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대호,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제3장 요약 - 3

5. 본질과 정의

이 책의 III장 3절에서 다루었던 본질과 정의의 문제가 이어지는데, 여기서는 정의하는 로고스(진술)의 내용이 다루어진다. 한편 정의의 내용이라는 논리적, 언어적 문제는 정의 대상의 구성이라는 문제와 동형적(isomorphic)인 까닭에, 그는 이 두 문제를 같이 다룬다.

먼저 아리스토텔레스는 두 가지 물음을 다룬다. (1) 전체에 대한 진술 안에는 그 부분에 대한 진술이 포함되는가? (2) 부분이 전체에 앞서는가, 아니면 전체가 부분에 앞서는가? 먼저 (1)에 대한 답은, 그 대상의 종류에 따라 경우가 다르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형상의 부분, 질료의 부분, 양자의 복합체의 부분은 각기 다르다. 형상은 형상의 부분만을 부분으로 갖는 반면, 질료 및 양자의 복합체는 질료를 부분으로 갖는다. 예컨대 구리는 구리를 부분으로 갖고, 동상 역시 구리를 부분으로 갖는다. 반면 동상의 형태는 구리를 부분으로 갖지 않는다. 이에 따라 구리에 대한 정의에는 구리가 포함되고, 복합체인 동상 개별자의 정의에도 구리가 포함되지만, 동상 형상의 정의에는 구리가 포함되지 않는다.

(2)에 대한 답은 다음과 같다. 진술에 포함된 부분들은 전체에 앞서되, 질료적 부분들의 경우 전체에 후행한다. 그러므로 개별자 사람에 대한 진술에서 사람의 형상인 영혼 및 영혼의 부분들은 사람에 선행하는 반면, 손가락이나 다리 등의 질료적 부분들은 사람에 후행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1)에 대한 답을 재진술한다. 첫째, 형상은 정의될 수 있고, 이 정의는 형상의 부분들을 포함한다. 둘째, 복합체¹는 정의의 대상이 되지 못하지만, 보편적 로고스에 의해(tōi katholou logōi)서는 진술될 수 있다. 이때 이 진술은 질료적 부분을 포함한다. 셋째, 질료는 그 자체로는 인식될 수 없다.

(2)에 대해서는, ‘동물’, ‘사람’ 등의 낱말의 경우 중의성을 띠는 까닭에 (1)에 대한 답은 두 가지로 나뉘어야 한다. 이 낱말들이 동물 형상 혹은 사람 형상을 의미한다면 이들의 정의에서 부분은 전체에 선행한다. 반면 이 낱말들이 동물 개별자 혹은 사람 개별자를 의미한다면 전체가 (질료적) 부분에 선행한다.

이 다음에 논의되는 주제는 형상의 부분과 복합체의 부분이 무엇인지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의 부분이 형상의 부분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마찬가지로 형상의 부분은 질료의 부분이 될 수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 모든 사물을 형상으로 환원하면서 그로부터 질료를 아예 배제하는 입장 역시 그르다. 모든 개별 사물은 질료와 형상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따라서 개별 사물에 대한 진술에서 질료에 대한 언급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개별 사물이란 생물 등의 감각적 대상뿐만이 아니라 도형과 같은 지성적 대상도 포함한다. 수학적 대상은 지성적 질료(hylē noētē)를 지니는 반면 생물과 같은 대상은 감각적 질료(hylē aisthētē)를 지닌다.

마지막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과 개별자를 구별하며, 형상을 제일실체로, 개별자를 복합실체로 규정한다. 전자는 정의될 수 있는 반면, 후자는 질료를 포함하는 까닭에 정의될 수 없다.²

6. 본질과 정의: 정의의 통일성

여기서의 주제는 유(genos)와 종차(diaphora)가 어떻게 하나의 통일된 정의를 이룰 수 있는가이다. 예컨대 사람의 정의인 ‘사람은 두 발 가진 동물이다’에서 ‘두 발 가진’과 ‘동물’은 왜 여럿이 아니라 하나인가?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명이 가능해 보인다. 하나는 ‘동물’이 주체이고 ‘두 발 가진’이 부수적인 속성이라는 설명이다. 이에 따르면 ‘두 발 가진 동물’은 ‘하얀 사람’이 하나인 것과 같은 이유에서 하나이다. 그러나 이는 곧바로 거부된다. 왜냐하면 ‘하얀 사람’의 경우와 달리 ‘두 발 가진’은 ‘동물’에 한낱 부수적으로가 아니라 그 자체로 귀속되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동물’이 ‘두 발 가진’에 관여한다는 일종의 관여(methexis) 이론적 설명이다. 그러나 유인 ‘동물’은 ‘두 발 가진’과 양립 불가능한 (이를테면 ‘네 발 가진’ 같은) 종차들로 나뉘는데, ‘동물’이 대립하는 종차들에 동시에 관여하는 일은 불가능하다.³ 그러므로 관여 이론 역시 받아들이기 어렵다. 나아가 종차들이 (예컨대 ‘두 발 가진’과 ‘날개가 없는’처럼) 서로 양립 가능하다고 해도, 이들이 사람에 대한 정의에 한꺼번에 등장하는 경우 관여 이론으로는 어떻게 하나의 동일한 정의를 이루는지 설명할 수 없다.

유와 종차의 통일성에 대한 적절한 답변은, 이들을 질료와 형상의 관계로 설명하는 것이다. 한 대상에 대한 정의는 나눔(diairesis)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나눔이란 유(‘동물’)를 정한 다음 차이(‘두 발 가진’)를 정하는 방식으로 정의를 구성하는 일이다. 여기서 다른 여러 차이들(‘날개 없는’)이 제시될 수는 있지만, 이도 마찬가지로 정의를 구성하는 종차라는 점에서 본질적인 변별점을 만들지 않는다. 여기서 유는 결코 종과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으며, 이 점에서 유는 질료, 혹은 정의의 재료이다. 유의 실재성은 종의 실재성보다 뒤떨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의 방법인 나눔에서 지켜야 할 원칙을 말하는데, 그 원칙이란 어떤 차이를 취하고서 그 다음 차이로 나아갈 때 앞서의 차이에 속하는 차이를 제시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앞서 ‘두 발 가진 날개 없는 동물’은 ‘두 발 가진’이라는 첫째 차이에 속하지 않는 ‘날개 없는’이라는 차이를 취했다는 점에서 적절한 정의가 아니다. 더구나 후행하는 차이는 선행하는 차이에 부수적으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속해야 한다. 예컨대 ‘두 발을 갖고 발이 하얀 동물’에서 ‘발이 흼’은 ‘두 발을 가짐’에 부수적으로 속하는 차이이기 때문에 부적절한 정의이다. 반면 ‘두 발을 갖고 발이 갈라진 동물’이라는 정의에서 둘째 차이는 첫째 차이에 속하며, 그것도 그 자체로 속하는 차이이기 때문에 적절한 정의이다. 이처럼 나눔의 방법을 거듭하여 유에서부터 차이에서 차이로 나아갈 때 최종적으로 얻어지는 마지막 차이(teleutaia diaphora)가 바로 실체 혹은 형상이다. 왜냐하면 마지막 차이야말로 유로부터 개별 종을 생성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가 질료라면, 최종적인 종차는 형상이다.

그러므로 정의 혹은 정의 대상이 단일성을 부여받는 이유는, 정의를 이루는 유와 종차가 질료-형상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질료:형상:복합체=유:종차:정의’라는 비례관계가 성립한다. 이때 유는 종차에 의해 규정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가능적인 것(dynamei on)이며, 종차는 유를 규정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현실적인 것(energeiai on)이다.⁴


¹ 마지막 부분의 진술로 미루어보아, 여기서 ‘복합체’는 지시 가능한 감각적 개별자인 복합 실체를 포함한다.
² 왜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렇게 말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III장의 3절에서 진술되었듯 오직 실체만이 본질을 지닌다. 그런데 분명 감각적 개별자 역시 실체에 포함된다. 그렇다면 감각적 개별자는 본질을 지닐 터이며, 본질을 지닌다는 것은 정의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감각적 개별자가 정의될 수 없다고 말한다면 실체가 본질을 지닌다는 앞서의 주장과 상충하지 않는가? 물론 거기서도 복합체가 본질을 지닐 수 없다고 말하기는 하지만, 거기서 복합체란 감각적 개별자라기보다는 속성들과 부수적으로 혹은 그 자체로 결합된 사물이라는 의미에서의 복합체일 터이다.
³ 양립 불가능성 개념이나 ‘네 발 가진’ 같은 예시는 보다 구체적인 이해를 시도해보기 위해 임의로 추가해본 것이다. 저자 자신의 설명은 이렇다. “‘동물’은 서로 대립 관계에 있는 차이들로 나뉘는데, ‘동물’이 이런 대립적인 차이들에 동시에 관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말이다.”(조대호, 2004, 193)
⁴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유가 무슨 기준으로 선택되는지가 궁금하다. 유와 종은 절대적인 개념인가, 아니면 상대적인 개념인가? 예컨대 ‘동물’이라는 개념은 ‘생물’과 관련해서는 종이지만, ‘사람’과 관련해서는 유가 아닌가? 아니면 ‘동물’이라는 개념은 단적으로 유이고 종으로는 간주될 수 없는가? 만일 유와 종이 상대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개념쌍이라면, 질료-형상 관계 역시 상대적으로 적용되는 개념쌍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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