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 벤첼, 『칸트 미학』, 「연역」 요약

Wenzel, C. H. (2012). 『칸트 미학: 『판단력 비판』의 주요 개념들과 문제들』 (박배형 역). 그린비. pp. 190-202.

취미판단의 연역은 취미판단의 보편적 및 상호주관적 타당성 요구에 대한 선험적 정당화를 목표로 한다. 한편 연역을 다루는 전체 절들 중 실제 연역은 §38에서 아주 짧게, 요약적으로 수행되고 있다.

§38이 위치한 논의 맥락은 다음과 같다. 칸트는 연역의 대상(이 미에 한정된다는 점), 연역의 방법, 취미판단의 두 가지 특유성, 취미판단의 원리의 주관성을 순서대로 논의하고, 취미판단이 선험적 종합판단의 일종으로서 초월론적 연역의 대상이라는 점을 상기한 뒤 §38에서 연역을 수행한다. §38 이후 칸트는 앞의 논의들을 공통감, 예술, 천재 등의 경우에 적용한다.

취미판단은 대상에 대한 개념 자체가 아니라 대상의 형식에 관련하는 까닭에 주관적이다. 그러나 취미판단을 가능케 하는 근거인 지성과 상상력의 자유로운 유희는 완전히 주관적이지는 않다. 왜냐하면 지성과 상상력은 그 자신 보편적인 능력이며, 이들의 결합 방식 역시 인식판단에서의 결합과 모종의 연관성을 띠기 때문이다. 특히 지성뿐만 아니라 상상력 역시 지각 과정에서의 종합 능력으로서 인식에 필수불가결한 보편적 요건이다.

취미판단에서 상상력은 인식판단에서 요구되었던 지성의 개념적 규칙에 종속되지 않으며, 양자는 서로 생기를 불어넣는 상호작용에 들어선다. 이 생기를 불어넣는 일을 느끼는 주체는 다른 사람이 아닌 오직 자기뿐인 까닭에 취미판단은 주관적이다. 그러나 그러한 작용은 모두에게 일어나며, 인식 일반과 연관되는 판단력의 사용의 주관적 조건들에 상응한다. 이 점에서 취미판단은 보편성요구를 지닌다. 미적 만족에는 이처럼 상상력과 더불어 지성이 개입하고, 또 상상력과 지성의 유희는 인식 일반에 상응하게 된다. 이 점에서 미적 만족은 단순한 쾌와 다르다.

칸트는 다음의 두 문제를 구별한다. 취미판단은 의심의 여지 없이 상상력과 지성에 관한 주관의 보편적 조건에 선험적으로 근거한다. 한편 어떤 판단이 실제로 취미판단인가 아닌가는 항상 의심스러울 수 있다. 왜냐하면 인식판단의 경우와 달리 취미판단에서 지성 아래에 포섭되는 것은 직관대상이 아니라 직관능력 전체 즉 상상력이기 때문이다. 지성은 인식 과정에서 직관으로부터 개념으로 나아간다. 취미판단에서 판단 대상은 실제로 개념으로 나아가지는 않지만, 이 나아감이 가능하기 위한 일반적 조건들에 포섭된다. 다르게 말하면 상상력은 개념의 규칙에 종속되지는 않지만 여전히 개념에 부합할 수 있는 가능한 종합들을 제시한다. “[…] 상상력은 적어도 가능한 개념화를 수용할 수 있는 어떤 것을 만들어 내야 하는데, 이것은 곧 상상력이 개념화의 조건들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Wenzel, 2012, p. 196) 물론 여기서 “포섭”이란 지성의 규칙들에 종속되는 일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상상력이 미리 정해진 규칙 없이 가능한 인식에 부합하는 요건들에 포섭되어 자유롭게 종합을 생산하는 일을 벤첼은 “유사-포섭”이라고 부른다.

또한 취미판단에서 지성에 대한 상상력의 유사-포섭은 “느껴지는 것”일 뿐 “인식되는 것”이 아니다(Wenzel, 2012, p. 196). 이 점에서 어떤 판단을 실제로 취미판단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항상 의심의 여지가 있다. 한편 만약 어떤 판단이 실제로 취미판단이라면, 그 판단은 상상력의 개념화 가능성 일반이라는 선험적 조건에 근거하는 까닭에 주관적 보편타당성을 지닌다. 취미판단의 연역 과정 자체가 이토록 짧기는 하지만, 그 연역은 논의 배경과 맥락들을 충분히 숙지하고 있을 때에야 비로소 그처럼 간명하고 짧은 형태로 제시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수학에서 종종 짧게 제시되기는 증명들이 존재하지만 증명을 이해하기 위해 요구되는 사전 지식들은 상당히 많다는 점과 유사하다.

물론 취미판단의 연역을 둘러싸고 아직까지도 해결을 요하는 많은 문제들, 즉 “개념과 규칙, 판단과 상상력의 본성에 관한 문제들”(Wenzel, 2012, p. 197)이 있다. 예컨대 현대철학의 맥락에서 우리는 아직까지도 개념에 대한 결정적인 정의를 제시할 수 있는 이론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 점에서 개념, 판단, 상상력에 관한 칸트의 논의는 아직까지도 시의성을 띤다.

그밖에도 벤첼은 연역과 관련하여 네 가지 문제를 제시한다. (1) 정말로 숭고에 대한 연역은 불필요한가? 칸트에 따르면 숭고의 실제 근거는 순전히 인식능력들의 관계이며, 숭고가 기초하는 도덕성과 의지는 그 스스로 선험적인 원리를 지니는 까닭에, 숭고에 대한 추가적인 연역은 불필요하다. 반면 미는 그와는 다른 독자적인 선험적 원리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숭고와 미가 정말로 그리 다른가? (2) 연역에 대한 핵심적인 논증은 어디에서 제시되는가? 이는 §38에서 제시되어야 하는 듯하지만, 혹자는 능력들의 자유로운 유희를 논하는 §9, 공통감 개념을 도입하는 §20-22, 혹은 변증론에 이르러서 비로소 제시된다고 주장할 수 있다. (3) 취미판단이 인식 주관의 보편적 조건들과 이토록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면, 우리는 인식의 모든 대상이 아름답다는 과도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지는 않는가? 이러한 오해는 지성으로부터의 상상력의 자유를 허용하는 표현인 ‘조화’라는 표현에 주목함으로써 불식되어야 한다. (4) 틀린 취미판단이란 가능한가? 칸트에 의하면, 취미판단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오직 개별 주관 자신의 판단에 달려 있다. 칸트가 §32에서 예시하듯 시인이 처음에 자신의 시가 아름답다고 굳게 믿고 있다가 미적 경험의 축적에 따라 자신의 판단을 철회한다면, 앞서의 판단은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취미판단이 아니거나, 취미판단을 주관의 자율에 따라 바꾸는 일이 허용되거나, 거짓인 취미판단이거나 셋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여하간 자율성이 취미판단의 필요조건이기는 해도 충분조건이지는 않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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