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버하르트 융엘 “하나님 존재는 되어감 안에 있다” 3부 하나님의 존재는 되어감 속에 있다 c, d 절

c) 하나님의 수난(Gottes Passion)

"행위 안에서의 하나님의 존재(Gottes Sein in der Tat)"는 예수 그리스도의 시간적 역사 안에서 드러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시간적 역사는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이 시간 속에서 실현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이 시간 속에서 실현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실존입니다. 인간으로서의 하나님의 실존은 단순히 피조물로서의 하나님의 존재가 아니라, 동시에 인간 실존을 특징짓는 하나님에 대한 모순적 대립에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내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내어주신 결과는 인간 실존이 하나님에 대해 가지는 그 모순적 대립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 대립을 겪으시는 고난입니다. 이 고난은 결국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이러한 의미에서도 ‘되어감(im Werden)’ 안에 있습니다. 그것은 소멸의 위협을 받는 ‘되어감’ 속에 있는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해 대립하는 인간은 소멸에 처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심판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실존 안에서 겪으십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더 진지하게 받아들일수록, 하나님 안에서 실제로 모순과 갈등이 발생한다는 생각에 더 강하게 사로잡힐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수난(Passion Gottes)"을 매우 진지하게 다룹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여기서 약하고 무능한 자의 모습으로 존재하고 말씀하며 행동하십니다. 영원하신 분이 여기서는 소멸하는 존재로, 필멸의 존재로 드러납니다. 생명이신 분은 죽음에 직면하고, 창조주는 무(無)의 힘에 굴복하십니다.” 그러나 바르트는 하나님께서 스스로와 갈등하는 모순의 결과를 단호히 거부합니다. 그러한 결론은 바르트에게 신성모독입니다. 그러나 바르트가 이 결론을 거부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고난에 대한 언급이 완화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이 고난을 겪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하나님의 개념을 비판합니다. 바르트의 이러한 비판은 모든 형태의 "자연신학(natürliche Theologie)"에 대한 그의 반대가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실재로부터 독립적으로 형성된 하나님의 개념이 하나님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존재하시며, 행동하시고, 고난받으신 사실에 대해 우리는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하실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무엇이 신적인 것인지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과 자신의 본성, 즉 신적인 본질을 계시하신 곳에서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깊은 통찰을 가장한 하나님 본질 속의 모순이나 단절을 말하는 대신, 우리의 하나님 본질에 대한 관념을 수정해야 하고, 그가 행하신 것에 비추어 이를 완전히 새롭게 구성해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했던 바, 하나님은 단지 모든 상대적인 것에 대립하는 절대적인 분이시며, 모든 유한성을 배제하는 무한하신 분, 모든 낮아짐에 대조되는 높으신 분, 모든 고난에 반대되는 활동하시는 분, 모든 시련에 무관한 불변의 분, 모든 내재성에 대조되는 초월적 존재, 요컨대 단지 인간적인 모든 것과 대립되는 신적인 분이실 뿐이라는 생각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사실상 그러한 일을 하시고 그러한 존재가 되신다는 점에서, 유지될 수 없으며 잘못되었고 심지어 이교적이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고난이 속한다고 말하는 것은 “행위 안에서의 존재(Sein in der Tat)”로서 하나님의 존재 규정에 위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고난은 그의 “행위 안에서의 존재”에 부합합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고난 자체가 그의 “행위 안에서의 존재”이며, 이는 또한 처음부터 하나님의 행동으로서 이해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수난(Passion)”입니다. 따라서 “고난의 행위 안에서의 하나님의 존재(Sein Gottes in der Tat des Leidens)”에 대해 말하는 것은 모순이 아닙니다. 이 명제가 모순이 될 수 있는 경우는, 하나님이 본질상 고난을 겪을 수 없는 존재라고 주장하는 경우입니다. 이는 부분적으로 그리스 철학의 형이상학적 하나님 개념에 따라 고대 교회에서 주장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르트(BARTH)의 관점에 따르면, 하나님의 계시된 존재에서 그의 “내적 존재”로 소급해 들어갈 때, 하나님의 “행위 안에서의 존재”는 하나님 아들의 수난(Passion)에 따라 어떤 의미에서 수동적인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 수동성은 순종(Gehorsam)의 의미에서의 수동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의 이러한 순종의 수동성 또한 궁극적인 능동성(Aktivität)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긍정된(passive bejahte) 수동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내적 삶(inneres Leben)에는 이러한 사건, 곧 순종이 포함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들이 아버지께 순종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존재의 통일성은 아들이 아버지보다 열등하다는 의미에서 위협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존재의 통일성은 구체적으로 그의 분리될 수 없고 독립될 수 없지만, 차이 속에서도 소멸되지 않는 존재 방식(Seinsweisen)들, 그리고 그들 사이의 구체적 관계 속에서, 또 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역사 속에서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존재의 통일성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안에서 순종을 받으시는 분(der, dem da gehorcht wird)으로서 한 분이시며 동시에 순종하시는 분(der, der da gehorcht)으로서 또 다른 분이시라는 사실 안에서 드러나며, 하나님의 “행위 안에서의 존재(Sein in der Tat)”를 “신적인 죽음(göttlicher Tod)”으로 이해되는 존재와 구별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생명 안에 순종(Gehorsam)이 영원부터 낯설지 않기 때문에, 그의 존재는 “신적인 죽음”과는 전혀 다른 것이며, 하나님께서 인간으로서 고난을 받고 죽음을 맞이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러한 삼위일체적 능력(innertrinitarisches Können)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수난(Passion Gottes)을 가능하게 하는 초월적 조건(transzendentale Bedingung)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은 주님이시다(Gott ist Herr)”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과 세상의 화해를 위해 세우시고 계시하신 하나님의 주권(Herrschaft)의 참된 표상은 바로 겸손 속에서 살아내신 순종입니다.”

이 순종 안에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으로 존재하시며 고난을 겪으십니다. 또한 이 순종 안에서 하나님은 스스로를 죽음에 내어주십니다. 수난과 죽음은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에게 일어난 형이상학적 불행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운명”을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수난과 죽음 속에서 “자신의 신성을 포기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굴욕 속에서도 가장 하나님다운 분으로 계셨으며, 이 죽음 속에서도 가장 살아계신 분”이십니다. “그는 바로 이 인간의 수난 속에서, 그의 영원한 아들로서 자신의 신성을 실제로 증명하고 계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와 자신을 동일시하셨습니다. 따라서 아들이 그러한 고난과 죽음을 겪도록 내어주신 아버지를 이 고난에서 제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심지어 아버지의 존재 방식으로라도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고통의 동참”은 오히려 “그 아들의 굴욕의 근거”입니다. 하나님은 “자신 안에서 받아들인 인간, 곧 그의 창조물로서의 인간의 외적 고통”을 아들을 내어주시는 과정에서 스스로 겪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고통의 동참은 “그 아들의 굴욕의 근거”이며, 이것이 바로 “그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역사적 사건으로 나타난 본질”입니다.

따라서 수난에는 아들과 함께 아버지도 참여하십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 방식들의 신적 통일성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고난의 행위 안에서의 존재(Sein in der Tat des Leidens)입니다. 그러나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존재는 여전히 행위 안에서의 존재이며, 되어감(Werden) 안에 있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의 역사성 안에 머무르시고, 역사성 속에서 자신의 존재와 함께하십니다. 바로 이 역사성 속에서의 머무르심이 하나님의 존재를 죽음 속에서도 여전히 되어감 안에 있는 존재로 유지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기 내어주심(Selbstpreisgabe) 속에서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스스로를 내어주십니다. 죽으신 분은 바로 인자와 연합된 하나님의 아들이며, 인간으로서의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죽은 자는 스스로를 살아나게 할 수 없습니다. 바르트는 이 점에서도 엄격히 반가현설(antidoketisch)적 사고를 유지합니다. 하나님의 존재가 죽음 속에서도 되어감 안에 있는 존재로 남아 있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의 행위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는 하나님의 지속적인 자기 긍정(Sich-Bejahung)의 새로운 행위들 속에서만 행위 안에서의 존재로 남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앞에서 역사성 속에 머무르시는 하나님의 행위 자체가 새로운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존재가 되어감 안에 머문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 앞에서 그에게 이루어진 새로운 행위인 부활(Auferweckung)을 의미합니다. 이 부활은 하나님의 아들과 함께 인간 예수에게도 일어난 사건입니다.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긍정하심으로, 하나님은 인간도 긍정하셨습니다. 그것도 동일한 긍정으로 말입니다. 하나님은 여기서 자신과 다시 일치하심으로써 인간 또한 하나님과 새로운 일치 속으로 데려오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속에서 인간은 죽음에 맞서 드러난 하나님의 존재의 일부를 공유받습니다. 이 공유는 은총으로서 하나님의 행위 안에서의 존재에 속합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 하나님의 존재에 속합니다.

d) 되어감 안에 있는 하나님의 존재

이 요약의 마지막에서는 바르트(BARTH)의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논의와 골비처(GOLLWITZER)의 신앙 고백 안에서 하나님의 실존에 관한 논의가 간략히 비교될 것입니다. 이 비교는 한편으로 골비처의 저서에서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난제(Aporie)에 초점을 맞추며 진행됩니다. 이 난제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골비처가 주장한 ‘자체로서의 하나님의 존재(An-und-für-sich-Sein Gottes)’는 골비처가 주장한 ‘우리에게 있어서의 하나님의 존재(Für-uns-Sein Gottes)’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 여기서 ‘우리에게 있어서의 존재’는 ‘자체로서의 존재’를 주장하는 근거로 제시되었습니다. 다른 한편, 이 비교는 - 비록 매우 간략하지만 - 앞서의 요약을 종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동일한 문제가 여러 관점에서 다뤄질 것이므로, 불가피하게 반복이 발생할 것입니다.

H. 골비처(H. GOLLWITZER)는 “하나님은 그 자체로 존재하신다(An-und-für-sich)”라는 명제를 회피하거나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명제는 “사변적 명제”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신앙 인식의 필수적인 요소”를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명제는 하나님의 존재가 하나님의 “우리에게 있어서의 존재(Für-uns-Sein)”와 동일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보장되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우리에게 있어서의 존재를 통해 자유롭고 아무 대가 없는 선물을 받으며, 이 선물이 하나님에게 어떤 필연성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고전 형이상학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첫 번째 실체(erste Substanz)입니다. 소위 첫 번째 실체의 특징은 그것이 본질적으로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첫 번째 실체는 본질적으로 πρós τɩ(다른 것에 대한 관계적 존재)가 아니며, 전체로서든 부분적으로든 관계적 존재로 이해되지 않습니다: “εлì μεv γàρ τ**ῶ ν πρ ώ των ο σι ν ληθ ές στιν· ο τε γ ρ τ λα ο τε τ μ έ ρη προ ς τ ɩ λéy ɛ ta ɩ . (“왜냐하면, 이는 1차 실체들에 대해서는 참되기 때문이다. 전체도, 부분도 관계적(πρός τι)으로 불리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의 존재를 관계적 존재로 이해한다면, 하나님의 존재와 함께 반드시 하나님의 존재가 관계를 맺는 다른 존재의 존재도 전제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관계적 존재는 그 본질에 따라 상호적으로 관계를 맺는 다른 존재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π**ά ντα ο ν τ πρ ός τι , ε ά νπερ ο κε ί ω ς ποδιδ ται, πρ ὸς ντιστρ έ φοντα λ έ γεται” . ("따라서 모든 관계적 존재(πρός τι)는, 만약 적합하게 귀속된다면, 상호적으로 전도될 수 있는 것을 향해 언급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존재를 본질적으로 관계적 존재로 이해하고, 하나님이 관계를 맺는 다른 존재를 인간으로 간주한다면, 하나님은 인간 없이는 하나님으로 이해될 수 없게 되며, 반대로 인간 개념도 항상 하나님과 연관되어 언급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사태를 골비처(GOLLWITZER)는 방지하려고 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인간에게로 자신을 향하셨고, 실제로 우리를 위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존재가 또한 관계적 존재라는 점은 골비처에게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관계는 하나님의 존재에 본질적으로 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인간과의 관계는 우발적인(kontingent) 관계이며, 하나님의 자체로서의 존재(An-und-für-sich-Sein)를 문제삼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으로 규정됨에 있어서 필연적으로(πρὸς αὐτὸ) 인간에게 의존하지 않으며, 단지 “우발적으로(ἐάν γε πρὸς τὸ τυχόν)” 인간과 관계를 맺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인간은 서로를 필연적으로 요구하지 않습니다: *“* πε ί , ἐά ν γε πρ ὸς τ τυχ ν ποδιδ ται κα μ πρ ὸς α τ λ έ γεται , ο κ ντιστρ έ φει” . ("왜냐하면, 만약 어떤 것이 무작위적인 것에 귀속되고, 그 자체로 불리워지는 것에 귀속되지 않는다면, 이는 상호 전도되지 않기 때문이다.")

골비처(GOLLWITZER)는 하나님의 존재를 고전적 실체(Substanz) 개념의 관점에서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 개념을 의도적으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골비처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격적 존재(Personsein)"로 이해하는 데 모든 초점을 맞춥니다. 그는 말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말할 때, 인격적 표현은 기독교적 담론에서 더 이상 대체할 수 없는 방식이다.” 그러나 동시에 “인격적 존재(Personales Sein)란 관계 안에서의 존재(Sein in Beziehung)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덧붙입니다. “따라서 인격(Person)은 반드시 관계적 개념으로 엄격하게 유지되어야 하며, 적어도 신학적으로는 관계적 개념으로만(!) 이해될 수 있으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실체의 속성을 표현하는 실체 개념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하나님은 그 자체로 존재하신다(An und für sich)”는 명제를 회피하거나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도 주장합니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딜레마는 명백합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의 ‘우리에게 있어서의 존재(Für-uns-Sein)’와 ‘우리 때문의 존재(Um-unsertwillen-Sein)’를 구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우리에게 있어서의 존재’는 하나님의 ‘자체로서의 존재(Für-sich-Sein)’의 자유에서 비롯되며, 반면 ‘우리 때문의 존재’는 하나님이 세속적 존재와 같이 객관적 독립성을 가진 존재로 인식될 수 없기 때문에 단지 기능적으로만 사고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단지 기능적으로”만 사고되어서는 안 됩니다. 비록 하나님의 존재는 “인격적 존재(personales Sein)”로만 이해될 수 있으며, 골비처(GOLLWITZER)에 따르면 “인격적 존재는 신학적으로는 반드시 관계적 개념으로만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되더라도 말입니다. 골비처의 논의는 하나님의 존재를 충분히 사고하기 위해 필요한 ‘관계 개념(Relationsbegriff)’을 명확히 할 필요성을 제기합니다.

하나님의 ‘우리에게 있어서의 존재(Für-uns-Sein)’가 ‘우리 때문의 존재(Um-unsertwillen-Sein)’가 아니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존재가 우리를 위한 관계로 어떻게 사고될 수 있는지 물어야 합니다. 이때 하나님이 ‘단지 기능적으로만’ 이해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구분의 필요성을 인정한다면, 하나님의 ‘우리에게 있어서의 존재’와 그의 ‘자체로서의 존재(Für-sich-Sein)’의 자유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질문은 더욱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 관계가 사고되지 않는다면, 계시는 계시로서 사고되지 않은 상태로 남게 됩니다. 하나님의 ‘근거 없는 자비(grundlose Barmherzigkeit)’에 대한 언급은 여기서 최종적인 해답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학적으로 이 개념은 하나님의 자비가 하나님 외부에 어떤 근거를 갖지 않는다는 점을 보장하는 한에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의 근거 없는 자비가 하나님의 존재 안에 그 근거를 가질 수 없다면, 자비라는 개념은 더 이상 하나님의 개념이 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결론은 골비처(GOLLWITZER)가 의도하는 바와는 거리가 멉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본질(Wesen)과 의지(Wille)를 구분하는 데 고집한다면, 이러한 결론을 피할 수 있을까요?

골비처(GOLLWITZER)의 이러한 구분 역시 반형이상학적(antimetaphysisch) 의도로 제시되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지(Wille)의 본질(Wesen)에 관한 논의만을 신학적으로 정당하다고 허용하는 이러한 구분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 안에서 형이상학적 본질의 배경이 배제되는 것은 아닐까요? 이러한 구분과 배제가 오히려 하나님의 존재를 철저히 역사적으로 사고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의 ‘자체로서의 존재(Für-sich-Sein)’의 자유는 계시된 ‘우리에게 있어서의 존재(Für-uns-Sein)’의 은혜로부터 사고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러한 사고는, 하나님의 ‘우리에게 있어서의 존재’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가 사건(Ereignis)이 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하나님의 존재가 ‘자체로서의 존재’의 자유 안에서 본래부터 사건이기 때문이라는 점을 포함해야 하지 않을까요?

골비처(GOLLWITZER)처럼 하나님의 자립성(Selbständigkeit)을 주장하고 사고하려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립성을 하나님의 자존(Selbstand)에서, 그리고 이 자존 역시 사고하는 과제를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존은 오직 하나님의 계시에서만 사고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존재가 ‘우리에게 있어서의 존재(Für-uns-Sein)’로 드러난 사건(Ereignis)에서 사고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를 플라톤이 οὐσία(본질)를 사고했던 방식으로는 자존으로 사고할 수 없습니다. 플라톤은 οὐσία에 대해 λόγος τοῦ εἶναι(존재의 이성)를 부여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은 언제나 존재하며(* ε . . . δ στι), 자기 자신 안에서 단일하며(μονοειδ ὲς ν α τ ό καθ α τ ό ), 동일한 상태를 유지하고( σα ύ τω ς κα κατ τα τ χει), 결코 어떤 방식으로든 변화를 허락하지 않는다(ο δ έ ποτε ο δαμ ο δαμ ῶς λλο ί ωσιν ο δεμ ί αν νδ έ χεται ). 이러한 자존으로서의 존재는 스스로 사건(Ereignis)을 배제하기 때문에, 그러한 자립적 존재는 스스로를 계시할 수 없습니다. ‘이데아로서의 존재의 자존’은 계시의 사건을 배제하며, 이는 자존으로서의 존재의 사건 자체를 배제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 자체로 존재하신다(An und für sich)”라는 명제는, 이 명제가 주장하는 하나님의 자립성이 계시의 사건으로부터 사고되지 않는 한, 심각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명제로 남게 됩니다. 이 명제가 하나님의 자존을 계시의 사건으로부터 사고하도록 허용할 때에만, 하나님의 자존은 계시의 사건을 이 존재로부터 사고하는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가 자존(Selbstand)으로서 계시의 사건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계시의 사건을 가능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사고된다면, 계시의 사건으로부터 사고된 하나님의 자존으로서의 존재는 그 자체로 사건(Ereignis)으로 이해됩니다. 그리고 이는 계시의 사건을 가능하게 하는 사건으로 이해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립적 존재는 계시의 사건으로부터, 그리고 계시의 사건을 가능하게 하는 사건으로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존으로서의 존재는 ‘자기 운동(Selbstbewegung)’입니다. 자기 운동으로서 하나님의 자립적 존재는 계시를 가능하게 만듭니다. 계시는 하나님의 ‘자기 해석(Selfinterpretation)’으로서 하나님의 존재의 자기 운동의 표현입니다.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우리에게 있어서의 존재(Für-uns-Sein)’의 은혜는 하나님의 ‘자체로서의 존재(Für-sich-Sein)’의 자유를 반영할 수 있어야 하며, 이러한 자유는 그 은혜의 ‘원형(Urbild)’으로서, 그 은혜 안에서 ‘모형(Abbild)’으로 드러날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계시를 ‘우리에게 있어서의 존재’로 진지하게 받아들이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존재가 명확히 드러나고 드러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곧 이러한 ‘되어감(Werden)’과 ‘가능성(Können)’이 하나님의 존재 자체로부터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셨다는 주장이 성립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성을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사고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존재는 이러한 ‘되어감’과 ‘가능성’에 비추어 사고되어야 하며, 그래야만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셨다는 주장이 성립할 수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역사성을 반드시 사고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역사적으로 말해야 한다는 주장이, 정작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역사적으로 말할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개념에 역사적 속성을 부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역사”와 “하나님의 존재”는 다시 너무 쉽게 분리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그 자체로 역사적 존재로 이해될 때에만, 그리고 오직 그때에만 진정으로 역사적으로 사고된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에서 중요한 점은, 역사가 하나님의 존재를 위한 상위 개념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역사적이다(Gottes Sein ist geschichtlich)”라는 명제는 계시의 명제이며, 반드시 그러해야 합니다. 이 명제는 계시의 명제로서 스스로 역사적 명제입니다. 왜냐하면 계시는 역사적 사건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계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가 단지 역사적 속성을 수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요구하는 존재임을 드러내는 역사적 사건입니다. 계시라는 역사적 사건 안에서 하나님의 존재는 그 자체로 사건(Ereignis)이며, 이는 인간의 언어(따라서 “인간화된(anthropomorphe)” 언어도 포함하여)가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이 단지 적절할 뿐 아니라 필수적이 되도록 만듭니다. 이는 인간의 언어가 가장 추상적인 언어로 표현될 때조차도 - 비록 스스로에게 숨겨져 있을지라도 - 인간화된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필연성은 인간의 언어가 본질적으로 하나님에 대해 말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을 은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존재가 역사적 속성을 요구한다는 사실은, 역사적 속성 자체가 하나님의 존재를 규정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드러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역사적으로 말해야 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성립하려면,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역사적 속성들이 역사적인 것보다 더 근원적 방식으로 역사적이어야 합니다.

바르트(BARTH)가 이해한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의 ‘자기 해석(Selfinterpretation)’으로, 이는 하나님의 존재를 그 자체로 사건(Ereignis)으로 사고하려는 체계적인 시도입니다. 이러한 사고는 하나님의 존재가 역사적 속성을 수용할 수 있도록 하면서도, 그 속성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규정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하나님께서 계시 안에서 자신을 해석하실 때, 역사적 속성들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가 반복됩니다. 그러나 이 ‘자기 해석’이 하나님의 존재를 하나님 스스로 반복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는 본질적으로 ‘반복 가능한 존재’입니다. ‘반복 가능한 존재’로서 하나님의 존재는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사건이 없는 존재는 단순한 동어 반복적 동일성(tautologische Identität)으로만 자신을 반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마치 부석(浮石, Bimsstein)이 그러하듯이).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는 동어 반복적 동일성이 아니라, 바로 ‘자기 해석’입니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필수적인 고찰이 필요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존재가 역사적 속성들을 그들의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단지 수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요구하기도 한다는 점을 완전히 이해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존재가 계시라는 사건을 통해 반복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의 존재는 계시라는 사건을 통해 자기 해석(Selbstinterpretation)이 가능한 존재이기도 하다는 것이 마찬가지로 사실이어야 합니다. 분명히 말하자면, 하나님의 존재는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반복되고 해석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영원으로부터 스스로를 통해 자신을 해석할 수 있다는 점이 반드시 이해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성에는 필연적으로 ‘속성의 능력(Fähigkeit zum Prädikat)’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속성의 능력은 모든 속성화(Prädikation)에 앞서 존재하며, 모든 속성화를 가능하게 만드는 ‘말씀의 사건(Ereignis des Wortes)’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계시의 사건으로부터 사고된 하나님의 존재는 그 자체로 ‘말씀적(wörtlich)’이며, 바로 그러한 이유로 ‘역사적(geschichtlich)’이기도 하다고 간주되어야 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것은, 이 로고스가 ‘나사렛 예수(Jesus von Nazareth)’라는 역사적 속성의 주체(Subjekt)로 간주된다면, 삼위일체적 중요성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존재가 그 자체로 말씀적(wörtlich)이다”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존재가 그 자체로 말씀적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스스로에게 “예(Ja)”라고 말씀하신다는 점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이 “예”는 하나님의 존재를 성부, 성자, 성령으로서 구성합니다. 또한 이 “예”는 모든 역사의 근거가 되는 하나님의 존재의 역사성을 동등하게 본원적으로 구성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이 “예”는 하나님의 존재의 신비이며, 본질적으로 질문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예”를 통해 하나님의 존재는 성부로서, 성자로서, 성령으로서 서로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이 일치는 궁극적인 신비이며, 어떤 역설로도 이를 능가할 수 없습니다.

이 일치(Entsprechung) 안에서 하나님의 존재는 신적 영의 삶의 역사로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치에 의해 구성된 역사 안에서 하나님은 자신에게 시간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시간을 허락하시는 이 행위는 지속적인 사건입니다. 이렇게 지속적인 사건으로 이해되는 ‘시간-공간(Zeit-Raum)’을 우리는 ‘영원(Ewigkeit)’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영원을 가지시기 때문에, 그리고 영원을 가지심으로써 시간을 가지신다.” “우리는 영원을 주로 시간 개념의 부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본래적으로 이해한다. . . 신학적 영원의 개념은 시간 개념과의 추상적 대립이라는 바빌론적 포로 상태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이러한 해방은 영원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시간을 허락하시는 지속적 사건으로, 그리고 그렇게 형성된 하나님의 ‘시간-공간’으로 이해할 때 이루어집니다. 이 시간-공간 안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하나님께서 길을 걸으신다는 것은 단순한 표현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피조물과 관계를 맺으실 때만 실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영원한 실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길을 걸어가시는 그 영원(Ewigkeit)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지속적으로 허락하신 ‘시간-공간(Zeit-Raum)’으로서, 단순히 비역사적인 것이 아니라 가장 본질적인 의미에서 역사적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가 성부, 성자, 성령의 일치(Entsprechung)에 의해 영원 안에서 역사적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계시는 “순간 속의 영원(Ewigkeit im Augenblick)”으로 가능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긍정하심(Sich-Bejahen)을 통해 이루어지는 존재의 이 일치의 신비는 계시를 역사적 사건으로 가능하게 하며, 이 역사적 사건 안에서 그 신비는 드러납니다.

순간(Augenblicke)은 머물지 않지만, 순간은 역사를 만들 수 있습니다. “순간 속의 영원(Ewigkeit im Augenblick)”으로서의 계시는 인간의 존재를 하나님의 자기 일치적인 존재와 일치시키는 방식으로 역사를 창조합니다. 바로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의 자유(Freiheit zum Wort)” 안에서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됩니다(에른스트 푹스, ERNST FUCHS). 이는 하나님께서 계시를 통해 자신, 곧 자신의 존재를 인간적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에 가능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존재를 인간적으로 말씀하신 역사적 속성은 바로 “나사렛 예수(Jesus von Nazareth)”입니다. 그러나 이 속성 자체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정의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이는 분석적 명제의 속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속성 자체에 대해 고대 교회의 아나이포스타시스(Anhypostasie) 교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 말했던 것이 적용됩니다. “나사렛 예수”는 그 자체로는 계시적 속성으로 간주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εvυπóσατoσ τω λoγω του θεou(“하나님의 로고스 안에 포함됨”)에 의해 이 속성은 유효합니다. 이 속성이 유효하기 위해, 하나님은 이를 영원으로부터 선택하셨습니다. 바르트(BARTH)가 주장했듯, “나사렛 예수”가 계시적 속성이 될 수 있는 그 로고스(λóyos)는 태초에 이미 하나님과 함께 있었으며, 이 역사적 속성의 주체(Subjekt)이자 “예수의 자리 채움자(Platzhalter Jesu)”였다고 말하는 것이 과도한 주장일까요? 바르트는 “하나님의 존재의 역사성과 역사적 속성의 관계”를 기독론적으로 이해하는 교리를 통해 이를 가르쳤습니다. 더 나은 대안이 나오기 전까지, 이 신학적 진술(Theologumenon)을 귀중히 간주하고 존중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골비처(GOLLWITZER)의 저서가 우리를 이끌었던 난점을 해결하려는 시도 과정에서 바르트(BARTH)의 진술을 해석하는 단계로 넘어갔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진술이 골비처의 저서가 제기한 ‘하나님의 존재를 관계로서 사고하는’ 형식적 과제에 대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히 밝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되신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존재가 관계적 존재(relationales Sein)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위에서 요약된 딜레마를 피하려면, 즉 하나님의 존재를 πρóσ τɩ(다른 것과의 관계)로 이해하면서도 어떤 ετερον(다른 것)에 대한 의존으로부터 이를 보존해야 하며, 동시에 이 관계가 단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substanz)의 우발적 속성으로 축소되지 않도록 하려면, 하나님의 존재를 본질적으로 이중적 관계적 존재(doppelt relationales Sein)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는 곧, 하나님은 ad extra(밖으로의 관계)에서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는 온톨로지적으로 그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실재적으로(ontisch) 존재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존재가 ad intra(내적인 관계)에서 자기 자신에게 관계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관계(Selfbezogenheit)는 삼위일체론(Trinitätslehre)이 다루는 주제입니다. 그러나 성부, 성자, 성령으로서의 하나님의 자기 관계를 적절히 사고하려면, 이는 하나님의 존재 방식(Seinsweisen) 안에서 하나님의 자기 관계를 단순히 “존재론적 이기심(ontologischen Egoismus)”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존재에게 하나님이 되게 하는 하나님의 존재의 능력”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되어감(Werden)”은 결코 하나님 외의 “다른 것”에 의해 조건 지어져서는 안 됩니다. 예컨대,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한 초월적 조건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자기 관계는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속하는 되어감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존재를 “행위 안에서의 존재(Sein in der Tat)”로 이해할 수 있게 합니다. 하나님의 자기 관계를 하나님의 존재에 속한 되어감으로 이해할 때에만, 하나님의 “우리에게 있어서의 존재(Für-uns-Sein)” 또한 충분히 사고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기 관계(εἶναι πρὸς ἑαυτόν)는 곧 하나님의 다른 것에 대한 존재(πρὸς ετερоν)의 능력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서 영원히 하나 되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은, 하나님 외의 모든 것에 대한 “근거 없는 자비(grundlose Barmherzigkeit)”의 근거가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다른 것에 대한 존재(πρὸς ετερоν)”는 자신으로부터의 단절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우리에게 있어서의 존재(Für-uns-Sein)”는 하나님 자신으로부터의 단절이 아니며, 또한 하나님이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존재를 단순히 ‘관계 안에서의 존재(Sein in Beziehung)’로 사고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연신학이 관계를 그 진술의 기본 범주로 삼는다고 해서 자동으로 복음적인 신학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관계를 “순수한 관계(reine Beziehung)”로 이해하더라도, 그 순수성이 신학적으로 사고되지 않는 한 여전히 신학적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복음주의 신학은 관계의 순수성을, 스스로 관계를 맺음으로써 관계의 근원이 되는 한 관계의 근원(Beziehungsursprung) 없이 사고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스스로 관계를 맺음(Sich-in-Beziehung-Setzen)’은 신학적으로 이해될 때 순수한 관계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스스로 관계를 맺음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존재는 본질적으로 관계적이며, 하나님의 존재는 “순수한 관계(reine Beziehung)”입니다.

“순수한 관계(Reine Beziehung)”란 곧, 스스로 되어가는 관계를 의미하지만, 그 관계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되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부터입니까? 하나님의 자기 관계(Selfbezogenheit)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하신 “예(Ja)”에 근거합니다. 이 “예” 안에서 하나님은 자신에게 관계를 맺으심으로써 자신이 누구인지 존재하게 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존재는 “되어감 안에 있는 존재(Sein im Werden)”입니다.

따라서 “순수한 관계”는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문장에서 서술어(Prädikat)가 될 수는 있지만, 결코 주어(Subjekt)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서술어는 분석적 명제(analytischer Satz)와 종합적 명제(synthetischer Satz) 모두의 서술어가 될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적 자기 관계에 초점을 맞출 때, 이 서술어는 분석적 명제의 서술어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시에 초점을 맞출 때, 이 서술어는 종합적 명제의 서술어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종합적 명제는 분석적 명제와 상응합니다. 이 상응은 다음을 의미합니다. “자기 관계로서의 하나님의 존재는 되어감 안에 있는 존재이며, 그 특징은 스스로를 반복할 수 있다는 데 있다.”

반복(Wiederholung)은 반복될 것을 전제로 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골비처(GOLLWITZER)의 관점에서 이는 하나님의 ‘우리에게 있어서의 존재(Für-uns-Sein)’는 하나님의 ‘자체로서의 존재(Für-sich-Sein)’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반복의 존재 이유(ratio essendi)는 바로 반복될 것입니다. 이와 관련된 문제들은 엔히포스타시스(Enhypostasie)와 아나이포스타시스(Anhypostasie)의 교리와 상응하여, 하나님의 존재의 반복에 대한 교리로 다뤄져야 합니다. 이러한 반복의 교리는, 엔히포스타시스와 아나이포스타시스 교리가 하나님-인간이라는 Relata(관계 항목)에 대해 기독론적으로 유효한 것을, 관계(Relationen)에 대한 시각으로 확장하여 다뤄야 합니다. 하나님의 존재가 우리에게 있어서의 존재(Für-uns-Sein)인 것은 그분의 자체로서의 존재(Für-sich-Sein)의 반복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아나이포스타시스 교리는 엔히포스타시스 교리와 함께 사고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존재가 ad extra(외적 관계)에서 아나이포스타시스적일지라도, 이 관계 안에서 하나님의 존재가 성부, 성자, 성령으로서 엔히포스타시스를 이루지 않는다면 이는 불완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계시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성부, 성자, 성령으로서 우리에게 있어서의 존재로 반복하실 때, 이 반복 자체도 존재로 인정받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계시를 통해 성부, 성자, 성령으로서의 구체적 관계적 실존을 반복의 방식으로 우리와 공유하신다는 뜻입니다. 반복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맺는 관계로서, 하나님의 자기 관계(Selfbezogenheit)에 대한 관계의 유비(analogia relationis)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계시는 참으로 하나님의 자기 해석(Selbstinterpretation)입니다. 이렇게 이해할 때, 하나님은 계시 안에서 προσ ετερov(다른 것에 대한 존재)이면서도 그 ετερov(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인간과 그의 세계는 자신의 존재를 προσ ετερov로서의 하나님의 존재에 빚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과 세계의 존재론적 관계의 비가역성(irreversibility) 안에 하나님과 세계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ontologische Differenz)가 놓여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의 하나님이 될 수 있으나, 인간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하나님으로 정의되지 않습니다. 동시에, 만약 하나님의 존재의 반복이 ad extra와 ad intra 관계의 상응에서 참으로 성립한다면, “하나님은 그 자체로 존재하신다(An und für sich)”는 명제는 구체적으로 보았을 때 “하나님은 단지 인간의 하나님으로만 하나님이다”라는 명제만큼이나 잘못된 것입니다.

위에서 언급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알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우리에게 있어서의 존재(Für-uns-Sein)’로부터 알 수 있고 진술될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의 ‘우리에게 있어서의 존재’를 통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이 존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건(Ereignis)으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은 계시(Offenbarung)라 불리며, 하나님의 자기 해석(Selbstdeutung)으로 이해됩니다.
  3. 하나님의 ‘우리에게 있어서의 존재’는 하나님의 존재를 정의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우리에게 있어서의 존재’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해석하십니다.
  4. 해석(Interpretation)은 해석될 대상에 의존합니다. 하나님의 ‘우리에게 있어서의 존재’는 관계적 존재(relationales Sein)로서, 성부, 성자, 성령으로서 하나님의 자기 관계(Selfbezogenheit)의 반복입니다.
  5. 반복 안에서 반복되는 것은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우리에게 있어서의 존재’ 안에서 하나님의 ‘자체로서의 존재(Für-sich-Sein)’는 하나님의 ‘우리에게 있어서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고 이를 근거짓는 존재로서 드러납니다.
  6. 하나님의 존재는 다음에서 서로 일치합니다:
    a) 하나님의 자기 관계 사건 안에서: 성부, 성자, 성령의 관계로서;
    b) 계시의 사건 안에서: ‘우리에게 있어서의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자기 관계 사건 안에서의 존재 사이의 관계로서.

관계 b)는 관계 a)로부터 존재론적 힘을 얻습니다. 관계 a)는 관계 b)를 구성합니다.

  1. 이 구성 자체는 관계 a)에 속하는 힘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 힘 안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신 분과 동일하시지만 동시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감추임(Verborgen-Sein)과 계시됨(Offenbar-Sein)은 관계적 존재로서 되어감(Werden)의 힘 안에 있는 존재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고려해야 할 점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되어감 안에 있는 존재(Sein im Werden)’라고 명명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실 수 있음을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행하신다는 것, 즉 하나님께서 계시 안에서 자신을 반복하셨다는 것은 필연성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이는 오히려 은혜(Gnade)입니다. 그러나 이 은혜는 하나님의 존재에 낯선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그것이 필연성과 구별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오히려 하나님의 존재를 구성하는 “자신에게 하신 ‘예’(Ja)”를 다른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반복하는 것입니다. 이 “예”가 하나님 외의 다른 것과의 관계에서 그 다른 것을 존재로 부른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은혜로운 “예”는 하나님의 존재를 무(無, Nichts)와 관계 맺게 합니다. 그러나 이 은혜의 “예”가 존재로 부름받은 피조물을 무로부터의 위협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은혜로운 “예”는 하나님의 존재를 무에 노출시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자기 희생(Selfpreisgabe)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기 희생이 동시에 하나님의 자기 포기(Selfaufgabe)가 되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무와의 관계(Relation zum Nichts) 안에서 하나님의 자기 관계(Selfbezogenheit)가 바로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관계(Selfbezogenheit)는 곧 하나님의 존재가 있는 ‘되어감(Werden)’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의 존재가 있는 이 되어감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예(Ja)”라고 하시는 말씀(Wort)에서 비롯된 되어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기 긍정(Selfbejahung)에 상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긍정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조물을 긍정하시는 이 행위는,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심(Menschwerdung)이라는 사건 안에서 이루어지며, 하나님은 피조물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자기 관계를 반복하십니다. 이 관계는 하나님께서 계시자(Offenbarer), 계시됨(Offenbarwerden), 그리고 계시된 존재(Offenbarsein)로 나타나십니다. 이 기독론적 피조물과의 관계 또한 하나님의 존재가 있는 되어감(Werden)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이 되셨기에, 그는 피조물로서 소멸(Vergehen)의 위험에 노출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경우 하나님의 되어감 안에 있는 존재(Sein im Werden)는 죽음을 향한 존재(Sein zum Tode)인 것입니까?

신약성서의 증언은 이 질문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메시지로 응답합니다. 이 메시지는 하나님의 ‘되어감 안에 있는 존재(Sein im Werden)’가 소멸(Vergehen)과 얽혀 있었던 그곳에서, 소멸이 되어감(Werden) 안으로 흡수되었다고 선언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존재가 여전히 되어감 안에 있는 존재로 남게 되었다는 것이 결정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향한 “예(Ja)”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사건 안에서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스스로에게 충실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모든 존재를 구성하는 하나님의 “예”는 무(無, Nichts)의 “아니요(Nein)”에 스스로를 노출시키셨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이 “예”는 무의 “아니요”에 맞서 승리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로 인해 은혜롭게도 다음의 질문이 결정되었습니다: 왜 존재하는 것이 있고, 무가 존재하지 않는가?

만일 그가 부활하지 않으셨더라면,
세상은 사라졌으리라.
그가 부활하셨기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찬양하네.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Kyriele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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