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 투쟁(Anerkennungskamp)과 결투(Zweikampf)는 다르다?!

이번에 백훈승 교수님의 [후쿠야마의 인정투쟁 이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란 논문을 읽어봤습니다. 이 논문에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인정 투쟁’은 사실 ‘인정 투쟁’이 아니고 ‘결투’라고 말하는데요. 저는 유튜브에서 헤겔로 박사 학위를 받으신 분도 ‘인정 투쟁’을 ‘명예’나 ‘자존심’ 같은 것과 엮어서 설명하시길래 그렇게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논문에선 ‘인정 투쟁’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수차례나 언급하시네요. 요약이 처음이라 형식을 많이 지키지 못했지만 한 번 써보았습니다.

백훈승 교수는 많은 사람들이 흔히들 이야기하는 <목숨을 건 인정투쟁>((Anerkennungskamp))이 헤겔의 의도와는 다른 뜻으로 퍼졌다고 말한다. 코제브의 헤겔 해석을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거의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 과정에서 왜곡이 일어난 것이다. 논문에 따르면, 헤겔이 말한 <생사를 건 인정 투쟁> 내지 <승인>의 문제는 오직 국가가 성립하기 이전의 자연상태에서만 일어난다. 우리가 흔히 아는 명예를 위해, 자신의 욕구를 위해 투쟁하는 것은 <인정 투쟁> 이 아니다. 헤겔은 그것을 두고 <결투>((Zweikamp))라 명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는 헤겔 연구자들까지 그 둘을 구분하지 않고 후자마저 전자의 의미로 편입해버린다. 백훈승은 이에 대해 그들에게 헤겔의 텍스트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거나 혹은 헤겔이 말하고 있는 바를 알고는 있지만, 그것을 무시하고 자의적(恣意的)으로 논의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강하게 말한다. 또 흔히들 이야기하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주인은 자기가 얻고자 한 인정을 받지 못한다(못하였다)>, <‘주인은 노예의 노예로 전락하고, 노예는 주인의 주인이 된다’고 하는 소위 주인과 노예의 전도(역전) 현상의 발생>에 대한 이야기 역시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고 말한다.

후쿠야마는 ‘인정 받으려는 욕망’ 어떤 의미로 쓰는가?

우선 후쿠야마는 인류의 역사가 자유민주주의에 이르게 되는 데 기여한 두 가지 요인을 제시한다. 그 하나는 외적인 것으로서, 경제발전이고, 다른 하나는 내적인 것으로서,소위 “인정을 위한 투쟁”the struggle for recognition이다.

그가 설명하는 ‘인정받으려는 욕망’은 다양한 의미로 쓰이는데, 크게 3종류로 나눌 수 있다.
ⓐ 자유와 존엄성⋅자존심을 지닌 한 사람의 인간으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망, ⓑ 자기자신의 지닌 특수한 매력이나 미덕, 그리고 가치 내지 능력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망, ⓒ 자기가 남보다 우월한 자라는 것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망으로 요약할수 있는데, 여기서 ⓐ는 — 뒤에서 설명할 후쿠야마의 용어를 적용하여 표현하면— ‘대등욕망’으로 수렴되고, ⓒ는 ‘우월욕망’이며, ⓑ는 ‘자기의 특수성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망’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렇다면 후쿠야마는 ‘인정투쟁’을 어떤 의미로 쓸까?

우선 그는 ‘인정받기 위한 투쟁’이 “우리 주위 어느 곳에서나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고, 오늘날 구(舊)소련이나 동유럽, 남아프리카,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 혹은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자유주의적 권리를 획득하기 위한 현대의 운동의 토대를 이루고 있다”(EH, 145 f.)고 주장한다. 여기서 이미 백훈승 교수의 입장과 대치됨을 알 수 있다. 백훈승 교수는 국가 성립 이전의 자연 상태에서만 인정 투쟁이 일어난다고 말했으니 말이다.

후쿠야마는 인정 투쟁이란 자기의 위신과 명예와 자존(自尊)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거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후쿠야마가 헤겔을 오독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헤겔의 철학을 이렇게 설명한다.

. [후쿠야마에 의하면, 헤겔이 말하는 자연상태의 인간은“현실의 실증적인 대상들”만이 아니라, “전적으로 비물질적인 대상”을 욕망하며,”다른 인간으로부터 필요한 자가 되거나 인정받기를“(EH, 146) 욕망한다. 뿐만아니라 그는 단지 ”타인으로부터 그저 인정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인간으로 인정받고 싶어한다.]

백훈승 교수는 예나 체계기획,[예나 체계기획Ⅲ](1805/1806), 정신현상학을 근거로 후쿠야마의 헤겔 해석이 잘못됐다고 말한다.

우선 헤겔의 철학에서 ‘인정을 위한 투쟁’은 예나 체계기획에서 처음 등장한다.

[각자는 자기의 점유에 있어서 특히, 필연적으로 방해받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점유 속에는 외적인 것, 물(物), 대지(大地)의 보편적인 것이 하나의 개별자의 권한 속에 있어야 한다는 모순이 놓여있기”20) 때문이다.]

자연상태에서 어떤 토지가 있다고 할때, 그 토지는 처음에는 그 누구의 것도 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어떤 사람이 독점적으로 점유할 경우, 타인이 그 사람의 점유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를 둘러싼 투쟁이 발생할 수 있다. 헤겔은 원초적인 자연상태[Naturzustand]에서의 인간을, 마치 홉스처럼, 전적으로 대립하고 전적으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GW 6, 308 ff. 참조) 인정투쟁을 감행하는 “그들은(...) 서로를 침해할 수밖에 없다”(GW 6, 309)고 주장한다.

이로부터 우리는, 헤겔이 여기서 말하는 인정이란, ‘나의 존재 및 나의 점유의 개별성’을 타인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투쟁이란 이러한 것을 인정받기 위한, ‘목숨을 건 투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예나 체계기획Ⅲ]으로 가면 ‘가족 간의 투쟁’이라는 개념으로까지 확장된다.

이후에 [정신현상학]에서 비로소 ‘인정 투쟁’의 의미가 나타난다. 여기서 헤겔은 이전과 같이 자연상태에서의 투쟁에 대해 말한다. 하지만 [정신현상학]에서 말하는 ‘인정투쟁’은 ‘나의 존재 및 나의 점유의 개별성’을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한 목숨을 건 투쟁이 아니며, ‘가족 간의 투쟁’이나 가족의 총체로부터 나오는 개별자들 간의 투쟁도 아니다. 또 명예와 관련된 ‘결투’도 아니다. 이는 오직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인정받으려는 투쟁, 인간의 자유를 확증하기 위한 투쟁을 의미한다.

헤겔이 인정 투쟁과 결투를 구분한 것은 [인륜의 체계](1802/03)에서 알 수 있다.
예컨대 [인륜의 체계]에서는 이러한 결투를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절도[Diebstahl]와 강도[Raub]라는 범죄 및, 그로부터 발생하는 투쟁[Kampf]을 다루고(SdS, 43-46), c)에서는 살인[Mord] 및 그로부터 발생하는 “명예를 위한 개인 간 내지는 가족 간의 투쟁과 전쟁[Krieg]”(SdS, 46-52)을 다루고 있다.29) 그런데 헤겔이 여기서 말하는 투쟁은, 이미 사회가 성립한 후에 절도나 강도 내지는 살인으로 인해 발생하는, 명예를 위한 개인 내지는 가족 간의 투쟁이다. 따라서 헤겔은 이러한 투쟁을 ‘인정투쟁’이라 부르지 않고, 난외주(欄外註)에 “결투[Zweikampf]”(SdS, 48)라고 적어 구별하고 있다.

여기서는 ‘명예의 인정’이라든지 ‘인정을 위한 투쟁’이라는 표현은 나타나지 않는다.
** 이에 더해 필자는 다시 한 번 헤겔이 말하는 인정투쟁은 결코, 국가나 시민사회가 성립한 후에 국민이나 시민사회의 성원(成員)들 간에서 발생하는 투쟁을 가리키는 용어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헤겔이 직접 ‘생사를 건 인정투쟁‘은 “인간이 오직 개별자로서만 존재하는 자연상태”(Hegel, Enzyklopädie der philosophischen Wissenschaften 참조)에서만 벌어지며, 이러한 인정투쟁을 “시민사회와 국가 속에서 발견되는 “결투”(ebd)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것이 맞다면, 후쿠야마와 더불어 수많은 사람들이 ‘인정투쟁’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 된다. 인정 투쟁은 오직 자연상태에서만 발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쿠야마는 “헤겔 자신은 ‘자연상태’라는 용어를 결코 사용하지 않았다”(EH, 192)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Vorlesungen über die Geschichte der Philosophie]에서 정확히 언급되어 있다. 헤겔은 분명 홉스와 같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를 자연 상태라 부르고, 이 상태에서만 인정 투쟁이 일어난다고 언급했다. 물론 국가 성립 이후에도 ‘인정 투쟁’이 일어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럴 경우엔 그 투쟁이 헤겔의 ‘인정 투쟁’과는 다름을 명시해야 한다.

그렇다면 헤겔의 주장은 옳은가? 헤겔은 국가에서는 투쟁의 소산인 ‘인정됨’[das Anerkanntsein]이 이미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인정투쟁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모두가 이것이 틀렸음을 말을 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그렇다면 ‘인정 투쟁’은 여전히 발생할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

그러나 헤겔은 인정투쟁이라는 용어를, 부모로부터 인정받으려는 욕망, 직장의 상사나 동료로부터 인정받으려는 욕망, 즉 타인으로부터 자기의 가치나 능력 혹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인정받기 위한 일 개인의 일방적(一方的)인 노력에 대해서는 사용하지 않고, ‘자기가 자유로운 자라는것을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쌍방 모두가 자기의 목숨을 걸고 하는 투쟁’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국가 속에서도 ‘인정투쟁’이 일어난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이러한 투쟁은 결코, 본래 헤겔 자신이 말하고 있는 인정받기 위한 ”생사를 건 투쟁”[der Kampf auf Leben und Tod]41)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인정투쟁의 결과, 주인과 노예가 발생한 경우에 과연 인정받으려는 욕망이 성취되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살펴보자. 이 역시 많은 사람들이 노예는 노동을 하고 세상과 부딪히며 자립적인 존재로 되어가는 것에 반해 주인은 수동적이기에 그 둘의 관계가 전복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백훈승은 플라므나츠를 근거로 이 또한 설득력이 없다고 말한다. 사회나 국가는 단 한 명의 주인과 단 한명의 노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 속에는 여러 명의 주인과 노예가 존재한다. 따라서 주인은 다른 주인에 의해 자유로운 자로 인정될 수 있기 때문에 인정의 욕망은 충분히 충족될 수 있는 것이다.

또 후쿠야마(그리고 헤겔과 코제프)는 노예의 노동의 가치는 과대평가하는 반면, 주인의 노동의 가치는 거의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노예의 노동을 기획하고 지시하는 것은 누구인가? 단순하게 말하자면, 노예는 주로 육체적으로 노동하는 자이고, 주인은 주로정신적인 노동을 하는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백훈승은 헤겔조차 — 적어도 [정신현상학]의 <자기의식> 장에 관한 한, — 주인의 노동의 가치는 제쳐놓고 오로지 노예의 노동의 가치만을 인정하고 있다고 말한다.

노예의 육체노동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주인의 통치 내지관리인데, 이 역시 노동이다. 이는, 노동의 본질이 ‘규칙적’[regular]이고 ‘의무적’[obligatory]이며, ‘봉사’[service]라고 할 때에도 마찬가지다. 뿐만 아니라 자유민[the free]이나 억압자[the oppressors] 역시, 예속된 자[the servile]나 피억압자[the oppressed]만큼이나 생산의 향상에 관심을 갖고 있고, 그들만큼이나 그들은 자연과 자기 자신들에 대해 면밀하게 연구하며 창의적이다. 또한 어떤면에서 보면 그들은 예속적인 자들과 피억압자들보다 훨씬 더 지적(知的)이고 성찰적인 계급이라고 할 수 있다.47) 그러므로 “역사를 진전시킨 원동력은 주인의 게으른 자기만족이나 변치 않는 자기주장(독선적 성격)[self-identity]이 아니라,인정에 대한 노예의 끊임없는 욕망”(EH, 198)이라는 후쿠야마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라고 백훈승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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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훈승 교수님의 주장이 헤겔의 텍스트에 대한 해설로는 유의미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인정투쟁'이라는 개념은 이제 더 이상 헤겔의 맥락에만 갇히지 않는 개념이 된 것 같습니다. 특히, 악셀 호네트가 마키아벨리즘을 비판하기 위해 인정투쟁 개념을 내세운 이후로, 오늘날 정치철학에서 '재분배-인정' 논쟁은 중요한 주제 중 하나가 되었는데, 이 주제는 헤겔을 떠나 프레이저나 영 같은 정치철학자들의 담론을 통해 자율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인정투쟁 개념이 헤겔의 텍스트에서 발생하였고, 그만큼 헤겔이 우리에게 여전히 영감을 주는 철학자로 다시 읽힐 수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과연 "대다수 사람들이 사용하는 인정투쟁 개념은 헤겔이 사용한 본래의 그 의미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 자체만으로 오늘날 정치철학에 어떤 유의미한 기여가 이루어질 수 있을지 저로서는 다소 의문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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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철학자가 제시한 개념을 현대철학자들이 오남용하고 있다는 취지의 연구는 양날의 검인 것 같습니다. 해당 개념에 대한 역사적 이해를 풍부하게 해 주는 순기능도 있습니다만, 오히려 그 과거철학자를 현대철학자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하는 효과도 있으니깐요. 예컨대 현대 정치철학자들이 이것을 보고 "이런, 헤겔을 다시 꼼꼼하게 읽어봐야겠군"보다는 "아하, 인정투쟁을 말하기 위해 헤겔을 안읽어도 되겠고만!" 하고 반응할 것 같거든요. 이거는 이거대로 헤겔 연구자들로서는 참 난감한 상황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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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하게 헤겔 덕후로서 헤겔이 왜곡되는 걸 참을 수 없으셨던 게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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