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turn of the Critique of Ideologies (Lafont 2023)
지난 100년간의 비판 이론의 유산에 대한 간략한 성찰을 제공하려는 시도는 벅찬 일이다. 대신 나는 단 하나의 사안, 최근 [일어나는] 이데올로기 비판의 부활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러한 유형의 비판[이데올로기 비판]은 비판 이론의 중요한 과제이며, 비판 이론의 가장 중요한 유산이다. 하지만 지난 수십 년간의 비판 이론가들의 작업을 보면, 앞선 진술은 결코 명백하지 않다. 실제로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행위 이론>으로 대표되는 프랑크푸르트 학파 2세대는 이데올로기 비판은 현대 사회의 맥락에서 볼 때 구식이라는 이유로 거부한다. 비록 1960-70년대에 하버마스가 이데올로기 비판에 대한 고전적인 맑스주의적 접근법을 받아들였다고 하더라도, 그는 결국에는 그것을 거부했다. 고전적인 맑스주의적 접근법을 괴롭힌 반론들을 논박하려는 분명한 시도가 1980년대 이후 하버마스 작업의 특징인 비판 이론의 소위 “민주주의적 전회”를 가져왔으며, 그 안에서 이데올로기 비판은 더 이상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
하버마스와 대조적으로 나는 이데올로기 비판의 귀환에 동조한다. 설사 이데올로기 비판이 유일한 비판 형태가 아니고 또 현대 사회에 대한 비판 이론의 중심 과제가 아니더라도, 나는 그것이 비판 이론가들에게 중요한 도구라고 생각한다. 나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 이론가뿐만 아니라 비판적 인종 이론가, 페미니스트, 그리고 주류 영미 철학자들에 의해) 현재 개발되고 있는 새로운 이데올로기 비판 접근법들이 고전적인 맑스주의적 이데올로기 비판관을 괴롭힌 반론들을 더 잘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간략히 보일 것이다. 이에 더해, 내가 보기에 현재 개발되고 있는 새로운 이데올로기 비판 접근법들은 비판 이론의 “민주주의적 전회”와 완벽히 양립할 수 있다—이 전회가 하버마스식의 완전한 절차주의적 해석이 아니라면 말이다. 나는 여기서 나의 견해에 대한 완벽한 옹호를 제공할 수는 없다. 대신 나는 (1) 새로운 이데올로기 비판 접근법들이 고전적인 맑스주의적 접근법과 차별화되는 중요한 지점과 그들이 어떻게 고전적인 맑스주의적 접근법에 대한 핵심 반박들을 피하는지 간략히 보일 것이다. 이후 (2) 이데올로기 비판에 대한 하버마스 특유의 반론들로 넘어가, 비록 그것들이 고전적 맑스주의적 접근법의 실행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적절히 변형된 이데올로기 비판 접근법을 위한 여지를 남겨둔다는 점을 보일 것이다.
1절. Classical vs. New Approaches to the Critique of Ideologies
고전적인 맑스주의적 접근법에 따르면, 이데올로기 비판은 사회에 대한 비판적 이론을 명료하게 하는 “과학적” 활동들의 주요 과제이다. 이데올로기 비판의 목표는 구체적인 이론적 질문, 즉 왜 사회 구성원들은 자신의 예속, 착취, 또는 억압을 영속시키기 위해 노동하는가에 답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들은 이에 대한 해답을 제공한다. 이데올로기들은 그들 “손아귀에 있는” 자들에게 사회적 실천과 제도에 관한 왜곡된 견해를 제공한다. 따라서 이데올로기는 (그것들이 부정의와 억압을 영속시키기에)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인식론적으로도 결함이 있다. 대조적으로 이데올로기 비판은 과학적 지식에 기반하기에 인식론적으로 우월하다고 여겨진다. 사회 과학자는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의 잘못된 점을 보이기 위해 사회 현상과 사회적 실천에 대한 경험적 증거와 구조적이며 기능적인 이론적 설명을 제공한다. 이 두 가지—경험적 증거와 설명—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왜곡된 실천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내부적 관점에서는 접근할 수 없다. 따라서 오직 사회 과학자의 외부적 관점에서만 사회 구성원들이 자신이 참여하는 사회적 실천들의 실제 작동[방식]과 의미에 대해 왜곡된 견해를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가정들 중 많은 것들이 도전을 받아왔다. 이데올로기 비판이라는 아이디어 자체를 거부하는 학자들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 비판에는 전반적으로 동조하지만 그에 대해 훨씬 더 넓고 실천 지향적인 이해를 지닌 학자들이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러한 도전들 중 일부를 간략히 주목하겠다. 흑인 해방, 페미니즘, 비판적 인종 이론, 탈식민 이론 등과 같은 전통에 있는 학자들에게 이데올로기 비판의 주된 목표는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실천적인 것이다. [그들이 이해하는 이데올로기 비판의 주된 목표의] 요점은 인과적 설명을 명료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해방에 기여하는 것이다. 이 가정과 함께 이데올로기 비판은 모든 참여자들이 동등하게 접근할 수 있는 실천으로 간주된다. 그것은 오직 사회 과학자만이 [이데올로기에서] 분리된 관찰자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는 종류의 과학적 지식을 요구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 대안적인 이해 방식은 억압받는 자들이 일반적으로 자신의 억압을 인식하지 못하며 그래서 “계몽된” 사회 과학자들에 의해 인식되어야 한다는 가정이 (터무니없이 가부장적일 뿐만 아니라) 정당화되지 않는지를 보인다. 대신 [대안적 이해에 따르면] 억압받는 사람들의 조화되지 않은 경험과 감정 자체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들의 힘을 약화하기 위한 대안적인 체계를 명료하게 만드는데 사용될 수 있는 근원적인 지식의 원천이다. 실제로 이러한 대안적인 이해 방식들은 설명을 위한 사회 이론으로 나타날 필요가 없다. 조화되지 않는 경험들, 법의 테두리에서 벗어난 감정들, 저항적인 실천들 등의 명료화로서, 그것들은 1인칭 서사나 증언과 유사한 형태를 취할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당연히 이러한 전통의 구성원들[대안적 이해 방식 지지자들]은 대개 모든 사람들 중에서 사회 이론가야말로 이데올로기들의 억압적인 힘을 식별하고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필수적인 지식에 대한 특권적인 접근 권한을 지닌 자라는 가정을 의심한다. 문제가 되는 이 가정은 억압의 희생자들이 이미 참여하고 있는 기존의 비판과 저항의 실천 및 전통들을 지나치게 무시한다. 문제가 되는 가정은 억압의 희생자들의 인식론적 능력과 행위자성을 얕잡아보고, 사회 과학이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와 대결하기보다는 그것을 영속시키려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당연히 고전적인 접근법에 반대하면서도 하버마스의 비판 이론이 가진 “민주주의적 전회” 정신에 입각하여 사회 이론가들이 이데올로기 비판에 참여할 경우, 그들은 원칙적으로 모든 참여자들에게 허용된 “비판적”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대응할 수 있다. 사회 이론가들은 소통의 대칭성을 깨지 않으며 그들이 우월한 인식론적 권위를 가졌다고 가정될 필요도 없다. 무엇보다 그들의 비판은 공적인 조사, 도전 그리고 경합을 견디지 못할 수도 있다. 따라서 사회 비판가들은 사회 참여자들[사회 구성원]의 인식론적 능력과 변혁적 역량을 (자기-면역화된 설명을 통해) 실격시킬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무엇보다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 도전하는 데 필수적일 수도 있는, 다른 지식의 원천인 경험적 (통계적) 지식, 그리고 사회적 실천과 체계에 대한 기능적 혹은 구조적 설명을 활용함으로써 현존하는 비판의 실천에 독특하게 기여할 수 있다. 그러나 통계적이고 이론적인 지식은 사회적 실천과 제도에 대해 외부 관찰자인 3인칭적 관점을 채택함으로써 습득된다. 이는 해당 지식이 참여자들 내부의 관점에서 습득된 지식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참여자들이 즉시 접근하기 쉽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억압을 인지하는 것과 그와 관련된 사실 (예를 들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영향을 받는지, 어떤 구조적 조건이 이 상황에 기여하는지 등)을 아는 것은 다른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해당 지식이 공개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되면, 그것은 해방 투쟁에 참여하는 자들을 결정적인 도움을 제공할 수 있다. 더욱이, 만일 누군가 과학적 담론이 영향력 있는 제도와 공중에 대해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점을 정교히 명료화함으로써 이데올로기를 영속시킬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한다면, 사회에 대한 과학적 담론의 사악한 효과에 대응하기 위해 과학적 담론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폭로하는 것은 그만큼 더 중요해진다.
이 대안적인 버전의 이데올로기 비판은 고전적인 접근법과 중요한 차이를 보이면서도, 그것이 가진 가장 독특한 특징들 중 일부를 간직할 수 있다. 대안적 버전의 비판은 “이데올로기”라는 용어를 도덕적으로 그리고 인식론적으로 결함이 있는 대상에 관해 사용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다. 훨씬 중요한 것은 대안적 버전의 비판은 이데올로기 비판이 참여자들의 인식론적 능력과 행위 주체성을 박탈시키거나 사회 비평가들에게 우월한 인식론적 권위를 조용히 부여하지 않으면서도, 참여자들의 자기 해석을 넘어서거나 자기 해석에 도전한다는 가정을 정당화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에 관한 순수 해석적인 접근법과 달리, 이 접근법은 사회 참여자들과 그들의 전통이 그들이 참여하고 있는 실천의 의미와 타당성에 관한 배타적인 (혹은 최종) 발언권을 가진다는 것을 인정하길 거부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유형의 이데올로기 비판은—불의와 억압에 대한 지속적인 해방 투쟁에 진정으로 기여할 수 있는—현대 사회에 관한 비판 이론의 중요한 과제로 옹호될 수 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 비판에 대한 이상의 변호는 이데올로기가 현대 사회 질서와 그 병리를 적절히 설명한다는 가정 아래서만 가능하다. 만일 하버마스가 지적하듯이 이데올로기가 현대 사회에서는 철 지난 것이라면, 즉 이데올로기가 병리를 적절히 설명하지 못한다면, 비판 이론 내의 “민주주의적 전회”는 사회 비판의 정당성과 가능성을 전반적으로 변호할지는 몰라도 이데올로기 비판의 정당성과 가능성은 변호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하버마스의 주장을 검토해 보자.
2절. Are Ideologies Obsolete in Contemporary Societies?
긴 얘기를 짧게 하자면, 현대 사회에서 이데올로기들은 시대에 뒤처진 것이 됐다는 하버마스의 주장은 두 가지 연관된 주장에 기초한다. 한편으로 이데올로기들은 더 이상 통일된, 총체화하는, 혹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이 아니다. 생활세계의 합리화의 결과로 이데올로기들은 파편화됐고, 다원적이고, 혹은 더 이상 사회 구성원 모두가 공유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데올로기들은 전통적인 형이상학적이고 종교적인 세계관이 행했던 것과 달리 사회 통합이 역할을 할 수 없다. 이는 이데올로기들이 파편화되고 다원적이기에, 어떤 이데올로기도 비판으로부터 확실하게 면역되거나 보호될 수 없기에, 따라서 모든 이데올로기들은 지속적인 도전과 경합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이데올로기들은 그들이 패러다임적으로 “이데올로기적인” 기능을 하도록 만들었던 속성들을 잃는다. 근대 주체들은 “비판적인” 능력 덕에 전통적 의미에서 총체화하는 이데올로기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난다. 다른 한편으로 체계 통합은 의사소통 참여자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과정과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돈과 권력과 같은 대안적인 매체를 통해 이뤄졌다. 따라서 비록 체계들이 부정의와 억압을 영속시키더라도, 체계들은 참여자들 사이에서 공유되는 배경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영속시키지는 않는다. 체계들에 의한 생활세계의 식민화의 결과인 사회적 병리들은 이데올로기들이 작동하는 방식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첫 번째 주장이 우리의 맥락에서 가장 관련이 있다. 전통적인 종교나 형이상학적 세계관처럼 총체화하는 이데올로기들은 대안적인 이데올로기들 및 사회적 현실을 프레이밍하는 방법의 부재로 인해 “그들의 손아귀에 있는” 자들에게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낼 수 있다. 이로 인해 이데올로기는 경합과 비판으로부터 면제된다—말하자면 이데올로기들은 유일한 선택지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일단 이데올로기들이 파편화되고 다원화되면 그것들은 더 이상 모든 사회 구성원들에게 공유되지 않는다. 이것은 이데올로기들이 상호 비판과 경합을 통한 도전 및 약화에 열려 있음을 의미한다. 일단 근대의 주체들이 “의심”을 갖고 대안적인 이데올로기들을 고려하는 비판적 능력이나 이데올로기들로부터 비판적으로 거리를 두는 비판적 능력을 획득하면, 무비판적인 주체들의 뒤편에서 자신의 효력을 발휘하던 이데올로기의 힘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약화된다.
나는 근대 이전 사회와 근대 사회 사이의 차이에 관한 이 기술이 어느 정도는 그럴듯하다고 본다. 하지만 나는 이 설명이 현대 사회에서의 이데올로기 비판에 대한 가능성이나 필요를 훼손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첫째, 이 설명에서 이데올로기들의 힘을 해명하는 요인은 제시되는 이데올로기들의 구체적 유형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데올로기 특유의 힘은 전통적인 종교적 또는 형이상학적 세계관처럼 하나의 총체화하는 현실관을 제공한다는 점에 의해 설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데올로기들 특유의 힘은 그들에게 도전하거나 경합할 수 있는 대안적인 프레이밍이나 관점의 부재 상황에서 작동된다는 사실에 의해 설명된다. 달리 말하면, 어떤 사회 현상 영역(예를 들어, 실천, 제도, 상호작용 등)에 대한 하나의 관점이나 해석은 우리가 문제가 되는 영역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더 설득력 있는 대안적 틀을 수중에 갖고 있지 않을 때마다 우리를 자신의 손아귀 속에 둔다. 어떤 것으로부터 거리를 두기 위해서는 우리는 입장을 취할 다른 곳이 필요하다.
둘째, 일련의 현상, 실천 혹은 제도들을 이해하기 위한 대안적인 해석적 틀의 부재가 한 틀의 “손아귀에 있는” 사람들이 조화되지 않는 경험들, 법의 테두리에서 벗어난 감정들, 혹은 다른 어떤 유형의 반대 증거를 가지지 않을 것임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더 말할 것도 없이, 표준적인 반론이 주장하듯이, 그들은 “비합리적”이거나 “멍청이”이다. 그들은 그러한 [손아귀에 대한] 반대 증거를 매우 잘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그 틀이 그들에 대한 지배력을 잃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지배력을 잃기 위해서는 문제가 되는 영역에 있는 현상이나 실천에 대한 더 통찰력 있는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대안적 틀의 성공적인 명료화가 필요하다. 조화되지 않는 경험들, 법의 테두리에서 벗어난 감정들, 혹은 다른 어떤 유형의 반대 증거는 더 나은 해석적 틀에 대한 절박한 요구를 분명히 나타내기는 하지만, 그로부터 저절로 더 나은 해석적 틀이 나오지는 않는다. 이러한 유형의 반대 증거가 지배적인 틀을 “의심스러워하는” 우리의 비판적 능력을 촉발할지도 모르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아무것도 없이 무언가를 이길 수는 없다. 강력한 대안적 틀과 실천을 명료하게 만드는 것은 창조적 작업이 요구되며, 이는 우리가 어떤 주어진 시간 내에 성공할 수도 있고 그렇지도 않을 수도 있는 그런 과제이다. 과학 혁명의 비유가 여기서 도움이 된다. 뉴턴 패러다임 발전 이전에 물리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적 물리학의 “손아귀 속에” 있었던 이유는 조화되지 않는 경험이 없었거나 설명할 수 없는 공백이나 변칙 등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그러한 것들을 많이 갖고 있었다. 되려 손아귀 속에 있었던 이유는 더 우월한 대안적인 틀이 없어서 오직 자신이 가진 아리스토텔레스적 물리학 속에서만 작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적 물리학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나 물리적 운동을 해명하려는 시도를 포기하는 것은 간단한 선택지가 아니었다. 물리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적 물리학의 “손아귀”에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비합리적이거나 “멍청이”였기 때문이 아니다. 물리적 세계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한 우월한 틀이나 패러다임을 그들은 결여하고 있어서, 그리고 결여한 한에서, 아리스토텔레스적 물리학의 “손아귀에” 있었다. 성공적인 대안 패러다임이 명료화되기까지 수 세기가 걸렸으며, 이 명료화가 아리스토텔레스적 패러다임의 부적절함이 통찰력 있게 지적될 수 있게 했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근대 주체들이 가진 모든 “비판적” 능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어떤 현상, 실천들, 또는 제도들에 관한) 더 낫고 설득력 있는 대안적 틀이나 관점이 결여된 해석적 틀들이나 관점들의 “손아귀”에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해석적 틀들과 관점들은 항상 그래왔듯이—즉, 오직 유일한 선택지로서 자신 힘을 행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이데올로기가 철 지난 것이 아님의 직설적인 의미이다. 비록 이데올로기들이 더 이상 통일되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형이상학적 세계관의 형태를 띠지 않더라도, 비록 그것들이 파편화됐으며 오직 특수한 사회적 현상이나 실천들의 영역에만 적용되는 형태로 유지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해당 영역들에 대한 더 나은 대안적인 틀에 접근할 수 없는 한 그것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엄청난 힘을 행사할 수 있다. 문제가 되는 현상과 실천들을 더 설득력 있는 방식으로 드러내거나 다룰 수 있는 대안적 틀을 명료하게 만들기 위해 필수적인 해석학적 상상력이 없는 경우에도 우리는 비합리적이지도 멍청이도 아니다. 대개, 일부 사회 집단 구성원들은 대안적인 해석 틀을 이용할 수 있더라도, 이 집단이 주변화됐거나, 다수 문화에 드러나지 못하거나, 헤게모니를 갖고 있는 해석적 틀을 강력히 옹호하는 자들이 도전장을 내미는 자들과 적극적으로 싸우고 있기에, 나머지 대중은 대안적인 해석 틀에 쉽게 접근할 수 없다.
아무튼, 만일 몇몇 이데올로기들이 아무리 파편화되고 약하더라도 불의를 영속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면, 문제가 되는 현상과 실천에 대한 대안적 이해를 명료화함으로써 이데올로기들을 해체하려는 시도는 확실히 시도해 볼 가치가 있다. 비판적인 사회 이론은 바로 이 중요한 과제에 기여할 수 있다. 더욱이 “이데올로기”가 적절한 설명을 위한 유일하게 작동하는 메커니즘이라고 가정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이데올로기는 다른 메커니즘들(습관화, 대안의 부재, 집단적 행위의 문제, 조정의 필요성, 관련 사실에 대한 무지 등)과 함께 작동한다고, 결코 부정의를 영속시키는 유일한 인과적 설명이 아니라고 여기는 것이 합리적이다. 하지만 다른 메커니즘과 달리, 이데올로기들(바로 그렇기에 이데올로기 비판의 목표가 되는)의 독특한 점은 대안적인 틀의 명료화를 제공하여 비판적인 인식이 향상하면 그들의 힘이 약화된다는 점이다. 만일 대안적 틀의 명료화와 제공이 부정의와 억압의 영속화를 멈추지 못하더라도, 그것들은 참여자들에게 본질적으로 가치 있고 해방적인 것이다. 설령 다른 힘들이 문제가 되는 부정의의 제거를 막더라도 이는 사실이다.
이데올로기 비판은 단순히 설명적인 동기뿐만 아니라 해방적인 동기도 지닌다. 우리의 자기 이해는 도덕적 결함을 갖고 있으며 부정의와 억압을 영속시키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자기 이해를 증진해야만 한다. 비록 자기 이해 증진 자체만으로는 해방적인 정치 투쟁이 성공하기엔 불충분하다는 점이 증명되더라도, 우리는 해야만 한다. 우리는 분명 다른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것 이상을 해야만 한다. 그렇지만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덜 할 여력이 있는지, 즉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을 바꾸지 않고도 어떻게든 우리 사회가 덜 억압적이거나 덜 부정의하도록 변하길 희망할 수 있는지이다. 만일 대답이 “아니오”라면, 이데올로기 비판은 보존할 가치가 있는 유산이다.
Lafont, C. (2023). The return of the critique of ideologies. Constellations, 30, 390–3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