람이 전혀 볼 수 없는 경우에도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원자에 관한 지식은 모두 표상으로부터 추론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표상으로 이루어진 세상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조직이어서 직접 본 것과 추론한 것을 구분하는 것이 가능하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자연과학이 개관적이라고 하는 것은 지각에 대해서가 아니라 객체에 대하여 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원자를 본 적도 없고, 원자의 실체도 모르기 때문에 원자에 대한 지각도 그에 따른 현상도 없습니다.”

“원자는 객체입니다, 객체가 없이는 객관적인 과학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이츠재커도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양자이론에서는 칸트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지각을 객관화하는 새로운 방법이 문제가 됩니다. 경험이 지각으로부터 나타난 결과라면 양자물리학에서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예를 들어 원자의 위치를 알아보는 실험을 통해 원자의 위치를 결정했다면 그 실험을 통해 알게 된 지식은 그 실험 조건에서는 완전한 지식입니다. 그러나 원자가 방출한 전자의 속도를 알아보는 실험을 했을 때는 위치에 대한 지식이 더 이상 완전한 지식이 될 수 없습니다. 두 가지 실험이 보어가 이야기한 상보적 관계에 있다면 한 관찰 상황에서는 완전한 지식이 다른 관찰 상황에서는 불완전한 지식이 됩니다.”

“당신은 경험에 대한 칸트의 분석을 전적으로 부정하려고 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칸트는 경험이 얻어지는 과정을 정확하게 분석했고, 그런 분석은 옳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직관 형식과 인과성을 절대적인 것으로 설정하고 모든 물리이론에도 같은 형식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위험한 생각이었습니다. 물리학자들이 하는 실험을 서로 소통하기 위해서는 항상 고전물리학의 언어로 서술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상대성이론이나 원자물리학도 칸트의 영향력 아래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아직 출발점에서 제시한 내 물음의 답을 충분히 얻지 못했습니다. 원자가 전자를 방출하는 원인을 아직 충분히 찾지 못한 상태에서 왜 계속 원인을 찾는 작업을 하면 안 되는지 알고 싶습니다. 당신들은 그것을 찾는 일은 헛된 수고에 그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그렇게 이야기하는 근거를 상보성이나 불확정성에서 찾으려고 하고 있는데 제가 보기에는 불확정성은 참으로 주관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번에는 바이츠재커 대신 하이젠베르크가 나섰다.

“원자현상으로부터 법칙성을 추론하려면 시간과 공간 안에서 객관적인 사건들을 연결시켜야 하는데 그것이 가능하지 않으며, 그 대신 관찰 상황이라는 것과 마주치게 됩니다. 우리가 관찰 상황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는 기호들은 하나의 가능성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과 사실 사이의 중간적인 것도 나타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원자는 더 이상 사물도 아니고 대상도 아니라는 것을 칸트는 짐작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원자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것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언어는 우리 일상경험을 통해 형성된 것이고, 원자는 일상경험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원자는 물리적 분석에서 아주 유용하게 사용되고 현상의 구성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이츠재커가 하이젠베르크의 말을 이어받았다.

“우리가 경험을 설명하는 데 사용하고 있는 개념들은 한정된 적용범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개념을 사용할 때는 전제를 조심스럽게 분석해야 합니다. 그와 같은 전제들로부터는 절대적인 주장을 이끌어낼 수 없습니다.”
칸트 철학으로 원자물리학자들의 주장을 철저하게 논파하든지, 아니면 칸트가 어디에서 오류를 범했는지를 확인하고 싶었던 헤르만에게는 이런 상황 전개가 불만스러웠을 것이다. 헤르만이 다시 물었다.

“당신들의 주장에 따른다면 확고한 인식의 밑바탕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겁니까?”

바이츠재커가 대답했다.

“칸트는 당시 자연과학의 인식 상황을 정확하게 분석했지만 양자역학에서는 새로운 인식론적 상황에 직면해 있습니다. 아르키메데스의 지레의 법칙은 당시의 기술적 측면에서는 완전한 자연법칙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자 기술 시대에는 더 이상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인류는 지레의 개념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은 기술 영역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렇다고 지레의 법칙이 상대적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지레의 법칙이 역사의 발전 과정에서 더 포괄적인 기술 체계의 일부가 되었을 뿐입니다. 칸트의 인식 분석이 불확실한 것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고전 물리학적인 경험 세계에서는 정확한 분석이었습니다. 역사의 발전과 더불어 인간의 사고구조도 바뀐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과학의 진보는 새로운 것을 알아내고 그것을 이해하는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고 구조를 바꿈으로서 성취되는 것입니다.”

헤르만은 끝내 바이츠제커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만족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바이츠제커와 하이젠베르크는 이 토톤을 통해 칸트 철학과 현대물리학의 관계를 좀 더 잘 이해하게 된 것 같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칸트로 시작해서 비트겐슈타인적인 결론에 도달하는 것 같기도 하고, 헤겔적인 결론에 도달하는 것 같은 기분도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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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이 '토톤'으로 쓰여 있네요. 이 글은 나중에 제가 칸트 철학을 배우고 나서 다시 한 번 봐야겠습니다. 5년 전에 전기가오리 공부 모임에서 칸트 형이상학을 처음 접했지만 이해가 잘 안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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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핑 하다보니까 오타가 생겼나보네요 ㅎㅎ

과학에서 원자는 현상인가 물자체인가, 과학 (혹은 시대)이 발전하면, 과거에는 물자체였던 것이 현재는 현상이 될 수도 있는가? 등 되게 재밌는 내용을 많이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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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테 헤르만은 폰 노이만의 양자역학 숨은 변수 불가능성 "증명"의 오류를 1930년대에 이미 지적한 것으로도 유명하죠. 물론 그리 놀랍지 않게도, 헤르만의 논박은 이후 수십년간 주류 물리학계에서 조금도 관심을 받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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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철학은 사실상 뉴턴의 고전역학에 대한 철학적 수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을 그대로 양자역학에서도 적용할 수는 없다는 것이 지금 대부분의 사람이 인정하는 견해죠. 헤르만은 칸트철학으로 뉴턴역학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에 의문을 가지지 않고 있는 것 같은데, 고전적 관점에 대하여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고전적 관점은 외부를 인식하는 인지자가 인지한 내용과 인지자 외부의 독립적인 세계가 서로 대응한다는 것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해서 양자역학에서는 - 선생님께서 올려주신 글에도 등장하지만 -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에 인식하는 이가 관여하게 되지요. 아마도 이 정도가 보통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 대한 대중적인 설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 마르부르크 학파 등의 신칸트주의자들은 다시 반론을 제기하는데요, 그들에 따르면 (양자역학을 포함한) 모든 자연과학적 인식구조는 사유의 선험적 논리 형식에 의존한다고 하죠.

이러한 논리를 주장하자, 칸트의 주장 자체마저 새롭게 바라보도록 하게 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즉, 주체마저 객체화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는 존재론적으로 불안정한 주체라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후설에 의해서 이 문제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됩니다. 후설은 존재론적인 확실성을 과학의 요건에 아예 포함시켜버리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요.

이제 프랑스 쪽에서 베르그송-시몽동-들뢰즈로 이어지는 '표현적 유물론'이라는 새로운 입장이 등장합니다. 이는 기존 유물론의 환원주의적인 입장을 고수하지 않고, 물질에 내재하는 힘에 이한 창조적 형성을 강조하는 견해입니다. 복잡계나 비선형적인 것을 다루는 과학분야, 양자역학 등에 나름대로 최적화된 철학적 입장이라고 볼 수 있을 거에요.

그리고 사실, 양자역학에 대한 해석도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이 토론의 피처링을 해 주신 하이젠베르크와 닐스 보어 같은 분의 견해를 위 글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요, 이는 코펜하겐 해석이라고 불리는 현재 주류적인 입장이고 다른 마이너한 견해들도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따라서 양자역학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면, 이를 해명하려는 철학적 설명에도 변화가 있을 수 있을 거에요. 이를테면 에버렛의 다세계 해석이랄지, 최근 유행하는 멀티 유니버스 가설 같은 것이 나중에 더 적합한 해석으로 받아들여지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죠.

저도 깊이 아는 주제가 아니라 극히 피상적으로만 생각을 적어보았습니다. 재미있는 글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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