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석: 동어반복적 근거로부터의 형식적 설명방식
반성이 규정적 근거들에 대해 자기를 여기서 드러난 근거 형식에서 고수한다면, 근거의 제시란 순전한 형식주의이자, 이미 직접적인, 정립된 것으로 고찰된 현존재의 형식 속에서 현전하는 것과 동일한 내용을 자기-내-반성, 본질다움의 형식 속에서 표현하는 공허한 동어반복이다. 그 때문에 근거들을 그렇게 제시하는 것은 동일성 명제에 대한 논의와 동일한 공허함을 수반한다. 학문들, 특히 물리의 학문들은 이러한 종류의 동어반복들로 가득 차 있는데, 이 동어반복들은 흡사 학문의 특권을 구성한다.─예컨대 행성들이 태양 주위를 돈다는 근거로서 지구와 태양의 상호 인력이 제시된다. 그러므로 이는 그 내용에 따르면 현상이, 즉 이러한 물체들의 상호 관계가 그 운동 속에서 함유하고 있는 것을 자기 내로 반성된 규정인 힘이라는 형식 속에서 언표된 것에 다름 아니다. 그 다음으로 인력이 어떤 종류의 힘인지 묻는다면, 대답은 그것이 지구와 태양이 움직이도록 하는 힘이라는 것이다. 즉 인력은 그 근거가 인력 [자신]이라는 그러한 현존재와 동일한 내용을 지닌다. 운동이라는 고려 속에서의 지구와 태양의 관계는 근거와 정초된 것의 동일한 토대이다.─분자들이 서로 특수한 배열 속에 들어서며 결정화 형식[Kristallisationsform]이 이 특수한 배열 속에서 그 근거를 지닌다는 점을 통해 결정화 형식이 설명된다면, 현존하는 결정화는 근거로서 표현된 배열 그 자신이다. 학문들은 이 원인론[Ätiologien]에 대해 특권을 지니지만, 이 원인론들은 일상생활에서는 원인론인 바 그것으로, 하나의 동어반복적인 공허한 말로 간주된다. 왜 이 사람이 도시로 여행을 가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305]그 사람을 그쪽으로 모는 인력[引力]이 도시에 위치하기 때문이라는 근거가 제시된다면, 학문들 내에서는 비준되는 이러한 답변 방식은 황당한 것으로 간주된다.─라이프니츠는, 인력이란 스콜라 철학자들이 설명을 위해 사용했던 그러한 숨겨진 질이라고 뉴턴의 인력을 비난했다. [하지만] 오히려 인력이 너무 잘 알려진 질이라는 점이라는 반대의 점을 비난거리로 삼아야 할 터이다. 왜냐하면 인력은 현상 자신과는 다른 내용을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이러한 설명방식이 추천되는 것은 그 큰 명확성과 이해 가능성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컨대 하나의 식물이 식물적인 즉 식물들을 생산하는 힘에 그 근거를 지닌다는 것보다 명확하고 이해 가능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이 힘이 하나의 신비로운[okkulte] 질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은 오직 근거가 설명되는 것과 다른 내용을 지닌다는 의미에서일 터이다. 그러한 내용은 제시되어 있지 않다. 그런 한에서 설명을 위해 사용된 저 힘은 [제시되도록] 요구받았으면서 제시되지 않은 근거로서 당연히도 하나의 숨겨진 근거이다. 내가 그것이 하나의 식물이라는 점이나 이 식물이 식물을 생산하는 힘에 그 근거를 갖는다고 말한다면, 이러한 형식주의를 통해서는, 한 식물의 본성이 인식된다는 점 외에는 어떤 것도 설명되지 않는다. 그로 말미암아, 이러한 명제의 모든 분명성을 가지고 이것을 하나의 매우 신비로운 설명방식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형식에 따르면 이러한 설명방식에서는 양자의 규정적 연관이 인식되지 않은 채 근거관계의 두 가지 대립되는 방향이 대두된다. 한편으로 근거는 근거가 정초하는 현존재의 자기 내로 반성된 내용규정으로서 근거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피정립자이다. 근거란, 현존재가 그로부터 파악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거꾸로 현존재로부터 근거가 추론되며 근거는 현존재로부터 파악된다. 다시 말해 이러한 반성의 주된 과업은 현존재로부터 근거들을 발견하는 데에, 즉 직접적 현존재를 반성되어있음의 형식으로 변모시키는 데에 있다. 이에 따라 근거는 자체독자적 및 자립적으로 존재하는 대신 오히려 정립된 것이자 도출된 것이다. 이제 근거가 이러한 처리방식을 통해 현상에 따라 정리되고 근거의 규정들이 현상에 기인하는 까닭에, 현상은 당연히도 완전히 매끄럽게 흘러나오며 순풍을 타고 그 근거로부터 흘러나온다. 그러나 인식에는 이로써 진척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인식은 형식의 구별 속에서 방황하는데, 이러한 처리방식은 그 구별을 뒤집어놓고 지양한다. 이 때문에 이러한 처리방식이 지배적인 학문에 천착하는 데 주된 어려움 중 하나는, 실상 도출된 것을 근거로서 앞서 이야기하고, 결과들로 나아갈 때 실상 결과여야 하는 근거들의 근거를 비로소 결과 내에서 제시하는 이러한 태도의 전도성[Verkehrtheit]에 기인한다. 서술은 근거에서 시작되는데, 근거들은 원리들이자 [306]최초의 개념들로서 허공에 세워진다. 근거들은 그 자신 자체독자적으로 어떤 필연성도 없는 단순한 규정들이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학문에 몰두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저 근거들을 명심해야 한다.─이는 이성에게 마뜩찮게 나타나는 과업인데, 이성은 근거 없는 것을 토대로서 타당하도록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많은 숙고 없이 원리들을 주어진 것으로 감수하면서 이제부터 이 원리들을 자기의 오성의 근본규칙으로 사용하는 자들이 가장 많이 진척을 이룬다. 이러한 방법 없이는 시작을 얻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진전은 이러한 방법 없이는 이룰 수 없다. 그러나 이제 진전은, 결과하는 것 속에서 도출된 것을 보이려는 방법에 대한 반동이 진전 속에서 대두됨으로써 방해받는다. 도출된 것은 사실 근거들을 저러한 전제들로 비로소 함유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결과하는 것은 근거가 그로부터 도출되는 현존재로서 자기를 보여주기 때문에, 현상이 그 안에서 성립하는 이 관계는 현상의 서술에 대한 불신을 부여한다. 왜냐하면 현상은 자기를 그 직접성 속에서 표현된 채가 아니라 근거의 증거로서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후자가 전자로부터 도출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현상으로부터 나오는 근거를 판정할 수 있기 위해 현상을 오히려 그 직접성 속에서 보기를 요구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본래적인 정초자가 도출된 것으로서 대두되는 그러한 서술 속에서는 어떻게 근거를 다루어야 할지도 또 어떻게 현상을 다루어야 할지도 알지 못한다. 순전히 원리들 내에 함유되어 있는 바의 이상 및 종종 완전히 다른 것을 가리키는 현상의 흔적들과 상황들이 도처에서 드러남으로써─특히 논의가 엄격히 일관적이지 않고 솔직할 때─불확실성이 증가한다. 반성된 또 순전히 가설적인 규정들이 마치 직접 경험에 속하는 듯 그러한 방식으로 언표된다면 이 규정들이 현상의 직접적 규정들과 그 스스로 뒤섞이는 까닭에 혼동은 마침내 더욱 거대해진다. 이 점에서, 솔직한 믿음을 가지고 이 학문들에 들어서는 몇몇 사람들은 다음의 의견을 지닐 수도 있다. 분자들, 공허한 간격들, 원심력, 에테르, 개별화된 광선, 전기, 전자 물질[Materie]과 그러한 종류의 집합이, 이들이 직접적 현존재규정들이라고 말해지듯이 사실은 지각 속에 현전한다는 사물들 혹은 연관들이라는 의견이 그것이다. 이들은 다른 것에 대한 최초의 근거들이라는 노릇을 하며, 현실적인 것들[Wirklichkeiten]로 언표되고 낙관적으로 적용된다. 사람들은 옳다는 믿음을 가지고 이들을 그렇게 간주한다. 이것들은 오히려 이들이 정초해야 하는 것으로부터 추론된 규정들이라는 점, 무비판적 반성으로부터 도출된 가설들이자 허구들이라는 점을 깨닫기도 전에 말이다. 사실 사람들은, 현존재의 규정들과 반성의 규정들, 근거와 정초된 것, 현상들과 환영들이 분리되지 않은 조합 속에서 서로 뒤엉켜서 서로 동등한 지위를 누리는 일종의 마녀의 원[Hexenkreis] 속에 자리한다.
이러한 근거로부터의 설명방식이라는 형식적인 과업들에서 사람들은, 잘 알려진 힘들과 물질들[Materien]로부터의 모든 설명들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러한 힘들과 물질들 그 자신의 내적인 본질을 알지 못한다는 말을 동시에 듣는다. 여기서는 이러한 정초가 자기 스스로 전적으로 불충분하다는 점, 이 정초가 그러한 근거들과는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을 그 스스로 요구한다는 점에 대한 시인만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하러 이러한 설명에 노고를 들이는지, 왜 다른 것을 찾거나 혹은 적어도 저러한 설명을 차치하고 단순한 사실들에 멈춰 서지 않는지 종잡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