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들 1』 §43 - 신이성론과 관념론 비판, 그리고 그 타당성에 관하여 (1)

에드문트 후설의 1913년 저작『순수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의 이념들 I』(Ideen zu einer reinen Phänomenologie und phänomenologischen Philosophie I)은 전작 『논리 연구 II』에 이어 현상학을 본질학으로 정초짓고 현상학을 학문으로서 본격적으로 제시하려는(『이념들 I』 머리말, 55쪽) 책이다. 이 책에서 후설은 현상학적 철학을 기초지은 토대 위에서 기존의 관념론과 실재론 양자를 비판한다. 현상학은 그것들이 기존의 의미에서 쓰이는 한에서 '관념론'도 '실재론'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념들 I』의 43절에서는 먼저 신이성론, 즉 신은 유한한 인간과는 달리 무한한 존재이기에 외부 사물에 대한 "완전하고 충전적인 직관"이 가능하다는 신이성론과 관념론, 특히나 우리의 직관 작용은 한갓 (물자체에 대한) "표상(Vorstellung)" 내지 심상(Bild)이라는 관념론적 철학에 대해 비판한다.

  1. 신이성론 비판
    후설의 비판의 대상이 되는 신이성론이란, 신은 유한한 인간과는 달리 무한한 존재이기에 외부 사물에 대한 "완전하고 충전적인 직관"이 가능하다는 철학적 학설을 일컫는다. 그렇다면 이에 대해 후설은 어떻게 비판하는가? 후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절대적으로 완전한 인식과 그래서 또한 모든 가능한 충전적 지각의 주체인 신은, 물론 유한한 존재인 우리에게는 거부되는 바로 사물 그 자체에 관한 완전한 인식과 충전적 지각을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이치에 어긋난다. 이 견해에는 초월적인 것과 내재적인 것 사이의 어떠한 본질차이도 없음이 포함되어 있고, 요청된 신의 직관에는 공간사물이 내실적 구성요소이며 따라서 그 자체로 신의 의식의 흐름과 체험의 흐름에 함께 속한 하나의 체험이라는 사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물은 결코 체험의 내실적 구성요소일 수 없고, 원리적으로 체험에 초월적(초재적)이다(§41~42를 참조).]"
(『이념들 I』, 159쪽)

이때 우리는 후설에게서 흥미로운 전제를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후설이 "지향성(Intentionalität)"을 결코 인간의 본성에 국한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에게서 지향성은 인간에게뿐만 아니라 동물, 심지어 신에게도 타당한 개념이다.

"후설은 '의식하다'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물음에 몰두한다. 이미 언급되었듯이, 이러한 물음은 인류가 무언가를 의식할 수 있기 위해 충족되어야 하는 경험적 조건들을 분석하는 것과 관련된 것이 아니다. 이는 그것이 인간의 것이든 동물의 것이든 외계인의 것이든 상관없이 의식이라는 것 자체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분석하는 것과 관계한다."
(단 자하비,『후설의 현상학』, 28쪽)

정리하자면, 후설의 관점에서 신이성론의 오류는 내재적 대상의 본질과 초월적 대상의 본질을 혼동했다는 데 있다. 가령 우리의 사유작용 등의 내재적 대상은 완전한 충전성에서 주어지지만, 상자와 같은 초월적 대상은 언제나 음영적으로만 주어진다.

  1. 관념론 비판
    또한 후설은 전통적 형이상학의 "표상 이론" 내지 관념론마저도 비판한다. 비판의 대상으로서의 표상 이론은 우리의 지각이 사물 자체에 대한 지각이 아니라 표상(Vorstellung), 즉 사물 자체에서 파생된 이미지라는 생각에 기초한다. 이때 새로운 표상 이론, 즉 비관념론적인 표상 이론도 후설의 비판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

"공간사물은 지각된 것, 즉 그 생생함 속에 의식에 적합하게 주어진 것이다. 공간사물 대신 어떤 심상이나 부호가 주어진 것이 아니다. 지각작용을 부호의식이나 심상의식으로 삽입하면 안 된다.(...) 그런데 직접 직관하는 작용 속에 우리는 '그 자체'를 직관한다. 그 자체는 더 높은 파악이 아니라 직관하는 파악 위에 구축되고, 따라서 직관된 것이 어떤 것에 대한 '부호'나 '심상'으로 기능할 것은 전혀 의식되지 않는다. 바로 이 때문에 그것을 '그 자체'로 직접 직관되었다고 한다. 지각 속에 그 자체는 더욱 본래—기억이나 자유로운 상상 속의 '눈앞에 아른거리는' '현전화한' 이라는 변양된 특성에 대립해— '생생한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본질적으로 다르게 구축된 이 표상방식[현전화, 기억의 재생 등]과 이에 따라 상관적으로 이 표상방식에 상응하는 '대상이 주어져 있음'을 통상 혼동하면, 따라서 단적인 현전화를 상징화—심상화하는 상징화든 기호적 상징화든—와 혼동하고 더구나 단적인 지각을 이 심상화하는 상징화와 기호적 상징화 모두와 혼동하면, 이치에 어긋난다. 사물지각은, 마치 기억이나 상상 속에 있듯이, 비-현재하는 것(Nichtgegenwärtiges)을 현전화하지 않는다."
(『이념들 I』, 159~161쪽)

"무언가가 다른 무언가를 표상한다는 것(x가 y를 표상한다)은, 후설에 따르면, 문제의 대상이 갖는 본성적 속성이 아니다. 대상은, 그것이 붉고 연장성을 가지고 금속이라는 속성을 가질 때와 같은 방식으로 표상적이라는 속성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다. 두 개의 사물이 얼마나 닮았는가 하는 것과 상관없이 닮음은 하나의 사물을 다른 사물의 그림이나 상으로 만들지 못한다. 가령 똑같은 책의 두 복사본은 닮았을지 모르지만 이러한 사실이 하나를 다른 하나의 표상으로 만들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닮음은 상호적 관계이지만, 표상의 경우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만약 X가 Y를 표상하려면, X는 Y의 표상이라고 해석될 필요가 있다. 즉 X에 표상적 기능을 부여하는 것은 바로 해석이다. (...)

회화는 닮음을 구성하는 의식에 대해서만 닮음이다. 이 의식에서 일어나는 상상적 통각은 지각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이러한 상상적 통각이 비로소 지각적으로 현전하는 일차적 대상에게 상이라는 지위와 의미를 부여한다. 어떤 것을 상으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의식에 지향적으로 주어진 대상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이 후자의 대상[의식에 지향적으로 주어진 대상]을 또 다시 그 자체가 상을 통해서 구성된 것으로 만든다면, 혹은 단순한 지각에 '지각적 상'이 내재하며 이 상을 통해 지각이 '사물 자체'를 지시한다고 진지하게 말한다면, 우리는 한마디로 무한소급unendlicher Regme을 가질 것이다(Hua 19/437 cf. Hua 19/398)1.

후설의 분석은 표상적 지시가 기생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표상이라고 해석되는 대상은 우선 지각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 지각에 대한 표상 이론은 명백히 거부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표상이론의 주장은 지각 그 자체가 표상을 통해 가능하게 된다고 주장하고있기 때문이다. 만약 표상이 지각을 더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지향성을 전제한다면, 표상 이론은 무너지게 된다.
후설에 따르면, 우리는 '우선 그리고 대개' zunächst und zumeist 세계 속의 실제 사물로 향한다. 이러한 향함은 직접적이며, 다시 말해 어떠한 심적 표상에 의해서도 매개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표상들을 경험하고 있다고 말하기보다는, 우리의 경험은 제시적이며 세계를 어떠한 모습을 지닌 것으로 드러내준다라고 말할 수 있다."
(『후설의 현상학』, 37~39쪽)

다시 말해서 표상 이론은 '현전화'의 본질과 '지각/직관'의 본질을 혼동했다. 지각은 그 자체가 주어지는 것이며, 어떤 심상이나 이미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덧붙여서, 사실 관념론 자체가 후설의 에포케적 태도와는 대립되는 독단적 태도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후설의 현상학을 "반(反)관념론"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후설은 이미 자신의 저술 곳곳에서 자신의 현상학의 관념론적 측면을 인지하고 있었다.

"오직 관념론적 인식론만이 정합적이다(Hua 19/112)."

"지향적 방법들이나 초월론적 환원, 혹은 이 둘의 가장 깊은 뜻을 오해하는 사람들만이 현상학과 초월론적 관념론을 분리시키고자 한다(Hua 1/119)."

그러나 후설은 동시에 실재론적이기도 하다. 결국 후설 현상학을 "관념론인가 실재론인가"하는 이분법적 구도에서 이해하려는 것은 무의미하며 심지어 부당하다고 할 수 있다.

"만일 실재론이 '나는 이 세계 속에 살고 있는 인간이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 그리고 나는 거기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는 뜻, 그 이상을 의미하지 않는다면, 이것보다 더 강한 실재론은 있을 수 없다.(Hua 6/190)"

"어떠한 보통의 '실재론자'도 현상학적 '관념론자'(어쨌든 이 말은 내가 더는 사용하지 않는 말이긴 하지만)인 나만큼 현실적이고 구체적이지 못했다(Husserliana Dokumente III/7.16)."2

따라서 현상학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판단중지, 즉 기존의 도식적 틀에서 벗어나 텍스트 그 자체로 들어가 유영하려는 에포케적 태도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1. 관념론에 대한 후설의 비판은 타당한가?

(2부에서)


1 후설전집(Husserliana). 약칭 Hua, 수록권수/쪽수.

2 다음의 인용들은 모두 단 자하비, 『후설의 현상학』 127~128p에서 재인용한 것이다.

참고문헌
에드문트 후설, 『순수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의 이념들 1』이종훈 옮김, 한길사, 2021
단 자하비, 『후설의 현상학』 박지영 옮김, 한길사, 2017

사실 관념론에 대한 후설의 비판에 의미심장한(?) 부분이 있어 그것을 끌어 올려 한 편의 글을 쓰려고 했는데, 아무리 해도 잘 생각이 돌아가지 않아서 글을 2부로 나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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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정리를 잘 하셔서 읽기에도 그다지 어려움이 없었어요. 난해한 현상학 저서를 이해하고 잘 정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죠. 수고 많으셨고요,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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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타겟하는 신이성론, 표상이론, 관념론이 구체적으로 어떤 이론/사상들을 대상으로 하는 비판인가요? 설명이 너무 포괄적이어서 어떤 이론에 대한 비판인지 아리까리 하네요.

어쩌면 이것이 후설의 서술에서 기인한 문제일지도 모르겠어요. 예전에 후설을 읽었을 때 기억을 되새겨보면 다른 철학자들에 대한 후설의 비판은, 좋은 의미로는 철저하게 일관적이고, 나쁜 의미로는 답정너 수준으로 똑같은 비판을 반복한다는 것(예를 들면 자연주의 비판)과 이 글에서처럼 광역기를 너무 남발한다(?)라는 인상을 받았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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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설이 이 둘을 비판하는 것은 "초월(초재)적 대상"과 "내재적 대상"의 본질을 구별하려는 맥락(§41~42)에서인데, 그래서 저는 이것을 어떤 학설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앞서 말한 두 대상의 (영역)존재론적 차이를 나타내기 위한 비판적 언급으로 간주하고 읽었습니다. 후설의 비판들에 대해 Herb님께서 언급하신 부분은 이 텍스트에도 적용되는 문제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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