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bating Democracy』 - 브레넌 파트

예전에 소개한 브레넌과 랜드모어 공저의 이 책에서 브레넌은 1-4장을 맡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1장을 제외한 2-4장을 요약한 것을 올립니다. 3장은 완전 요약은 아닙니다. 저의 견해는 당구장 표시로 마킹해뒀습니다.

책의 서술이 심플하면서도 잘 쓰여져 있으니, 한 번 직접 읽어보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브레넌은 기본적으로 글을 잘 씁니다.


2장. Is the Solution More Democracy? (46-67)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철학자와 이론가들은 민주주의가 가진 문제점은 더 많은 민주주의로 해결될 수 있다고 믿곤 한다. 그들은 현실 민주주의에 어떤 체계적인 문제가 있다는 지적에 직면할 때, ‘그건 민주주의가 아니야!’라는 식으로 대응하곤 한다. 이러한 자들을 민주적 근본주의자(democratic fundamentalist)’라고 칭하기도 한다.

민주주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더 많은 민주주의가 필요하다는 주장—Solution to the problems of democracy is more democracy proposal—은 크게 세 가지를 외친다: (1) 단순한 시민(유권자) 교육의 증대 (2) 다양한 방식의 시민들의 숙의 (3) 시민 개개인이 현명하지 않더라도 전체 유권자는 현명하다.

1절. More Education?
더 많은 교육을 외치는 자들은 더 많은 교육을 제공함으로써 유권자의 무지를 축소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들은 정치적 지식에 대한 교육의 효과를 과대평가하고 있다. 옛날에 비해 시민은 더 많은 교육을 받고 있다. 하지만 무지한 것은 매한가지이다.

이를 설명할 수 있는 한 가지 이유는 민주주의에서 시민들은 소위 ‘합리적으로 무지한(rationally irrational)’ 태도를 지니게 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에서 내가 정치적 지식에 대한 앎을 획득하여 목소리를 낸다고 하더라도, 대세에 지장이 없다. 쉽게 말해, 내가 정치적 지식에 대한 앎을 추구할 인센티브가 적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오직 기대 이익이 기대 비용보다 더 클 경우에만, 앎을 획득하고자 한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가르침을 준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까먹으려고 한다. 그 결과 대개의 시민은 계속 무지하다.
물론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앎을 얻으려는 자들이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 정치는 좋아하는 화젯거리의 일종이기에, 대개는 자신의 인식적 편향을 충족하려는 동족주의자이다. 결과적으로 시민들은 (1) 무지하면서 크게 동족주의적이지 않거나 (2) 다른 사람보다 좀 더 배웠지만 동족주의적이다. 이것이 실제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현실의 모습이다.

2절. Deliberative Democracy; Implementing Deliberative Democracy in the Real World
숙의를 외치는 자들은 적절한 민주주의는 투표하는 시민이 아니라 서로 숙의하는 시민으로 이루어진다며, 투표제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들을 피한다. 숙의 민주주의자들은 숙의가 정치적으로 더 나은 결과를 산출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현존하는 경험적 연구는 그들 주장을 지지하지 않는다. ※ 너무 많아서 내용 생략

숙의 민주주의자들은 사람들이 절절히 행했더라면 좋은 결과가 나왔을 것이라고 반박하곤 한다. 하지만 우리가 알기 원하는 것은 ‘소련은 진정한 사회주의가 아니야!’와 같은 ‘그 숙의는 진짜 숙의가 아니야!’가 아니라 ‘숙의를 시행할 때 사람들은 실제로 어떻게 행하는가이다.’

숙의 민주주의를 시행하는 방도로 숙의의 날이나 숙의적 투표가 제시되곤 했다. 하지만 Somin의 분석은 그러한 실행 방도가 어떤 긍정적인 효과도 내놓지 못함을 보여준다: (1) 하루 혹은 몇 주 동안 아주 조그만 쟁점에 대해서라도 시민들이 그것들을 이해하고 다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2) 시민들이 아주 작은 하나의 문제에 대해 집중하더라도, 그 하나의 문제의 국소적 면모까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년에 걸친 전문적 훈련이 요구된다; (3) 토론할 쟁점과 대변인을 선정하는 방식을 결정할 때 조작이 가미될 가능성이 크다.

랜드모어의 경우, 인터넷에 기반한 크라우드소싱을 극찬하며 숙의의 날이나 숙의적인 투표보다 덜 조직된 형태의 숙의 방식을 제안한다. 그녀는 헌법 개정에 크라우드소싱을 활용한 아이슬란드의 실험을 사례 연구로 사용한다. 아이슬란드의 실험은 대강 다음처럼 요약된다: 일곱 명의 정부 전문가가 아이슬란드 헌법의 종교 자유 조항에 대한 개정안을 제안하도록 요청받았다. 이어서, 스물다섯 명의 비전문가 시민들 또한 개정안을 제안하도록 요청받았고, 그들은 인터넷을 통해 부분적으로 그것을 크라우드소싱했다. 크라우드소싱된 제안은 전문가 버전보다 우월했다. 주로 그것이 다소 더 포용적인 언어를 포함했고 의회에 재량권을 조금 덜 남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주장에도 문제가 있다. 첫째, 아이슬란드는 작고, 인종적으로 동질적이며, 고등 교육을 받았다는 점이다. 또한 정치적 양극화 수준이 낮고, 인간 개발 지수, 시민 간 대인 신뢰도가 매우 높으며, 넓게 이해되는 시민 참여의 강력한 역사를 갖고 있다. 이는 민주적 숙의와 합의가 상대적으로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조건이다. 랜드모어는 그렇지 않은 국가에서 동일한 방식을 통해 같은 효과가 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녀의 추론은 잘못된 일반화의 오류를 겪고 있다.
둘째, 아이슬란드의 사례에서 시민들에게 주어진 업무는 다소간 쉬운 것이었다. 그들은 디젤 배기가스를 규제하는 최적의 방법이 무엇인지, 또는 러시아의 새로운 공격에 직면하여 아이슬란드가 NATO에 정확히 어떻게 참여해야 하는지와 같은 어려운 문제에 대한 미세한 정책 세부 사항을 작성하라는 요청을 받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헌법을 위한 종교의 자유에 대한 메타-법적 원칙을 작성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심지어 이들은 다양한 법률 사례 연구를 참고할 수 있었고, 다른 헌법의 다른 종교 조항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장시간에 걸쳐 검토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시민들이 작성한 조항은 다른 많은 자유주의 국가들의 입법자나 법률가들이 작성한 종교 자유 조항보다 명백히 나쁘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은 무신론 비율이 극도로 높고 종교 활동 참여율이 낮은 나라에서 국교인 루터 교회를 폐지하는 것조차 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아이슬란드의 성과는 나빴다.

※ 브레넌의 주장에서 메타-법적 원칙을 작성하는 것이 왜 상대적으로 더 쉬운 일이라는 것인지 이해되지 않는다.
※※ 브레넌은 아이슬란드의 시민들이 작성한 것이 아이슬란드의 전문가의 것보다 낫다는 점에 동의한다: “the crowd-sourced proposal was, both Landemore and I agree, superior to the ‘expert’ version.” 하지만 다른 나라의 전문가 버전보다는 낫지 않다는 점에서 랜드모어와 의견이 다르다. 의문이 드는 점은 브레넌은 현실 상황에서의 민주주의에 중점을 두는데, 왜 여기서는 그렇지 않냐는 것이다. 아이슬란드에게 주어진 상황에서는 크라우드소싱 기반의 숙의가 더 나은 결과를 낳은 것이다. 다른 현실에 처해 있는 국가의 결과를 비교하는 것이 얼마나 의미가 있을지?

3절. Miracles of Aggregation: Are Crowds Wise?
개인 수준에서 유권자가 현명하지는 않더라도, 특정한 상황에서 대규모의 유권자 집단은 현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혹은 개별 유권자는 무지하거나 잘못된 정보를 갖고 있어도, 그들의 표를 합계하면 적절한 결과가 도출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이들의 주장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눠진다:

첫째, 선호 집합의 기적(Miracle of Aggregation): 좋은 후보자와 나쁜 후보자 둘이 있다고 가정하자. 오직 2%의 유권자만이 좋은 정보를 갖고 있다. 나머지 98%는 무지하다. 무지한 유권자는 어떤 편견이 없어서 좋은 후보자보다 나쁜 후보자를, 나쁜 후보자보다 좋은 후보자를 선호할 수 있다. 그래서 98%의 투표는 사실상 동전 뒤집기와 같다. 즉, 50%의 싸움이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나머지 2%의 현명한 유권자는 좋은 후보자를 결정할 것이다. 결국, 좋은 후보자가 당선된다. 이 결과는 대개 전적으로 무지한 유권자로 이루어진 대규모의 선거가 대개 전적으로 현명한 유권자로 이루어진 선거와 같은 결과를 낸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둘째, 콩도르세 배심원 정리(Condorcet’s Jury Theorem): 만일 한 집단이 결정을 내리며, 집단 구성원 개개인의 평균 신뢰도가 50% 이상이라면, 집단의 규모가 클수록 집단이 옳은 해답을 선택할 확률은 100%에 수렴한다. 반면, 집단 구성원 개개인의 평균 신뢰도가 50% 이하라면, 집단이 옳은 해답을 선택할 확률은 0%에 수렴한다.

셋째, ‘인식적 다양성은 능력을 능가한다’ 정리(Cognitive Diversity Trumps Ability Theorem): 적절한 상황에 있는 집단적 의사 결정 과정의 참여자들의 인식적 다양성을 보장하는 것이 참여자들 개개인의 신뢰성이나 능력을 증대하는 것보다 올바른 결과를 산출하는 데에 기여한다.

위 세 가지 중에서 민주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쓰이는 —특히 랜드모어가 애용하는— 논리는 세 번째 것이다. 하지만 해당 정리는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수학자인 Thompson에 따르면 해당 정리는 (1) 수학적으로 오류를 범하고 있으며 (2)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를 범하고, (3) 수학적인 의미에서 쓰인 다양성이 현실 세계에서의 인식적 다양성과 대응하지 않으며, (4) 해당 증명은 보편화될 수 없다. Quirk는 (1) 해당 정리가 의존하는 실험이 결과를 산출하기 위해 좋은 방식으로 편향되어 있으며, (2) 해당 정리는 현실 정치 상황에서의 의사 결정 과정에 대한 어떠한 함축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비판한다. 유사한 비판들이 철학자에게서도 제기되곤 했다.

하지만 해당 정리가 수학적으로 옳다고 가정하더라도, 해당 정리는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기반으로 사용될 수 없다. 왜냐하면 해당 정리는 집단 구성원의 신뢰도는 낮더라도 집단 전체의 신뢰도는 높은 상황을 상정하고 있는데, 실제 현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 현실에서 (1) 시민들은 자신의 생각을 독립적으로 그리고 개별적으로 형성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서로를 따르며, 특히 자신의 정당이 말하는 바를 그대로 앵무새처럼 따라 말하는 경향이 있다; (2) 시민들은 대체로 비인지적이고 비이데올로기적인 이유로 투표한다. 그들은 해답을 발견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팀을 응원하고 있는 것이다; (3) 대부분의 시민들은 정치에 대해 매우 단순한 정신 모델을 가지고 있으며, 정보 수준이 매우 낮다; (4) 시민들은 체계적인 오류를 저지르며, 광범위한 기본적인 정치적 사실과 더 높은 수준의 사회 과학적 지식에 대해 체계적으로 오해하고 있다. 이 네 가지 실증 연구 결과에 대한 반박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게다가 해당 정리가 가정하는 ‘적절한 상황’이란 다음과 같은 상황이다: (1) 참여자들은 진정으로 다양한 세계 모델을 가져야만 한다; (2) 참여자들은 충분히 복잡한 세계 모델을 가져야만 한다; (3) 참여자들은 문제가 무엇이고 무엇이 해결책으로 간주될지에 대해 동의해야만 한다; (4) 참여자들은 모두 함께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해야만 한다, 그리고 (5) 참여자들은 타인으로부터 배우고 다른 참여자들의 지식을 활용할 의지가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실제 현실의 선거와 숙의에서는 이러한 조건들이 거의 만족되지 않는다. 앞서 말한 실제 현실 세계의 모습에 더해, 시민들은 투표하거나 숙의할 때, 문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이 해결책으로 간주될지에 대해 거의 동의하지 않는다. 게다가 함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도 않고, 타인의 지식으로부터 배우거나 그것을 활용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확증 편향이나 반증 편향을 겪으며, 타인의 생각이나 증거를 일축하고 자신의 생각에 고착되는 경향이 크다.


3장. Democracy: Maybe Less is More (68-93)

※ 몇 가지 흥미로운 주장이나 논변 위주로 정리.

1.

인식론적 혹은 도구주의적 민주주의 이론가는 민주적 정치 구조가 절차 독립적인 기준에 비추어 봤을 때 올바른 정치적 결정을 내리는 경향이 있다는 이유로 그것을 정당화한다.

※ 저자가 언급하고 있지는 않으나, 모든 인식론적 민주주의 이론이 (1) 절차 독립적인 기준에 비추어 봤을 때, (2) 올바른 정치적 결정을 내린다는 이유로 민주주의를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이때 쟁점이 되는 것은 (1) 절차 독립적인 기준의 유무와 (2) 정치적 결정이 ‘올바르다’라고 할 때, 올바르다는 것의 의미이다.

인식론적 민주주의자와 그 반대자는 정치권력과 정부의 형태가 민주적이어야만 하는가 아닌가에 집중해서 다툰다. 하지만 이를 넘어 우리가 답해야만 하는 두 질문이 있다: (1) 모든 사안이 정치적으로 다뤄져야 하는가? 아니라면 어떤 사안이 정치적으로 다뤄져야 하는가? (2) 한 사회가 근본적인 수준에서 민주적이라고 하더라도, 민주적이지 않은 방식을 통해 내려진 정치적 결정은 모두 민주적 확인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전자는 정치의 범위에 관한 것이고, 후자는 민주주의의 범위에 관한 것이다.

2.

우리는 누군가가 무지하거나,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하거나, 부족주의에 빠져있거나, 악의를 지니고 있거나, 이해 충돌의 상황에 있거나, 이성적이지 않거나, 무능력할 경우, 그 사람의 결정이 정당하거나 권위를 갖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정치적 결정 또한 그렇다. 정치적 결정은 오직 그것을 만든 정치체가 능력을 갖췄고 선의를 갖췄을 때, 정당하고 권위를 갖는다.

문제는 아주 중요한 정치적 결정인 선거 투표를 하는 사람인 유권자의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누군가는 선거 투표가 사실 중요하지 않다고 반박할 수도 있다. 이렇게 주장할 경우, 즉 선거가 정책 결과에 유의미한 효과를 끼치지 못한다고 주장할 경우, 민주주의가 왜 정당한지 이유를 찾기 힘들게 된다. 왜 모든 사람이 동등한 투표권을 갖고 투표하러 가는가?

3.

  • 인식론적 선별 원리: 최선의 의사 결정을 내거나 혹은 최선의 결과를 산출하는 경향이 있는 제도적 틀을 선택하라. 여기서 그 결과는,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절차 독립적인 기준에 따라 판단된다.

  • 능력 원리: 무능한 숙의 기구에 의해 내려진 결정의 결과로, 또는 무능한 방식이나 악의로 내려진 결정의 결과로, 시민들의 생명, 자유, 또는 재산을 강제로 박탈하거나 그들의 삶의 전망을 심각하게 해치는 것은 부당하며 시민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정치적 결정은 오직 유능한 정치 기구에 의해 유능한 방식으로 그리고 선의로 만들어졌을 때만 합법적이고 권위를 가진다고 여겨진다.

4.

저자가 일련의 실증적 연구 자료를 보여주며 펼치는 주장의 의도는 ‘우리는 민주주의의 규모를 축소해야 한다’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민주주의가 최선의 통치 형태라고 생각하더라도, 민주주의가 더 나은 결과를 내지 않기도 한다’라는 점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5.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을 정치적 쟁점으로 삼을 것인지 또 민주적 통제 아래에 둘 것인지를 결정해야 하는데, 이러한 정치의 범위의 문제 자체도 정치적으로 다뤄져야만 하는 질문 같아 보인다는 점이다. 만일 ‘정치의 범위를 넘어선 쟁점이란 없다’라고 생각한다면, 인식론적 선별 원리나 능력 원리 자체도 정치적 쟁점이다. 따라서 누군가는 어디에 그리고 어떻게 인식론적 선별 원리나 능력 원리를 적용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랜드모어의 경우, ‘누가 정치의 범위 문제를 결정하느냐’라는 문제는 민주적 수단을 통해 최선으로 결정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의료 규제나 중앙은행의 금리와 같은 문제는 정치적 사안으로 두지 않고, 전문가 패널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일반 대중과 같은 비전문가들 사이의 숙의가 잘 이뤄지는 상황에서도 말이다. 이러한 주장은 그녀의 다른 주장—다수의 통치는 항상 전문가에 의한 의사 결정을 능가한다—와 모순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녀는 ‘전문가 패널에게 권한을 부여할 것인가’에 관한 의사 결정은 민주적 수단을 통해 최선으로 결정된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두 주장을 동시에 방어한다.

하지만 “‘누가 정치의 범위 문제를 결정하느냐’라는 문제는 민주적 수단을 통해 최선으로 결정될 수 있다”라고 주장하는 랜드모어의 주장은 잘못됐을 뿐만 아니라, 모든 인식론적 민주주의자들은 랜드모어처럼 답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들이 랜드모어처럼 인식론적 선별 원리나 능력 원리를 참으로 여기고 받아들인다면 말이다.

이 이유는 인식론적 민주주의를 순수 절차주의와 비교 대조함으로써 밝혀질 수 있다. 순수 절차주의는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좋은지 나쁜지는 사람들의 논쟁에 따라 결정되며, 이 결정과 독립적인 기준이 없다고 본다. 그래서 순수 절차주의는 독립적인 기준이 있다고 주장하는 인식론적 민주주의에 반대하며, 그것의 선별 원리와 능력 원리도 정책의 논쟁으로 삼아 버린다.

하지만 다음의 사례를 보자. 헌법을 작성할 때, 작성자들은 정부의 통제에 무엇을 포함하고 무엇을 제외할 것인지, 어떤 권한을 누구에게 위임할지에 관해 결정을 내린다. 하지만 이것이 어떤 사안이 국가 통제에 적절히 종속되고 어떤 것은 또 그렇지 않은지, 또는 어떤 권한이 누구에게 위임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사태와 독립적인 진리가 없다는 것을 말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순수 절차주의자가 아닌 인식론적 민주주의자라면, 단순히 “정치의 범위는 오직 민주주의만이 결정할 수 있는 문제이다”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인식론적 선별 원리를 따라 “민주주의는 어떤 권력을 어떤 기구에 위임할지를 결정하는 데에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다”라고 말해야만 한다.


4장. Alternatives to Democracy (94-120); 브레넌 파트 (完)

이전 장에서는 우리는 우리의 허접한 정치적 지식에 따른 결과를 완화하기 위해 통상적인 선거 민주주의의 대안을 실험하는 데에 마음을 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번 장에서는 대안들을 제시한다.

1절. Vote Achievement Day: Pay the People to Know

적절한 정보를 더 많이 알고 있다면, 더 나은 결과를 위해 투표한다. 하지만 평균값(mean), 중간값(median), 그리고 최빈값(modal)에 해당하는 유권자는 적절한 정보를 매우 갖추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적절한 정보를 갖고 더 나은 결과를 위해 투표하기 위한 동기를 부여하면 어떤가?

첫째, 개별 유권자의 권력을 증대. 전체 유권자에서 100명을 무작위로 산출하고, 그들에게만 투표권을 부여했다고 하자. 그들의 투표는 이제 무척 중요해졌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투표에 대해 조심스레 생각할, 적절한 정보를 얻으려는, 그 정보를 신중히 처리할 강한 동기가 부여됐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대안의 경우 심각한 단점이 있다. 자신의 투표가 갖는 권력이 강해질수록, 유권자는 똑똑해지나 공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투표하는 경향이 있다. 이 가설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경험적 증거가 있다.

둘째, 다수 유권자가 더 나은 정보를 얻도록 동기를 부여. 케플런이 제안한 ‘National Voter Achievement Day’에서 유권자는 자발적으로 시험 센터에 가서 정치 정보와 관련된 시험을 치고, 높은 점수가 나오면 차등의 돈을 받을 수 있다. 즉, 더 많은 정보를 갖고 있으면 더 많은 경제적 이익을 얻는다.

이러한 대안은 물론 우리가 처한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지만, 적어도 유권자가 더 많은 정보를 얻도록 노력하는 올바른 길로 우리를 인도할 것 같다.

2절. Enlightened Preference Voting

어떤 정책을 선호하는지를 설명하는 데는 세 가지 데이터가 필요하다: “What people know”, “What they want”, “who they are.” 이 세 데이터를 조합함으로써 유권자의 사고 방식을 파악할 수 있다.

이상의 세 가지 데이터 조합하는 여러 연구 방식을 활용하여 높은 수준의 통치를 이루려는 시도가 가능하다. 선거일에 유권자는 단순히 투표하는 것이 아니라 (1) 그들의 성별, 성 정체성, 소득 수준 등과 같은 인구학적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그들이 누구인지’를 고지하고, (2) 기본적인 정치에 관한 정보를 시험하는 퀴즈를 풂으로써 ‘그들이 무엇을 아는지’를 고지하고, (3) 선거에서 어떤 후보, 정당 혹은 입장을 지지하는지를 밝힘으로써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고지한다. 이 세 데이터는 익명화되어 사회적으로 공유가 된다. 그 후, 선거 위원회는 해당 데이터를 사용해 만일 대중이 인구학적으로 동일하나 지식 시험에서 만점을 받았다면, 무엇을 원했을지를 추정하고, 그 무엇을 실현한다. 이러한 대안을 현명한 선호 투표라고 부를 수 있다.

이 현명한 선호 투표라는 대안은 더 나은(더 잘 아는) 유권자를 만들려고 시도하지 않는다는 특징을 지닌다. 즉, 교육을 말하지 않는다. 현명한 선호 투표는 투표에 영향을 미치는 인구학적 편향을 조사하고 제거한다는 강점을 지닌다.

누군가는 이 현명한 선호 투표 방식이 진정으로 민주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일단 현명한 선호 투표에서도 누구나 투표할 수 있고, 동등한 권력을 갖는다. 게다가 현명한 선호 투표는 우리가 더 잘 알았다면 무엇을 원했을지를 알게 해준다는 점에서, 군중으로부터 지혜를 뽑아내는 더 나은 민주적 메커니즘인 것이다.

반면 누군가는 현명한 선호 투표 방식이 민주적이지 않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널리 알려진 민주주의의 정의에 입각하면, 한 체제는 오직 인민이 자신을 집단적으로 통치할 때만 민주적이다. 그런데 현명한 선호 투표 체제에서 인민은 스스로 ‘직접’ 자신을 통치하지 않고 일종의 ‘구성된 혹은 시뮬레이션을 통한 인민’이 자신을 통치하기 때문이다.

※ 브레넌이 내세우는 현명한 선호 투표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 자신이 강점으로 내세우는 ‘인구학적 편향’을 제거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인식론적 민주주의의 주장대로 ‘옳은’ 정치적 해답이 있다고 했을 때, 그것이 ‘누구에게’ 옳은지도 따져봐야 한다. 이민자에게 옳은 정치적 해답이 있을 수 있고, 이민자가 아닌 자에게 옳은 정치적 해답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이민자의 사례처럼 인구학적 비율이 극단적으로 차이가 나는 경우, 정치적 편향을 제거했을 때 옳은 정치적 해답이 도출됐고, 그것이 이민자에게 옳지 않은 해답이라고 해보자. 이 경우, 정치는 적어도 옳을지는 몰라도 정의롭지는 못한 정책을 실천하게 된다. 정치나 정책은 단순히 옳음을 추구하지 않는다. 이 경우, 정치는 ‘편향의 제거’를 말미암아 사회적 특수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없는 것으로, 심지어는 없어져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 입장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다. 오히려 정치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인구학적 편향의 ‘제거’가 아닌 ‘고려’이다.

나의 이러한 문제 제기는 5절과 이어진다.

3절. Who Decide What Counts as Enlightened?

에스틀런드는 몇몇 시민은 정치적으로 더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으므로, 더 나은 정치적 판단을 할 수 있다는 점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는 그 ‘뛰어남’의 ‘기준’이 논란의 대상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은 어떤 사태가 논란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곧 해당 사태에 대한 참이 없다는 것으로 이해돼선 안 된다. 그의 주장은 뛰어남을 측정할 시험이나 전문가를 선별하는 기준이 공적으로 정당화되어야만 하는데, 이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그는 모든 합리적인 사람은 정치의 측면에서 뛰어난 사람과 아닌 사람이 실제로 구분될 수 있다는 추상적인 수준에는 동의하나, 구체적인 수준으로 모든 합리적인 사람이 동의할 만한 시험이나 기준이 있을 수 있다는 점에 대해 회의적이다. 예컨대, 2절에서 소개한 현명한 선호 투표에서 치러지는 시험을 구성한다고 치면, 현실 세계에서 많은 개입이 이뤄진다.

하지만 우리는 시민들의 숙의 조사를 통해 뛰어난 능력의 유무를 가릴 기준을 설정할 수 있다. 이 주장은 시민들이 현명하지 않고, 숙의는 자주 실패를 낳는다는 이전의 일관된 주장과 대치되어 보인다. 하지만 이는 오해다. 우선, 지금까지 주장한 바는 ‘시민들은 항상 어디서든 체계적 오류에 종속되어 있다’라거나 ‘정치적 당파성은 항상 어디서든 우리를 멍청하게 만든다’라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대중은 몇몇 정치적 쟁점에 대해서 체계적인 오류를 저지른다’였을 뿐이다. 평균적인·일반적인 시민은 ‘정보를 잘 갖춘 시민은 무엇을 알고 있어야만 하는가?’에 대해서는 대답할 수 있다. 단지 그들은 ‘실제로’ 그것을 알지 못하거나 알기에 쉽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시민들은 뛰어난 능력의 유무를 가질 기준을 알고 또 설정할 수 있다. 단지 그들은 그 기준을 스스로에게 적용하지 못할 뿐이다.

나아가 뛰어난 사람과 아닌 사람을 구분하는 기준이 있다는 점에 추상적으로 동의할 수는 있어도, 구체적인 수준에서 그 구분 기준을 만드는 것은 논란이 될 수 있다는 에스틀런드의 회의는 그다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정치의 영역에 있는 많은 것들이 그렇다. 예컨대, 우리는 종교적 표현의 자유가 상업적 표현의 자유보다 더 위에 있다고 추상적인 수준으로 알고 있으나, 구체적인 정책 수준에서 그것을 적용하는 것이 어려울 뿐이다. 이렇게 구체적 적용이 논란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문제로 삼는다면, 에스틀룬드는 민주적 국가보다는 아나키스트가 되어야 할 것이다.

모든 사람이 동의할 만한 뛰어난 능력의 유무를 가릴 기준을 설정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주장은 Gaus를 통해서도 제시됐다. 그리고 설정을 위한 ‘심판’은 (1) Impartial & Fair, (2) Reliable & Competent, (3) Decisive, (4) Public 한 성질을 갖고 있으면 된다는 것이 Gaus의 주장이다. 그리고 시민들의 숙의 조사가 Gaus가 주장하는 성질을 갖춘 심판으로 작동할 수 있다.

4절. It Doesn’t have to be Perfect, It Just has to be Better

숙의와 결합한 현명한 선호 투표가 기존 투표 제도가 갖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완벽한 제도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여전히 이러저러한 방해와 조작을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현명하지 않은 기존 투표 제도보다는 더 나을 것이다. 제안하는 대안이 완벽할 필요는 없다. 작은 규모에서 대안을 실험한 후, 만일 성공적이라면 규모를 확장하면 되고, 문제가 있다면 다시 고치면 될 뿐이다. 수정할 수도 없다면 다른 대안을 찾으면 될 뿐이다.

5절. Democracy’s Race Problem: Why Enlightened Preference Voting is Better for Minorities

현명한 선호 투표는 민주주의가 겪는 소수자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명목상 모든 사람에게 선거권이 주어져 있지만, 혜택받은 유권자와 그렇지 않은 유권자는 나누어져 있다. 다음과 같은 극단적 사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90%의 백인과 10%의 흑인으로 구성된 굉장히 인종주의적인 사회에서는 백인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흑인의 투표권 여부와 관계없이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은 투표를 통해 정당화된다.

하지만 현명한 선호 투표는 인구학적 편향을 제거함으로써 인구학적으로 동질적인 공중을 구상하고, 그들이 정보를 충분히 갖췄을 때 선호할 것이 무엇인지 시뮬레이션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목표를 가진 현명한 선호 투표는 무지의 베일을 주장하는 롤스의 이론과 유사하다. 무지의 베일을 통해 인종, 젠더, 성, 소득 수준 등에 관한 정보가 차단된 상황에서 사람들은 모두에게 좋은 규칙을 선택하게 되는 데, 현명한 선호 투표는 같은 효과를 낳는다. 즉, 모든 인구학적인 영향력을 “중립화”함으로써 더 나은 결과를 산출하는 데 방해되는 것들을 제거하고, 그 결과 인구학적 특징으로 인해 침해받는 소수자의 권리를 보호할 수 있다.

※ 브레넌은 “Some philosophers and theorists dispute whether a veil of ignorance, rather than defeating unfair biases, instead removes important information”이라며 자신 주장에 대한 비판을 의식하나, “I am not taking a firm stand here”라며 비판을 피한다. 그 후 그는 자신 이론이 편향으로 가득 찬 민주주의를 개선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편향 제거가 편향이 없는 상황에서 모든 사람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다줄지는 몰라도, 브레넌 자신이 강조하듯이 편향된 상황이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이다. “이 사회주의는 진짜 사회주의가 아니야!”라는 식의 반론을 비판한 브레넌이 현명한 선호 투표를 통해 지금 시도하는 바는 ‘진짜’ 민주주의를 이 땅에 자리 잡게 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인구학적 편향으로 인한 불평등이 현실에 존재한다는 점을 인정하는 브레넌이라면, 현명한 선호 투표를 통해 밝혀진 ‘옳은’ 정책에 찬동하고 그것에 잘 따를 수 있는 사람은 그 편향에서 득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브레넌이 현명한 선호 투표를 통해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 ‘진짜’ 민주주의 사회일지는 몰라도, ‘정의로운’ 민주주의 사회인지는 의문이다. 특히나 “빈자를 방치하는 것”과 같은 “능력이 부족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해로울 뿐만 아니라 악이다”라고 말하는 브레넌 자신의 이론은 얼마나 정의로운가?

6절. Other Alternatives and Conclusion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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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Against Democracy를 읽고 있는데 Debating Democracy도 읽어야 겠군요.

브레넌 책이 읽어보니 생각보다 빡세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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