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존재론과 실체론
실체란 첫째로 있는 것(prōton on)이며, 다른 것들은 모두 실체에 의존해서 존재한다. 이런 이유로 있는 것이 무엇인지 탐구하려면, 제일의 존재자인 실체에 대한 탐구를 가장 우선적으로 진행해야 한다. 이런 이유에서 실체 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 존재론의 핵심을 차지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론에 대해서는 다양한 논쟁거리가 있지만, 특히 『범주론』의 실체 이론과 『형이상학』의 실체 이론 사이의 관계를 둘러싼 논쟁이 있다. 『범주론』에서 등장하는 실체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째로 10개 범주 중 첫 번째 범주인 실체는 “지시 가능한 감각적 개별자”(조대호, 2004, 89)를 가리킨다. 이때 실체는 진술에서 주어의 자리에 오며 속성을 담지하는 기체이다. 둘째로 이 개별자 실체의 본질을 밝히는 진술의 술어가 되는 종이나 유의 보편자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라고 부른다. 전자의 경우 첫째 실체, 후자의 경우 둘째 실체로 구별된다. 반면 『형이상학』에서 첫째 실체는 복합적 실체로 간주되고, 이 실체는 다시 질료와 형상으로 나뉜다. 이 중 개별자를 구성하는 형상에 첫째 실체, 혹은 본질(ti to ēn einai)이라는 명칭이 사용된다.
이러한 외견상의 불일치로 말미암아 많은 연구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 이론에 모순 혹은 간극이 있다는 주장을 했다. 이 중 대표적인 주장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범주론』에서 플라톤에 반하여 개별자들에 존재론적 우위를 부여했으나, 『형이상학』에서는 보편자에 존재론적 우위를 부여함으로써 플라톤적인 입장으로 선회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용하는 ‘eidos’라는 용어의 두 가지 상이한 의미를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 ‘eidos’는 종의 의미를 지니기도 하고 형상의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eidos’는 『범주론』에서는 전자를 뜻하지만 『형이상학』에서는 후자를 뜻한다. 여기서 형상이란 종과 같은 보편자가 아니라 개별자가 각기 고유하게 갖고 있는 (영혼, 신체 등의) 형태를 뜻한다. 그러므로 ‘첫째 실체’라는 명칭의 의미 변화는 『범주론』의 실체 이론이 『형이상학』에서 부정되었음을 뜻한다기보다는 실체 이론이 더 깊은 탐구 층위로 심화되었음을 뜻한다.
1. 실체의 일반적 본성과 종류
아리스토텔레스는 ‘있는 것’(to on)이라는 말이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서 존재론을 시작한다. 성질, 양, 관계, 개별자 등은 모두 있는 것이지만, 이 각각은 모두 다른 의미에서 있다. 이 점에 착안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있는 것들의 부류를 구분하고 각각의 부류를 범주라고 부른다. 범주들은 술어의 부류라는 논리적 의미와 있는 것의 부류라는 존재론적 의미를 모두 지닌다.
범주들 중 제일가는 의미에서 있는 것은 바로 실체이다. 실체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소크라테스나 크뤼시포스와 같은 감각적 개별자인데, 이들은 분리되어 존재할 수 있는, 즉 독립적인 것이다. 둘째는 이 개별자가 ‘무엇’(to ti estin)인지를 규정하는 종 혹은 유의 술어이다. 예컨대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의 술어인 “사람”이 바로 둘째 의미에서의 실체에 해당한다. 반면 “소크라테스는 하얗다”와 같은 진술에서처럼 “하얗다”와 같은 술어는 그저 우연적인 성질일 뿐 종이 아니므로 실체가 아니다.
실체는 세 가지 의미에서 다른 모든 있는 것들에 우선한다. 첫째, 실체는 시간적인 측면 및 있음의 측면에서 우선한다. 상태, 성질 등이 있기 위해서는 이들의 담지자인 개별자가 먼저 있어야 한다. 둘째, 실체는 논리적으로 우선한다. 모든 진술(로고스)은 궁극적으로 개별자를 주어로 지니기 때문이다. 셋째, 실체는 앎의 측면에서 우선한다. 어떤 대상이 ‘무엇’인지를 알 때 우리는 그 대상을 가장 잘 안다.
실체는 첫째로 있는 것이며, 다른 모든 것들의 존재는 실체에 의존한다. 이 점에서 있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실체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귀결된다. 이런 이유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은 실체에 속하는 것들, 실체의 본성 등을 탐구하게 된다.
‘실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종래의 학설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실체가 물질적인 것들이라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실체가 비물질적인 것이라는 입장이다. 전자에는 단순한 물체(물, 불, 흙), 복합체(동물, 식물, 천체) 등이 속한다. 후자에는 한계들(perata), 형상들, 수학의 대상들 등이 속한다.
실체론의 탐구 주제는 크게 세 가지이다. (1) 감각적인 실체들과 분리되어 있는 실체들이 존재하는가? (2) 감각적 실체들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 (3) 분리된 실체란 존재하는가? 만일 있다면 왜 그리고 어떻게 존재하는가?
2. 실체와 기체
탐구 대상이 될 실체의 후보자에는 본질, 보편자, 유, 기체의 네 가지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먼저 이들 중 기체와 본질에 대해 탐구하는데, 여기서는 일단 기체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기체란 다른 모든 것들을 술어로 담지하면서도 자기 자신은 술어가 되지 않는 것이다. 이는 『범주론』에서 등장했던 실체에 대한 정의와 같은 궤에 있다. 그러나 『형이상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개별 실체를 구성하는 질료와 형상에도 이 정의를 확장 적용한다. 『형이상학』에서의 실체론에 따르면 개별자는 질료와 형상으로 이루어진 복합체인데, 그는 개별자, 질료, 형상 모두를 기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개별자가 아니라 개별자를 구성하는 질료가 더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실체인가? 만일 그렇다면 진정한 실체는 성질 등에 의해 한정되지 않는 무한정자(apeiron)와 같은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왜냐하면 질료는 실체를 규정하는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실체는 다른 것들과 분리되어 있으면서 지칭 가능해야 한다. 우리는 실체를 다른 것들과 구별해서 ‘이것’이라고 칭할 수 있어야 하는데, 단순한 질료는 그와 같이 분리할 수도 지칭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질료는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실체가 될 수는 없다. 반면 형상은 다른 것들과 분리되어 특정 지칭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을 ‘제일실체’(protē ousia) 혹은 ‘질료 없는 실체’(ousia aneu hylēs)라고 부르며 질료보다도 우선적인 탐구 대상으로 삼는다. 형상은 감각적 개별자의 본질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