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 잔트카울렌, 「체계와 체계비판: 근본적 문제연관의 현재적 의미에 관한 고찰」

Sandkaulen, B. (2006). System und Systemkritik. Überlegungen zur gegenwärtigen Bedeutung eines fundamentalen Problemszusammenhangs. In B. Sandkaulen (Ed.), System und Systemkritik: Beiträge zu einem Grundproblem der klassischen deutschen Philosophie. Königshausen & Neumann.

1. 체계에 대한 불편함

모든 체계비판은 필연적으로 체계와의 관계를 그 유보조건으로 갖는다. 체계비판은 체계의 전체에 깊게 관여해서 그것이 지니는 의미를 인정하고 비판의 결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처럼 파괴되어야 하는 것의 의미를 긍정하는 일이 체계비판을 구성하는 조건이다. 체계요구(Systemanspruch)와 그 의미가 사라진다면 체계비판의 충동 역시 불필요해지며, 체계비판은 단순히 “체계에 대한 불편함[Unbehagen am System]”(Sandkaulen, 2006, p. 12, 원저자 강조)이 된다. 그렇다면 오늘날 체계와 체계비판의 문제들은 과거의 문제로 치부되어야 하는가?

2. 고전 체계비판의 유형학과 역설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하이데거나 아도르노의 체계비판이 아니라 독일고전철학에서 태동한 체계문제이다. 이 시기에 개진된 체계-체계비판적 사유들은 20세기에 무시되고는 했는데, 이들은 야코비, F. 슐레겔, 노발리스 등이다. 종종 이 시기에서는 피히테, 셸링, 헤겔의 세 철학자들만이 주목받고는 하는데, 이는 그 세 명의 철학이 체계비판적인 동기에 의해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는 점, 나아가 이들 세 명이 스스로 체계비판을 수행했다는 점을 망각하게 한다.

이 시기의 철학자들은 체계에 대한 요구가 한낱 자의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공유한다. 그러나 체계비판의 기획은 상식처럼 공유된 전제가 아니라 논쟁적으로 상이한 모습을 띠고 나타난다. 우리는 당대의 체계비판적 사유를 세 가지 모형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그 중 가장 급진적인 버전은 야코비의 체계비판이다. 스피노자 『윤리학』과의 비판적 대결을 통해 형성된 그의 비판은 모든 종류의 체계사유에 근본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을 띠는데, ‘목숨을 건 도약’(salto mortale)이 이를 대표하는 표현이다. 유형상으로 아도르노와 하이데거가 이 부류의 입장에 속할 것이다. 둘째 유형은 초기 낭만주의이다. 이들은 피히테의 학문론에 반대하면서도 체계요구를 포기하지 않은 채 아이러니한 불가능성, 즉 “체계인 동시에 비체계[System und zugleich Nicht-System]”(Sandkaulen, 2006, p. 13, 원저자 강조)를 추구했다. 체계비판의 셋째 유형에는 피히테, 셸링, 헤겔이 속하는데, 이들은 체계로서의 스피노자 철학과 대결하면서, 체계비판을 통해 대안적 체계를 구성하고자 했다. 이들은 체계비판을 수행함으로써 비판의 파괴적 귀결들을 새로운 체계 속으로 흡수하고자 했다.

이 세 가지 체계비판은 각각의 역설에 빠진다. 첫째로 모든 체계사유를 파괴하는 야코비의 반체계철학은 그 자신이 성립하기 위해 어디에 근거해야 하는가의 문제에 빠진다. 초기 낭만주의자들이 빠지는 어려움은 “체계인 동시에 비체계”라는 이들의 모순적인 언명에서 자명하게 드러난다. 셋째, 피히테, 셸링, 헤겔의 대안은 어떻게 그 자신이 체계이면서도 진정한 의미에서 반체계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당면한다. 체계가 비판을 통해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다른 형태로 재생산되었을 뿐이라는 반론이 이 모든 체계비판적 작업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 체계에 대한 이런 노력들을 정리하고 되돌아보는가? 체계사유나 체계비판에 대한 문제의식이 우리에게 낯설어진 지금 이들을 회상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3. 체계와 현실 진단: 아도르노에서 하버마스까지

독일고전철학 시기 철학자들은 자신들이 논의하던 체계와 체계비판을 통해 현실의 특질을 규정하고 현실을 진단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체계사유는 아도르노나 하이데거가 비판한 대로, 현실의 이데올로기적 강제나 세계의 기술화(Technifizierung)에 빠질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현실 전체에 대한 진단이나 체계사유에 대한 수용은 그 힘을 잃어버리고 주목받지 못한다.

그러나 하버마스가 주도한 비판이론의 전회 속에서 체계와 체계비판이라는 문제설정은 변형된 방식으로 수용되었다. 이는 그가 사회를 생활세계와 체계의 두 층위로 파악하는 데에서 나타난다. 하버마스는 사회 내에 체계의 작동을 인정하면서도, 체계와 구별되는 생활세계 고유의 논리를 주장한다. 체계비판이라는 모티브는 하버마스에게 생활세계의 식민화 비판이라는 새로운 요구를 가지고 등장한다.

이렇게 본다면 하버마스는 2절에서 구분한 체계비판의 세 가지 모형에 더해 네 번째 모형을 제시한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체계와 비체계를 이질적이지만 동등한 두 개의 차원으로 놓는 것이다.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침범해서 잠식하지 않는 한 양자는 사회 내에서 각기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체계의 측면에서 본다면, 체계는 그 보편성을 요구하지 않는 한 사회 내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

4. 자연사의 일원론: 신경생물학적 토의에서 하버마스의 기여

그런데 체계와 체계비판의 복합적 문제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재등장한다. 두뇌에 대한 신경생물학적 설명과 자유의지 사이의 대립이 그것인데, 이 논쟁 자체는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라 자유와 결정론 사이의 대립의 변주이다. 하버마스는 이 논쟁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들을 내놓는다. 신경생물학적 결정론은 우리 인간의 일상적 자기이해에 비추어봤을 때 반직관적이다. 그러나 신경생물학적 관점과 자유로운 행위자의 관점은 양립해야 한다. 그런데 이 두 관점의 양립은 존재론적인 이원론을 도입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되고 인식론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인식적 이원론은 자연사적으로 양자의 연속성 위에 기초해야 한다.

일견 체계와 체계비판의 문제는 여기서 전혀 주제가 아닌 듯하다. 그런데 하버마스는 사회이론에서 전개했던 생활세계와 체계의 구별을 변형된 형태로 신경생물학과 자유의지라는 주제에 적용한다. 참여자와 관찰자라는 두 관점, 우리 행위에 대한 문화적 자기이해와 기능적 자기이해는 자유와 과학적 결정론이라는 개념 구별 속에서 다시 나타난다. 사회이론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연과학적 설명은 하나의 축으로서 인정되어야 하지만 그 환원주의적 보편성 요구는 기각되어야 한다.

하버마스의 체계비판 모형은 성공적이지만, 사회이론에서 생활세계와 체계를 사회의 “존재물”(Entität)이라고 부르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자유와 결정론의 문제에서 그는 관점이원론 혹은 인식적 이원론을 고수하면서 두 층위를 존재론화하는 일을 경계한다. 게다가 그는 “세계의 정합적 상에 대한 우리의 욕구”에 근거하여 이원론의 관점적 성격을 옹호한다. 즉 우리는 인식적으로는 두 개의 관점을 고수해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세계 전체는 자연사 아래 일원론적으로 파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버마스가 세계에 대한 과학적 환원적 설명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앞서 보았듯 그는 그러한 방식의 노골적 자연주의에 반대하며, 그가 말하는 자연사 역시 단순한 자연과학적 대상의 총체가 아니라 약한 자연주의에서의 자연사이다. 이러한 자연사는 협의의 자연과 문화를 모두 포괄하며, 양자는 그 안에서 분화되는 것이다. 한편 이제 자유로운 행위자의 자기이해는 “세계의 정합적 상에 대한 우리의 욕구”에 따른 체계의 보편성 요구를 물리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이처럼 자기 내에 분화된 두 개의 관점을 포괄하는 일원론은 체계라는 이름을 지닐 만하다.

5. 체계사고의 회귀

체계와 체계비판의 문제는 오늘날 그 유의미성을 잃어버린 듯 보였다. 그러나 자연과학의 발전에 의해 새로 등장한 자유의지와 결정론 문제 및 일원론에 대한 하버마스의 입장은, “참으로 보편적이고 환원주의적이지 않은 체계”(Sandkaulen, 2006, p. 20)에 대한 생각을 출현시킨다. 물론 독일고전철학에서와 달리 하버마스의 입장은 체계에 대한 형이상학적 주장에 기반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를 차치하고서라도, 위와 같은 문제설정과 하버마스가 제시한 논의 구도는 단순히 오늘날에 국한되지 않고 독일고전철학에서도 타당하다.

하버마스의 인식적 이원론에서는 세 가지 층위에서 상대화가 이루어진다. 첫째, 자연사가 자연과 정신을 모두 포괄하는 일원론적 역사라는 점에서, 이 자연사의 ‘자연’이 지니는 의미는 변화한다. 물론 그는 다윈의 자연적 진화론을 염두에 두고 이 개념을 사용한다. 이는 헤겔의 정신 개념이 단순히 자연과 대립되는 정신을 가리키지 않고 정신과 자연 양쪽을 포괄한다는 점과 마찬가지이다. 한데 이처럼 환원주의를 거부하면서 일원론을 견지한다면, 일원론이 포괄하고 있는 두 계기의 차이를 밝히는 일이 결정적으로 중요해진다.

둘째, 인식적 이원론에서는 정신과 자연의 두 계기 중 어느 쪽이 주도권을 점해야 하는지 밝힐 수 없다. 다윈주의적 견지에서 본다면, 일견 우위는 자연에 주어져야 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이 자연사적 진화가 항상 재구성된 형태로, 혹은 “관찰자관점”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는 의문스럽다. 독일고전철학의 체계비판적 작업들 역시 체계 내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는 부분의 기준들이 증명되고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셋째, 체계와 체계비판의 논의가 이런 방식으로 계속 물어진다면, 이는 체계에 대한 욕구가 계속해서 견지된다는 점을 뜻한다. 포스트다윈주의적 관점에 따르면 세계의 정합적 상에서는 자연에 우위가 주어져야 하지만, 여전히 정합성에 대한 요구와 정합성을 성취하는 방식은 애초에 서로 구별되어야 한다. 이 점에서 하버마스가 세계상의 정합성을 아무런 의문 없이 당연하게 요구한다는 점은 특이하다.

이러한 철학적 체계사고는 독일고전철학, 예컨대 체계에 대한 인간의 욕구를 철저히 일관적으로 밀어붙인 시도를 스피노자의 일원론에서 발견했던 야코비, 혹은 정신과 자연, 자유와 필연성 등의 구별을 무화하지 않은 채 생명 개념 속에 포괄하려 했던 헤겔, 인식을 이끄는 충동들을 총체적 세계관과 더불어 고찰하고자 한 셸링의 철학 등에 그 연원을 둔다.

6. 세계의 정합적 상에 대한 욕구

이는 체계사유가 어떤 임의적인 방식에 의해 제시된 것이 아니라 진정한 철학적 요구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는 체계사유의 실질적인 정당성을 입증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 신경생물학에 의해 새로이 발생한 정합성 요구의 강제성, 구속력을 검증하는 일이 필요하다. 하버마스에 의하면 이 정합성에의 욕구는 “우리의” 욕구이지만, 그는 정확히 어떤 이유에서 이 욕구가 우리 모두에게 공통된 욕구인지를 상세히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 욕구는 철학적 반성을 추동함과 동시에 (위처럼 환원주의적 설명에의 열망을 함축할 수 있는) 과학을 추동하기도 할 것이다. 혹은 정합성 요구는 어쩌면 일찍이 그가 주장한 ‘생활세계의 합리화’에 그 바탕을 두고 있을 수도 있다.

독일고전철학 시대의 철학자들은 정합성 욕구가 “생명의 인식적 노력[Erkenntnisstreben des Lebens]”(Sandkaulen, 2006, p. 23)에 기인한다고 설명한다. 이는 무슨 뜻인가? 체계사유와 생명의 욕구를 관련 짓는 설명은 첫째, 체계에의 요구가 넓은 의미에서 실천적 정향을 지니고 있음을 뜻한다. 예컨대 스피노자가 자신의 형이상학, 인식론, 정동이론 등을 모두 포괄하는 자신의 주저를 『윤리학』이라고 지은 데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는 것이다. 둘째, 체계와 생명은 서로 본질적으로 구별될 수 없다. 양자의 구별은 체계 내로의 진입을 돕기 위한 일시적인 구별일 뿐이다. 이는 피히테가 초기에서 후기에 이르기까지 “생명의 입장”과 “사변의 입장”을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점(Sandkaulen, 2006, p. 24)에서 잘 나타난다. 셋째, 체계는 사태를 서술하는 형식이 아니라 사태 자체를 뜻한다. 그러므로 체계는 단순히 형식적 서술을 넘어 서술 방법상의 반성을 요구한다. 철학의 참된 시작에 대한 헤겔의 고투가 이러한 반성의 대표적인 예시이다. 이처럼 체계가 체계와 생명, 사태와 서술의 차이를 지양해버리고 이로 말미암아 하이데거나 아도르노 등에 의해 비판받았다는 점은, 체계가 현실에 대한 진단이자 현실 자체로 기획되었다는 점을 방증한다.

정합성에의 욕구와 체계사유가 이처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서로가 서로를 통해 긍정된다면, 체계비판적 논의의 의미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만일 세계상의 정합성에 대한 요구가 체계에의 요구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면, 체계비판적 작업은 얼핏 성립하기 어려워 보인다.

7. 자유의식의 자명성

체계사유와 정합성에의 요구 사이의 착종으로 말미암아 하버마스의 기획 역시 환원적 자연주의와 비과학주의적 자연주의 사이의 구별을 무화할 위기에 처하는 듯하다. 이러한 체계의 총체성 안에서 행위자로서 우리의 자유에 대한 의식은 어떤 위치에 자리하는가? 이러한 문제의식이 바로 독일고전철학의 체계비판을 이끌던 동기이다. 우리의 자유의식과 체계적 정합성에의 요구가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지에 대한 해명이 요구된다.

하버마스 자신도 지적한 바 있는 자유의 자명성과 정합성요구 사이의 갈등은 이미 야코비의 체계비판을 추동하던 문제의식이었다. 스피노자의 체계와 대결하면서, 야코비는 체계에의 요구가 철저하게 일관적으로 성취될 경우 우리의 자유의식을 설명할 가능성이 없어진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자유로운 행위자라는 점, 우리가 우리 행위의 장본인이며 그에 책임을 진다는 점은 체계적 정합성과의 불화 속에서만 수용 가능하다. 즉 자유의식은 일종의 “해소 불가능한 수수께끼”(Sandkaulen, 2006, p. 27)로 구제 가능한 것이다.

8. 긍정과 부정

자유의식이 해소 불가능한 것으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은 세계의 정합적 상이라는 요구에 중대한 문제를 가져온다. 자유의식이라는 우리의 상식적 관점은 체계 밖의 외재적 입장을 요구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순전히 자유의식을 앞세워 정합성에의 요구를 폐기해버릴 수는 없다. 야코비가 체계사유의 일관된 개진의 대안으로 주장한 도약은 “영구적인, 심연을 향하는 부유상태”(Sandkaulen, 2006, p. 28)에 빠지게 되며,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시 “강화된 체계구상”(Sandkaulen, 2006, p. 28)이 추동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입장들은 체계에 대한 긍정과 비판을 동시에 이끈다. 한편 이는 초기낭만주의 혹은 특히 헤겔에서 나타나듯, 비판적 계기를 체계에 대한 긍정 속에 통합시키는 것으로 귀결된다. 여기서 자유의식은 본질논리적 가상과 같은 것으로 나타났다가 “반성의 반성”(Sandkaulen, 2006, p. 28)을 통해 회수된다. 자유의식의 부정주의적 성격은 처음에는 체계에 대한 비판으로 나타나지만 종국에는 다시금 체계의 비판면역성(Kritikimmunität)을 입증하게 된다.

9. 자유의 정합개념

여기서 나타나는 역설은, 자유의식이 정합적 세계상과 통합될 때 자유의 개념이 변형된다는 점이다. 행위의 원인으로서의 우리의 자기이해를 앞서의 야코비와 같은 방식으로 이해한다면, 이러한 자기이해는 체계 속에서 제 자리를 찾을 수 없다. 한편 우리는 독일고전철학의 체계기획 속에서 자유 스스로가 정합성욕구를 지닌 채 하나의 정합적 사건으로 변모하는 것을 목격한다. 이에 따르면 자유는 “모든 저항 또 이와 더불어 행위하는 주체의 존속이 완전한 일치 속에서 지양되어 있는 곳”(Sandkaulen, 2006, p. 29)에서 나타난다. ‘타자 속에서 자기 자신으로 있음’이나 ‘인간의 사명’ 등의 정식이 이처럼 변형된 채 일치 속에서 나타나는 자유의 개념의 예시이다. 이 중 ‘타자 속에서 자기 자신으로 있음’이라는 헤겔의 정식은 객관정신의 영역을 넘어서며, 이 점에서 객관정신은 행위하는 주체의 저항들을 모두 상쇄시키지 못한다. 한편 자유는 무규정적으로 남지 않고, 자유와 객관적 상황 사이의 일치가 달성되었는지를 판단하도록 해주는 상호주관적 규범에 의해 완전히 규정된다.

하버마스 역시 이러한 유의 정합적 자유 개념을 자신의 입장 속에서 인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근거와 원인을 구별함으로써 행위의 자유를 신경생물학적 인과성과 변별할 뿐만 아니라 진화론적으로 자연발생한 논리적 공간 속에 위치시키기 때문이다. 상호주관성의 공간 속에서 자유는 “정합성의 의무가 부과된 근거들”(Sandkaulen, 2006, p. 30)에 의해 정당화되는 사회적 구성물로 이해된다. 그러나 자연과학적 구성물과 사회-문화적 구성물의 구별은 그 스스로는 만족스러운 해결책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자기이해 역시 여전히 앞서 야코비가 제기한 비판에 노출되기 때문이다.

10. 정합성과 자유: 근거와 원인의 구별에 관하여

원인과 근거의 구별 역시 당시에 야코비가 스피노자의 ‘이유 즉 원인’(ratio sive causa)에 맞서 지지했던 것 중 하나이다. 야코비는 하버마스에서처럼 근거의 영역에 특권을 부여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유에 특권을 부여했을 때 발생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앞서 서술된 바 있다. 자유를 근거에 의해 규정하더라도, 이는 주체의 “행위가능”(Handelnkönnen)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행위가능은 근거를 통해 자신의 행위를 규정할 능력의 담지자인 행위자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행위에 대한 자유로운 행위자의 장본인성(Urheberschaft)은 여전히 어떤 맹점으로 남아 있다. 이 장본인성은 행위자의 행위가능을 심적 원인이나 자연과학적으로 결정론적인 원인과 구별되는 일종의 목적인(Finalursache)으로 간주하게 한다.

야코비는 행위에 대한 이러한 지향적 이해방식을 근원적인 것으로 설정했다. 그에 의하면 자유로운 행위 지향이라는 원인은 자연인과성에 대한 외적인 관찰을 통해서는 발견할 수 없는, 우리 자신이 내적으로 경험하는 원인이다. 이처럼 우리의 세계 이해를 지향적 관점에 근거 짓는 일은 근거와 원인의 구별을 자유와 정합성의 구별과 관계시킨다. 근거와 원인의 구별은 “우리의 정합성기대”와 “우리의 행위경험”을 반영한다(Sandkaulen, 2006, p. 32). 한편 여기서 출현한 근거-원인 구별을 체계-체계비판의 구별과 곧바로 등치시키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 “야코비의 관심은 […] 우리 자신과 세계와 우리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 […] 근거와 결과의 논리를 응용해서 이를 지향적 원인성의 경험과 관계시키는 것이다.”(Sandkaulen, 2006, p. 33, 원저자 강조) 이를 통해 행위의 지향적 원인을 정합적으로 위치시킬 단서가 마련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자유로운 행위에 대한 설명의 무한퇴행을 막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여기에 더해 근거와 원인을 (스피노자, 다른 독일고전철학자들 혹은 하버마스에서처럼) 일원론적으로 통일하는 일이 필요하다. 물론 야코비는 여기에 반대했을 것이다.

세계에 대한 정합적 상을 지향하는 체계는 보다 지향적 어휘들 속에서 드러나는 자유의식의 전제들에 의존하고 있다. 한편 자유의 영역이 체계의 정합성요구에 침범당하지 않게 놓아두는 일은 “체계의 내면에서의 모순점을 표시하는 일”(Sandkaulen, 2006, p. 34, 원저자 강조)이며, 이 모순은 체계에 외재적으로 덧붙여진 요소가 아니라 체계 내의 갈등을 드러내고 체계를 파괴할 수 있는 요인이다.

“결론적으로, 야코비를 통해 후일 해소된 논쟁들은 근거와 원인의 짜임관계를 통해 특징 지어지는 논점을 부단히 평가절하하거나 전혀 주목하지 않았다는 점을 확증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가설적인 그러나 흥미로운 물음은 마지막으로는 다음의 물음이다. 이는 독일고전철학이 이들의 수용을 포함하여 야코비의 도발을 고려했더라면 체계와 체계비판의 복합 속에서 어떤 상[像]이 산출될까 하는 물음이다.”(Sandkaulen, 2006, p. 34)


글을 읽고 몇 가지 떠오르는 생각들을 적어둔다.

잔트카울렌은 얼핏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듯 보이는 체계와 체계비판의 문제가 현대 철학의 논의지평에서, 특히 자유의지와 자연과학적 결정론의 문제에서 다시 출현한다는 점을 보인다. 또 이를 자유와 체계적 정합성 사이의 문제로 해석하고 이를 독일고전철학, 특히 야코비의 철학과 연결 지어 해석한다. 이후 논자는 자유와 정합성 모두 쉽사리 포기될 수 없는 필연적 욕구라는 점, 그러나 양자를 통합시키려는 시도 역시 성공하기 어렵다는 점을 주장한다.

자유의지와 결정론에서 체계와 체계비판의 문제가 변주되어 나온다는 논제는 그 자체로 타당하다. 그러나 잔트카울렌 스스로도 인정하듯이 이 문제는 그리 새로운 문제틀이 아니다. 자유와 자연의 문제는 칸트 이래로 독일고전철학자들을 계속해서 괴롭혀 온 문제였으며, 이것이 이들의 체계사유를 추동해 온 문제임은 잘 알려져 있다고 생각한다.

의아한 점은, 논자가 독일고전철학의 체계 개념들을 하버마스의 사회이론적 체계 개념에 곧바로 적용하고, 다시 이를 자유의지와 대립되는 의미의 자연인과성에 그대로 적용한다는 점이다. 물론 세계에 대한 정합적 상을 그리려는 욕구가 자연과학적 탐구를 추동한다는 말은 결론적으로 일리가 있어 보이는 이야기지만, 하버마스의 사회이론적 체계 개념이 그리 잘 들어맞을지는 모르겠다. 하버마스의 체계 개념은 예컨대 헤겔에서처럼 학문적으로 포착되고 논증될 수 있는 총체성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기능적인 행위 조절 매체에 가깝다. 하버마스의 체계 개념이 루만과의 논쟁 속에서 형성되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고전적 체계개념과의 맥락상의 간극은 더욱 선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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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논문에 대한 충실한 번역,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 방면에 지식이 일천해서 제가 올바르게 이해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읽고 나서 든 생각을 간단히 정리해보고 싶어요.

개인적으로는 법철학적인 관점에서 궁극적으로 '체계'란 곧 사회나 국가의 체계로 귀결되고, 위 논문에서 저자가 이에 대해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 사실을 어느 정도 염두에 두고 의식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체계는 사실상 자율적인 사회의 영역과 법치주의가 지배하는 국가의 영역을 공통의 가치로 묶는 수단입니다. 오늘날의 현실은 법(Recht)으로부터 자유로운 영역은 예외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법률(Gesetz)의 망이 촘촘히 짜여있습니다. 하버마스가 체계와 생활세계를 제시했을 때, 법역시 체계에 대응하는 법과 생활세계에 대웅하는 법으로 분리되어 제시됩니다. 그러나 이는 일국의 법질서 자체의 일원성 및 평등원칙 등의 문제 때문에 마찰의 소지가 있습니다. 체계와 비체계라는 두 영역을 분리하는 것 역시 실정 제도적 토대를 고려하지 않은 논의라는 인상이 강하게 듭니다.

신경생물학적 토의는 니클라스 루만에게 영향을 준 움베르토 마투라나의 오토포이에시스 개념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지만 이런 개념이 실정 질서에 어떤 생산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인 생각이 들어요.

저는 현대에 우리를 둘러싼 체계에 대한 비판이 여전히 타당할 수 있는 근거는 법의 지배체제라는 형태로 변형된 체계가, 인간의 보편적 권리와 존엄성 유지에 위협적인 것이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란 생각을 해봅니다. 자유의 이념은 무규정적인 것이 아닌 실현되어야 할 현실적 과제로서 체계에 대한 비판/저항의 정당성을 확보하도록 하는 원리라고 봅니다. 또한 그러한 저항의 실마리는 법률의 부조리함에 대한 상호주관적 의사소통을 통한 합의에서 찾을 수 있겠죠.

자유를 근거에 의해 규정하더라도, 이는 주체의 “행위가능”(Handelnkönnen)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행위가능은 근거를 통해 자신의 행위를 규정할 능력의 담지자인 행위자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행위에 대한 자유로운 행위자의 장본인성(Urheberschaft)은 여전히 어떤 맹점으로 남아 있다. 이 장본인성은 행위자의 행위가능을 심적 원인이나 자연과학적으로 결정론적인 원인과 구별되는 일종의 목적인(Finalursache)으로 간주하게 한다.

이 부분을 제가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행위자에게 특정 행위를 하라고 강제할 수 없으며, 부작위의 권리도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시민불복종 혹은 저항권을 행사할 권리에 대한 부정의 이유가 아니라, 사실상의 사정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자유의지의 존재여부에 대해 생물학적/신경생리학적으로 어떤 평가가 내려지더라도 법적 영역에서의 평가 자체를 좌우하는 영향을 미칠 수는 없다고 보는데요, 그것은 법적 질서의 자율성과 독자적인 판단이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위 논문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에 대한 충실한 소감이라기보다 법철학적 관점으로 변형시킨 소감이 되고 말았네요...글을 다시 읽고 음미하며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훌륭한 글을 읽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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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의 "체계" 개념을 하버마스 자신이 제시한 사회이론적 체계로 이해하기 보다는, "체계"가 어떤 배경에서 요구되는지에 대한 하버마스의 이해로 보는 것이 더 나을 듯 합니다. 하버마스는 "체계요구"를 기본적으로 주체성이 엄밀하게 발현되는 현대성(Moderne)과 관련시킵니다. 예컨대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에서 체계요구와 철학의 필요(Bedürfnis der Philosophie)가 태동한 배경으로, 현대성이 그 스스로부터 규범성을 산출해야 한다는 점을 꼽습니다 (sie [Moderne] muss ihre Normativität aus sich selber erschöpfen; Suhrkamp, p16). 흥미로운 점은 이 점에서 헤겔을 현대성과 "철학의 필요"를 제대로 인정한 선구자로 꼽는다는 점입니다. 하버마스는 헤겔의 초기 저작들, <차이논문 Differenzschrift> 와 <Über das Wesen der philosophischen Kritik> 등을 다루면서, 헤겔이 칸트이래로 문제된 이분법(자연/자유, 현상/물자체, 이론/실천 등)과 관련된 분열(Entzweiung)을 진지하게 여겼고 이러한 분열을 극복하는 것을 철학의 존재이유로 보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실제로 헤겔은 <차이논문>에서 "철학의 필요 Bedürfnis der Philosophie"라는 챕터를 두어 다음과 같이 서술하죠: "분열은 철학의 필요의 원천인다 Entzweiung ist der Quell des Bedürfnis der Philosophie [...]" (Suhrkamp, 2: 20)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하버마스는 "체계요구"나 "정합성 요구"를 단순히 이론/자연적 영역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실천적이고 "자유의식"적 근원("반체계")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는 것으로 보입니다. 정합성에의 욕구를 인정하는 한에서 자유의식에 대한 욕구를 동시에 인정할 수 있고, 따라서 체계 요구는 동시에 반체계에 대한 반성적 욕구를 동반한다는 것이 하버마스의 생각이지요.

그런데 사실 체계/정합성 요구와 자유의식이 사실 동일한 근원이라는 것을 인지한 것은 제가 보기에 칸트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칸트는 이론적/실천적/미적 능력들을 모두 인간의 인식능력들(지성/이성/판단력)에 기반한 것으로 보았고, 따라서 이러한 인식능력들을 자발적(spontan)이라고 보았지요. 칸트에게 자발성(Spontaneität)이 실천적 "자유" 뿐만 아니라 이론적 인식능력(예컨대 지성의 종합)에게도 귀속되는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닙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칸트는 예컨대 <도덕형이상학 정초>에서 자유의지를 이론철학적 관점에서 역시 인정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죠 (GMS, AA: 448). 즉 이미 칸트에게서 소위 "체계요구"와 "반체계"는 모순되는 것이 전혀 아닐 뿐 아니라, 같은 근원(인간의 자발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체계/정합성 요구와 실천적 자유의식을 모두 개념적 자발성으로 귀속시키는 이러한 칸트적 전략을 맥도웰 역시 < Mind and World >에서 따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칸트에 대한 야코비의 비판이 애초에 과장된 것입니다. 야코비는 이론철학적 체계를 끝까지 관철시킨다면 자유의식의 설 자리가 없어지는 양자택일의 문제에 직면하기 때문에 "목숨을 건 도약"을 감행해야 한다고 보았지만, 애초에 칸트는 결정론적인 자연형이상학을 목표로 했던 것이 아니었던 것이죠. 오히려 칸트가 보여준 것은 모든 체계/이론/정합성을 결국 Impose하는 것은 인간의 "자발성"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마치 칸트 이후 "체계"와 "반체계"의 요구가 등장한다는 일종의 철학사적 클리셰는, 맥도웰의 표현을 빌린다면, 그자체로 exorcise의 대상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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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Herb 님의 글을 읽으니 위 논문을 좀 더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네요. 감사합니다. 오늘 다시 천천히 잔트카울렌의 글을 읽어보니 제가 상당히 오독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체계와 체계의 비판에 대해 고도로 추상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논의를, 저는 위에서 현대 사회/국가 체계에서의 제도적 - 즉 법적 차원이라는 훨씬 좁고 구체적인 차원의 문제로 축소시키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마저도 깊이있고 철저하게 논의를 마치지 못했죠.

만약 이제 다시 법철학적 차원에서 잔트카울렌의 논의를 이어받을 수 있다면, 저는 체계 내의 자유를 어떻게 근거짓고 체계 내에서 무모순하고 정합적으로 설명해낼 수 있는지가 관건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접하는 실재세계는 법제도의 망으로 촘촘히 '이미' 둘러싸이고 자유의 한계와 의미가 사실상 긍정적/부정적인 방식으로 규정되어버린 - 어쩌면 이미 자유의 규정이 형해화(形骸化)되어 버린 세상은 아닐지 염려가 앞섭니다. 이는 제도적 체계/체계의 제도가 자유의 근거와 그 보장을 위한 철학적인 논의들을 무화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형사정책적인 문맥에서 Jakobs 같은 이가 주장하는 '적극적 일반예방론' 같은 것은 시민의 내면에 준법정신을 강화함으로서 범죄에 대한 예방을 꾀하고자 하는 정책/이론입니다. 이것은 인간 내면의 자유로운 의사형성과 인격형성을 통제하는 부수적/수반적 결과 발생으로 이어지게 되겠죠. 자유는 그 의미가 많이 상대화되었지만, 어떤 목적으로서의 자유라는 사고는, 자유를 - 그리고 나아가 인간 자체를 - 점점 수단적인 것으로 보는 체계에 의해서 위기를 맞고 있는 것 같습니다. 죽은 것 같았던 리바이어던이 부활하여 다시 거리를 활보하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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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문을 읽고 의견을 나누어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답글에 대한 제 생각 및 질문을 남기고자 합니다.

아시다시피, 이 논문의 주된 주제는 자유의지와 자연과학의 체계적 정합성 사이의 양립 가능성 문제입니다. 체계-반체계 구도가 말씀하신 국가질서 혹은 법질서와 개인의 자유 사이의 대립이라는 구도에도 적용될 수는 있겠으나, 자연과학적 설명의 체계와 국가/법질서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점들이 있습니다. 가령 사실적으로 인과법칙은 위반이 불가능하나, 법질서는 위반이 가능합니다. 전자는 규범성을 지니지 않지만 후자는 규범성을 지닙니다. 또 자연과학에서 정합성이 요구되는 이유와 법질서의 정합성이 요구되는 이유는 다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자유의지-결정론 문제와 (개인의) 자유의지-사회질서 문제는 크게는 비슷한 구도에서 파악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사실은 성격상 다른 논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자유의지와 결정론에 대한 입장을 곧바로 개인의 행위에 대한 사회적 강제 등의 문제에 대한 입장으로 변환시켜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나 싶습니다. 논문에서 논의되는 구도를 사회철학에서 논의되는 개인과 국가의 문제에 있는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비슷한 이유에서, 신경생물학적 토의가 실정 질서에 생산적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점은 어떤 의미에서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큰 이야기는 아닌데, 다음과 같은 질문이 떠오릅니다. 하버마스가 자신의 텍스트에서 법을 생활세계의 법과 체계의 법으로 분리하나요? 하버마스에게 법은 생활세계의 토의적 질서를 체계 속에 제도화하면서 사회통합의 매체 역할을 할 텐데, 하버마스가 법을 사회의 두 영역 속에 분열시키고 법질서의 일원성을 간과했다는 비판이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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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제가 이해에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있었는데 친절하게 설명해 주셨네요. 그리고 법을 분리했다는 것은 체계에 대응하는 매체로서의 법과 생할세계에 대응하는 제도로서의 법으로 분리되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아직 "의사소통행위이론"을 집필하였을 때의 견해로 알고 있고요, 이후 "사실성과 타당성"의 단계에서는 이전에 분리시켰던 견회를 철회하고, 공통적으로 '담론원리'라는 근원을 가진 것으로 파악하는 것으로 압니다.

HABERMAS, JÜRGEN. "Law as Medium and Law as Institution". Dilemmas of Law in the Welfare State, edited by Gunther Teubner, Berlin, New York: De Gruyter, 1986, pp. 203-220. Law as Medium and Law as Instit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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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하신 대로 저자가 하버마스 자신의 체계개념이 아닌 고전 철학체계들에 대한 하버마스의 분석을 가져왔다면 논문의 논지가 훨씬 잘 살아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 생각에 잔트카울렌이 본인이 전거로 가져온 『의사소통행위이론』의 체계 개념은 고전적인 체계개념과는 의미상으로 판이한 까닭에 논자가 이끌어내고자 하는 구도와 별로 잘 들어맞지 않고, 따라서 생활세계의 식민화 논제가 기존의 헤겔이나 야코비 등이 제시했던 체계사유/체계비판 모델과 나란히 놓일 수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반면 현대성에 대한 하버마스의 진단을 경유했더라면 체계요구와 체계비판적 요구가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하버마스의 주장을 도출해내는 일도 훨씬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다른 어떤 무비판적 권위에도 의존하지 않으면서 자기를 스스로 정당화해야 한다는 현대성의 이중적인 과제가 곧 체계비판적 동기와 체계지향적 동기의 근거가 될 수 있을 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도 하버마스의 모델은 "체계요구는 동시에 반체계에 대한 반성적 욕구를 동반한다"는 입장이라고 이해합니다. 다만 이렇게 이해할 경우 하버마스의 모델은 2절에서 제시된 기존의 유형들과 변별되기 어려워 보이고, 둘째 유형 혹은 셋째 유형으로 분류되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현대성의 기획에 대한 하버마스의 긍정적 입장으로 미루어볼 때 그의 입장은 셋째 유형에 포섭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말씀하신 칸트와 야코비에 대한 논의 역시 수긍이 됩니다. 한편 체계적 지향이 자발성 자체의 지향이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이는 체계요구가 자유의 실현이라는 입장을 뒷받침할 근거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고, 따라서 체계비판의 셋째 유형, 그러니까 체계비판적 계기를 자기 내에 포함하는 체계라는 구상에 힘을 실어주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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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의 "체계"의 실천적 근원에 대한 하버마스의 진단은 이미 그의 초기 저작에서부터 나타나는 입장입니다 (가령 <Zu Hegels politischen Schriften (1966)>). 잔트카울렌의 글을 직접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하버마스의 이런 배경을 전제하고서 <의사소통행위이론>의 체계 개념 역시 체계/반체계의 구도에서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일단 두번째 낭만주의 유형은 확실히 아닐 것 같습니다. 가령 아방가르드적인 예술비평운동에 대해서 하버마스는 그 고유성은 인정함과 동시에 생활세계로부터 유리된 한계를 비판하기 때문이죠. 사실 체계와 반체계의 "매개"가 개념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애초에 세번째의 헤겔적 유형이 두번째 유형을 그자체로 aufheben한 유형이죠 (헤겔 본인이 주장하듯이요).
세번째의 헤겔적 유형과 하버마스의 네번째 유형을 굳이 구별하고자 한다면, 거꾸로 헤겔에 대한 하버마스의 비판점을 상기하는 것이 어떨까 싶어요. 이론적/체계적 요구와 실천적 욕구를 "이성 Vernunft"로서 포섭하고자 했던 헤겔의 (궁극적으로) 일원론적 기획이, 국가를 강조하는 그의 법철학을 통해 오히려 민주적 자기결정(Selbstbestimmung)을 사실상 위협하게 되고 생활세계를 구출할 수 없는 등 다원적 체계를 끌어안을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난다는 것이 그 요지겠죠. 하버마스를 읽을 때 저는 하버마스가 (이론/실천/예술의 다원적 구조를 드러낸) 칸트와 (이를 통합하고자 했지만 추상적 차원에 머물렀던) 헤겔을 최종적으로 종합하고자 한다는 인상을 받는데, 잔트카울렌이 네번째 유형을 지시한다면 아마 이러한 맥락이지 않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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