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열,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 5장, 「샌델 이론의 실체」 요약 (1)

평등적 자유주의에 대한 옹호가 이 책의 핵심인데, 4장의 제목이 샌델, 자유주의를 왜곡하다라서 4장에 그러한 내용이 있을것같지만, 위에서처럼 정작 그런 내용은 4장에는 별로 없고 5장에 있었습니다.

(4장을 요약하려했는데 시험이 끝나니까 책을 정말 읽기싫었다)
(사실 이 책의 5장이 본론인데 5장이면 책이 끝납니다. 샌델을 미워하는 비판서인척하는 매우 알찬 정치철학 개론서였던것임... 정치이론을 소개하는 2,3,5장의 내용은 저같은 입문자에게 매우 유익했슴다)

핵심을 요약하는 솜씨가 매우 부족한 탓에 글의 분량이 많습니다.
그래서 각 주제로 묶일수있는 부분에 번호를 붙여봤습니다.

제가 볼때 5장의 논의는 대략 세부분으로 나름 재구성할수 있는 것 같습니다.

첫번째는 샌델식 공동체주의의 세가지 단점을 지적하는것

두번째는 자유주의에 대한 샌델의 두가지 비판
(1.자유주의는 추상적 개인주의다 2.가치상대주의다)에 각각 답하면서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부분

세번째는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에 대해 평등적 자유주의식의 설명을 제시하는것
(저자는 개인주의와 집단주의가 무조건 충돌한다는 식의 속류 공동체주의스러운 설명은 엄밀하지 못한 추론에서 나오는 오류라고 주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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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델은 (드디어) 정의 8장에서부터 자신의 주장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샌델은 자유주의가
'추상적 개인주의'와 '가치상대주의'를 전제하고있다고 비판한다.

정치의 목적은 시민의 미덕,덕목을 키우는것이다. 그런데 자유주의는 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자유주의가 전제하는 추상적 자아는 관계(공동체,가족 등)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이 진정으로 추구하고 싶은 미덕과 단순한 선호 사이를 구분하지못하기때문이다.

추상적 자아, 중립적 국가를 내세우는 자유주의는 정치적 사안에 관한 논쟁을 해결할수없다.
국가가 나서서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삶인지 정해줘야 그런 '옳음'의 문제들을 다룰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음(미덕과 목적)을 먼저 이야기해야 옳음(정의와 권리)를 이야기할수있다.
권리와 정의라는 개념들은 불필요할떄가 많다.

저자는 샌델의 이론이 가지고 있는 단점들을 나열한다.

ㅡㅡ샌델 이론의 한계ㅡㅡ

1. 목적론적 추론의 한계(1장의 내용과 살짝 비슷하다)
샌델은 사회적 행위에 관한 도덕판단을 할때 주로 '특정한 행위의 목적or본질은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던진 뒤, 그 목적이 '시민적 탁월성'이라는 더 큰 목적에 봉사하는 정도에 따라 행위의 허용가능성을 판단한다.

이것이 목적론적 추론이다. 또한 샌델에 따르면 정치의 본질적 목적은 '좋은삶'에 관한 토론으로 시민들의 능력과 미덕을 개발하게 만드는것인데, 자유주의는 이를 사실상 망각하고 중립적 국가,공허한 정치를 고집한다. 자유주의는 국가가 무엇이 좋은삶인지, 무엇이 추구해야할 목적인지 구성원들에게 말해주지않아야 한다고 보기 떄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우리가 도덕 추론을 시작할때, 논의되고있는 행위의 목적을 고려하는것은 사실 모든 도덕추론에서 흔히벌어지는 일이라고 지적한다.
오히려 목적론적 추론만이 가지고있는 특성(이자 한계)은
행위의 목적을 언급한다는 것이 아닌 목적을 고려하는것만으로 논의를 종결시키는 것이다.

원칙없이는 목적간의 타당함을 가리지못하기때문에, 목적론적 추론은 논의를 끝맺을수있는 분석방식이 아니다. 조금 더 정당화를 위해, 저자가 드는 예를 살펴보자.

영국의 윤리학자 버나드 윌리엄스와 로버트 노직은 '의료 혜택의 분배'를 두고 논쟁한다.1
윌리엄스는 의료 행위의 '목적'이 건강하지 못한 상태로부터 회복에 있으므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의료 혜택을 분배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노직은, 그렇다면 이발의 '목적' 중 하나는 '머리를 깎는 것'이므로, 이발도 지금처럼 개인의 비용 부담이 아니라 머리가 긴 사람들을 우선으로 무상 혜택을 분배해야 하는것이냐고 반박한다.

이민열은 노직의 주장에 반박하려면 목적을 언급하는 방식에 더해서, 심층적 원칙을 제시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단순한 필요(선호)와,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기본적 필요를 구분한다'라는 원칙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일체의 무상의료는 옳지않다는 노직의 주장보다, 병든 사람에게 기본적인 의료혜택이 제공되어야한다는 윌리엄스의 주장이 더 바람직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그것은 윌리엄스가 끝내 올바른 목적을 맞춘 덕분이 아니라, 평등과 자유의 원칙같은,
우리가 가지고있는 심층적인 도덕적 확신들을 광범위하게 고려했기때문이다.
따라서 목적을 언급하는것은 목적론적 추론만의 독자적인 장점도 아니고, 목적을 떠올리는것만으로 도덕적 추론을 종결시킬수도 없다.

''목적론적 추론을 따른다 해도,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정치의 목적을 순순히 납득하기는 힘들다. 다음과 같은 목적은 어떠한가? ''정치의 목적은 ...자신의 목적을 형성하고 추구하며 책임지고 최선을 다해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럴듯해 보이지 않는가? 이 내용은 샌델이 거부하는 자유주의자의 ''정치의 목적''이다. 목적론적 추론 자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과 자유주의자의 목적 중 무엇이 타당한지 전혀 설명해주지 않는다.... 결국, 그 목적이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 판단과 원칙에 어떤 점에서 부합하는지를 밝혀야만 한다.''2

2.정의는 다른 미덕들에 비해 열등한 가치가 아니다

ㅡ정의의 여건은 보편적이다

롤스는 자원의 희소성, 좋은 삶에 대한 비전의 갈등이 모든 인간사회에 공통적인 여건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정의가 사회의 제1덕목이며, 구성원들의 상충하는 요구를 조정하기 위해 정의의 원칙이 필요하다고 한다.
샌델은 롤즈를 비판한다. (샌델의 박사논문이름이 '정의의 한계'라고 한다)

가족, 친구, 민속, 종교 등등의 공동체들이 출현한것을 보라. 따라서 '부족한 이타성'이라는 정의의 여건이 보편적이라는 롤즈의 주장은 틀렸다. 정의는 사회의 제1덕목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조건적으로 제일 덕목이다. 불굴의 용기가 전쟁터에서 제일 덕목인 것처럼 말이다.'3

저자는 샌델을 비판한다. 특정 집단의 출현을 근거로 정의의 여건을 부정할수는 없다. 정의의 원칙은 '무수히 많은 사람들과 집단들로 이루어진 정치공동체에서 집단들 사이의 관계를 규율하는 원칙'이기 때문이다. 집단 안에서 아무리 사랑이 넘친다고 해서 집단 간에도 이타심이 발휘될거라는 착각은, 현 시대에도 일어나고 있는 종교공동체들이 잔인하게 싸우는 모습만 봐도 반박된다. 따라서 정의의 여건은 보편적이다.

ㅡ정의는 보충적 덕목이 아니다

샌델은 위에서 말한 전쟁터의 예에서처럼,
정의가 불필요한 덕목일 때가 있으며, 심지어는 다른 덕목들을 위축시킬때도 있다고 주장한다.
자비심 등의 덕목이 충분하면 정의를 요구하지않고, 정의의 요구가 다른 덕목들을 약화시킬때도 있기
때문이다. 4

그러나 저자는 다른덕목이 높아도 도덕적 검토를 위해 정의는 여전히 필요하며, 정의는 다른 덕목들을 강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른 덕목의 수준이 높을때 사람들이 정의를 요구하지않는 것은 이미 정의의 목적이 달성되었다고 여겨지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목적이 달성되었는지에 대한 재검토를 위해 정의의 원칙은 여전히 필요할수 있는것이다.

또한 이민열은 정치학자 사이먼 케이니의 예를 가져온다.

예시1. 가정에서 아내가 가사노동을 도맡아 하고있다. 그는 이 모든 일을 단순한 선의로
수행하지만 일과 관련해서 자기가 어떤 권리를 가지고 있는지 전혀 모른다. 그는 다른 이들이 즐기면서 노는 동안 궃은일을 혼자 감당하는 상황이 불공정하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다.

예시 2. 한 회사에서 어떤 노동자가 고된 잡일을 자신의 몫을 넘어 훨씬 많이 한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임금을 받고 있고,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만큼만 일하면 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친절한 사람이어서 계속 그렇게 한다.5

예시1에서 아내는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지 않았지만, 요구하지 않았다고 해서 정의가 필요하지 않은것은 아니다.

또한 우리는 예시1과 예시2를 비교했을때, 예시2의 자비심이 더 높은 도덕적 가치를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권리에 대한 무지에서 나오는 복종보다, 동등한 관계에서 나오는 의도적인 친절을 바람직한 자비심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정의의 체제는 더 가치있는 형태의 자비가 번성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한다.

ㅡ제도적해석과 행위해석

이민열에 따르면 샌델은 롤즈가 사용하는 '정의'의 의미를 완전히 오해했다. 우리가 사용하는 '정의'의 의미는 사실 두가지로 나눌수있다.

제도적 해석(institutional reading): 정의는 사회 제도의 첫 번째 덕목이다. 정치 체제는 다른 무엇보다도 정의를 제도화해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권리를 가져야만 한다.

행위자 관련해석(agent related reading): 정의는 개별 행위자의 첫 번째 덕목이다. 모든 덕목( 자비심, 인내, 용기, 현명함) 중에서 정의가 가장 가치 있는 것이다.

롤즈는 정의가 '사회'의 제1덕목이라고 했지. 모든 개인이 일상생활에서 정의를 우선적으로 실천해야한다고 보지않았다. 정의가 다른 미덕들(대표적으로 자비)을 위축시킨다는 샌델의 주장은 이럴때만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위에서 사이먼 케이니의 예를 봤던것처럼, 자비와 정의는 필연적으로 반목하는 가치들이 아니며, 정의로운 제도는 구성원들의 올바른 자비가 자랄수있는 토양이 될수있다.

3.샌델의 미덕이론에 대한 비판

ㅡ미덕을 논한다고 해서 그자체로 독자적인 이론이 될수없다.

위에서 본것처럼 샌델은 정의와 권리에 대한 강조가, 다른 미덕들을 약화시키는 측면이 있다고 비판한다.

따라서 샌델은 '정의의 한계'에서 미덕은 정의의 언어(미덕, 권리)와 경쟁하는 가치이며, 미덕이론은 다른 이론들과 명료하게 구분되는, 정의의 이론의 대체제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민열은 미덕이라는 개념을 분석해보면 '이와 같은 생각은 착각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미덕이란 '이성적 주체가 적절한 상황에서 적절한 행동을 하는 성향'이다. 따라서 미덕은 '단순히 두 극단 사이의 중간점을 택하거나, 이성적인 태도를 유지하는것과는 다르다.'

''결국 미덕이란, 특정 상황과 맥락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변환이 가능하다.
V(공화국 시민의 덕)라는 미덕을 갖췄다는 것은 S라는 상황(선거)에서 A(투표)라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ㅡ> 정치 공동체가 사람들이 미덕 V를 갖추도록 만든다는 것은 S라는 상황에서 A라는 행동을 하도록 의무를 부과하는 것이다.
ㅡ>즉, 사람들은 S라는 상황에서 A라는 행동을 할, 정치 공동체가 규정한 의무를 가진다.
위의 분석에 보듯, 미덕에 관한 진술은 의무에 관한 진술로 변환할 수 있다.
특히 그것이 정치를 통해 집단적으로 규정되는 미덕일 경우에 '의무 부과'는 필연적으로 따라나온다''.6,7

또 저자는 의무의 언어 역시 권리의 언어로 변환할수있다고 주장한다.
권리진술은 권리자의 특정 이익이 중요하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그 특정 이익은 또한 의무진술을 정당화한다. 저자는 이를 투표의 자유(투표권)을 예로들어 정당화한다.

내가 투표의 권리를 갖는것은, 투표했을때의 이익이, 내 투표에 관련된 남들의 의무를 부과할정도로 중요하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따라서 투표의 권리를 인정한다면, 투표를 방해하지않을 남들의 의무가 도출된다.
그러므로 의무진술을 권리진술로 변환할수있다.
저자는 이렇듯 미덕, 의무,권리는 모두 '가치의 그물망'으로 연결되어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것은 미덕의 '형식'을 분석했을 뿐이고, 그 형식에는 다양한 내용이 들어갈수있다.
자유주의식의 관용도 미덕의 내용이 될수있고, 공리주의식 자비심의 미덕도 미덕의 내용이 될수있다.
샌델의 이론만이 미덕을 존중하는 것이아니다. 공리주의나 자유주의도 충분히 미덕을 말할수있다.
다만 오직 '공리주의,자유주의에서 인정하지않는 의무를 전제하는' 미덕만을 반대할뿐이다.
이를 간과하고 정의,권리등의 강조가 미덕과 경쟁한다고 말하는 샌델은 개념들간의 차원이 다르다는것을 알지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미덕은 대중에게 부정할수없는 수사적 호소력을 갖는다.

ㅡ미덕에 의존하는 이론은 정치적 논의를 어지럽게 만든다.

''예를 들어 자유지상주의자들이 ''국가는 약자를 도와줄 권리나 의무를 지니지 않는다.'' 라고 말했을때 그들의 구호는 지나치게 삭막했다. 그러나 미덕의 언어로 갈아입고 ''복지국가는 의존성, 수동성, 그리고 영구적 소외를 조장한다.'' 라고 외쳤을때, 그들의 구호는 정치적으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국가는 약자를 도울 의무를 지니지 않으며, 약자 역시 사회 안전망을 요청할 권리가 없다는 진술이 그 구호 앞에 분명히 전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미. 미덕의 언어를 사용한 덕택에, 특정 상황을 가능하게 한 재산권 질서와 노동 및 경제 정책, 실질적인 교육 기회에 관한 국가 정책이 정의로운가 하는 문제는 슬그머니 은폐된다''8

권리와 의무를 애써 언급하지 않는탓에, 애초에 배경이 되는 권리질서가 정당한가?라는 물음을 무시하는 문제는, 정치제도의 목적을 혼동하는 문제 또한 불러온다.

샌델은 흑인들의 인권운동이 시민들의 유대감을 불러일으키기때문에 좋은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흑인 민권운동은 바로 그 흑인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 과정에 일부의 유대감이 증진되었을지는 모르지만, 백인과 흑인 사이에는 여전히 갈등이 극심했고 전국에는 많은 시위가 벌어졌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운동의 정당성을 부정해야 하는가?
과세제도는 최소수혜자들의 삶을 위한 제도인것이 아니라, 부자들의 자비심을 증진시키기위한 제도라는
주장은 논의의 목적을 빗겨가는 것이다.

샌델은 정치제도의 목적이 시민의 미덕을 키우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시민의 미덕이란 사실 '시민의 권리보장'이라는 본질적인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이 모든 경우에 있어, 시민권에관한 주장은, 사실상, 정의에 관한 이전의 주장들로부터 일종의 전략적 후퇴라 할 수 있다.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동성애는 본질적으로 죄악이다)을, 수단적으로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동성애로 인해 미덕의 온실인 전통 가족이 해체되는 것을 좌시해서는 안된다)으로 바꾼다고 해서, 논의의 근본에 가까이 다가간 것은 아니다. 왜 하필이면 '전통 가족'인지, 실제로 그런지를 따져야 하기 때문이다.''9

즉, 저자에 따르면 '경쟁하는 것은 미덕과 공정성이 아니라 사람마다 달리 주장하는 미덕들이며, 그 미덕들과 연결된 권리와 의무에 관한 상이한 관점들이다.'
따라서, 여러가지 한계때문에 저자는 샌델의 이론적 기획이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샌델은 왜 이러한 기획을 밀고나가는가?
그것은 서구의 정치문화에 녹아들어가있는 자유주의 정치철학에 본질적인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기때문이다. 샌델은 자유주의가 인간을 이해하는 관점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ㅡㅡ자유주의의 인간관 ㅡㅡ

샌델은 말한다. 예를들어, 자유주의는 국가가 종교의 자유를 인정해야한다고 본다.
그러면서 국가는 각 종교의 가치에 대해 중립적 입장을 고수해야한다. 이런 태도는 우리의 자아와 목적(가치관)을 분리시키는, 공허하고 무사심적인 인간관을 전제한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구체적 목적들은 우리 자신의 삶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을 무시하는 자유주의는 추상적 개인주의를 전제한다. 10

또한 자유주의는 사람들의 좋은 삶에 대한 비전에 간섭하지말고 자유롭게 추구할수있도록 놔둬야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실질적으로 국가가 구성원들의 좋은 삶에 신경쓰지않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따라서 자유주의는 가치 상대주의를 전제한다.

저자는 그러나 이것은 자유주의에 대한 어이없는 묘사이며, 자유주의는 인간을 유령과같은 존재, 좋은 삶에 대한 구체적 관심이 없는 존재로 보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우선 가치 상대주의라는 샌델의 비판을 반박한다.

1.자유주의는 가치 상대주의가 아니다

자유주의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괜찮다'라는 사상이 아니다.
저자에 따르면 오히려, 누구나 좋은삶을 살고싶어하고, 누구나 좋은 삶을 살아야한다는것이 자유주의의 핵심 아이디어이다.
자신은 삶에 대해 거창한 반성을 하고 싶지 않으며, 현재와 미래에 쾌락을 즐기면 그만이라는 쾌락주의자들조차도 '잘 산다'라는 관념을 전제한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조차도 과거에 부족했던 쾌락들을 아쉬워하고, '쾌락적인 삶이 좋은 삶'이라는 직관을 암묵적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톨스토이의 작품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의 주인공 판사 이반 일리치를 보자.
그는 평생 명성과 부를 쌓아왔지만, 침상에 누운채 갑작스런 죽음을 앞두자 지금까지 자신의 삶이 모두 거짓이었음을 깨닫는 고통과 환희를 동시에 느낀다.
그러므로 인간은 '좋은 삶을 사는것의 중요성, 그와 동시에 좋은 삶에 대한 우리의 판단이 틀릴수있다는 가능성' 에 대해 가지고 있는 깊은 도덕적 확신이 존재한다.
그렇지 않다면 크리스마스 캐럴을 비롯한 , 삶에 대한 반성과 회개를 다루는 문학작품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좋은삶을 사는것은 우리가 현재 좋다고 믿는 삶을사는것과는다르다. 즉, 우리가 현재 하고 있는 일이 가치 있는지에 대해 잘못 판단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한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사소하거나 천박한 목표나 기획을 추구해오며 삶을 낭비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11

따라서 자유주의에선 누구나 좋은 삶에 대한 관심,가치관을 형성하고 수정하는 능력에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자유주의는 인간의 좋은 삶에 본질적인 우려를 하고있으며,
그때그떄 되는대로 살라는 철학이 아니다.

또한 저자는 진정으로 좋은 삶이라고 할수있으려면, 삶의 목적을 스스로 판단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가치관의 탐구와 수정을 집단에게 맡길수는 없다.

그 이유로는
첫쨰, 집단은 자신들의 오류를 교정하려하지않는 자기강화기제를 가지고있다.
집단의 판단을 따르지않을시 불이익이 있다면 오류 교정의 기회는 줄어든다.
둘째,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판단과 맞지않는 의견차이들을 탄압할 가능성이 높다.
셋째, 판단의 오류를 개인이 범했을때는, 손실을 감수함으로써 비판적인 음미가 가능하다. 그러나 집단이 개인의 판단을 강제할경우, 판단이 잘못되었을때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것인지가 불분명하다. 따라서 좋은 삶에 대한 개인적 책임감을 약화시킨다. 12

''길동은 특정 종교를 믿는 삶이 좋은 삶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다. 그런데 길동의 친구 몽룡은 그 종교를 믿지 않는다. 길동은 몽룡을 설득해보려 했지만 도저히 설득이 안된다. 너무나 완고하다. 그런데 길동은 특이한 광선총을 갖고 있다. 그광선총에 맞으면, 광선총에 미리 입력된 프로그램에 따라 몸이 자동으로 움직인다. 길동은 종교 활동을 하게끔 프로그램을 입력한 다음 친구 몽룡에게 광선총을 쏘았다. 이제 몽룡은 일요일이 되면 종교 모임에 참석한다. 기도하는 자세를 취하고 기도를 읊는다. 노래도 부르고, 사람들에게 인사도 한다. 식사를 하기에 앞서 성호를 긋는다. 이제 몽룡의 삶은 더 나아졌는가? 길동이 보기에 몽룡은 더 좋은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 모두 알고 있듯이 몽룡은 꼭두각시가 된 것에 불과하다.''13

따라서 우리는 모든이들이 자신이 판단에 따라 살수있도록 해야하며, 언제나 판단을 수정할 기회도 폭넓게 보장해야한다.
우리는 '신념들에 대해 자유롭게 질문을 던지고, 우리의 문화가 제공하는 모든 정보와 사례와 논변에 비추어 그것들을 자유롭게 검토할 수 있어야 한다.14

여기서 기본적 자유의 평등한 보장이라는 자유주의의 핵심원칙이자 롤즈의 제1원리가 도출되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가치상대주의나 추상적 개인주의에서 오는 유산이 아니고,
인간의 삶에서 공동체가 주는 영향 또한 부정하지않는다.

2.자유주의는 추상적 개인주의가 아니다

물론 우리가 진정성있는 삶을 살기위해서는 다른 이들과 독립적인 관계가 보장되어야한다.
그러나 공동체는 '우리 삶의 가능성의 구조'를 현실적으로 결정하기 때문에, 좋은 삶은 공동체라는 여건과 분리될수없다.
독립적인 삶이라 해서 공동체의 영향과 설득으로부터 떨어져야한다는것을 의미하는것이 아니다.
단지 저자는, 우리가 a. 자신의 판단이 아예 지배받는 경우(남이 판단을 대신하는것), b. 판단이 남에게 영향을 받는경우를 구분할수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우리의 삶과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유비시킨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를 생각해보자.
화가가 가지고있는 물감의 수와 종류는 화가의 그림에 분명한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색이 아무리 적어도 화가가 자신의 손으로 그렸다면 그것은 화가의 창조물이라고 할수있다.
이번에는 남이 화가의 손을 잡고 대신 그린다고 해보자.
그것은 색이 아무리 많든 적든간에 이미 화가의 창조물이 아니다.
이렇듯 자유주의는 단지 영향을 수용하고 지배를 거부할뿐이다.
인간의 삶에 공동체가 필수적이라는것을 부인하지않는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1.저자의 인용. paul russel, ''nozick, need and charity,'' journal of applied philosophy 4. 1987, pp.
205~ 216
2. 이민열,『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 217p
3.저자의 인용. 마이클 샌델, 『정의의 한계』, 이양수 옮김, 멜론, 2012년, 118p
4.저자의 인용. 위의 책, 120p
5.저자의 인용. simon caney, ''notes and commets - sandel's critique of the primacy of justice ; a liberal rejoinder, ''p. 517
6.이민열,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 』, 244p
7.본문에는 더이상의 추가설명이 없지만, 요약자로서는 저자의 논증이 타당한것같다.
공동체가 의무를 부과하지않고서는 구성원들이 매번 '특정 상황에서 특정 행동을 하게만드는' 구조가 실제로 무엇이 있는지 생각하기힘들다. 애초에 미덕을 키우는 온정적 간섭(의무 부과가 아닌)이 가능하려면 우선 간섭할수있는 공동체의 권한에 대한 사회의 적극적 인정이 필요할것이다.
그러나 그런 '적극적 인정'의 조건이 갖춰진다면, 더더욱 의무를 부과한다는 선택지는 구성원들의 반대에 부딪히지도 않을것이고, 더 효율적일것이다. 따라서 권력을 가진집단, 의견의 불일치를 허용하지않는 권력자들은 번거롭게 무슨 넛지스러운 간섭보다는 의무부과를 최우선으로 고려할것이다.
8.이민열,『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 248p
9.위의 책, 253p
10.저자의 인용. 마이클 샌델, 『정의의 한계』, 347p
11.저자의 인용. will kymlicka, ''liberalism, community, and culture,'' oxford university press, 1991 ,ch2.
12. 이민열,『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 340p
13. 위의 책, 261p
14.저자의 인용. will kymlicka, ''liberalism, community, and culture,'' ch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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