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대호,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제3장 요약 - 2

3. 실체와 본질

이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의 또 다른 후보자인 본질(to ti ēn einai)을 다루는데, 이 본질에 대한 논의가 아리스토텔레스 실체 이론의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한다. 본질 이론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1) 논리적인 관점에서의 본질, (2) 사물과 본질의 관계, (3) 본질이 사물의 생성에서 차지하는 위치, (4) 본질과 정의의 관계, (5) 사물의 존재 원인으로서의 본질을 논한다. 이는 형상에 대한 논의와 맞닿아 있는데, 왜냐하면 사물의 본질은 형상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로고스 혹은 논리의 관점에서, F가 x의 본질이라는 말은 곧 x가 그 자체로(kath’ hauto) F이라는 말이다. 이때 본질로서의 F는 ‘x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적절한 대답으로 제시될 수 있는 것이다. ‘x는 그 자체로 F이다’는 ‘x는 부수적으로(kata symbebēkos) F이다’와 바로 이 점에서 구별된다. 예컨대 “표면은 하얗다”라는 진술에서 하양은 표면의 본질이 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이 진술은 “표면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양은 표면에 그 자체로가 아니라 부수적으로 속한다. 나아가 “하얀 표면”처럼 피정의항을 자기 내에 포함하고 있는 정의항 역시 본질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본질은 정의되는 대상을 포함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무엇인지를 말해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본질을 갖거나 정의될 수 있는가? 본질의 담지자의 후보로 일단 ‘하얀 사람’, ‘굽은 다리’ 같은 복합체가 검토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복합체는 본질의 담지자가 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복합체는 실체가 아니다. 본질은 ‘이것’이라 부를 수 있는 대상인 개별자-실체에 그 자체로 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복합체는 이러한 실체가 아니라 실체와 속성의 합성물인 까닭에 본질을 지닐 수 없다. 둘째, 복합체에 대한 진술을 구성하는 술어들은 서로 부수적으로만 관계할 뿐 유와 종차의 관계를 맺지 않는다. 예컨대 ‘x는 하얀 사람이다’에서 ‘하얀’과 ‘사람’은 서로 부수적인 관계를 맺을 뿐이다. 반면 ‘x는 두 발 달린 동물이다’에서 ‘두 발 달린’과 ‘동물’은 종차와 유의 관계이기 때문에 사람이라는 종을 규정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실체가 아닌 성질이나 상태 등에 대해서도 정의를 내릴 수 있는 듯 보인다. 예컨대 하양은 실체가 아니라 속성이지만, ‘하양은 이러저러한 색깔이다’라는 정의가 가능한 듯하다. 이는 ‘있다’(esti)가 다의성을 지니며 따라서 ‘무엇’(ti esti) 역시 여러 가지 뜻을 지닌 채 유비적으로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라는 낱말이 다의적이라면, ‘무엇’에 대한 대답인 본질 역시 다의적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낱말들의 일차적인 쓰임과 파생적인 쓰임을 구별한다. ‘있다’와 ‘본질’은 일차적으로 혹은 “무제한적으로”(haplos)는 실체에 대해 사용되며, 오직 파생적으로만 다른 것들에 적용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다음으로 부수적으로 결합된 복합체가 아닌 그 자체로 결합된 복합체를 다룬다. 가령 ‘수컷 동물’에서 ‘수컷’은 ‘하얀 사람’의 경우와 달리 ‘동물’에 부수적으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속한다. 이러한 복합체 역시도 기껏해야 오직 파생적으로만 본질을 지니며 정의될 수 있다. 이로써 엄밀한 의미에서는 오직 실체만이 본질을 지닌다는 점이 다시 강조된다.

‘하얀 사람’과 같은 부수적인 뜻에서 말해지는 것들(ta legomena kata symbebēkota)은 자신의 본질과 동일하지 않다. 이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증은 다음과 같다. 하얀 사람이 자신의 본질과 같다고 가정해보자. 하얀 사람은 사람과 같다. 따라서 사람의 본질과 하얀 사람의 본질은 같을 터이다. 그러나 사람의 본질과 하얀 사람의 본질은 같지 않다. 그러므로 하얀 사람은 자신의 본질과 같지 않다.¹

반면 그 자체로 말해지는 것들(ta kath’ hauta legomena)은 자신의 본질과 동일하다. 만일 그 자체로 말해지는 것들이 그 본질과 동일하지 않다면, 예컨대 좋음이 좋음의 본질이 아니고 사람이 사람의 본질이 아니라면, 후자는 전자와 분리되어 이데아로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이 이데아는 개별자 및 종보다 우선해서 존재할 것이다. 그런데 개별 사물과 본질이 서로 분리되어 있다면, 예컨대 좋음 자체와 좋음의 본질(이데아)이 분리되어 있다면, 전자는 학문적 인식이 대상이 될 수 없고, 후자는 있을 수(~일 수) 없다. 왜냐하면 학문적 인식은 무언가의 본질을 아는 데에서 성립하는데, 개별 사물이 본질과 떨어져 있다면 개별 사물로부터 본질을 알 수 없을 터이기 때문이다. 또 본질이 개별 사물 자체와 떨어져 있다면 본질은 스스로에게 본질로 술(述)해질 수 없을 터이기 때문이다.² 그러므로 실체에 속하는 것들은 자신의 본질과 동일하다.

4. 실체와 생성

여기서는 실체와 본질이 생성의 관점에서 탐구된다. 생성은 본성적인 생성, 기술적인 제작, 자발적인 생성의 세 가지로 나뉜다. 세 가지 생성은 공통적으로 “어떤 것의 작용에 의해서, 어떤 것으로부터, 어떤 것이 된다”(조대호, 2004, 143). 먼저 본성적 생성의 경우 생성의 위 세 가지 요소(작용인, 질료인, 형상인/목적인) 모두 자연적인 것이다. 둘째로 기술적 제작에서 형상인은 자연물이 아닌 제작자의 영혼에 있다. 제작자는 영혼 속의 형상을 실현하는 과정을 사유(noēsis)한 뒤 사유된 것들을 거꾸로 되짚으면서 형상을 질료에 구현함으로써 제작(poiēsis)한다. 그러므로 기술적 제작은 질료 없는 형상이 질료를 동반한 현상으로 변화하는 과정이다. 셋째로 자발적 생성은 제작에서와 같은 사유 과정 없이 실현이 생성의 출발점이 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보편적인 점은, 생성을 위해서는 질료가 먼저 존재해야 한다는 점이다. 즉 생성이란 형상 없는 질료가 형상을 부여받는 과정이다.

한편 질료뿐만 아니라 형상 역시도 생성의 필요조건으로 전제되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형상은 질료와 형상의 결합인 사물과는 달리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만일 형상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가정할 경우 그 형상은 만들어지기 스스로 질료와 형상을 전제할 것이고, 이 전제의 연쇄는 무한히 진행될 것이다. 그러므로 형상은 생성되지 않는 반면, 형상과 질료의 결합인 개별자 실체는 생성된다.

형상이 생성되는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존재하는가? 일단 형상은 개별 사물들과 떨어져 보편적인 이데아로 존재하지 않는다. 생성을 설명하기 위해 보편자를 요청하는 일은 불필요하다. 왜냐하면 생성이란 개별자가 다른 개별자를 낳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물들은 자발적으로 생겨나는 반면, 다른 사물들은 그렇지 않다. 왜 이러한 차이가 발생하는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이는 질료의 본성 때문이다. 스스로 운동할 능력이 없는 질료들(나무, 벽돌 등)은 자발적 생성의 원인이 될 수 없는 반면, 스스로 운동할 수 있는 질료들(사람, 동물 등)은 자발적 생성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생성에 대한 이상의 이론들로부터 알 수 있는 점은, 모든 것은 자기와 동종적인 것으로부터 생겨난다는 점이다. 예컨대 자연적인 생성에서 사람의 생성 원인은 사람이고, 기술적 제작에서 집의 원인은 건축가의 영혼에 내재하는 집의 형상이며, 자발적 생성에서 (자가치유 과정에서) 건강을 생성하는 몸의 열기는 그 스스로가 “건강이거나 건강의 한 부분”(조대호, 2004, 147)이다. 그러므로 생성은 형상, 즉 실체와 본질에서 출발한다.

마지막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 아닌 것들(양, 질, 관계 등)의 생성이 실체의 생성과 지니는 공통점 및 차이점을 서술한다. 비(非)실체들의 생성은 실체의 생성과 마찬가지로 형상의 생성이 아닌 형상을 지닌 개별자의 생성이다. 한편 실체의 생성의 경우 생성되는 실체는 생성하는 실체가 완전태(entelecheia)라는 점을 전제하지만, 그밖의 것들은 생성 속에서 가능태(dynamis)에 머물러 있다.


¹ 이게 타당한 논증인지는 잘 모르겠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가 ‘하얀 사람은 사람과 같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잘 이해되지 않는다.

² 해설에 이 논증(1031a28ff.)이 상세히 해설되어 있지 않아 본문을 직접 보고 논증을 재구성했는데, 본문이 어려워 이렇게 재구성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 만일 이렇게 재구성한 것이 맞다면, 플라톤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반론은 다소 부당한 측면이 있는 듯 보인다. 왜냐하면 플라톤의 입장에서는 이데아야말로 단적으로 있는 것(~인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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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이런 걸 보면 같이 토의를 하고 싶어지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정말 아는 게 하나도 없어서 토의를 진행할 게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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