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열,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 「3장, 샌델과 자유지상주의 사이의 기묘한 관계」 요약(2)

  • 로크의 단서는 실패한다
    노직은 무소유자들의 '처지가 나아질 수 있다' 라고 주장한다,
    그는 남들이 먼저차지해서 기회가 줄어들더라도, 또 자원을 벌충할 새로운기회가 생길수있다고 주장한다. 어떻게?
    첫째. 절대적 소유권을 허용하면 자산가들은 생산수단을 개선할 인센티브가 생기고 자산시장은 활성화된다. 따라서 사회의 생산성이 늘어난다.
    둘째. 어떤사람은 아이디어를 창출하고, 어떤사람은 자본을 소유하며, 어떤사람은 노동을 공급한다. 따라서 분업과 전문화가 이루어진다.
    셋째. 생산수단 소유자들은 여럿이다. 따라서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라도 고용되기 위해 소수의 관료집단을 힘들게 설득할 필요가 없다. 고용기회가 늘어난다.
    따라서 모든 사람의 처지가 나아질수있다.
    (여기서 노직은 '공유지의 비극'을 방지한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음을 알수있다.
    누구도 소유하고있지않아 아무도 생산성을 높이려는 의지가 없다면 무임승차와 도덕적 해이가 발생할 것이다)

이민열은 그러나 노직이 주장하는 절대적 소유권체제에서는,
전체 사회의 부가 개인의 부로 옳겨질수있다는 근거가 부족
(즉, 노직도 동의하는 명제ㅡ'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존엄하다'를 지키지 못한다)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노직의 논증에는 두가지 숨겨진 전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1.권리질서의 정당성은 물질적인 측면에서만 평가된다. 즉 누군가의 처지가 나아진다는것은 오직 물질적인 측면에서 나아진다는 것이다.
2.'더 나아진다'할떄의 비교기준은 사적 소유권도없고 어떤 규제도 없는상태이다.

이민열은 1의 전제를 반박한다. 물질적 측면은 우리의 처지를 묘사하는 한가지 요소에 불과하다.
우리가 자신의 신체를 소유하더라도 모든 외부자원(생산수단)이 타인의 소유라면, 설사 물질적 측면이 나아지더라도, 먹고살려고 타인의 지배를 받아들일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민열이 소개하는 몽룡과 춘향의 예를 살펴보자.

몽룡과 춘향이 아직 사유화되지 않은 토지를 자유롭게 사용하면서 살고 있었다고 하자.
물질적으로 풍족한 상태는 아니다. 이때 몽룡이 울타리를 치고 모든 토지를 차지한다.
토지를 전보다 효율적으로 사용하면서, 춘향에게 몇가지 조건을 내걸어 고용 기회를 제공한다. 임금은 춘향의 이전 소득보다 높게 제시한다. 이때 춘향의 처지는 두 가지 측면에서 더 나빠진다. 첫째로, 춘향은 이전까지 자율적으로 사용해온 토지에 대해 어떤 권리도 행사할 수 없다. 둘쨰, 춘향은 몽룡이 제시한 조건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만큼 삶의 통제권을 잃어버린다.........춘향은 어쩌면 농사일은 조금만 하고, 시 짓고 토끼 기르며 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춘향은 이제 곡물 생산에만 시간을 쏟아야 한다.1)

따라서 절대적소유권체제에선, 먹고사는 물질적측면에서 나아지더라도 인간의 처지와 존엄성이 훼손될수있는 것이다.

이민열은 또 2의 전제를 반박한다.
노직은 아무 소유권도 없는 공유지에서 사적 소유권이 생기고 자본가들이 등장하는 근거를, '오직 아무것도 없는 원점의 상태'와 비교하여 '더 나아질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권리질서의 타당성을따질때 우리는 아무질서도 없는상태가 아니라, 여러 권리질서들끼리 비교할수밖에 없다.
(이민열은 꼭 절대적재산권체제가 아닌 어떤 권리질서에서도 공유지의비극은 충분히피할수있다고 주장한다.2))
무직 상태인 철수 씨를 생각해보자.
그에게 어머니가 a회사를 소개한다. 그러나 그는 b,c,d....등등의 회사도 지원할 수 있는 상태라고 쳐보자.
여기서 그는 '오직 자신의 원래 상태에 비해서는 더 나아졌으니까' 라는 이유로 a회사만을 고려해야하는가? 당연히 b,c,d.....등등도 고려해야 자신의 선택이 정당화될 것이다.

노직의 주장으로 돌아가보자.
아무 규제도 재산권도 없는 상태에서 절대적 재산권 체제인 a체제가 있다. 분명히 a체제를 선택하면 지금보다는 처지가 나아질 것이다.
그러나 b,c,d....등등의 여러가지 소유권 체제가 있을 수 있다면, 그래도 '오직 자신의 원래 상태에 비해서는 더 나아졌으니까' 라는 이유로 a 체제를 선택해야한다면, 체제의 정당성을 따지는 것이 '선착순의 문제'로 변질된다고 이민열은 주장한다.
어떤 체제가 정당하냐의 문제가, 누가누가 '모두의 처지가 나아지긴하지만, 그러나 결국 자신에게 더 유리한 소유권 체제'를 빠르게 제시하느냐? 의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규제도 없는 상태와 비교할필요가 없으며, 권리질서를 '개인들의 처지가 더 나아졌다'가 아니라 모두를 평등하게 대우하느냐라는 기준으로 평가해야한다.
여러 종류의 재산권 질서를 비교 기준으로 삼는다면, 특정 질서가 아닌 다른 질서에서 처지가 더 나아진 사람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기 떄문이다.

모든 논의를 종합하자면, 결론은 이렇다.
내 신체의 주인이 나자신이라도, 최초취득에 대한 절대적소유권은 정당화될수없다.
외부자원 혹은 재산이 나의 신체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고 보기 힘드므로, 과세는 인간을 수단으로 다루는것이 아니다.

  • 정의로운 이전, 자발성과 재산권의 순환논법

지금까지는 노직의 '정의의 첫번째 조건(최초취득에 대한정의)'을
살펴보고 그것이 설득력이 떨어진다는것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민열은 첫번째 조건뿐만 아니라 두번째 조건마저도 비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노직은 첫번쨰조건이 성립한다는 전제아래 두번쨰 조건(자발적인 이전에 대한 정의)이 성립하면 계약의 무조건적 자유가 정당화될수있다고 생각한다. 즉 노직은 d1이라는 상태에서 소유권이 분포되어있는 상태가 정당하고(즉, 최초취득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고), 그 상태에서 재산과 자원의 이동이 '''자발적이었다면''' d2라는상태 역시 정의롭기때문에, 자발적인 이전에 대한 정의가 절대적 재산권에 대한 필요조건 중 하나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민열은 노직의 논증이 온전히 성립하려면 자발성에 대한 전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노직에게 '자발적인 행위'라는 것은 무엇인가?
노직은
1.행위자의 선택지가 타인에게 제한되어있지않거나
2.만약 타인에 의해 제한되어있다면, 그 제한하는 타인의 행위가 타인의 권리에 속하는것이라면
3. 그 행위자는 자발적으로 행위한것이다
라고 주장한다.
(노직은 자발성의 조건을 근거로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계약을 논한다.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노동을 제공하지않으면 굶어죽는다 하여도, 각자 권리안에서 행동했다면 계약은 자발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저런 자발성의 조건은 어떻게 정당화되는가?
노직은 남자와 여자 사이 짝을 짓는 경우를 예로 든다.
열명의 여자, 열명의 남자가 있다고 하자.
이들 중 커플이 되기 원하는 남녀부터 짝을 짓는다면, 맨 마지막에는 남자 한명, 여자 한명이 남을 것이라고 가정하자.
그 남녀는 이제 열 명의 이성중에 제일 매력이 없는 상대방과 결혼하던지, 독신으로 살던지의 선택지가 남는다.
그러나 비록 이 두명의 남녀의 선택지는 제한되었지만, 그럼에도 자발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라고 노직은 생각한다.
첫번째커플부터 원하는 사람과 만나고 짝을 지었다.
따라서 열여덟명의 남녀들은 각자의 권리안에서 행동했으며, 누구의 권리도 침해하지않았다.
따라서 우리는 마지막남은 남녀의 선택도 자발적이었다고 직관적으로 판단할수있다.
( 열여덟명의 남녀들이 딱히 '마지막남은 남녀들의 선택을 제한하겠다!' 라고 생각한것도 아니다. 그들은 그냥 원하는 사람을 만났다)
따라서 모두 자신의 권리범위 안에서 행동했다면, 모든 선택은 자발적인 것이다.

그리고 노직은 이러한 '짝짓기의 예'와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계약'이 상당히 유사하므로, 모두 각자의 권리안에서 행동했다면, 노동자의 계약도 자발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설사 노동자가 불공정한 대우를 받거나, 인기없는 직업을 선택하더라도) 따라서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계약을 국가가 교정하는것은, 남녀 사이의 만남을 국가가 개입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주장한다.

이민열은 1. 자발성의 조건에 대한 논증이 순환논증에 불과하며 2.짝짓기의 경우와 계약의 무조건적 자유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노직이 짝짓기의 경우에서, 남녀들이 '각자의 권리안에서' 이성을 만났다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원하는 사람과 만나고 짝을 지었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민열은 이것이 '자발성의 정의' 그 자체이기 때문에, 노직의 논증은 순환논증이라고 주장한다.
자발성이 권리로 정당화되고, 그 권리는 또 자발성으로 정당화되기때문에, 논리적 오류를 범한다는 것이다.

또 남녀 사이의 경우와 노동자와 자본가의 경우는 다르다.
남녀 사이의 만남을 국가가 개입한다면, 즉 인기없는 사람을 위해 인기있는 남자가 인기없는 여자와 만나도록 국가가 개입한다면 그것은 스무명의 남녀들의 평등한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기없는 여자'의 내재적 선호('나는 내가 원하는 사람과 만나고 싶다')와 외재적 선호(원하는 사람이 '누군가(즉 자기자신)'를 만나게 하고싶다) 모두를 충족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재적 선호만이 충족된 다른 남녀들을 평등하게 대우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계약은, 외부자원과 기회를 분배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남녀 사이 짝짓기의 경우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따라서 자발성의 조건에 대한 논증이 실패했기때문에, 자유로운 이전의 원칙과 절대적 재산권은 정당화되지않는다.
따라서 국가는 자원의 분배를 직접 교정해야할 이유가 생긴다.

결론적으로, 샌델이 자유지상주의의 명제들을 이용해 자유주의를 공격하는것은 옳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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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민열,『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 178p
2.''배타적인 사적 소유뿐만 아니라 국가 소유, 효율적인 사용 규제가 첨가된 공동 소유, 대상에 따라 사적 소유와 공동 소유를 따로 적용하는 방식, 모든 구성원의 균등 소유까지 모두 마찬가지다.'' 이민열,『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 187p.
이민열은 미국 메인주 앞바다의 항만 갱들, 뉴기니 근처에 살고 있는 폰암족의 사례를 근거로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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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오래된 글에 제가 참견하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만,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 책의 저자분께서 '노직의 자유 논변이 개념적 순환에 빠져 있다'고 지적하신 부분은 사실 저자분의 독자적인 주장은 아닌 것으로 압니다.

해당 논점은 원래 G. A. 코헨(G. A. Cohen)이 우파 자유지상주의자들의 자유 개념을 비판하면서 처음 제기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봤을 때는 G. A. 코헨의 제자였던 조나단 울프(Jonathan Wolff)가 (1991 등) 저서들에서 이에 대해 정리한 내용을 저자분께서 가져다 사용하신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 부분은 구글링을 해보시면 더욱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실 수 있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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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본 책에도 g.a.코헨의 저서에 대한 인용이 몇군데 나오는걸로 보아
(해당 자발성논증 부분에는 인용표시가 없지만) 아마 crow님의 말씀이 맞을것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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