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돔 120일 혹은 방탕주의 학교로 유명한 D.A.F. 사드의 전집이 성귀수씨의 번역으로 출간되고 있습니다.
꽤 재밌는 논증들이 있어 몇가지 소개합니다.
저자는 자기 자신의 철학이 아니라, 각 글에 어울리는 철학을 그때그때 적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과연 저자는 언제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가능할 수 있겠다. 스스로 자제할 때인가, 아니면 모든 베일을 찢고 나설 때인가? 어느 쪽이든 독자에겐 상관없는 문제다. 제각각 글의 특성에 맞는 견해를 그때그때 제시함으로써 표제에 부합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런 방법을 통해서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무언가가 나오지 않을까? 어떤 종류의 편견도 가지지 않고, 이성에 충실해서든 그 밖에 다른 동기에서든,편견을 완전히 말살해버린 사람들이라면 이 문집에서 자기 취향에 맞는 글을 찾아내고야 말 것이다. 편견이 아직도 일부 남아 있고, 철학적 사고의 주변부만을 기웃거린 사람들이라면 다소 평범한 견해에 머물 것이며, 대개는 누구나 그런 정도로 만족할 것이다. 그런데, 미리 말해두지만, 일부 부류는 결코 그렇지도 못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뒹굴던 그 진창 속에 그대로 놓아두기로 한다. 거기서 그들은 시대가 저물 때까지 지지부진한 삶을 이어갈 것이다. 남에게 불쾌감만을 유발할 뿐인 자들의 비위를 굳이 맞추려 애쓸 필요가 있겠는가?
사드 전집 1권에 나오는 사드의 발언인데, 나오다시피 사드는 여러 글들을 일관성 있게 논리적으로 쓰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내용들은 부족한 지식으로나마(저는 철학 비전공자입니다.) 현대적인 논증으로 변형하여 적었습니다.
얕은 웅덩이 논증
출처 : https://doingphilosophy.kr/ethics-and-absolute-poverty/
싱어의 논증은 다음과 같은 매우 단순한 도덕적 원리에 의존한다: 만약 우리가 매우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을 그에 견줄 만큼 도덕적으로 중요한 것을 희생하지 않고도 막을 수 있다면, 우리에게는 그렇게 해야 할 도덕적 의무가 있다.
이 원리는 당신이 왜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해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아이의 생명은 당신의 옷보다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절대 빈곤으로 인해 고통받거나 죽어가고 있으며,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효율적인 구호 단체에 기부함으로써 이를 막기 위한 무언가를 쉽게 할 수 있다. 또한, 그렇게 하기 위해 우리는 도덕적으로 중요한 것을 희생할 필요도 없다. 바닐라 라떼, 넷플릭스, 그 밖의 사치품 등 인간의 생명보다 덜 중요한 것에 돈을 덜 쓰면 된다. 따라서 싱어는 우리 중 많은 사람이 기부를 하지 않는 것은 옷이 더러워지는 것을 피하려고 어린아이가 연못에 빠져 죽도록 내버려 두는 것과 마찬가지로 잘못된 일이라고 결론짓는다.
익히 알려진 피터 싱어의 얕은 웅덩이 논증입니다. 만약 우리가 매우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을 그에 견줄 만큼 도덕적으로 중요한 것을 희생하지 않고도 막을 수 있다면, 우리에게는 그렇게 해야 할 도덕적 의무가 있다. 따라서 우리의 작은 즐거움을 포기해서라도 (효과적인) 기부를 하는 것은 의무이다. 사드는 이와 유사한 주장을 합니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범하고 (중략) 그 폐해라고 해 봐야 어차피 그 여자가 언젠가는 속할 계층에 처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어떤 수전노는 한 불운한 가족이 눈앞에서 몰락해가는 꼴을 빤히 보고만 있다. 어쩌면 그 가족의 끔찍한 절반은 내키는 대로 온갖 일탈 행위를 저지름으로써 역경을 외면하려 들지 모른다. 그러니 악랄한 수전노 한 명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음으로 인해 얼마나 험악한 폐해와 잡다한 범죄가 뒤를 잇겠는가 말이다! 그런데도 그 수전노에 대해 우리가 취하는 조치는?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그 결론은, 형법의 부조리함을 폭로하는 것으로 나아갑니다. 형벌의 세기는 의무를 지키지 못했을 때 발생하는 폐해에 비례해야 하는데, 우리가 중범죄라고 여기는 것들의 폐해보다 "얕은 웅덩이의 아이를 구하지 않은" 것의 폐해가 더 큽니다. 따라서 후자가 전자보다 처벌이 커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중범죄가 더 처벌이 큽니다. 따라서 현실의 법은 잘못되었습니다.
색채 논증
플란팅가는 우리가 과학 등에서 요구하는 엄밀한 증거가 없어도, 상대방의 마음이 객관적으로 존재할 것이라고 믿는다고 합니다. 이러한 믿음은 비합리적으로 평가받지 않습니다. 따라서,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도 비합리적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사드는 이와 유사한 논증을 펼치지만, 대신 감각질qualia 중 하나인 색감을 끌고 들어옵니다. 사드의 논증은 해석하기에 따라 두 가지 방향으로 나뉘는 것 같습니다.
사드의 약한 반종교적 논증
- 상대방의 마음에 대한 믿음은, 자신의 마음에 대한 생생한 경험으로 합리화된다.
-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에 대한 그만한 경험이 없어도 신에 대한 믿음을 그저 문화적 관습의 영향 때문에 받아들인다. (사드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영감spiritual feeling을 색감에 비유하면 맹인과도 같은 상태라고 합니다.)
-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의 신에 대한 믿음은 플란팅가의 논증으로 합리화가 불가능하다.
사드의 강한 반종교적 논증
- 우리는 색깔이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우리가 느끼는 색감이 물체가 질량, 부피, 전하량과 같이 객관적으로 가지는 성질이 아니다.)
- 이는 사람마다 색깔을 다르게 받아들인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 한편 어떤 사람a의 마음은 a의 반성 능력에 의해서만 생생하게 포착이 가능하다. 대부분의 경우 그 a는 "자신의 마음은 존재한다"(자신은 철학적 좀비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a와 (마음이 존재한다고 믿는) 나의 주장은 서로 일치한다.
- 유신론자만큼 무신론자는 꽤 많다. 세상의 종교도 다양하다. 세계의 속성인 신의 존재 및 그 양상에 대해 우리는 색만큼 다양한 불일치를 보이고 있다.
- 따라서, "신의 객관적 존재" 라는 믿음의 합리성을 유비추론을 통해 평가할 것이라면, "마음의 존재"에 대한 믿음 보다 "색깔의 객관적 존재"의 믿음에 유비하여 평가해야 한다.
- 색깔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믿음은 합리적이라 볼 수 없다. 따라서, "신의 객관적 존재"라는 믿음은 합리적이라 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