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 Henrich, <피히테의 근원적 통찰>의 핵심 논변

독일 철학자 디터 헨리히 (Dieter Henrich; 1927-2022)의 초기 저작이자 피히테 연구로서도 유명한 그의 논문 "피히테의 근원적 통찰 (Fichtes ursprüngliche Einsicht)" (1966)의 핵심 논변 중 하나를 소개합니다. 참고로 헨리히가 지적한 문제는 자기의식에 대한 현대철학적 논의에서도 (피히테의 이름과 함께) 종종 언급이 됩니다.


헨리히에 따르면 피히테는 (라이프니츠와 칸트를 포함한) 기존 철학자들의 자기의식 모델 기저에 깔려있는 순환성을 처음으로 지적하고 이것을 문제화한 철학자이다. 헨리히는 이 문제적인 자기의식 모델을 반성모델 (Reflexionsmodell)이라고 부른다. 반성모델이란 자기의식을 곧 주체가 자기 스스로를 표상하고 인식하는 태도 및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즉 반성과정을 통해 "주체로서의 나"가 "객체로서의 나"를 의식하고 인식한다 (이하 "주체-나"와 "객체-나").

피히테는 이러한 반성모델이 저지르는 순환성을 2가지 측면에서 지적한다.

  1. 반성모델에 따르면 자기의식이란 "주체-나"로 시작하여 이 "주체-나"가 "객체-나"를 의식적으로 지향해서 이것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 "주체-나"는 어떤 대상이 "객체-나"인지를 이미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바로 그러한 "객체-나"를 표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애초에 "주체-나"가 자기의식에 도달하기도 전에 이미 "객체-나"를 알고 있다는 말이 된다. 즉 이러한 모델은 설명되어야 할 것(=자기의식="객체-나"에 대한 앎)을 이미 전제하는 순환오류를 저지르고 있다.
  2. 어찌저찌하여 1번의 반성과정이 성립하였다고 하자. 즉 "주체-나"가 우여곡절 끝에 "객체-나"를 지향할 수 있다고 치자. 그러나 이것만으로 자기의식이 완성될 수 없다. "자기"의식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그렇게 지향된 "객체-나"가 곧 "주체-나"와 동일하다는 앎에 도달해야 하는 것이다 ("주체-나" = "객체-나"). 그러나 그러한 앎은 순환적이다. (반성과정을 통해 대상으로 주어진) "객체-나"가 (반성과정의 시작점인) "주체-나"와 동일하다는 앎을 얻기 위해서는 이미 "주체-나"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주체-나"가 무엇인지에 대한 앎은 애초에 반성을 시작한 목표였다. 즉 반성을 통해 설명되어야 할 것이 이미 전제되고 있다.

따라서 자기의식에 대한 반성모델은 실패한다. 자기의식에 대한 진정한 철학적 모델은 이러한 순환성을 저지르지 않고도 자기의식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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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포함한 모든 학문은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주체의 행동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자기의식은 잘 정의된 개념은 아니지요.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지만 이 소망이 좌절될 때 내 자신을 되돌아 보는 활동이 자아의식일 수도 있지요.

학문은 주체의 환경과 상호작용은 목표를 세우고 이것이 달성되는지 확인하는 되먹임회로 입니다. 세상 물정을 모르고 목표를 세우면 실망만 느낄겁니다. 목표는 세상을 알고 자신을 알아야만 가능합니다.

세상의 모든 학문은 목표를 세우고 실적을 확인하는 순환적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모든 공학제품이 이 순환적 구조를 가지지요. 공학적으로는 되먹임회로라고 합니다. 저의 철학서는 되먹임틀을 기반으로 작성했는데. 암든 피히테는 철학에서 순환구조를 명시적으로 도입한 창의적 철학자이지요.

순환구조가 논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듯 하지만 공학적으로 상당히 안전하게 작동합니다. 순환구조의 인한 불일치가 발생하지 않도록 목표설정과 반응간에 시간 지연을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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