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기, 결론에서 나는 성서의 설화를 고수했다. 나는 금령을, 그리고 형벌에 대한 음성을 외부에서 오는 것으로 간주했다. 물론 이런 생각은 많은 사상가들을 괴롭혀온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것을 미소로써 대하기만 하면 된다. 순진함은 물론 말을 할 수 있다. 언어 속에서 그것이 정신적인 모든 것에 대한 표현을 소유하고 있는 한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저 아담이 혼잣말을 했다고 생각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의 결함, 즉 어떤 다른 사람이 아담이 이해하지 못한 것에 관해서 아담에게 말했다는 결함은 그렇게 해서 제거된다. 아담이 이야기할 수 있었다는 사실로부터, 그가 자신이 이야기한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결론은 훨씬 깊은 의미에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것이다. ”
이 부분에서 지금 제가 헷갈리는 건 키에르케고어가 성서를 아예 뒤집어서 “뱀은 아담을 유혹한 적이 없고, 아담이 혼잣말을 했을 뿐이다”라고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뱀이 아담에게 말한 것은 맞으나, 아담이 혼잣말을 했다고 생각하면 이 설화를 이해하기 쉬워진다”라고 말하는 것인가요?
키에르케고어는 창세기의 아담 이야기를 실제 있었던 사건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키에르케고어는 그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가령, 에덴 동산이 있었고, 뱀이 사람처럼 말을 하였고,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서 선악과를 먹었는지)에 대해 무관심합니다. 애초에 그 시대에는 이미 성서비평이 유럽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보니, 키에르케고어가 창세기를 문자적 사실로 강조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다지 놀랄 만한 일은 아닙니다.
오히려 키에르케고어는 '아담'이라는 인물이 모든 '인류'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게 되는 이야기 속에, 모든 인간이 겪는 실존적 상황이 상징적으로 투영되어 있다고 보는 거죠. 아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 수 있고,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되면 아담과 같은 모든 개개인들이 겪는 실존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키에르케고어는 이렇게 말합니다.
매 순간 개인은 자신인 동시에 전 인류이다. (쇠렌 키르케고르, 『불안의 개념』, 이동용 옮김, 세창출판사, 2024, 70쪽.)
아담은 최초의 인간이다. 그는 자신인 동시에 전 인류이다. (『불안의 개념』, 71쪽)
우리가 아담을 필요로 하는 것은 힘차게 생각에 임하기 위함이다. 아담의 존재 의미를 인류의 조상으로, 즉 그의 종족에서 인류가 탄생했다는 식으로, 게다가 그가 신과 처음으로 계약을 맺은 자라고 설명하는 한, 이런 교리적인 설명들을 떠올리는 한, 모든 것은 혼란 속에 빠진다. 아담은 본질적으로 인류와 다르지 않다. […] 간단히 말해, 그는 자신이면서 동시에 인류이다. 그래서 아담이라는 존재가 설명하고 있는 것은 인류인 동시에 그 반대도 되는 것이다. (『불안의 개념』, 71-72쪽 원저자 강조)
따라서, 물어보신 내용에 대해 답만 말씀드린다면, 키에르케고어는 "아담이 혼잣말을 했을 뿐"이라고 보는 쪽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에덴'이라는 장소가 있었고, 실제로 '아담'이라고 지칭되는 한 개인이 있었고, 실제로 그 개인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오히려 아담의 이야기가 인간이 겪는 내적 갈등의 상황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 그래서 모든 사람은 아담과 똑같은 방식으로 불안을 겪고 죄에 빠진다는 것이 키에르케고어의 요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