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의 칸트 100불 반박으로 본 being, determinate being, something

*한글로 철학글을 거의 써본 적이 없어서, 제가 쓰는 한국어 용어들의 더 좋은 substitute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요즘에 헤겔의 대논리학의 존재론에서 칸트의 100불 주장이 여러가지의 존재방식을 헷갈린 거다라고 주장한 것이 인상깊어 그것으로 존재론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일단 칸트의 100불론은,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존재는 내용을 규정하지 않는다입니다. 제 계좌에 100불이 있든 없든, "100불"이라는 것은 바뀌지 않습니다. 제 계좌에 있다고 해서 99불이 됐다가 계좌에 추가됐다고 해서 101불이 되는 것은 아니니깐요. 이것으로 신의 존재론적 증명, 즉 신의 본질에 존재가 추가돼있다는 것에 반박을 하겠죠. 존재는 어떤 것의 내용을 바꾸지 않고, 즉 어떤 것의 내용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신의 본질 혹은 내용에 존재가 포함돼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겠죠.

이 주장에 헤겔은 칸트가 헷갈린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신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는 이 Remark에선 언급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칸트가 다른 종류의 "존재"들을 헷갈려한다고 하고, 그것으로 pure being, determinate being, something 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일단 전 pure being은 "인" (what is)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냥 "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아닌" 것과 구분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레 우리는 "인" 것이면서 "아닌" 것을 생각할 수 있겠죠. 그것을 헤겔은 determinate being (이 글에선 "무언가"라고 하겠습니다) 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무언가라는 것은 "무언가인" 것 이면서 "무언가가 아닌" 것 이겠죠. 헤겔이 무언가인 것과 무언가가 아닌 것이 구분이 안 된다고 하는데, 이건 생각보다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100불을 생각해보죠. 100불이다, 혹은 100불이 아니다, 는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100불이 있는 계좌"와 "100불이 없는 계좌"는 두 개가 다르겠지만, 헤겔은 저건 something의 영역이지, 무언가의 영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언가라는 것은 그저 "인" 것과 "이 아닌" 것 이며, 100불이든 100불이 아니든, 두 개는 같습니다. 영어로 하면 좀 더 와닿는다고 생각하는데, 100 dollars are/100 dollars are not 두 개의 차이는 없다시피 하죠. 철학사로 조금 더 들어가게 된다면, 헤겔은 reality란 단어를 무언가인 거에 쓰게 되는데, 이것은 데카르트의 objective reality에서 따온 용어라고 볼 수 있겠죠.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무언가인" 것과 "무언가가 아닌" 것을 구분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무언가이면서 무언가가 아닌 것을 생각하게 되죠. 그것을 헤겔은 something이라고 부릅니다. something은 그렇다면 무언가가 아닌 것으로 무언가인 것을 알게 되면서 determinacy가 생깁니다. 이렇게 보면 굉장히 어려워보이지만, 헤겔의 100불 예가 또 굉장히 도움이 됩니다. 100불이 있는 계좌는 100불이 아닌 계좌를 생각함으로써 생각이 됩니다. 혹은, 100불이 있는 계좌라는 것은 100불이 없는 계좌가 아니라는 것으로 규정돼있죠. 100불이 있다 혹은 100불이 없다 등의 determinate being으로써 우리는 something을 생각할 수 있는 거죠. 이것이 제가 이해한 something 입니다.

요즘은 본질론의 Shine 과 Reflection을 고대 회의론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거 이해하면 또 한 번 써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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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제가 제대로 이해했는지 모르겠지만, 선생님께서 위 글에서 설명하고 계신 부분을 읽으니 전통적 논리학의 근원적 원칙 중 하나인 동일률과 배증률(의 문제점)에 대한 헤겔의 지적이 떠오르네요.

즉, A=A(동일률)라면 A는 A이면서 동시에 not A일 수 없다는 것이고, 이는 A의 A임이 바로 'A임'이 배제하는 것에 의하여 구성된다는 것을 함축하는데, 이러한 논리는 주어와 술어의 구분을 전제로 하게 될 수밖에 없다는 귀결에 이릅니다. 즉, 아주 엄격하게 말해서 A=A라는 원칙에 금이 가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위에서 지적하신 'pure being'의 소재가 밝혀질 수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A가 A도 not A도 아닌 것이 아니다'(배증률)라고 하기 위해서 우리는 'A아닌 것'과 'not A가 아닌 것' 둘 다를 인정해야 하는데, A는 이 두가지와 구별되는 것이 됩니다.

100불이 있는 계좌가 +A라면, 100불이 없는 계좌는 -A입니다. 여기서 A는 +A와 -A, 양자에 의해 동시에 식별할 수 있는 것이 됩니다. 이러한 문맥에서 yhk9297 선생님께서 언급하신 'something'을 이해할 수도 있겠지요... 본질론의 Shine와 Reflection에 대한 글도 기대해 보겠습니다.

(제가 배움이 부족해서 오류나 착오가 있을 수 있습니다. 널리 지도편달을 바랍니다. 그리고 이 댓글의 작성에 하워드 P. 케인스의 "헤겔 철학의 현대성"의 일부를 참고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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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감사합니다. 열심히 썼는데 댓글 없어서 시무룩했었거든요...ㅎ

동일률과 주어/술어 설명은 굉장히 흥미롭습니다. 주어/술어는 개념론 (3권)에 나오는 개념이고 동일률은 본질론 (2권)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개념론은 아직 제가 이해하기에 너무 어렵지만, 다행히 동일률이 Reflection 바로 다음에 나오는 내용이기 때문에, 제가 Shine과 Reflection을 조금 더 이해하면 바로 더 제대로 된 얘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배증률에 대해서도 굉장히 흥미롭습니다. 아마 헤겔은 A가 empirical content라고 할 것 같습니다. something 그리고 other (something이 연결짓는 그 아닌 것) 은 그 content의 존재 방식 혹은 형태이기 때문에 content와 말씀하신 것과 같이 구별되겠죠. something and other의 존재방식으로 이해하는 content가 "100불이 있는 계좌"와 "100불이 없는 계좌"겠지요. 선생님의 언어로 제 해석을 설명한다면, A라는 content가 있으면 그것을 우리가 something의 form (존재방식)으로 보기 때문에 +A (something) 과 -A (other) 으로 이해할 수 있다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 는 본질론에서 따로 나오고 전 본질론을 아직 잘 모르기 때문에 말을 아껴야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본질론에서 form and content의 unity를 다루기 때문에 그걸 제가 이해하게 되면 더 재밌게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얘기하다보니 헤겔이 어떻게 움직임의 역설 (제논) 을 풀어냈는지에 대한 해석도 조만간 따로 올리면 좋을 것 같습니다. Something and Other이 구분이 가능하지 않고 즉 자기이면서 자기가 아닌 true infinity가 됩니다. 즉, 제논이 말한 것처럼 principle of contradiction과 움직임이 마찰되는 것이 아니라, 움직임이 있기 때문에 principle of contradiction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는 거겠죠. 아마 이건 어느 정도의 이해도가 있기 때문에 금방 올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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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답변 감사합니다. '자기이면서 자기가 아닌 true infinity'라는 구절을 보니 Graham Priest가 "The Logic of Paradox"에서 '어떤 진술이 참이면서 동시에 거짓이 되는 것을 인정하려면 우리는 헤겔의 변증법을 따라야 한다'고 말한 것이 떠오릅니다(위에서 언급한 케인스의 저서 中 p.25 주7 참고). 나아가 제논의 역설 역시 변증법적 계기를 통해 해소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움직임(운동)이란 변화이자 모순을 내재한 것으로 변증법적 사유와 연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true infinity'라는 것 역시 변증법적 사유 내에서 이념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으로 연결될 수 있다고도 보입니다...계속적인 정반합의 과정은 무한을 내포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실제적'이 아니라 '이념적'이라는 단어를 쓴 것은 여기서 '무한'을 Georg Cantor가 수학적으로 정리한 바(실제적)로 이해하면, 무한에도 크고 작은 여러 무한이 존재하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수학의 무한집합론에서는 크기가 아니라 '농도'라는 용어를 쓰긴 하지만요)

헤겔과 제논의 역설에 대해서 흥미로운 글을 곧 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기대됩니다. 새로 시작되는 한 주 내내 평안하시고 바라시는 것들 잘 이루실 수 있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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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헤겔 논리학에 관심이 있으시다니 반갑습니다.

글을 읽고 몇 가지 질문이 있어 답글을 남깁니다. (아마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영어로 ‘determinate being’으로 번역되는 단어 ‘Dasein’의 표준적인 번역어는 ‘현존재’이고, ‘something/Etwas’는 ‘어떤 것’으로 번역되지요. 송구하지만 글 쓰는 데 헷갈려서 답글에서는 표준적인 번역어를 좀 쓰겠습니다.)

1. 직접 인용은 안 하셨지만 생멸(Werden) 절에 등장하는 첫 번째 주석(WL, I, 84-92)을 염두에 두고 계신 것 같은데, 그 부분에서 헤겔이 현존재와 비(非)현존재를 구별할 수 없다고 말하나요? 문제의 주석이나 아니면 현존재 자체(Dasein als solches) 절에 등장하는 개념들에 대한 헤겔의 설명을 찾아봐도 현존재와 비현존재가 구별되지 않는다는 언급은 찾아보기가 힘드네요. 오히려 저는 다음 구절 때문에 현존재와 비현존재는 내용적으로 차이를 지니고 구별되어야 한다고 이해하고 있는데, 아래의 구절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존재와 비존재는 동일하다. 따라서 내가 있든 있지 않든, 이 집이 있든 있지 않든, 이 100탈러가 내 수중에 있든 있지 않든 동일하다.─이 추론 혹은 전자의 명제의 적용은 명제의 의미를 완전히 바꿔버린다. 그 명제는 존재와 무의 순수 추상을 내포한다. 그러나 그 적용은 그로부터 하나의 규정적 존재와 규정적 무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미 말했듯이 규정적 존재는 여기서 논의거리가 아니다. […] 논의되는 명제에 반해 성립되고 있는 심급들에서는, 어떤 것은 있든지 없든지 무관한 것으로 나타나지 않으며, 존재 혹은 비존재와 관련하여서가 아니라 다른 내용과 관계 맺는 그것의 내용과 관련하여 그러하다. […] 현존재는 그와 관계 맺는 특정한 다른 내용이 있든 있지 않든 무관한 것이 아니다. (WL, I, 86-87, 인용자 강조)

2. 현존재와 비현존재가 구별되지 않는다고 이해하신다면, 칸트의 소위 ‘100탈러’ 논증에 대한 헤겔의 비판 지점과 존재론적 신 증명에 대한 헤겔의 입장은 어떻게 이해하고 계신가요? 일단 저는 다음처럼 이해하고 있습니다.

말씀하셨듯이 헤겔은 칸트가 “다른 종류의 ‘존재’들을 헷갈려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헤겔이 보기에 칸트는 앞서 제가 인용한 구절에서처럼 존재/비존재와 현존재/비현존재를 뒤섞어 놓고 있습니다. “이것은 내가 100탈러를 지니는지 지니지 않는지의 구별을 순전한 존재와 비존재로 밀어내는 기만이다.─”(WL, I, 89) 집이나 100탈러 같은 것들에 대해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순간, 저기에서 “존재하다”란 더 이상 순수 존재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논의가 이미 규정적인 대상에 대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저 “존재하다”란 규정적 존재, 즉 “현존하다”의 의미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신 존재 증명도 이 점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그런데 칸트는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을 반박하기 위해 100탈러의 예시를 끌어들이면서, 100탈러의 존재는 100탈러라는 개념에 그 어떤 내용도 첨가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존재는 사물에 대한 내용적인 규정이 아니고, 100탈러의 개념과 100탈러의 존재가 무관한 것과 마찬가지로 신의 개념과 신의 존재 역시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헤겔에 의하면, 신이나 100탈러 같은 특정한 대상에 사용되는 구별은 존재/비존재가 아니라 현존재/비현존재고, 현존재는 무차별적인 순수존재와 달리 실재적으로 내용을 지닙니다. “존재와 무 즉 무엇과 타자의 실재적 구별을 비로소 담지하는 것은 현존재이다.”(WL, I, 90) 그렇기 때문에 존재 개념을 통해 신 존재 증명을 반박하려는 칸트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갑니다.

그렇다고 헤겔이 보기에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이 마냥 옳은 것도 아닙니다. 칸트의 반박이 문제 있는 것과 별개로, 헤겔이 보기에 존재론적 증명의 패착은 바로 저 현존재/비현존재의 구별이 갖고 있는 내용적 차이에 있습니다. 존재론적 증명은 신의 개념으로부터 신의 현존을 도출하려고 하는데, 앞서 살펴봤듯 현존재와 비현존재는 엄연히 실재적 구별이기 때문에, 신의 개념과 신의 현존 역시 엄연히 내용적 차이를 지닙니다. 헤겔은 존재론적 증명의 옹호자들이 이런 내용적 차이를 무시하고 신의 개념으로부터 부당하게 신의 현존을 도출하려 한다고 비판합니다.

현실의 100탈러가 그저 가능적인 100탈러와 다르다는 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이것이 내 재산 상태의 차이점을 구성한다는 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100탈러에서 이러한 차이가 두드러지기 때문에, 개념 즉 공허한 가능성인 내용규정과 존재는 서로 다르다. 따라서 신의 개념 역시 신의 존재와 다르며, 내가 100탈러의 존재로부터 그 현실성을 도출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신의 개념으로부터 신의 실존을 “끄집어낼” 수 없다. 그러나 존재론적 증명은 신의 개념으로부터 신의 실존을 이렇게 끄집어내는 점에 그 요체가 있다. (WL, I, 92)

이상이 존재 장의 첫 번째 주석에 나오는 ‘100탈러 논증’에 대한 제 이해입니다. 만일 헤겔이 현존재와 비현존재가 구별되지 않는다고 주장한 거라면, 위의 제 서술은 모조리 틀린 게 되겠지요. 혹시 헤겔에서 현존재와 비현존재가 구분이 안 되고 아무런 차이도 지니지 않는다고 이해하고 계시고, 그렇기 때문에 위의 이해가 오류라고 생각하신다면, 해당 부분 주석 1의 칸트 관련 내용은 어떻게 이해하고 계시는지 질문드립니다.

3. 존재논리학 초두에 등장하는 범주들의 전개를 존재-현존재-어떤 것의 순으로 개괄적으로 서술하신 것으로 보이는데, 혹시 중간에 등장하는 범주들의 전개는 논의를 간략하게 하기 위해 일부러 생략하신 건가요? 개인적으로 저는 생멸→발생(Entstehen)/사멸(Vergehen)→현존재로의 이행이나 현존재→규정성→질/실재/부정→어떤 것으로의 이행과정이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이고 또 어렵다고 느꼈는데, 이런 세부적인 부분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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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글 감사합니다. 제가 한국어로 철학 공부를 제대로 해본 적이 없어서 선생님의 글을 잘못 이해할까 걱정이 되지만,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특히 헤겔은 한국어로 읽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번역이 있다는 것조차도 몰랐네요.. 앞으로 한국어로 헤겔 얘기를 할 때 참고하겠습니다.

  1. 제가 아무래도 최대한 간단하게 쓰기 위하여 여러가지를 말을 안 한 것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현존재와 비현존재가 "개념적으로" (conceptually) 구분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즉, 현존재와 비현존재를 개념으로 보았을 때 그 둘은 그 구분이 안 되기 때문에 "어떤 것" [Etwas]이 나온다는 것이겠지요. 적어도 존재론에서는 정반합을 이룰 때 정과 반이 구분이 안 되는 형태로 합까지 가는 걸로 알고 있고, "어떤 것"마저도 그것의 다른 것 [Andere]과 구분이 안 돼 유한성이 나오고, 유한성이 아닌 무한성 (Bad infinite) 과 유한성이 구분이 되지 않아 진짜 무한 (True Infinite)이 나오며, 본질론이 나오기 전까지 지속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 선생님도 이 내용을 알고 계실 거 같고, 제가 "개념적" 차이라고 말을 안 해서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더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말씀하신 걸 봤는데, 제 책에는 72-73 으로 나와있네요. Di Giovanni 번역인데.. 흠... ). 번역 차이가 큰 것 같아서 Di Giovanni의 영어 부분을 쓰겠습니다.

"In the instances adduced against our proposition, something appears as not indifferent to whether it is or is not, not on account of being or non-being, but because of its content which connects it with some other content. If a determinate content, some determinate being, is presupposed, this being, since it is determinate, stands in manifold reference to another content. It is not a matter of indifference to it whether a certain other content to which it refers is or is not, for only through such a referring is it essentially what it is."

제 생각에 여기서 헤겔은 "개념적"으로 현존재와 비현존재가 다르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Remark에서 개념 자체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닌 이런 개념들의 application들을 보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다루지 않았던 content (내용) 를 볼 수 있는 겁니다 (본질론에서 보게 되죠). 즉, di Giovanni가 맞다면, 저 한글 번역이 틀린 것으로 보입니다. 강조하신 부분은 "현존재는 그와 관계맺는..." 이 아닌, "[현존재가 적용된] 내용은 그와 관계맺는..." 으로 보는 게 di Giovannia의 번역이 아닌가 싶습니다. 말씀하신 "내용적 차이"가 무엇인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개념적으로 보았을 때 현존재와 비현존재의 차이는 없고, 그것을 내용에다가 적용시켰을 때 현존재가 아닌 현존재가 적용된 내용이 다른 내용에 관계짓는다고 해석이 되기에 제 주장에 pressing 한 문단은 아닌 것 같습니다.

현존재와 비현존재가 구별되지 않는다는 언급은 찾아보기가 힘들다고 하셨습니다. 제 생각에 그 이유는 헤겔이 현존재를 Reality, 비현존재가 Negation으로 바꾸기 때문입니다. Reality는 존재하는 현존재이며, Negation은 존재하지 않는 현존재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다음 단락을 보게 되면 개념적으로 구분이 안 된다고 헤겔이 말하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c. 어떤 것 밑에 있습니다)

"In existence its determinateness has been distinguished as quality; in this quality as something existing, the distinction exists -- the distinction of reality and negation. Now those these distinctions are present in existence, they are just as much null and sublated. Reality itself contains negation; it is existence, not indeterminate or abstract being. Negation is for its part equally existence, not the supposed abstract nothing but posted here as it is in itself, as belonging to existence." (21.103)

즉, 존재하는 현존재와 존재하지 않는 현존재 (혹은 비현존재)가 구분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것"이 나오는 것이겠죠.

  1. 내용적 차이로 헤겔의 존재증명에 대한 스탠스를 물어보셨는데,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번째로, 저는 말씀하신 "내용적 차이"가 뭔지 잘 이해를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적 차이가 신의 개념과 신의 현존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아직 이해를 못했습니다. 두번째로, 저는 헤겔이 이 Remark에서 신존재증명에 대해 뭐라고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지금은 헤겔이 존재론적 증명에 크게 비판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저 칸트가 이 존재론적 증명을 잘못 이해했다고 하는 걸로만 보입니다 (그 이유는 unity of form and content가 신에 필수적인데, 그것이 본질론에서 나오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은 단락 단위로 봐야 클리어하다고 생각해서 단락을 가져왔습니다:

"Still to be noted is the immediate connection between, on the one hand, the elevation above the hundred dollars and finite things generally, and, on the other hand, hte ontological proof and the mentioned Kantian criticism of it... [according to Kant,] just as I cannot extract the possibility of the hundred dollars their actualiyt, I can just as little 'extract' God's existence from his concept. But the ontological proof consists precisely in thus extracting God's existence from his concept. Now, though there is of course truth to the claim that the concept is different fro being, God's difference from the hundred dollars and other finite things is yet greater. It is the definition of finite things that in them concept and being are different; that the concept and reality, soul and body, are separable; that they are therefore perishable and mortal. The abstract definition of God, on the contrary, is precisely that his concept and his being are unseparated and inseparable. The true [Kantian] critique of the categories and of reason is just this: to acquaint cognition with this distinction and to prevent it from applying to God the determinations and the relations of the finite."

즉, 첫문장부터 하나하나 살펴보게 되면, 헤겔은 이 단락에서 존재론과 칸트의 비판의 연결점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처음엔 칸트를 얘기하고, "그러나 존재론적 증명은..." 혹은 "But the ontological proof consists..."부터는 존재론적 증명이 왜 칸트의 비판이랑 상관이 없는지를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순수이성비판을 조롱하면서 끝나죠. 신과 이런 유한한 것들이 다르다는 것을 무시하고 extrapolate 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1. 논의를 간략하게 일부러 생략한 것이 맞습니다. 이 글은 정말로 현존재와 "어떤 것"의 intuitive gloss를 위해 쓴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발생/사멸은 헤겔이 좀 더 rigorous 하게 만들기 위해 집어넣은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존재가 무고 무가 존재라면, "존재로써의 무," "무로써의 존재"에만 도달하지, "무와 존재인 것"에 도달하지는 않습니다. 즉, 무가 존재가 되고 존재가 무가 되는 움직임이 서로 "마비" (paralyze, 21.93) 시키기 때문에 우리가 갖고 있던 생멸이 없어지고 현존재가 나오는 것이겠죠. 이 부분은 Winfield - Hegel's Science of Logic 59-68에 더 잘 써져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아주 중요한 부분은 아니고, 헤겔이 그냥 자기 책을 더 완벽히 쓰려는 노력으로만 보입니다.

규정성, 질/실재/부정은 지금 이 글에서 제 입장을 얼추 설명한 것 같지만, 조금 더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현존재는 존재이면서 무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존재는 존재하며, 현존재는 존재하지 않기도 합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존재하는 현존재는 실재이며 존재하지 않는 현존재는 부정이겠죠. 그렇지만 존재하는 현존재와 존재하지 않는 현존재는 구분이 불가능하며, "어떤 것"이 나옵니다. 하지만 말씀하신 것처럼, 실재와 부정의 차이는 실재하며,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것"은 단순히 실재와 부정이 아닌, 실재이면서 부정의 부정인 것입니다. 자신이 아닌 것이 아닌 것으로써 자신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100불이 있는 계좌가 "어떤 것"의 application으로 적합하겠지요 (이 개념적인 부분은 한 번 더 자세히 글을 따로 한 번 써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100불이 없는 계좌로써 100불이 있는 계좌가 되니깐요. 이것이 제가 이 글을 쓰게 된 계기입니다.

이걸 쓰면서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다시 한 번 답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P.S. Reality의 번역이 실재로 되나요?? 그럼 Actuality [Wirklichkeit]의 번역이 뭔지 궁금해지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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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보니 "개념적으로 구분이 안 된다"라는 표현이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debate의 30-40% 가 제가 부적절한 표현을 썼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일 수 있다고 생각했네요. 더 적절한 표현 있으시면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와람되이 제언하자면 영어로 써보시는 게 어떠신지요? 제 부족함으로 사실 글을 도무지 따라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김재권도 한국어를 거의 잊었다고 하던데, 그 분께 듣는 한국어 설명보다 영어 설명이 더 명징하겠지요. 글쓴이 분도 영어로 사유하기가 더 수월하신 것 같아 말씀드려 봅니다. 혹자는 칸트의 글이 길고 어려운 이유를 칸트가 철학적 사유를 라틴어로 하고 이를 다시 독어로 번역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더군요. 한국어를 연습하셔야 하는 이유가 없다면 영어로 철학적 사유를 해오셨을 글쓴이 분께서 영어를 사용하시는 게 더 공동의 논의를 위해 좋을 것 같습니다. 헤겔을 영어로 연구하는 분들의 어휘도 많이 배울 수 있을 것 같다는 개인적 욕심도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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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영어 글쓰기가 편하지만 다 한국어로 쓰길래 억지로 한국어로 썼거든요... 피는 한국인이라 눈치를 많이 봐서리... 다음에 참고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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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이 커뮤니티엔 영어로 읽고 쓰는 것에 큰 어려움이 없는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부담갖지 마시고 눈치보지 마시고 영어로 논의해주신다면 좋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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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rklichkeit는 주로 현실로 번역됩니다. 이따금씩 문맥에 맞춰 현실성 따위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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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갖고 있는 게 펠릭스 마이너 판이 아니라 주어캄프 판이라서 인용 쪽수에 차이가 나는 것 같습니다. 헷갈리실 테니 원문을 인용할 때는 영역본의 쪽수를 같이 표기하겠습니다.)

1. 일단 번역 관련한 문제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 가져오신 디조바니의 구절에 정확히 해당하는 부분을 명기하겠습니다.

논의되는 명제에 반해 성립되고 있는 심급들에서는, 어떤 것은 있든지 없든지 무관한 것으로 나타나지 않으며, 존재 혹은 비존재와 관련하여서가 아니라 다른 내용과 관계 맺는 그것의 내용과 관련하여 그러하다. 규정적인 내용이, 여하한 규정적인 현존재가 전제된다면, 이 현존재는 규정적이기 때문에 다른 내용과의 잡다한 관계 속에 놓이게 된다. 현존재는 그와 관계 맺는 특정한 다른 내용이 있든 있지 않든 무관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관계를 통해서만 현존재는 본질적으로 현존재인 것이기 때문이다. (WL, I, 87-88/SL, 63-64)

문제 삼으신 문장의 독일어 원문은 “es ist für dasselbe nicht gleichgültig, ob ein gewisser anderer Inhalt, mit dem es in Beziehung steht, ist oder nicht ist[.]”인데, “dasselbe”를 받는 명사가 “Inhalt”가 될 수는 없기 때문에 “내용”이 아니라 “현존재”가 무관한 것이 아니라는 번역이 맞습니다. 영역본은 “it is not a matter of indifference …”를 첨가하고 있습니다만, 틀린 번역이라거나 글의 요지를 결정적으로 바꾼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가져오신 두 번째 구절은 정확히는 실재와 부정의 구별이 “무상하고 지양된다”(nichtig und aufgehoben)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구별이 안 되는” 것과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특히나 현존재 이후에 등장하는) 범주들은 무차별적으로 동일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차이를 간직하면서 고차적인 범주 속에서 통일되기 때문입니다. 인용하신 문단 바로 밑에서 헤겔은 이렇게 말합니다.

구별들의 이 지양은 순전히 구별들을 되돌리고 도로 무르는 일이나 단순한 시작 자체로서의 현존재로의 회귀 그 이상의 것이다. 구별은 철회될 수 없다. 구별은 있기 때문이다. (WL, I, 123/SL, 88-89)

인용하신 구절에서 보이듯이 실재와 범주는 서로를 포함하지요. 양자의 차이가 보존되기 때문에 이 포함 관계는 무차별적 동일성이 아니라 질의 자기관계이고, 따라서 어떤 것이 도출 될 수 있는 것입니다.

2. 존재론적 신 증명을 헤겔이 비판하고 있다는 서술은 제 오류입니다. 존재론적 증명에 대한 헤겔의 입장은 제 위의 서술과 정확히 반대입니다. 인용하신 구절에 나와 있는 대로 헤겔에 의하면 무한자인 신의 개념은 100탈러를 비롯한 유한자들의 개념과 다른데, 칸트는 이 구별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개념과 실재가 분리되는 유한자의 경우와 달리, “신의 개념과 신의 존재는 분리되지 않고 분리될 수 없”(WL, I, 92/SL, 66)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의 개념은 그 현존을 포함하며, 존재론적 증명은 옳습니다. 나아가 헤겔은 여러 가지 신 증명 중 존재론적 증명만이 유일하게 참된 증명이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존재론적 증명은 처음에 기독교에서 캔터베리의 안셀무스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러고 나서 그것은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볼프에 의해 이후의 모든 철학자들에 의해 거론되었는데, 존재론적 증명만이 홀로 참된 증명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증명들과 나란히 열거되고 있다. (Hegel, G. W. F., “Ausführung des ontologischen Beweises in den Vorlesungen über Religionsphilosophie vom Jahre 1831”, Vorlesungen über die Philosophie der Religion II, Werke in zwanzig Bänden 17, Frankfurt: Suhrkamp, 1986, 529)

한데, 이와 별개로 헤겔의 비판점 중 하나는 현존재/비현존재의 구별과 존재/무의 구별을 혼동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내가 100탈러를 지니는지 지니지 않는지의 구별을 순전한 존재와 비존재로 밀어내는 기만이다.─”(WL, I, 89/SL, 64) 그리고 헤겔이 보기에 양자의 구별의 차이는, 존재와 무가 아무 차이도 지니지 않는 것과 달리 현존재/비현존재가 차이를 지닌다는 데 있습니다. yhk님께서는 현존재/비현존재가 개념적으로 구별이 안 되고 그 적용(application)에 있어서만 차이가 난다고 하셨지만, 해당 부분을 보면 정확한 요지는 “존재하다”라는 술어가 특정한 내용에 적용되었을 때 순수성을 잃어버린다는 것, 그리고 순수하지 않은 의미에서의 “존재하다”는 순수 존재가 아니라 현존재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적으로 앞 글에서 인용했던 부분을 다시 보겠습니다.

존재와 비존재는 동일하다. 따라서 내가 있든 있지 않든, 이 집이 있든 있지 않든, 이 100탈러가 내 수중에 있든 있지 않든 동일하다.─이 추론 혹은 전자의 명제의 적용은 명제의 의미를 완전히 바꿔버린다. 그 명제는 존재와 무의 순수 추상을 내포한다. 그러나 그 [명제의] 적용은 그로부터 하나의 규정적 존재와 규정적 무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미 말했듯이 규정적 존재는 여기서 논의거리가 아니다. 하나의 규정적인, 유한한 존재는 다른 존재와 관계 맺는 그러한 것이다. 그것은 다른 내용과, 전체 세계와 필연성의 관계 속에 있는 하나의 내용이다. (WL, I, 87/SL, 62)

헤겔에 의하면, 존재와 비존재의 동일성으로부터 특정한 어떤 것의 존재와 비존재의 동일성이 따라나오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100탈러 같은 구체적인 어떤 것에 관해 거론한 순간 ‘존재’라는 말은 순수 존재가 아니라 현존재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순수존재와 달리 어떤 것은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 있고, 그 관계가 어떤 것의 내용 자체를 구성합니다. “그러한 관계를 통해서만 현존재는 본질적으로 현존재”입니다. 결국 헤겔에게 현존재는 “있든 없든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관건이 되는 것은 존재/비존재, 현존재/비현존재의 개념적 차이이지 그것들의 특정한 적용 사례가 아닙니다. 이와 관련해서 윈필드의 설명(Winfleid, 2012: 56) 역시 참조할 수 있습니다.

덧붙이자면, 저 차이가 순수존재/순수무와 그 이후의 규정들을 가르는 중요한 특징입니다. 존재와 무는 무규정적이기 때문에 양자의 구별 역시 직접적으로 소멸하는 반면, 실재와 부정은 소멸하지 않고 단적으로 다른 것으로 남아 있으며, 이는 논리학에서 등장하는 최초의 규정적인 차이입니다(Houlgate, 2006: 307).

3. 이건 그저 개인적인 잡념이지만, 저는 “이 범주와 저 범주가 구분이 안 되고 그래서 새로운 범주가 나온다”는 식의 서술을 각 범주에다 일괄적으로 적용하는 게 옳은 설명 방식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설명이 각 범주들이 왜 이런 정의를 지니고 그게 어떤 귀결을 낳는지를 이해하는 데는 크게 도움이 안 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실재와 부정은 서로 구분이 안 되고 그래서 실재적이면서도 부정적인 것을 생각할 수 있는데 이것이 어떤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어떤 것이 왜 정의상 자기관계이고 이것이 어떻게 타자와 관계 맺는지가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저는 그래서 마지막에 말씀하신 것처럼

과 같은 포인트들을 정확히 집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 범주에서 다른 범주로의 이행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정확히 아는 것이니까요. 이런 이유에서, 정반합 같은 도식을 각 범주에다 적용하는 설명 방식은 단순명료하기는 하지만, 위와 같은 이유에서 그러한 설명들이 헤겔이 진짜로 거기서 하는 말을 잘 잡아내고 있는 건지에 대해 저는 좀 회의적입니다. 물론 헤겔이 제시한 논증의 주된 논점을 오해하지 않으면서 논의를 간단명료하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참 고민이 많이 되는 일입니다.

P.S. 정황을 보니 아마 해외에서 유학중이시거나 한 것 같습니다. 특별한 사정으로 인해 이런저런 철학 개념들에 해당하는 한국어 번역어를 잘 모르신다면, 적어도 핵심 개념들은 그대로 영어로 놔두시거나 그 번역어를 물어보셔도 될 것 같습니다. 국내 연구자들도 영미권의 연구 문헌들을 참조하기 때문에(현실적으로 참조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에 해당하는 적절한 번역어를 찾아 알려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P.S.2. reality(Realität)의 번역어는 "실재" 혹은 "실재성"이고, actuality(Wirklichkeit)의 번역어는 sophisten님 말씀대로 "현실" 혹은 "현실성"입니다.


Winfleid, D., Hegel’s Science of Logic: A Critical Rethinking in Thirty Lectures, Lanham, Maryland: Rowan & Littlefield, 2012.
Houlgate, S., The Opening of Hegel’s Logic: From Being to Infinity, West Lafayette, Indiana: Purdue University Press,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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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네, 사실 제가 서강올빼미에 온 지 얼마 안 돼서요... 그냥 흔히 "아 헤겔이 이랬구나~"라고 말하는 것에 만족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요약본을 던지고 가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는 차원이 다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른 분이 말씀하신 것처럼 영어가 편하다면 그냥 영어로 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하셔서 생각 중입니다 (영어도 잘하진 않지만요...). 적응하는 중이라고 귀엽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 (2입니다. 자동 수정돼서 4라고 뜨네요)"헤겔의 비판점"이라는 것이 헤겔을 향한 비판이라는건가요, 헤겔이 하는 비판이라는 건가요...? 독해력과 한국어가 둘 다 딸려서요... "헤겔이 하고 있는 비판"이라면 그 후에 나오는 것들이 제 의견과 동일합니다.

하지만 아직 "내용"을 언급하실 때 제대로 된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저희가 말하고 있는 부분에서 내용 (content) 은 100불로 알고 있고, 내용이 따로 나오는 곳은 본질론이기 때문에, 현존재, 어떤 것, 등의 내용이라고 말씀하시면 정확히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현존재와 어떤 것의 규정성 혹은 구조를 의미하시는 것일까요? 만일 그렇다면 내용과 현존재, 구별 못함 등의 논쟁은 그저 semantic dispute로만 될 것 같습니다. 그럼 너무 힘 빠질 거 같아서 아니길 바라고 있습니다.

  1. 이것 역시 semantic dispute로 가는 것 같습니다. 논문 형태에서 제대로 체계적으로 쓰는 게 아니라 인터넷 글이다 보니 한계가 있는 것 같네요. 아니면 제가 "구별 못한다"라고 말한 게 제대로 된 표현이 아닌 것 같기도 하고요.

P.S. 언제나 그렇듯이, 아무래도 처음 보는 사람과 얘기하면 수많은 semantic dispute를 견뎌내야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헤겔에 관한 대화는 더 그런 것 같고요. 오늘 대화 자체는 몇 개의 마이너한 포인트들을 빼면 크게 다르지 않아 크게 서로에게 배우는 것이 없었던 것 같지만, 오늘 대화를 통해 미래 대화가 이득이 될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앞으로 서강 올빼미에 자주 출현할 것으로 예상되니, 많이 얻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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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부분은 논점이 텍스트 해석과 얽혀 들어가 있어서 표현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왜 yhk9297님께서 "개념적으로 구별이 안 된다"라고 하셨는지는 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예컨대 현존재와 규정성은 둘 다 '존재와 비존재의 통일'인데, 양자의 차이는 존재에 강조점을 두느냐 아니면 비존재를 강조하느냐에 있으니까요. 그래도 사실 그 미묘한 강조점의 차이가 양자를 결정적으로 가르는 부분이라, 제 생각에는 (홀게이트가 강의에서 쓴 표현인데) '동일한 논리적 구조를 갖는다'처럼 표현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2. "헤겔이 하고 있는 비판"이 맞습니다. 제 이해와 동일하다고 하시니 2번 논점과 관련해서 더 이야기할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내용'에 대해서 덧붙이자면, 저 맥락에서는 '실재적인 차이를 지니는 규정성' 정도로만 이해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굳이 본질론의 내용을 끌어오자면 내용은 질료와 형식의 통일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 자체로 형식을 갖는 (추상적이 아닌) 실재적인 규정성이고, 따라서 형식과 매개되고 통일되는 것이겠습니다만, 저 구절은 이런 함축들을 굳이 모두 다 알아야만 이해가 되는 그런 구절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실 헤겔은 '내용' 외에도 '형식'(Form), '반성'(Reflexion), '구별'(Unterschied), '모순'(Widerspruch), 혹은 '정립하다'(setzen) 등 무수히 많은 본질론의 개념들을 끌어와 존재론에서 아주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참 난처한 일입니다만, 그리고 본질론의 내용을 알면 더 깊은 이해가 가능하겠지만, 그래도 저 표현들의 본질논리학적 의미를 정확히 모르더라도 존재론에서 어떤 논의가 이루어지는지 정도는 충분히 파악할 수 있지요. 저 구절도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3. 말씀하신 용어상의 논쟁이 소모적인 형태를 띠는 경우가 많지만, 그래도 이런 것들을 계기로 보다 신중하게 정확한 표현들을 사용하게 된다면 건설적이고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제가 데카르트에 관해 서술하기 위해 '회의주의자'라는 표현을 썼다가 이 표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방법적 회의를 사용했다'라고 표현을 고쳐 쓴다면, 실상 저는 데카르트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에 도달한 셈이지요. 이런 이유에서 저는 (특히나 난해한 용어가 범람하는 헤겔 철학을 다루는) 이 토론이 유익했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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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렇군요. 과제나 논문이 아니라 sloppy하게 썼는데, "동일한 논리적 구조"는 여기 게시물로도, 또 과제나 논문으로도 적절한 표현 같습니다. 여기서도 쓰고 rigorous 한 라이팅에서도 쓰면 좋겠군요.

  2. 전 헤겔이 본질론에서 말하는 것이 우리가 존재론에서 봤던 형태를 empirical content에 적용시키는 방식을 보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물론 내용을 끌어내니 empirical 하진 않겠지만요). 즉, 제가 이 글에서 "형식을 empirical content (e.g. $100) 에 적용시키는 것" 조차 하나의 thought category로 볼 수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훌게이트를 좋아하시니, 이 부분은 제가 훌게이트에 영향을 크게 받으신 것을 볼 수 있으실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용"이라고 하시면 전 존재론에서 다루는 형식으로 무언가 알 수 있는 걸 내포한다고 생각하여, 말로만 듣던 1세대 해석을 따르시는 것인지 궁금해서 여쭤봤습니다. 물론 1세대 해석을 모르긴 하지만, 그저 "어떤 것이 생각될 수 있고 존재할 수 있는 방식" 이 아닌 $100불 같은 내용에 직접적으로 무언가를 알게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역시 "실재적인 차이를 지니는 규정성"으로 보게 된다면, 역시 저랑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헤겔이 "내용"이라고 하면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과 다른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만요.).

말씀하신대로 나중에 나오는 내용들을 계속 가져다쓰죠. 그것이 헤겔을 의심의 여지없이 철학사 역대 최악의 writer로 만드는 것 같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200년 전으로 돌아가 한 마디 하고 오고 싶은데, 헤겔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으니깐 뭐... 어쩔 수 없죠.

  1. 네, 아무래도 제가 "한국어로 하는 커뮤니티"와 "영어로 쓰는 formal writing"에 엄격한 구분을 뒀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1에서와 같이 여기서 formal writing에서도 쓸 수 있는 좋은 표현들을 배워가니, 좋은 것 같습니다. 또, 며칠 지나고 느낀 것인데, 제가 이해가 완벽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 계속 얘기하고 듣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semantic dispute로 끝나더라도 도움을 받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서강 올빼미에 올리는 것들은 제가 이해도가 낮다고 생각해서 주로 올리니깐요 (적어도 저는 그렇습니다).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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