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대호,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제3장 요약 - 4

7. 실체와 보편자

이제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의 후보 중 하나인 보편자를 탐구하는데,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종이나 유와 같은 보편자가 실체가 아니라는 점을 밝힌다. 동시에 그는 이러한 논의를 통해 이데아론을 비판하고 가장 보편적인 개념들의 실체성을 부정하고자 한다.

보편자는 정확히 각자의 실체(ousia hekaston) 및 기체(hypokeimenon)라는 두 가지 의미에서 실체일 수 없다. 보편자가 각자의 실체가 아님을 보이는 논증은 다음과 같다. 보편자는 어떤 것 고유의 실체이거나, 모든 것의 실체이거나, 아무것의 실체도 아니다. 첫째의 경우 보편자는 진술 속에서 언제나 여러 가지 주어들의 술어이며, 궁극적 주어의 역할을 할 수 없다. 따라서 보편자는 어떤 것 고유의 실체가 아니다. 둘째의 경우, 보편자가 어느 한 대상의 실체라고 해 보자. 그렇다면 보편자는 다른 것들에 공통적인 술어인 까닭에 다른 대상들의 실체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서로 다른 대상들의 실체가 동일하다면 우리는 이 상이한 대상들이 모두 동일하다는 부조리한 결론에 맞닥뜨린다. 그러므로 보편자는 모든 것의 실체도 아니다. 그러므로 보편자는 아무것의 실체도 아니다.

다음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보다 약한 주장, 보편자가 각자의 실체 혹은 본질에 속해 있는 구성 원리라는 주장을 검토하는데, 결론적으로 보편자는 각자의 실체에 속하는 구성 원리일 수도 없다. 종과 유는 여러 대상들의 술어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종과 유가 이 대상들에 직접 속해 있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술어로서 보편자는 주어의 종적 및 유적 성질들을 “한정하고(aphorizein) 가리킬(sēmainein) 따름이다”(조대호, 2004, 210). 이는 감각적 개별자 및 종과 유가 실체로서¹ 기체 안에 들어 있지 않음(to mē en hypokeimenōi einai)을 그 특징으로 지닌다는 『범주론』의 서술과 맥을 같이한다.

그 다음은 이데아에 실체성을 부여하는 이론에 대한 비판이 개진된다. 이데아가 각 사물들 안에 놓여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각기 서로 다른 대상들 안에 놓여 있는 이데아가 서로 동일하다고 말해야 하는데, 서로 다른 것에 속하는 것이 하나의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일을 불합리하다. 그러므로 이데아는 하나가 아니다. 혹자는 여러 대상들이 하나의 이데아에 관여(methexis)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이러한 비판을 회피하려 할 수도 있지만, 이 경우에도 하나의 대상(예컨대 동물)이 서로 양립 불가능한 이데아(예컨대 두 발 가짐과 네 발 가짐)에 동시에 관여할 경우를 설명할 수 없다. 그렇다고 각 대상들 안에 놓여 있는 이데아가 서로 다르다고 가정해도 문제가 발생한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동종의 이데아를 갖는 개체의 수만큼 무수히 많은 이데아가 존재할 터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각 동물 개체가 모두 동물의 이데아를 갖는다면, 동물 개체 수만큼 많은 동물 이데아가 존재한다는 결론을 받아들여야 한다. 결론적으로 이데아가 각 사물들 안에 놓여있다고 주장할 경우, 이데아가 하나라고도 여럿이라고도 주장할 수 없다는 모순에 맞닥뜨리게 된다.

이어서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개별자에 대한 어떤 정의도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개별자에는 감각적 개별자, 이데아들, 영원한 개별자들이 속한다. 첫째로 감각적 개별자는 III장 5절에서 제시되었듯 질료를 갖기 때문에 정의될 수 없다. 이는 질료의 존재가 본성상 우연적인 반면, 정의의 대상은 필연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이데아의 정의 불가능성 논변은 이데아가 개별적인 것이자 분리된 것이라는 이데아론자들의 주장을 근거로 진행된다. 논변은 크게 두 가지로 이루어지는데, 첫째 논거는 다음과 같다. 정의를 이루는 진술의 구성 요소인 낱말들은 보편적이기 때문에 개별적인 이데아를 규정할 수 없다. 혹자는 개별 낱말들은 보편적일지라도 그 결합은 개별적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으나, 이에 대해서도 두 가지 난점이 존재한다. (1) 결합된 두 낱말은 여러 대상들에 대해 사용된다. 예컨대 ‘두 발 달린 동물’은 결합된 낱말이지만 동물에도 쓰일 수 있으며 두 발 달린 것에 대해서도 쓰일 수 있다. (2) III장 5절에 제시되었듯 정의의 부분들은 정의 전체에 선행하며, 따라서 이 부분들이 결합되었다고 해서 전체가 부분들의 특징인 보편성을 소멸시킬 수는 없다. 둘째 논거는 다음과 같다. 이데아론자들에 의하면 이데아는 각 이데아들에 서로 관여한다. 그러므로 모든 이데아는 여럿에 대해 술어가 될 수밖에 없으며, 여럿에 속할 수밖에 없다.²

끝으로 영원한 개별자(예컨대 천체들) 역시 정의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들은 개별자이고, 따라서 보편성을 그 특징으로 하는 로고스에 의해 파악될 수 없기 때문이다.³

나머지 부분에서는 생물의 부분들과 요소들의 실체성, 하나(hen)와 있는 것(on)의 실체성, 이데아 이론에 대한 비판이라는 세 가지 상이한 주제가 다루어진다. 첫째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물의 부분들 및 흙, 불, 공기 같은 요소들이 오직 가능적인 것이라는 뜻에서만 실체라고 주장한다. 둘째로 그에 의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이자 있는 것이다. 이처럼 가장 보편적인 술어들은 각 사물의 실체일 수 없다. 셋째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이데아 이론의 패착은 분리성(chōriston)과 보편성(katholou)을 이데아 개념에 같이 적용했다는 데에 있다. 분리성과 보편성은 양립 불가능한 특징들이다. 이데아들이 분리된 것이라면, 이들은 실체일 수는 있겠지만 여러 사물들에 적용되는 보편적 술어가 될 수는 없다. 반대로 이데아가 여러 사물들에 적용된다면 이들은 실체일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이들은 “감각적인 것들에 ‘자체(auto)’라는 용어만을 덧붙여 감각적인 것들과 종류가 같은 영원한 이데아들을 만들어”냈다(조대호, 2004, 214).

8. 실체: 존재의 원인

이제 실체, 정확히 말하면 각자의 실체(ousia hekastou) 혹은 본질이 존재의 원인(aitia)이자 원리(archē)로서 탐구된다. 이 탐구는 ‘무엇 때문에’(왜, dia ti)라는 물음의 언어적 구조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출발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왜’ 물음은 항상 ‘무엇 때문에 x는 y인가?’라는 항상 2항 관계에 관련하는 문장이다. 만일 두 항에 동일한 이름을 대입해서 이를 ‘무엇 때문에 a는 a인가?’라는 물음을 던진다면, 이는 공허한 물음이 된다. 그러한 물음에 대해서는 언제나 모든 것이 자기 자신과 분리될 수 없다는 똑같은 대답밖에는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왜-물음은 서로 다른 두 개의 대상의 관계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 중에서 하나의 항에만 관계하면서도 유의미한 물음이 있는 듯 보인다. 이는 ‘무엇 때문에 x가 존재하는가?’(ti x esti)라는 물음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물음에 제대로 된 답을 하기 위해서는 해당 문장을 2항 관계에 관련한 문장으로 환언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무엇 때문에 x가 존재하는가?’는 ‘무엇 때문에 y는 x인가?’로 환언할 수 있는데, 여기서 y는 x를 구성하는 질료를 가리킨다. 예컨대 ‘무엇 때문에 집이 존재하는가?’는 ‘무엇 때문에 벽돌과 목재는 집인가?’로 분석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왜 x가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으로 제시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x의 형상, x의 실체이다.

여기서 말하는 형상 혹은 실체란 무엇인가? 일단 왜-물음에서 물어지는 대상은 하나의 전체라고 할 수 있는데, 전체는 부분들로 환원 가능한 단순한 더미(sōros)가 아니라 환원 불가능한 복합체이다. 왜냐하면 전체가 부분들로 해체될 때 남는 것은 부분들일 뿐 전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사람은 살과 뼈로 구성되어 있지만, 사람은 살과 뼈의 단순한 모음과 똑같지 않다. 왜냐하면 사람이 살과 뼈로 해체될 경우 그 부분들인 살과 뼈만 남을 뿐 사람은 남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체는 자신의 구성 부분들 외에 다른 어떤 것(heteron ti)을 포함한다.

전체를 전체이게끔 만드는 이 다른 어떤 것은 그 스스로 질료적 구성 요소일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이 또 하나의 구성요소라고 가정한다면, 앞서의 구성 요소들과 이 다른 어떤 구성 요소를 결합해서 전체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다시 제기되고, 이런 식으로 무한 퇴행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상을 전체이게끔 만드는 것은 어떤 질료적 구성 요소가 아니다.

그러므로 한 대상을 그것 자신이게끔 하는 원인은 질료적인 구성 요소가 아니라 각자의 실체이다. 이는 “사물의 내적인 본성” 혹은 “원리”이다(조대호, 2004, 238).

이는 사물의 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한 충분한 대답이 아니다. 이 사물의 본성 혹은 원리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이 부분에서 답해지지 않는다. 어떤 연구자들은 생물의 존재 원인으로 영혼이 제시된다는 점에 입각하여 이 원인이 영혼이라고 답한다. 그러나 해당 부분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드는 예시들은 무생물들이며, 따라서 존재의 원인이 영혼이라는 대답은 부적절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른 곳에서 엠페도클레스의 주장을 원용하면서 살과 뼈가 로고스에 의해 존재한다고 말하는데, 이때 엠페도클레스가 말하는 로고스란 요소들이 결합하는 수적인 비율을 뜻한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존재의 원인이란 결합의 수적인 비율로서의 로고스이다.


¹ 저자는 『형이상학』과 『범주론』의 실체 이론 사이의 연속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이를 보면 『형이상학』에서 말하는 ‘실체’와 『범주론』의 ‘실체’ 사이에 확실히 모종의 간극이 있는 듯하다. 적어도 종과 유가 『범주론』에서 실체로 간주되었다가 『형이상학』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 간주된다는 점에서 말이다.
² 둘째 논거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데아가 여럿에 속한다는 점으로부터 이데아가 정의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어떻게 나오는가? 이데아가 개별적인 것이라는 이데아론자들의 주장에 대한 반박이 되기는 할 듯하다. 그러나 그렇다면 보편적인 이데아가 마찬가지로 보편적인 로고스에 의해 정의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오지 않는가?
³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렇게 거추장스러운 논증 방식을 택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단순히 다음처럼 논증하면 되지 않는가? ‘보편적인 것은 개별적인 것을 그 개별성 속에서 파악할 수 없다. 그러므로 감각적 개별자, 이데아, 영원한 개별자 모두 정의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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