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 카플란, 「지시사」 발췌 정리

Kaplan, David (1989). “Demonstratives: An Essay on the Semantics, Logic, Metaphysics, and Epistemology of Demonstratives and Other Indexicals.” Themes from Kaplan. Ed. Joseph Almog, Jonh Perry and Howard Wettstei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481-564. 481-507.

서문

논리학의 양화 문제는, 카플란이 직접지시어(directly referential term)라 부르는 표현을 다루는 직접 지시 의미론(semantics of direct reference)의 문제로 우리를 이끈다. 직접지시어란, 프레게의 뜻(Sinn)을 경유하지 않고 대상을 지시하는 단칭어를 말한다. 이러한 단칭어가 존재한다면, 이것을 포함한 문장으로 표현되는 명제는 현전 방식을 통한 간접적인 형태로가 아니라 직접적으로 개별 대상을 수반하게 된다. 이처럼 직접지시어를 포함하는 명제를 카플란은 단칭명제(singular proposition)라 부른다.

양화 내포 논리에서는, 개별 대상이 여러 개의 가능세계를 통틀어 같은 것으로 식별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 점은 단칭명제에 대한 가능세계 의미론을 구성할 때 문제가 된다. 가능세계 의미론에서 모든 명제가 단칭명제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비(非)단칭명제들을 분석할 때에도 단칭명제가 필요하기 때문에 이 문제는 중요하다.

(∃x)(Fx&~□Fx) (어떤 x에 대해, F이면서 필연적으로 F이지는 않은 x가 존재한다.

이 문장에서 □Fx의 진릿값을 결정하기 위해 Fx가 필연적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여기에서 자유 변항 x에 (가령 “a” 같은) 특정한 값이 할당된다면 이는 직접지시어의 전형이다. 그리고 자유 변항을 포함한 유의미한 명제를 구성하고자 한다면 (“Fa”처럼) 변항의 자리에 값을 할당해야 하며, 따라서 이런 명제는 단칭명제가 되어야 한다. 개별 대상이 명제의 구성 성분이 아닌 단칭어에 의해 직접 규정되는 명제를 우리는 단칭명제라 부른다.

프레게 의미론을 견지하면서 양화 내포 논리를 발전시킨 처치(Alonzo Church)는 직접지시어에 대한 이러한 요구를 교묘하게 은폐한다. 처치의 논리학에서는 자유 변항의 값이 할당된 문장 정식만으로는 명제가 규정되지 않으며, 추가로 변항의 ‘뜻’이 주어져야 한다. 처치가 직접지시어의 가능성을 거부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직접지시어가 도입되면 이름에 관한 동일성 문제가 발생하는데, 뜻과 지시체의 구별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프레게와 처치는 뜻을 통해 지시에 도달하는 길만이 있지, 지시를 통해 뜻에 도달하는 길은 없다고 생각한다.

카플란은 당초 프레게주의의 입장에서 양화 내포 논리가 이러한 단칭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1 그러나 도넬란, 퍼트남, 크립키 등 지시가 오직 뜻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프레게의 의미론을 비판하는 직접지시이론의 옹호자들을 통해 카플란은 직접지시의 중요성을 깨닫고 지시사에 관한 논의를 발전시킨다.2 그의 요지는, 도넬란의 지시적 사용과 비슷한 발상이 자신의 새로운 지시사 “Dthat”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시기들을 거쳐, 카플란은 지시사들이 직접지시모형을 가지고서야 비로소 적절하게 설명될 수 있다는 생각에 도달한다. 이 논고는 직접지시 의미론보다 좁은 범위의 이론이면서도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생각되는 지시사 논리에 관한 논고이다.

I. 서론

II. 지시사, 지표사, 순수 지표사

카플란의 이론은 지시사(demonstratives), 그리고 지시사를 넘어 대명사(나, 너, 그, 그녀, 그것), 지시대명사(이것, 저것), 부사(여기, 지금, 어제, 오늘), 형용사(현재) 등 특정한 용법을 갖는 문장 성분들에 관한 이론이다. 이 문장 성분들은 특정한 용법 속에서는, “지시체가 그 사용 맥락에 의존하며, 맥락의 특정한 측면 가운데 지시체를 결정하는 규칙을 단어의 의미가 제공한다”(Kaplan, 1989: 490)는 특징을 갖는다. 이 문장 성분들은 “자아중심적 특수자”(egocentric particular)나 “개별항 재귀어”(token reflexive)로 불리고는 했는데, 카플란은 이들을 통칭하여 “지표사”(indexical)라 부른다.

지표사들 중에는 지시체(referent)를 결정하기 위해 대상을 (이를테면 손가락 등으로) 지목(demonstration)하는 일을 필요로 한다. 이 특징을 가진 것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지시사이며, “이것”, “저것” 등이 그 예시이다. 한편 지시사에 대응하여 지목의 대상이 되는 것을 피지목항(被指目項, demonstratum)이라 부른다. 지시사들은 각각의 맥락에서 사용을 규정하는 언어 규칙만으로는 의미가 결정되지 않으며, 지목과 연계되지 않고서는 불완전한 채로 남는다. 지목을 동반하지 않은 지시사는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지목을 동반함에도 어떤 피지목항도 지니지 않는 (지목에 실패한) 공허한(vacuous) 지시사와는 구분되어야 한다.

카플란은 순수 지표사를 참다운 지시사와 구분한다. 순수 지표사(“나”, “여기”, “지금”, “오늘” 등)는 지시사와 달리 지목을 동반하지 않아도 완전한 의미를 갖는다. 순수 지표사는 각각의 맥락을 규정하는 언어적 규칙만으로 그 의미가 결정된다.

어떤 지표사는 순수하게도 지시사적으로도 사용될 수 있다. 예컨대 지도의 한 부분을 가리키며 “2주 뒤에 나는 여기 있을 거야”라고 말한다면, 이때 “여기”는 지시사적으로 사용된 것이다.

III. 두 가지 분명한 원리

카플란의 이론은 자명한 두 가지 원리에 기초한다.

원리 1: 순수 지표사의 지시체는 맥락에 의존하며, 지시사의 지시체는 연계된 지목에 의존한다.
원리 2: 지표사는 순수 사용에서든 지시사적 사용에서든 직접지시적이다.

IV. 고정지시어에 관한 소견

크립키는 고유명을 고정지시어라고 간주한다. 고정지시어란, 대상이 존재하는 모든 가능세계 속에서 동일한 대상을 지시하며, 그 외의 세계에서는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는 이름이다. 이에 따르면 고정지시어가 모든 가능세계에서 동일한 대상을 지시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카플란이 보기에 크립키는 고정지시어 개념과 상충하는 주장들을 편다. 크립키에 의하면, “히틀러는 존재하지 않는다”와 같은 문장이 참일 수도 있는 이유는, “히틀러”라는 이름이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이름으로 지시되는 대상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편, 크립키는 변항이 모든 가능세계에서, 동일한 개별자를 지시한다고 주장한다. 해당 개별자가 존재하지 않는 가능세계에서도 말이다. 우리는 『이름과 필연』에 두 가지 고정지시어 개념이 존재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수정된 고정지시어” 내지 “강한 고정지시어”로, 대상이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모든 가능세계에서 동일한 대상을 지시하는 지시어이다. 다른 하나는 “원래의 고정지시어”로,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가능세계에서는 대상을 지시하지 않는 지시어이다.

​ “크립키의 의도가(내가 의심하듯 그는 그 자신의 개념을 잘못 기술했을까?) 그리고 연계들이나 ‘고정지시어’라는 구의 의미가 무엇을 지니든, 나는 ‘직접지시적’이라는 말을 다음의 표현들에 대해 사용하도록 의도한다. 해당 표현들의 지시체가 일단 결정되면, 그 지시체는 가능한 모든 상황 속에서 고정된 것으로, 즉 명제 성분[propositional component]으로 취해진다.”(Kaplan, 1989: 493) 직접지시적(directly referential)이란, 가능한 모든 상황 속에서 지시어가 지시체를 고정적으로 지시함을 뜻한다. 이 지시를 통해 지시체는 명제의 구성성분이 된다. 이때 고정된 대상을 직접지시하는 일은 의미론적 규칙에 의해 제공된다는 점이 카플란의 생각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용 맥락”(context of use)과 “평가 상황”(circumstance of evaluation)을 구분해야 한다. 지시어가 가능한 모든 상황 속에서 지시체를 고정적으로 지시한다는 말은, 해당 지시어가 이 지시체 외에 다른 대상을 지시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지시어는 사용의 맥락에 따라서는 다른 대상을 지시하는 데 쓰일 수 있다. 그러나 주어진 사용 맥락 속에서 해당 지시어가 포함된 진술들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평가할 때, 가능한 상황들을 진술하는 모든 명제들은 지시어가 가리키는 동일한 대상에 대한 것이다.

명제를 문장에 의해 표현되는 구조를 가진 형이상학적 존재물(entity)로 상정하자. 문장에 단칭어가 등장할 때, 단칭어에 대응하는 구성요소가 명제에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이때 명제 내의 구성요소는 대개 여러 가지 속성들이 조합된 복합체일 터이지만, 직접지시적 단칭어의 경우 그에 대응하는 명제의 구성요소는 복합체가 아닌 지시 대상 자체이다.3 예컨대

The n[(눈이 얕게 쌓였다&n2=9)∨(~눈이 얕게 쌓였다&22=n+1)]

이라는 한정 기술구는 크립키의 의미에서 고정지시어이지만 카플란의 의미에서 직접지시어는 아니다. 이 기술구가 ‘3’에 해당하는 대상을 지시한다는 점은 사실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 예시로 카플란은 직접지시어의 개념을 고정지시어 개념과 구별한다. 직접지시어를 특징 지우는 것은, 모든 가능한 상황에서 대상을 지시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모든 평가 상황에서 대상을 직접 지시하도록 하는 의미론적 규칙에 지배된다는 점이다.

사용 맥락과 평가 상황을 구별한다면, 우리는 각각의 ‘맥락’에 대상을 할당하는 ‘규칙’과 각각의 ‘상황’에 대상을 할당하는 ‘복합체’를 혼동하지 않을 수 있다. 예컨대 각각의 맥락에는 행위자(내지 화자)가 있으므로, 우리는 직접지시어의 적절한 규칙을 다음처럼 생각해볼 수 있다.

각각의 사용 맥락 속에서, 주어진 용어는 맥락의 행위자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 규칙이 적절하다는 것은, 이 규칙이 모든 평가 상황에서 대상을 할당한다는 뜻은 아니다. 이 규칙은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가 참이 되는 상황, 즉 내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행위자, 화자를 할당하지 못한다.

직접지시어의 지시체는, 가능한 여러 상황들을 맞닥뜨리기 전에 이미 명제 성분으로서 결정되어 있다. 직접지시어는 사용 맥락 속에서 의미론적 규칙에 의해 지시체를 할당받는다. 따라서 우리는 지시체가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상황, 즉 평가 상황 속에서 지시체를 선택해 직접지시어에 할당해야 할 필요가 전혀 없다. 그렇다면 직접지시어(예컨대 고유명이나 변항)는 모든 가능세계에서 존재하지 않더라도 여전히 모든 가능세계에서 동일한 대상을 지시하는 강한 고정지시어이다.4

가능세계 의미론은 사용 맥락과 평가 상황의 구별을 모호하게 만든다. 가능세계 의미론은, 직접지시어의 명제 성분을 마치 상황 속에서 불변하는 상항 함수(constant function)처럼 보이게 만든다. 이렇게 된다면 직접지시어의 대상은 한정 기술구의 대상이 변항인 것과 대조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카플란의 구별을 정확하게 견지한다면, 직접지시어의 명제 성분은 상황과 연관되는 어떤 함수가 아니다. 사용 맥락에서 결정되는 명제 성분은 평가 상황과는 아예 범주가 다른, 무관한 것이다.

직접지시어는 그 종류에 따라 프레게의 의미와 관련되는 기술적 의미(descriptive meaning)를 가질 수도 있고 갖지 않을 수도 있다. 고유명은 이런 의미를 갖지 않을 수도 있고, 지표사는 이런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직접지시어의 기술적 의미는 직접지시어의 명제적 내용과는 무관하다.

V. 원리 2에 대한 논증: 순수 지표사

여기서 카플란은 원리 2의 의미를 분명히 한다. 카플란은 지표사가 기술적 의미를 결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표사의 기술적 의미는 지시체를 결정하는 사용 맥락 속에서 정해지지, 평가 상황 속에서 정해지지는 않는다. 예컨대 “나”라는 지표사의 기술적 의미가 명제의 구성요인이라고 가정한다면, 내가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발화했을 때 이 문장은 내가(화자가) 존재하지 않을 때 그리고 오직 그 때에만 참일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말한 것은 참이 될 수 없으며, 이로부터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 따라 나올 것이다. 이는 이상하다. 개인의 존재는 필연적이 아니라 우연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에 해당하는 명제의 구성요인은 지시체지 기술적 의미가 아니다.

지표사의 기술적 의미는 어떤 평가 상황에도 적용 불가능하다. 내가

지금 내가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라고 말한다면, 여기서 소망이 충족되는 상황은 내가 말을 하지 않는 상황이다. 그러나 평가 상황은 저 문장의 “나”와 “지금”의 지시체를 결정하지 않는다. 이 지표사들의 지시체는 평가 상황이 아닌 사용 맥락에 의해 이미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음의 예시는 기술적 의미의 상황에의 적용 불가능성이 아니라 무관함을 드러내는 예시이다. t0에서 내가 “지금 아름다운 모든 것이 퇴색하는 때가 올 것이다”라고 말할 때, 평가 상황은 “지금 아름다운 모든 것이 퇴색한다”가 미래 시점인 t1에서 참인지 거짓인지이다. 그런데 여기서 '지금'은 평가 상황인 t1이 아니라 사용 맥락의 시점인 t0이다.

5년 후 파키스탄에서는, 실제로 지금 여기 사는 사람들만이 부러움을 살 수도 있다.

이 문장에서 “실제로”, “지금”, “여기”가 각각 가리키는 상황, 시점, 장소는 그 사용 맥락에서 정해지는 것이지, 양상, 장소, 시간 연산자에 의해 정해지지 않는다.

이 예시는 지표사들이 일차 발생한다는 점만을 보여줄 뿐이라는 반론이 가능하다. 이 반론에 따르면 위 문장은 다음처럼 변환된다.

(∃w)(∃p)(∃t)[w=실제 상황&p=여기&t=지금&◇5년 후 파키스탄에서 ∀x(x는 부러움을 산다→x는 w에서 t 동안 p에 위치한다)]

그러나 이렇게 변환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이 지표사들이 지시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물을 때 문장이 발화되는 맥락 c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이 절에서 카플란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T1) 순수 지표사의 기술적 의미는 사용 맥락의 측면에서는 지표사의 지시체를 결정하지만, 평가 상황의 측면에서는 지시체를 결정하는 데 적용 불가능하거나 무관하다.

(T1)은 (T2)의 직관에 의해 뒷받침된다.

(T2) 맥락 c 내에서 순수 지표사를 사용해서 말해진 것이 임의의 상황과 관련하여 평가될 때 관계되는 대상은 항상 맥락 c의 측면에서의 지표사의 지시체이다.

(T2)는 원리 2를 보다 정교화한 것이다.

VI. 용어법적 소견

원리 1과 원리 2를 동시에 받아들인다면, 순수 지표사를 포함하는 문장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는 점이 도출된다. 카플란은 두 가지 의미를 각각 ‘내용’과 ‘성격’이라고 칭한다.

VI. (i) 내용과 상황

“나는 오늘 점심을 걸렀다”처럼 지표사를 포함한 문장은 어느 날에 누가 발화하느냐에 따라 다른 것을 말하게 된다. 즉 같은 문장은 상황에 따라 말하는 바가 다르다. 이렇게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종류의 의미를 카플란은 내용이라 칭한다. 문장의 내용은 전통적으로 명제 또는 진술이라 불려왔던 것과 유사하다. 하나의 문장은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따라 다른 명제 또는 진술을 표현할 수 있다. 한편 내용은 문장뿐만이 아니라 한정 기술구, 지표사, 술어 등의 문장 성분도 갖는 의미이다.

문장이든 문장 성분이든, 한 표현의 내용을 평가한 결과는 그 표현의 외연이 된다. 예컨대 문장의 내용이 명제라면, 평가 결과는 그 명제의 진릿값이다. 한편 단칭어의 평가 결과는 지시체이다. 이런 식으로, 카플란은 내용을 평가 상황에 따라 외연을 산출하는 함수(카르납의 표현으로는 내포)로 규정한다. 모든 평가 상황 속에서 동일한 외연을 산출하는 고정된 내용은 상수(常數) 함수로 간주될 수 있다.

평가 상황이란, 표현의 외연에 관련하는 사실적/반사실적 정황을 말한다. 상황에는 상태, 시간 등의 요소들이 포함된다.

양상 연산자, 시제 연산자와 같은 내포 연산자들은 내포 논리에서와 마찬가지로 평가 과정에서 내용에 적용될 수 있다. 예컨대 양상 연산자는 평가 상황에서 세계 내 가능한 상태들에, 시제 연산자는 평가 상황의 시간에 관여한다. 내포 연산자는 카플란이 “완벽한(perfect) 문장”이라 부르는 것, 즉 구체적인 평가 상황을 이미 포함하고 있는 문장에서는 잉여적으로 된다. 이미 특정한 시간과 특정한 세계 내 상태(state of the world)를 지시하고 있다면, 시제 연산자와 양상 연산자를 내용에 첨가하는 일은 쓸모가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글을 쓰고 있다”라는 문장은 내가 언제 글을 쓰고 있는지와 내가 속한 세계가 어떤 상태인지를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지 않으므로, 양상 및 시제에 대해 중립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평가 상황 속에서 진릿값을 할당하기 위해 양상 연산자와 시제 연산자를 유의미하게 이용할 수 있다. 반면 “나는 2020년 7월 9일에 필연적으로 글을 쓸 수밖에 없다”라는 문장의 내용은 이미 특정한 양상과 시제를 포함하고 있으며, 평가 상황에서 내포 연산자들을 도입하는 일은 잉여적이다.

​ 한 상황에서 존재하는 개체는 다른 상황에서도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어떤 속성들을 가지고 존재하는가? 카플란은, 직접지시적 표현에 관한 이론은 이러한 형이상학적 질문이 유의미하게 물어질 수 있을 때에만 더불어 의미를 지닌다고 지적한다. 카플란은 개체에 관한 개체성주의(haecceitism)5라는 입장을 취하며, 직접지시적 표현에 관한 논의가 형이상학적 개체성주의로 직결된다고 생각한다.

VI. (ii) 성격

지표사는 내용뿐만 아니라 ‘성격’이라는 두 번째 층위의 의미를 갖는다. 성격은 다양한 맥락 속에서 지표사의 내용을 결정하는 의미이다. 예컨대

‘나’는 화자를 지시한다.

는 ‘나’라는 지표사의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격은 표현 자체가 갖고 있는 의미 규칙 또는 언어적 규약이다. 성격은 그 자체로는 불완전한 의미만을 가지며, 맥락과 결합해서 비로소 온전한 의미를 산출한다.

내용이 평가 상황을 논항으로 하여 외연을 산출하는 함수이듯, 카플란은 성격 또한 함수로 정의한다. 성격이란, 사용 맥락을 논항으로 하여 내용을 산출하는 함수이다. 카플란의 논의를 따라간다면 다음의 두 방정식이 성립한다.

성격+맥락=내포(내용)
내용(내포)+가능세계=외연

지표사가 이처럼 맥락민감적(context-sensitive)인 반면, 비(非)지표적 표현들은 모든 맥락 속에서 고정적인 의미를 지닌다. 물론 카플란의 주장은 비지표적 표현들이 맥락에 대해 고정적이라는 것이지, 평가 상황에 대해서도 같은 결과값만을 산출한다는 말이 아니다. 예컨대

1977년에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은 2177년에 죽는다.

처럼 어떤 지표사도 포함하지 않은 문장은 평가 상황에 따라 다른 결과를 산출할 수는 있겠지만, 어떤 상황에서 발화되든 같은 내용을 지닌다.

프레게의 내포 교체 원리는 카플란의 설명을 도입한다면 다음의 두 가지 원리로 재정식화될 수 있다.

(F1) 전체의 성격은 부분들의 성격의 함수이다. 다시 말해, 각기 (아마도 다른) 맥락 속에서 정립되었으며 적형식 표현인 두 복합물이 각각의 맥락 속에서 취해진 성분과 관련해서만 다르다면, 각기 고유 맥락으로부터 취해진 두 복합물의 내용은 같다.
(F2) 전체의 내용은 부분들의 내용의 함수이다. 다시 말해, 각기 (아마도 다른) 맥락 속에서 정립되었으며 적형식 표현인 두 복합물이, 각각의 맥락 속에서 취해졌을 때 같은 내용을 갖는 성분6과 관련해서만 다르다면, 각기 고유 맥락으로부터 취해진 두 복합물의 내용은 같다. (Kaplan, 1989: 507)

(F2)는 다른 지표사를 통해 같은 것을 말할 수 있다는 점을 드러낸다. 날짜가 바뀌면, “오늘 나는 아침을 걸렀다”와 동일한 것을 말하기 위해서는 지표사를 바꿔서 “어제 나는 아침을 걸렀다”라고 말해야 한다.

앞서 직접지시어의 의미가 곧 지시체라고 주장했던 것과 유사하게, 카플란은 지표사 없는 표현의 성격이란 곧 내용이라고 주장한다.


1.Kaplan (1968). “Quantifying In.”
2.Kaplan (1978), “Dthat.”
3.명제와 명제의 구조에 관한 형이상학은 러셀과 화이트헤드의 『수학의 원리』에서 차용한 것이다.
4.“우리가 만일 가능세계 의미론을 받아들인다면, 모든 직접지시어는 모든 가능세계에서 (사물이 가능세계에서 존재하는지 아닌지와는 무관하게) 동일한 사물을 지시하는 표현의 수정된 의미에서 고정지시어로 간주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미 지적했듯, 나는 모든 고정지시어─모든 강한 고정지시어들(모든 가능세계에서 존재하는 무언가를 지시하는 것들) 또는 수정된 의미에서 모든 고정지시어마저도─가 직접지시적이라고 간주하지는 않는다. 나는 고유명이 변항과 마찬가지로 직접지시적이라고 믿는다. 이들은 대개 강한 고정지시어도 아니고 원래의 의미에서 고정지시어도 아니다. 직접지시어의 특징이란, 명제 성분이 상황과 더불어 피지시항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피지시항(지시체)이 명제 성분을 결정한다는 점이다. 이 이유에서, 우연히 존재하는 대상을 지시하는 직접지시어는 여전히 수정된 의미에서 고정지시어일 것이다. 명제 성분은 현재의 상황에 의해 제공된 것들로부터 피지시항을 선택할 필요가 없다. 명제 성분은 이미 상황을 맞닥뜨리기 전에 피지시항을 확보한 것이다.”(Kaplan, 1989: 497)
5.Kaplan (1975). “How to Russell a Frege-Church.”
6.(F1)을 만족시키는 두 성분을 의미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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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플란이 말하는 성격(character)가 표현 자체가 갖고 있는 의미 규칙 또는 언어적 규약이라고 하셨는데,
“오늘 나는 아침을 걸렀다”는 명제에서 성격은 어떤 것인가요? 이 문장이 표현하고 있는 언어적 의미 즉 사실 여부를 떠난 문자적 의미를 뜻하는 것인가요? 그래서 이러한 문자적 의미가 화자가 오늘 오후에 “오늘 나는 아침을 걸렀다”라고 말을 하는 맥락에서 명제가 참이 되는 건가요?

네 맞습니다. 일단 성격과 내용의 구분은 지표적 표현들에 대해 적용되는 구분인데, 일단 성격은 지표사가 갖는 어휘적(lexical) 의미입니다. 가령 이러저러한 맥락을 떼어놓고 단어 자체만 놓고 봤을 때 "오늘"은 "지금 지나가고 있는 이 날"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나"는 "남이 아닌 발화자 자신"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한편 "오늘"이나 "나"의 의미는 성격만으로 완성되지 않고, 이에 더해 구체적인 맥락을 부여받음으로써 비로소 온전해집니다. 예컨대 "오늘 나는 아침을 걸렀다"가 1804년 12월 3일에 발화될 때에야 "오늘"은 특정한 날짜를 지시할 수 있고, 헤겔에 의해 발화될 때에야 "나"는 발화자인 특정한 인물을 지시할 수 있습니다. 이때 성격과 맥락의 결합 속에서 지표사가 가리키는 대상을 카플란은 내용이라고 일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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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언어철학의 논의들은 언어의 의미에 대해서 입체적으로 분석을 하다보니 주장의 핵심을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서 애를 먹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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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언어철학 수업 때 읽 (어야했지만 안 읽었)던 논문이군요. 전 이때 읽기 너무 귀찮아서 제대로 안 읽고 에세이 쓰고 B를 받은 전적이 있습니다. 그 이후로 괜히 카플란은 읽기 싫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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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적으로야 고전이라 배울 게 많다지만, 솔직히 읽기에는 별로 좋지 않은 글이라고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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