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문제의식과 목표
로크의 심리철학적 주장 중 동일성과 지각에 대한 것들은 많은 주목을 받지만, 의식에 대한 주장은 생각보다 논의되지 않는다.
그 얼마 되지 않는 해석 역시도 로크를 "고차 지각 해석(High-Order Perception Account; 이하 HOP)"의 선구자로 간주하는 연구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 논문에서는:
1. 로크의 의식 이론을 HOP로서 해석함이 잘못되었음을 밝히고,
2. 그를 브렌타노를 위시한 "등차 지각 해석(Same-Order Perception Account;이하 SOP)"의 선구자로 해석함이 더 옳음을,
문헌적 근거, 역사적 근거, 이론적 근거를 통해 옹호하고자 한다.
Ⅱ. HOP 이론에 대한 개괄
1. 의식의 정의
HOP 이론을 말하기 이전, 우리는 "고차 관찰 이론(High-Order Monitoring Theory; 이하 HOM)"를 먼저 살펴야 한다. 암스트롱(David Armstrong) 혹은 라이칸(William Lycan) 같은 철학자에 따르면, 의식이란 2차적인 심적 상태를 형성할 수 있는 능력(capacity)을 포함해야 한다. 즉,
주체의 심적 상태 S1은 의식적이다 iff 주체는 S1을 대상으로 하는 2차 심적 상태 S2를 지닌다.
2. 의식의 본성
다만 우리 스스로를 표상하는 모든 심적 상태가 의식적인 것은 아니다. HOP 이론가들은 S2가 S1을 "적절한 방식"으로 표상해야만 S1이 의식적이라고 말한다. 그 모든 방식을 여기서 논하지는 않겠지만, 중요한 점은 S2가 평소에는 그 자체로 무의식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HOM에서 의식은 S1에 대해 외적인 속성이다. 즉, S1은 S1과 완전히 구분되는 심적 상태 S2에 의해 의식적이 된다. 그런데 그렇다면, 이러한 의식을 구성하는 바로 그 정신의 기능(faculty)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해, 그 기능은 지각과 유사한, 고차적인 심적 상태를 산출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바로 HOP를 지지하는 이들이다. 그리고 암스트롱, 라이칸, 구젤데레(Guven Guzeldere)는 로크가 HOP 해석의 선각자라고 주장한다.
로크는 우리 지식의 원천이 오로지 "감각(sensation)"과 "반성(reflect)" 둘 뿐이라고 말하며, 이 중 감각은 외부 대상에 대한 감각인데 반해, 반성은 우리 정신의 작동에 대한 "내적 감각"과 같은 것이라 설명한다. 이에 더해 로크는 아예 직접적으로 "의식은 인간의 정신에 스쳐가는 것들에 대한 지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로크가 원시적인 형태의 HOP를 주장했다고 말함은 정당한 듯하다. 하지만 로크에 대한 이 해석은 심적 상태에 대한 로크의 주요한 주장과 마찰을 일으킨다.
Ⅲ. 의식의 무한 퇴행 문제
문제는 로크가 그의 철학 체계 전체에서 꾸준히 모든 심적 상태가 의식적이어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로 만약 앞선 철학자들처럼 로크의 의식 이론을 해석한다면, 우리는 앞선 로크의 주장과 HOP를 연언으로 두어야만 한다. 하지만 이 경우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무한 퇴행에 빠지게 된다.
(P1) 모든 심적 상태는 의식적이다.
(P2) 어떤 의식적인 심적 상태 S1은 다른 심적 상태 S2에 의해 표상됨으로써 의식적이다.
(P3) S2는 의식적이다. (P1)
(P4) 의식적인 심적 상태 S2는 다른 심적 상태 S3에 의해 표상됨으로써 의식적이다.......
HOP 이론가들은 보통 모든 심적 상태가 의식적이라는 연언지를 부정함으로써 이 무한 퇴행을 빠져나가려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연언지를 포기하지 않고도 다른 방법으로도 이를 회피할 수 있다. 바로 브렌타노식의 의식 이론이다.
브렌타노는 의식을 한 심적 상태 S1의 내재적 속성으로 이해한다. 고로 그는 다른 심적 상태 S2를 설정하지 않고도 S1이 의식적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앞서 제기된 무한 퇴행의 문제를 해결한다. 이런 브렌타노의 이론을 우리는 SOP라고 부를 수 있겠다.
다만 문제는 로크가 정말로 SOP를 주장하였는지에 있다. 로크가 직접적으로 1차적인, 자기지각적인 심적 상태를 가짐으로써 의식적이 된다고 말한 구절은 없으며, 고로 그를 SOP 진영에 놓음은 지나친 해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로크 자신이 모든 심적 상태가 의식적이라고 주장한 이상, 그는 의식의 무한 퇴행의 문제를 해명해야 할 의무를 가진다. 우리의 주장은 로크가 이 문제를 의식하고 있었으며, 이를 SOP적 관점으로 해결하려 했다는 것이다.
고로 우리는 앞서 언급했듯, 역사적 증거를 통해 그가 의식의 무한 퇴행 문제를 의식하고 있었고, 문헌적 증거를 통해 그가 SOP적 관점으로 이를 해결하려 했으며, 이론적 증거를 통해 SOP가 로크의 심리철학을 정합적으로 만드는 데 더 적절한 관점임을 보이려 한다.
Ⅳ. 역사적 증거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론』에서 의식의 무한 퇴행 문제를 거론하고, 이에 대해 "시각에 대한 지각이 [시각과는] 다른 지각이라면 이는 무한히 나아갈 것"이라 말하며, "어떤 지각은 그 자신에 대한 지각"이라 결론 내리며 의식에 대한 SOP적인 관점을 개진한다.
이러한 의식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 시선은 여러 근대 철학자가 공유하고 있다. 아니, 실은 그렇지 않았더라도, 최소한 많은 주석가들이 그렇게 생각한다. 데카르트, 아르노, 칸트, 커즈워스, 리드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인 입장에서 의식을 규정했다.
더 흥미로운 것은 라이프니츠는 완전히 반대의 관점에서 의식을 설명한다는 것이다. 그는 『신 인간지성론』에서 '심적 상태는 모두 의식적'이라는 로크의 주장을 거부하며 "사유되지 않으면서 발생하는 사유"라는 HOP적 개념으로 의식을 설명한다.
즉,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의 시대에 의식의 무한 퇴행 문제는 여전히 "살아있는(in the air)" 논제였으며, 로크가 이를 생각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하기는 어렵다.
누군가는 로크가 무한 퇴행을 회피하지 않으려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로크는 지식에 있어 무한 퇴행의 문제를 피하기 위해 신의 실존에 대한 증명을 증명적 지식(Demonstrative Knowledge)의 제1 원리로 두고 있다. 즉, 로크는, 학문의 어느 영역에서라도, 무한 퇴행의 문제를 회피하는 쪽을 선택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로크가 자신의 주장을 정합적으로 유지하려면 그는 의식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브렌타노적, 즉 SOP적 관점을 유지해야만 한다. 고로 그의 의식 이론은 SOP로서 해석되어야 한다.
Ⅴ. 문헌적 증거
『인간 지성론』 Ⅱ.ⅰ.19에서, 로크는 한 심적 상태 S1과 그 심적 상태에 대한 알아챔(awareness) 사이 내적 연결을 전제하며, 그로써 S1과 그에 대한 의식 사이 시간적 간격을 배제한다. 이 시간적 간격은 HOP에서는 허용되는 것이지만, SOP에서는 절대 허용될 수 없는 것이다.
같은 곳에서 로크는 "알아챔이 없는 사유"를 "부분이 없는 연장"에 유비한다. 그에 따르면 부분이 없는 연장은 연장된 물체가 아닌 것처럼, 알아챔이 없는 사유는 사유가 아닌 것이다. 즉, 의식적 상태와 그에 대한 의식은 서로 필연적 관계에 있게 된다. 그런데 구분되는 두 심적 상태의 연결은 우연적일 수밖에 없으므로, 로크에게 의식이란 단일한 사건 혹은 상태 안의 구분되는 두 측면 혹은 부분의 연결이다.
게다가 로크는 자신의 인격 동일성 이론을 의식으로서 설명하는데, 인격 동일성이 의식의 동일성에 의존하는 이유는, 서로 다른 사유를 "나"로서 포괄하도록 만들어주는 그것이 그 사유에 대한 의식이기 때문이다. 즉, 한 사유와 그에 대한 의식은 필연적인 관계에 있는 것이다.
Ⅵ. 이론적 증거
1. 로크의 관념에 대해
로크 연구에 있어 문제가 되는 지점 중 하나는 로크가 그의 핵심 개념어, "관념"을 애매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 지성론』에서 로크는 관념을 어떤 곳에서는 지각 행위 그 자체인 것처럼 말하다가도, 다른 곳에서는 지각의 대상인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로크가 SOP를 받아들인다고 가정한다면 이 문제는 해결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의식에 대한 SOP적 관점은 지각적 행위가 언제나 그 자체로 바로 그 대상, 즉, 지각은 행위이자 곧 대상이기 때문이다. 즉 로크는 "관념"의 지시체를 둘로 설정한 것이 아니라, 지각이라는 한 지시체의 두 측면을 모두 나타내는 것으로 사용한 것이다.
2. 로크의 지각에 대해
SOP는 로크의 지각 이론에 대한 새로운 측면 역시 제시한다. 로크의 지각 이론에 대한 기존의 패러다임은 로크가 표상 실재론을 제시하고 있는지 혹은 직접 실재론을 제시하고 있는지의 대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SOP는 로크 체계가 두 이론을 동시에 수용, 즉, 우리는 직접적으로 외부 대상을 지각하면서도, 내부적 표상 역시 직접적으로 지각함을 가능하게 해준다. SOP에 따르면 한 지각은 언제나 외부 대상과 자기 자신을 모두 표상하기 때문이다. 즉, 이 점에서 외부 대상에 대한 지각은 두 구분되는 직접적 대상을 가지며, 이 둘 사이 어떤 경쟁이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
3. 로크의 직관지에 대해
로크는 『인간 지성론』 Ⅳ.ⅹⅰ.11.에서 "우리는 직관에 의해 우리 자신의 있음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주장이 로크의 경험론적 전제와 양립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고로 대부분의 연구에서 자기 존재에 대한 로크의 주장은 지금까지 무시되어오곤 하였다.
하지만 SOP에 의거한 해석은 로크의 경험론적 전제와 직관지에 대한 주장을 양립 가능하도록 해준다. 모든 지각은 그 자신을 지향적 대상으로 삼음으로, 그로부터 비롯된 모든 지식은 최소한 그 지각의 주체로서의 자기 자신과 관계된다. 즉, 우리 경험의 모든 요소, 우리가 의식하는 모든 관념은, 그 경험의 주체로서 우리 자신의 실존을 검증해주는 셈이다.
Ⅶ. 결론
우리는 이 논문을 통해 로크의 의식 이론을 SOP 이론의 선구자로서 검증할 만한 이유를 보였으며, 그에 대한 역사적, 문헌적, 이론적 근거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