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도덕성의 상징으로서의 미에 관하여
개념의 실재성을 보이기 위해서는 개념에 상응하는 직관이 요구되는데, 경험적 개념의 실재성을 밝혀주는 직관은 실례(Beispiel), 순수지성개념의 실재성을 밝혀주는 직관은 도식(Schema)이다. 반면 이념의 객관적 실재성을 보여줄 수 있는 직관은 있을 수 없다.
현출(Hypotypose) 혹은 현시(Darstellung)란 개념을 감성화하는 일을 뜻하는데, 현출에는 도식적 현출과 상징적 현출이 있다. 도식적 현출은 순수지성개념에 대응하는 선차적(a priori) 직관이 내용적으로 일치함으로써 이루어지는 반면, 상징적 현출에서 개념은 개념을 감성화하는 직관과 반성형식의 측면에서만, 즉 판단력의 도식화작용 규칙에서만 일치를 보일 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상징적 현출은 유비적으로 이루어진다.
개념의 상징적 표상방식은 흔히 볼프나 바움가르텐 등에 의해 직관적 표상방식과 대립되었으나, 이러한 분류법은 잘못되었다. 올바른 분류에 의하면, 직관적 표상방식은 기호표시(Charakterismus)와 구분되며, 직관적 표상방식은 다시 도식적 표상방식과 상징적 표상방식이라는 하위 구분을 지닌다. 기호표시가 순전히 (상상 속에서 개념을 재생하기 위해) 연합의 법칙에 따라 감성적 기호를 통해 개념을 표기하는 방식이라면, 직관적 표상방식(현출)은 개념에 대응하는 직관을 예시함으로써 개념의 구체적인 형태를 감성 속에서 보여주는 (혹은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표상방식이다.
그 중에서도 도식은 개념을 직접적으로 현출하는 반면, 상징은 개념을 간접적으로 현출한다. 전자는 직관을 통해 개념을 예증(입증; demonstrieren)하는 반면, 후자는 직관을 통해 개념을 유비할 뿐이다.
이때 유비란 판단력이 (1) 개념을 직관의 대상에 적용한 후, (2) 이 직관의 반성 규칙만을 가져와서 완전히 다른 대상에 적용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칸트는 전제군주국가를 손절구와 같은 기계에 유비하는 일을 예시로 드는데, 전제국가의 개념은 현실 속 전제국가(예컨대 루이 14세 시대 프랑스)에 일차적으로 적용되며 손절구에 이차적으로 적용된다. 그리고 전제국가를 손절구에 빗대는 일은, 양자의 인과적 작동 방식에 대한 반성의 규칙이 서로 유사하다는 점에 의해 보증된다.
우리 언어 속에서도 상징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칸트가 보기에 근거(Grund; 지반, 토양), 의존하다(abhängen; 위에 매달려 있다), (따라) 나오다(fließen; 흘러나오다) 등의 개념이 현시되는 대상은 직접적이 아니라 모두 상징적이다. 특히 신에 대한 우리의 모든 표상방식(혹은 실천적 견지에서의 인식)은 도식적이 아니라 상징적이다. 우리는 지성, 의지 등의 개념을 통해 신을 표상하지만, 이러한 표상활동은 상징적일 뿐이다. 왜냐하면 엄밀히 말해 그러한 개념들의 실례는 감성적 세계 속에서만 현현하기 때문이다. 이 상징적 성격을 간과하고 신에 대한 우리의 표상을 도식적으로 여기게 된다면 우리는 의인론(Anthropomorphism)에 빠지게 된다. 반면 그렇다고 해서 신의 이념을 상징적으로 현현하는 모든 직관적 표상들을 배제한다면 우리는 이신론(Deism)에 빠지게 된다.
미는 도덕적 선의 상징이며, 취미판단이 모두의 동의를 요구할 권리를 지닌다는 명제는 바로 이러한 한에서만 옳다. 미적인 경험을 할 때 우리는 단순히 마음에 듦이나 쾌를 넘어서 도덕적 선의 이념, 혹은 예지적인 것을 향해 고양된다. 이 예지적인 것 덕분에 우리의 인식능력들은 서로 모순을 일으키지 않고 부합하여 통일성을 이룰 수 있다.
판단력은 이성적 욕구능력이 자기입법을 하듯이 자기의 법칙을 자율적으로 수립한다. 또한 판단력은 이 (내적 및 외적) 자율의 가능성을 통해서 “자연도 자유도 아니지만 자유의 근거와, 곧 초감성적인 것과 연결되어 있는 어떤 것”(5:353, 번역 수정)과 관계한다. 이처럼 자연과 자유 중 하나에 속하지 않는 이 “초감성적인 것”이야말로 이론적인 능력과 실천적인 능력을, 혹은 자연과 자유의 통일을 가리켜 보여주는 것이다. 양자가 결합되는 방식은 우리에게는 알려질 수 없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칸트는 미가 선의 이념을 상징적으로 표상하는 방식이라는 주장을 제시하면서도, 취미판단의 네 가지 계기를 도덕성의 경우와 대조함으로써 선-미의 유비가 지니는 한계를 명시한다.
(1) 미적 대상은 직접적으로(비개념적으로) 마음에 든다.
(2) 미적 대상은 무관심적으로 마음에 든다.
(3) 미는 대상의 합목적성의 형식이다(상상력의 자유는 지성의 합법칙성과 일치한다).
(4) 미적 대상은 비개념적으로 만족된다(취미판단은 주관적으로 보편적이다).
(1′) 미적 대상이 반성적 직관 속에서만 마음에 드는 반면, 도덕적인 것은 개념적으로 선하다.
(2′) 미적 대상이 무관심적인 반면, 도덕적 대상은 미적 판단이 불러일으키는 관심과 결합된다.
(3′) 취미판단에서 상상력의 자유가 지성의 합법칙성과 일치하는 반면, 도덕판단에서 의지의 자유는 이성의 법칙을 통해 자기 자신과 일치한다.
(4′) 취미판단이 그 비개념성으로 말미암아 주관적으로 보편적인 반면, 도덕판단은 객관적 개념에 매개되는 까닭에 객관적으로 보편적이다.
여기서 확연히 드러나는 점은, 취미판단과 달리 도덕판단이 “구성적 원리들”(5:354)과 그 보편성에 근거해 행위 준칙을 세우는 데에서 존립한다는 점이다.
미적 대상에 도덕적인 함의를 지니는 명칭을 부여하는 일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데, 왜냐하면 미적 대상이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방식은 도덕판단이 우리의 마음상태를 불러일으키는 방식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상상력이 자유롭게 합목적적인 규칙을 수립하고 감성적 대상들 속에서 만족을 발견하는 일은, 의지가 자유롭게 도덕법칙을 수립하고 선한 것을 찾는 일과 유사하다. 바로 이러한 유사성에 의해 감각적 자극은 취미판단을 통해 도덕으로의 이행을 용이하게 한다.
§60. 부록: 취미의 방법론에 관하여
이론이성과 실천이성의 비판이 요소론에 이어 방법론을 지니는 것과 달리, 취미비판은 방법론을 지니지 않는다. 왜냐하면 취미판단은 객관적 원리를 결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술은 학문이 아니다. 아름다운 것의 객관적 원리는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이를 가르쳐주는 방법도 있을 수 없다. 예술에서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창조행위의 객관적 규칙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례 속에서 드러나는 행위 절차의 “주요한 계기들”(5:355)뿐이다. 또한 이 실례를 그저 모방하고 따라야 할 대상으로만 간주하는 일을 막고 상상력을 자유롭게 발휘하기 위해, 우리는 모든 예술 작품이 미적 이념을 표현하기에 항상 불충분하다는 점을 일깨워야 한다.
예술의 완전성을 추구하기 위해 필요한 예비학은 인문교양(humaniora)이다. 인문교양은 고전문헌학의 일종으로, 고대(그리스와 로마)의 고전을 통해 취미를 계발하는 학문인데(9:46 참조), 고전을 학습함으로써 우리는 고대인들의 (이를테면 수사학과 시학 같은) 작품들로부터, 인간성을 계발하고 자유와 강제가 조화를 이루는 공동체의 형성을 촉진하는 수단의 모범적 사례를 엿볼 수 있다. 특히 인문교양이 계발시켜주는 것은 사회성(Geselligkeit)인데, 사회성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 참여하고 자기 자신을 타인에게 전달하는 능력이다. 사회성은 인간이 자연상태에서 벗어나 타인과 도덕적 공동체를 이루며 살도록 추동하는 심리적 동기이다.
그러나 참된 의미에서 취미판단을 위한 예비학은 인문교양이 아니라, 도덕적 이념들과 도덕 감정을 계발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취미판단의 능력이란 유비를 통해 도덕적 이념을 감각 속에서 상징적으로 표상하는 능력이며, 쾌의 보편타당성은 바로 이 능력에 의해 근거놓이기 때문이다. 취미판단의 능력은 도덕적 이념에서 유래하는 도덕감정에 대한 감수성을 근거놓는 능력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미적 판단의 반성규칙은 도덕감정에 대한 감수성의 반성규칙과 동형적이며, 이 점에서 도덕감정의 계발은 취미의 계발을 예비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