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속성과 관계
루이스는 속성과 관계를 모든 가능세계에서 존재하는 사례들의 집합을 통해 설명하고자 한다. 그는 ‘당나귀임’이라는 속성이 모든 가능세계에 존재하는 당나귀들의 집합이라고 주장하고, ‘이항 관계’라는 관계는 모든 가능세계에 존재하는 순서쌍들의 집합이라고 주장한다. 특별히, 루이스에 따르면, 가능세계의 실재성을 도입하는 이러한 양상 실재론은 서로 다른 속성과 관계가 ‘우연히 동외연적인(accidentally coextensive)’ 상황을 배제하기에 효과적이다. 가령, 심장을 가진 동물과 신장을 가진 동물이 우연히 우리 세계에서 동일한 동물이라고 하더라도, ‘신장을 가짐’과 ‘신장을 가짐’이라는 두 가지 속성이 동일한 속성인 것은 아니다. 다른 가능세계에서 심장을 가진 동물이 신장을 가진 동물이 아닌 사례가 존재하거나 신장을 가진 동물이 심장을 가진 동물이 아닌 사례가 존재한다면, 그 두 가지 속성은 서로 구분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루이스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속성: 속성은 이 세계와 다른 세계에서 그 속성을 지닌 모든 사례들의 집합이다. “[속성을 설명하기 위한] 가장 단순한 방안은 한 속성을 그 속성을 지닌 모든 사례들―이 세계와 다른 세계를 막론하고서, 그 모든 사례들—의 집합으로 취하는 것이다. 따라서 당나귀임이라는 속성은 모든 당나귀들의 집합, 곧 우리 세계의 당나귀들과 더불어 다른 세계들의 당나귀들의 집합으로 드러난다.”(Lewis, 1986: 50) 단순히 ‘이 세계’에 존재하는 사례들만을 고려할 경우, 서로 다른 속성들이 우연히 공외연적인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사례들까지도 고려할 경우, 이러한 상황은 사라진다. “[…] 양상 실재론에 따르면, ‘우연히 외연이 일치하는’ 이러한 속성들은 전혀 외연이 일치하지 않는다. 그 속성들은 우리가 그들의 다른 세계의 사례들을 무시할 때에만 그렇게 나타난다. 모든 사례들을 고려한다면, 두 속성이 외연은 일치하지만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는 경우는 결코 일어날 수 없다.”(Lewis, 1986: 51) 한 속성이 우리 세계에서는 우연히 특정한 사례들에 예화될 수 있더라도, 그 속성이 모든 가능세계에서 언제나 그 사례들에 예화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관계: 관계 역시 이 세계와 다른 세계에서 그 관계를 지닌 모든 사례들의 집합이다. “속성에 대해서처럼, 관계도 그러하다. 이항 관계의 한 가지 사례는 관계를 맺고 있는 것들의 순서쌍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그 관계를 그 관계를 지닌 사례들―이 세계와 다른 세계를 막론하고서, 그 모든 사례들—의 집합으로 여길 수 있다.”(Lewis, 1986: 52) 모든 가능세계를 고려하는 양상 실재론에서는 특정한 두 관계가 우리 세계에서 공외연적이라는 사실만으로 그 두 관계가 동일하다는 입장이 도출되지 않는다. “[…] 서로 다른 관계들이 우연히 공외연적일 수 있다는 것은 아무런 문제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단지 그 집합들이 지닌 이 세계의 부분(this-worldly part)들이 동일하다는 것을 말할 뿐이며, 집합에는 그 집합이 지닌 이 세계의 부분(this-worldly part)보다 더 많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Lewis, 1986: 52) 우리 세계에서 특정한 사례들 사이에 성립하는 관계가, 다른 세계에서도 언제나 그 사례들 사이에 성립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2. 명제
루이스는 명제가 일종의 속성이라고 주장한다. 다만, 그에 따르면, 다른 속성들이 세계 속 개체들에 의해 예화되는 것과 달리, 명제는 전체 세계에 의해 예화된다. 명제가 특정한 세계들에서 성립하고 특정한 세계들에서 참이 된다면, 속성이 그 속성을 지닌 개체들의 집합인 것처럼 명제도 그 명제를 성립시키는 세계들의 집합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 루이스의 관점이다. “나는 명제들을 특정한 속성들과 동일시하는데―곧 오직 전체 가능한 세계들에 의해서만 예화되는 속성들과 동일시한다. 그렇다면 속성들이 일반적으로 그 속성들의 사례들의 집합이라면, 명제는 가능한 세계들의 집합이다. […] 명제는 그 명제가 성립하는 세계임이라는 속성(the property of being a world where that proposition holds)과 동일한 것이며, 그리고 그것은 그 명제들이 성립하는 세계들의 집합(the set of worlds where that propositions holds)과 동일한 것이다.”(Lewis, 1986: 53-54)
물론, 명제들 중에는 전체 세계에 의해 예화된다고 보기 어려운 것들도 있다. 가령, 시제 명제(tensed proposition)는 특정한 시간에는 성립하고 다른 시간에는 성립하지 않는 특징을 지닌다. 또한 자기중심적 명제(egocentric proposition)는 특정한 사람에게는 성립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성립하지 않는 특징을 지닌다. 루이스는 우리가 ‘명제’라는 용어를 세계와 관련해서 사용하고자 할 것인지 사고의 대상과 관련해서 사용하고자 할 것인지에 따라, 시제 명제나 자기 중심적 명제를 ‘명제’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고 인정할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맥락에 상관 없이 특정한 세계에서 단적으로 ‘참’이나 ‘거짓’이 되는 것만이 명제라면 그 명제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명제가 아닐 것이지만, 사고의 대상으로 상정되는 것 일반이 명제라면 그 명제들도 명제일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명제’라고 올바르게 일컬을 만한 것들이 다른 어떠한 것과도 아니라 세계들과 관련해서 참이거나 거짓이어야 한다고 당신이 고집한다면, 적어도 일부 사고의 대상들은 명제가 아닌 것으로 판명된다고 말하는 편이 낫다. 반면 ‘명제’라고 올바르게 일컬을 만한 것들이 모든 사고의 대상으로 기능하는 것들이라고 당신이 고집한다면, 일부 명제들이 자기중심적이라고 인정하는 편이 낫다.”(Lewis, 1986: 55)
데이비드 루이스, 『세계의 다원성에 대하여』
3. 구조화
루이스는 ‘속성’이라는 개념의 의미가 일상적 용법에서나 철학적 용법에서 명확하게 확정되어 있지는 않다고 지적한다. “[…] ‘속성’이라는 단어와 연관된 단 하나의 역할이 충분히, 그리고 논란의 여지 없이 확정되어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 개념은 상당히 혼란스러운 상태에 있다.”(Lewis, 1986: 55) 그는 속성을 모든 가능세계에서 존재하는 사례들의 집합으로 이해하고자 하지만, 다른 방식으로도 속성을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특별히, 그는 ‘삼각형성’과 ‘삼변성’처럼 반드시 공외연적일 수밖에 없으면서도 여전히 서로 다른 것처럼 처럼 보이는 속성들이 어쩌면 구조화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한다. 가령, A를 ‘…의 각임(being an angle of)’이라는 관계로 정의하고, L을 ‘…의 변임(being a side of)’이라고 정의해 보자. 또한 개체들이 지닌 속성 F와 개체들이 지닌 관계 G 사이에서 고차적 관계 T가 성립하는 것은, F가 ‘정확히 세 개의 것이 관계 G를 맺는 어떠한 것임(being something which exactly three things bear relation G to)’이라는 속성일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만이라고 정의해 보자. 이러한 정의를 받아들인다면, ‘삼각형성(정확히 세 개 것이 각임의 관계를 맺는 어떠한 것임)’이라는 속성은 <T, A>라는 쌍으로 구조화될 수 있고, ‘삼변성(정확히 세 개의 것이 변임의 관계를 맺는 어떠한 것임)’이라는 속성은 <T, S>라는 쌍으로 구조화될 수 있다. ‘삼각형성’과 ‘삼변성’이라는 속성은 단순한 관계와 단순한 속성이 다시 서로 관계를 맺어서 이루어진 복잡한 속성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관계와 명제에 대해서도 동일한 이론을 적용해 볼 수 있다. 특별히, 우리는 명제도 일종의 속성이라는 사실을 바탕으로 가능세계에 존재하는 사례들의 집합으로부터 다양한 종류의 명제에 대한 유사-통사적(quasi-syntactic) 구조를 구성해 볼 수 있다. “만약 당신이 ‘명제’와 연관시키는 역할에서 어떠한 종류의 유사-통사적 구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핵심적이라면, 그래서 주어-술어 명제나, 부정 명제나, 연언 명제나 양화 명제에 대해 말하는 것이 유의미하다면, 세계들의 집합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가능체들(possibilia)**로부터의 더욱 복잡한 집합론적 구성물이 그 역할을 대신할 수 있다. 어떠한 경우에는 이러한 구성물들이 우리의 작은 언어의 문장들의 ‘의미’와 매우 유사할 수도 있다.”(Lewis, 1986: 57) 가령, N을 ‘하나의 명제’와 ‘그 명제가 성립하지 않는 모든 가능세계의 집합임’이라는 속성 사이의 관계로 정의하고, P를 하나의 명제로 정의해 보자. 이제 이러한 정의를 받아들인다면, 부정 명제적 명제는 <N, P>라는 순서쌍으로 구조화될 수 있다. 또한 A를 개체로 정의하고, P를 술어로 정의해 보자. 이제 이러한 정의를 받아들인다면, 개체 상항과 일항 술어를 지닌 주어-술어 명제는 <A, P>라는 순서쌍으로 구조화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속성, 관계, 명제의 의미를 어떠한 방식으로 설명하고자 하든지 다른 가능세계에서 존재하는 사례들인 ‘가능체들’은 결국 도입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즉, (a) 속성을 구조화되지 않은 사례들의 집합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입장은, ‘삼각형임’과 ‘삼변임’이 반드시 공외연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 두 속성을 동일한 속성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b) 속성을 구조화된 관계들로 이해하고자 하는 입장은, ‘삼각형임’과 ‘삼변임’이 <T, A>와 <T, S>라는 순서쌍에 따라 구분된다는 점에서, 그 두 속성을 서로 다른 속성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루이스는 그 두 입장 중 속성을 구조화되지 않은 사례들의 집합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입장을 더욱 선호하지만, 그는 두 입장이 반드시 대립되는 것이라고 평가하지 않는다. 오히려 두 입장 중 어느 한 쪽을 취하고자 하더라도 우리가 ‘가능체들’에 대한 이론이 전제해야 한다는 것이 루이스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이다. “짧게 말하자면, 속성, 관계, 명제의 구조화된 버전과 비구조화된 버전 사이에는 경쟁이 존재하지 않는다. 집합론과 양상 실재론의 결합된 자원을 고려하면, 우리는 두 버전을 모두 지닌다. (즉, 우리는 ‘속성’, ‘관계’, ‘명제’라는 용어와 연관된 역할의 양쪽 버전을 채우기에 적합한 후보들을 지닌다.) 두 버전 모두 **가능체들(possibilia)**을 필요로 한다.”(Lewis, 1986: 59)
4. 자연적 속성
어떠한 속성들은 자연의 이음매를 갈라내지 않고, 다른 속성들은 자연의 이음매를 갈라낸다. 전자는 자연의 이음매와 상관없이 아무렇게나 성립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수가 매우 풍부하지만, 후자는 반드시 자연의 이음매에 따라 성립해야 하기 때문에 그 수가 다소 희박하다. “풍부한 속성들은, 당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외재적(extrinsic)일 수도 있고, 얼마든지 초랑과 같이 자기마음대로 배열되어 있을(gruesomely gerrymandered) 수도 있고, 얼마든지 잡다하게 선언적일(disjunctive) 수도 있다. 그 속성들은 질적인 이음매를 전혀 고려하지 않으며, 사물들을 온갖 방식으로 갈라낸다. […] 희박한 속성들은 이야기가 다르다. 그러한 속성들을 공유하는 것은 질적 유사성을 만들어내며, 그 속성들은 질적인 이음매에서 사물들을 갈라내고, 내재적이며, 매우 구체적이고, 그 속성들이 지닌 사례들의 집합은 그 자체로(ipso facto) 완전히 잡다한 것이 아니며, 사물들을 완전하면서도 중복 없이 특징짓기에 꼭 필요한 만큼만 존재한다.”(Lewis, 1986: 59-60)
우리는 풍부한 속성들 중 자연의 이음매를 갈라내는 희박한 속성들을 ‘자연적 속성(natural property)’들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모든 속성들은 자연의 이음매를 갈라내는 속성들로부터 구성된다는 점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어느 정도 자연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자연의 이음매를 갈라내는 속성들은 그 이음매에 정확히 대응한다는 점에서 다른 속성들과는 달리 ‘완전히 자연적’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자연적 속성들과 그 밖의 속성들 사이의 구별은 정도를 허용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마 가장 좋을 것이다. 소수의 속성들은 완전히 자연적이다. 다른 속성들은, 비록 어느 정도 선언적이거나 외재적일 수 있지만, 완전히 자연적인 속성들로부터 지나치게 복잡하지는 않은 정의 가능성의 연쇄를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정도만큼, 적어도 파생적인 의미에서 어느 정도 자연적이다.”(Lewis, 1986: 61)
자연적 속성과 비자연적 속성들 사이의 구별은 ‘내재적 속성’들과 ‘외재적 속성’들 사이의 구별을 위한 토대를 제공한다. 내재적 속성들이 언제나 자연적 속성들인 것은 아니지만, 자연적 속성들은 언제나 내재적 속성들이라고 보이기 때문이다. “모든 내재적 속성이 완전히 자연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삼분적이거나-액체이거나-정육면체임이라는 속성이 그런 것처럼, 속성은 선언성 때문에 비자연적일 수 있는데, 그러면서도 그 속성을 구성하는 선언지(disjuncts)들이 내재적이라면, 그 속성은 여전히 내재적이다. 그러나 모든 완전히 자연적인 속성은 내재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충분히 그럴듯하다.”(Lewis, 1986: 61) 또한 우리가 ‘자연적 속성’들과 ‘내재적 속성’들 사이의 이러한 관계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두 사물이 ‘복제물(duplicate)’들이라는 말에 대한 정의를 내릴 수 있다. “[…] 두 사물이 복제물인 것은 (1) 그들이 정확히 동일한 완전히 자연적인 속성들을 가지고 있고, (2) 그들의 대응하는 부분들이 정확히 동일한 완전히 자연적인 속성들을 지니고 있고 정확히 동일한 완전히 자연적인 관계들을 맺고 있는 방식으로 그 부분들이 대응될 수 있는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만이다. […] 그렇다면 우리는 내재적 속성이란 두 복제물 사이에서 결코 다를 수가 없는 것이라고 계속해서 말할 수가 있다.”(Lewis, 1986: 62)
루이스의 양상 실재론은 자연적 속성들과 비자연적 속성들 사이의 구별을 원초적인 것으로 상정한다. 물론, 모든 철학자들이 이러한 구별을 루이스처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몇몇 철학자들은 ‘자연적 속성’과 ‘비자연적 속성’이라는 개념을 미리 전제하지 않고서도 그 구별을 설명할 수 있어야만 그 구별이 선결문제 해결의 오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는 입장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루이스는 ‘자연적 속성’과 ‘비자연적 속성’이라는 구별을 더 이상 환원하고자 하는 시도를 거부한다. 그는 그 구별이 너무나 원초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사유에서 명시적으로든지 암묵적으로든지 언제나 전제될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많은 철학자들은 자연적 속성과 초랑 같은 속성 사이의 구별에 회의적이다. 그들은 이러한 구별이 어떻게든지 그 구별을 전제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지 않다면, [그 구별이]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내 생각에, 불가능한데, 왜냐하면 우리는 끊임없이 그 구별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 자연적 속성과 비자연적 속성 사이의 구별을 사용하는 방식들 가운데 일부를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는 순환성 없이 그 구별을 정의할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을 갖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그 구별을 거부할 이유는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사실은 그 구별을―필요하다면, 원초적인 것으로서―받아들여야 하는, 이유이다.”(Lewis, 1986: 63)
5. 원초적 자연성, 보편자, 트롭
루이스는 자연적 속성들과 비자연적 속성들 사이의 구별을 원초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그 구별을 보편자 이론이나 트롭 이론이 설명할 수 있을 가능성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보편자 이론은 자연적 속성들이 보편자들에게 대응한다고 생각하고, 트롭 이론은 자연적 속성들이 트롭들에게 대응한다고 생각한다. 그 두 이론 사이의 차이는 동일한 자연적 속성을 지닌 서로 다른 두 가지 사례를 설명하는 방식에서 발생한다. 즉, 보편자 이론은 그 두 가지 사례가 동일한 하나의 보편자를 예화하고 있다고 논증하는 것과 달리, 트롭 이론은 그 두 가지 사례가 서로 다른 두 가지 복제 트롭을 지니고 있다고 논증한다. 가령, 두 가지 입자가 동일한 단위 양전하를 지닐 경우, 보편자 이론은 ‘하나의 동일한 보편자’가 그 두 가지 입자에 복수적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하지만, 트롭 이론은 하나의 입자가 지닌 ‘전하-트롭’과 다른 입자가 지닌 ‘전하-트롭’이 그 두 가지 입자에 개별적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 세 가지 대안―원초적 자연성, 보편자, 트롭―사이의 경쟁에서, 나는 우월함이 비슷하다고 생각하다 보니,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는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Lewis, 1986: 64)
그러나 루이스는 보편자 이론이나 트롭 이론이 양상 실재론을 부정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첫째로, 그는 그 두 이론이 이미 ‘가능체’들이라는 개념을 전제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 두 이론이 예화되지 않은 보편자들이나 트롭들도 존재할 수 있다고 인정한다면, 그 두 이론은 그 보편자들이나 트롭들을 일종의 ‘가능체’들로서 상정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전히 가능체들이 필요 것인데, 만약 우리가 이 세계에 이질적인 것으로서 예화되지 않은 속성들을 인정하고자 한다면 말이다.”(Lewis, 1986: 66) 둘째로, 그는 양상 실재론이 보편자 이론이나 트롭 이론보다도 설명력이 크다고 주장한다. 속성들의 종류가 무한히 다양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자연적 속성들에만 대응하는 보편자들이나 트롭들을 상정하는 입장보다는, 모든 종류의 속성들에까지도 대응할 수 있는 가능체들을 상정하는 입장이 속성들에 대해 더욱 포괄적인 관점을 제공할 것이기 때문이다. “보편자들이나 복제 트롭들의 집합은 풍부한 속성들로서 역할을 맡기에는, 심지어 지나치게 풍부하지도 않고 지나치게 희소하지도 않은 속성의 역할을 맡기에조차도 좋은 후보가 아닐 것이다. 그것들은 속성에 대한 더 포괄적인 이론에 유용한 부속물이지, 그 이론을 대체하는 것은 아니다.”(Lewis, 1986: 67)
참고
Lewis, D. On the Plurality of Worlds, Oxford: Basil Blackwell, 1986, pp. 50-6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