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과 실재』 1~3장 요약

고드프리스미스, 『이론과 실재』, 한상기 역, 서광사, 2014.

제1장 서론

이 책에서는 과학의 본성에 관한 100년 동안의 논쟁을 개관하고자 한다. 여기서는 과학을 대략 1) 세계에 대한 탐구, 2) 《과학 혁명》으로부터 내려온 연구적 전통 두 가지로 파악하고, 이들에 대하여 다루려 한다. 또한 많은 과학철학의 작업은 과학적 방법이나 과학의 논리적 구조를 밝히려 해왔는데, 저자는 과학적 전략을 기술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과학적 방법을 세우기엔 과학은 예측불가능한 측면이 많았고, 논리적 구조를 정식화하는 작업은 실제 과학과 동떨어지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앞으로 되풀이될 세 가지 과학에 대한 사상을 각각 알아보자. 셋은 서로 경쟁관계이기도 하지만 서로 융합될 수도 있다.

경험주의와 과학: 과학적 사고나 탐구는 일상적 사고나 탐구와 똑같은 기본 유형을 가지고 있다. 각각의 경우에 세계에 관한 진정한 지식의 유일한 원천은 경험이다. 그러나 과학은 조직적이고, 체계적이고, 경험에 특히 반응하기 쉬워 특별히 성공적이다.

수학과 과학: 과학을 다른 종류의 탐구와 다르게 만드는 것, 그리고 과학을 특별히 성공하게 만드는 것은 수학적 도구를 사용하여 자연세계를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사회적 구조와 과학: 과학을 다른 종류의 탐구와 다르게 만드는 것, 그리고 과학을 특별히 성공하게 만드는 것은 과학의 독특한 사회적 구조이다.

이후에는 16, 17세기 과학혁명의 개관이 이루어지나 생략함.

제2장 논리 + 경험주의

경험주의적 전통

논리 실증주의는 경험주의적 전통과 관련이 있다. 경험주의의 골자는 지식의 유일한 원천이 경험이라는 것이다. 17, 18세기의 경험주의를 지배한 “감각주의”에 따르면 감각들이 정신이 파악하는 모든 것이다. 감각주의는 감각 배후의 실재를 다루는 것은 무의미하며 세계 개념은 감각 집단 개념일 뿐이라는 “현상주의”로 이어진다. 이와 별개로 경험주의에 대비되는 견해로서 이성주의는 순수 이성이 경험에 의존하지 않고 지식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칸트는 이성주의와 경험주의를 절충하여, 모든 사고를 경험을 이해하는 데 사용하는 선험적 정신 구조와 경험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파악했다. 고드프리스미스는 경험주의가 아주 이상한 견해인 현상주의를 벗어나야 하고, 정신의 능동적인 역할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지적한다.

논리 실증주의

논리 실증주의는 빈 학단에 의해 창립된 일종의 경험주의이다. 논리 실증주의자들은 20세기 초 과학의 발전에 자극을 받았고, 논리학과 언어철학이 새로운 경험주의 철학의 앞길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특히 헤겔과 하이데거가 언어를 오용하고 있다는 이유로 이들을 비판했다.

논리 실증주의는 분석-종합 구별과 검증가능성 의미이론이라는 두 가지 언어에 대한 일반 이론에 기초한다. 분석문장은 세계와 무관하게 그 의미에 의해 옳거나 그른 문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분석적 참은 사실적 내용이 없다. 반면 종합문장은 그 의미와 세계가 실제로 어떻게 존재하는지 둘 다에 의해 옳거나 그르다. 논리 실증주의는 선험적으로 참인 문장은 모두 분석문장이라고 주장했다.

검증가능성 의미이론이란 문장의 의미를 아는 일은 그 문장을 관찰을 통해 어떻게 시험해볼지 아는 일이라는 주장이다. 이 원리에는 문장에 유/불리한 관찰적 증거만이 요구되므로, 완전한 증명을 의미하는 ‘검증’보다는 ‘시험가능성’이란 단어가 더 어울릴 것이다. 그러나 표준적인 표현은 ‘검증가능성 이론’이다. 여기서 검증가능성 이론은 실제적 검증가능성이 아니라 원리적 검증가능성을 다루고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논리 실증주의자들은 대부분의 전통철학이 검증가능성 원리에 위배되므로 무의미하다고 주장했다.

논리 실증주의자들의 과학상에서 그들은 “관찰적” 언어와 “이론적” 언어를 구별한다. 이는 보통 개별 용어들에 적용되는 구별로 여겨졌다. 슐리크는 감각을 언급하는 용어만이 관찰적이며 그 외는 모두 이론적이라 생각했지만, 노이라트는 일상적인 물리적 대상을 가리키는 용어가 관찰적이라고 주장했다. 카르납은 구별을 구획하는 방식이 여럿 있고, 목적에 알맞다면 무엇이든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논리 실증주의자들은 과학에 대한 논리학적 분석을 제시하고자 했다. 특히 귀납논리학을 발전시키는 것이 그들에게 중요했다. 과학에서 나타나는 논증은 결정적이지 않고 오류가능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논리 실증주의자들은 과학에 대한 논리학적 분석과 과학에 대한 역사적 · 심리적 탐구를 구분했다. 각각 ‘정당화의 맥락’과 ‘발견의 맥락’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내진다.

논리 실증주의에서 과학의 목적은 경험에서 유형들을 추적하고 예측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경험주의와의 연관성을 볼 수 있다.

논리 경험주의

콰인은 그의 논문 “경험주의의 두 가지 독단”에서 논리 실증주의에 중요한 비판을 제기했다. 첫째로 그는 전체론적 시험이론을 주장했다. 우리는 단일한 가설이나 문장이 아니라, 주장들과 가정들의 복잡한 망만을 시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복잡한 망만이 관찰에 대한 명확한 예측을 만들기 때문이다. 물론 논리 실증주의자들은 시험에 관한 전체론적 견해를 명시적으로 승인하고 있었지만, 검증가능성 원리가 문장을 하나씩 시험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그들은 비판을 피해갈 수 없었다.

둘째, 콰인은 분석-종합 구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앞서 말한 대로 우리의 모든 관념과 가설은 하나의 믿음의 망을 형성하고, 이 전체가 경험과 접촉한다. 이때 예기치 않은 관찰은 그 망에 변화를 촉구하는데, 분석적인 문장조차도 경험에 반응하여 수정될 수 있다. 이것은 분석문장의 정의에 반하는 것으로 보인다.

논리 실증주의는 더욱 온건한 형태인 논리 경험주의로 이행했다. 논리 경험주의자들은 분석-종합 구별을 거부하진 않았지만 최소한 미심쩍게 여겼다. 또한 검증가능성 이론은 전체론적 경험주의 의미이론으로 대치되었다. 이론은 전체로서 망을 이루고, 그 망의 의미 원천은 경험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관찰적 언어와 이론적 언어의 구분은 여전히 유지되었고, 논리학적으로 과학을 다루려는 태도 역시 변하지 않았다.

논리 실증주의는 관찰불가능한 것에 대한 기술이 관찰가능한 세계에 대한 추상적 기술일 뿐이라 여겼다. 논리 경험주의 또한 이러한 견해를 옹호했지만, 과학이론이 관찰불가능한 실재를 기술하려 한다는 생각을 점차 의식하게 되었다. 실제로 과학자들은 그런 방식으로 용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경험주의와 너무나 대치되는 의견이라 논리 경험주의자들에게는 옹호되기 어려웠다. 고드프리스미스는 논리 경험주의자들이 실재론적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과오”라고 평한다.

논리 경험주의는 1970년대에 거의 소멸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논리 경험주의의 기초를 형성했던 언어관의 붕괴 2) 전체론적 비판 3) 귀납논리학의 발전 실패 4) 과학철학에서 역사와 심리학의 새로운 역할 5) 과학적 실재론으로부터의 압력.

제3장 귀납과 확증

확증에 대한 논리적 분석

과학이론과 그를 지지하는 관찰증거 사이의 관계, 즉 확증(confirmation)이란 무엇인가? 논리 경험주의자들은 이론과 관찰에 대한 문장들 사이의 논리적 관계를 분석함으로써 확증을 다루고자 했다. 특히 과학의 논증은 대부분 비연역적이므로 귀납논리학이 큰 역할을 한다. 이번 장에서는 이를 살펴보겠다.

이 책에서는 확증을 다루는 데에 있어서 귀납, 투영법, 설명적 추리를 인정할 것이다. 1) 귀납은 때로는 비연역적 추리 전체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특수한 관찰을 근거로 하여 일반진술을 지지하는 추리’에만 귀납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겠다. 이것은 매거에 의한 귀납을 포함한다. 2) 투영법(projection)은 귀납과 유사한 추리로, 몇 가지 관찰된 사례로부터 다음 사례에 관한 예측에 도달하는 추리이다. 3) 설명적 추리는 근거가 되는 자료를 설명할 어떤 구조나 과정에 관한 가설을 추리하는 경우이다. 가설추리, 귀추,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리 등 많은 별칭이 있지만 여기서는 설명적 추리라고 부른다.

논리 경험주의자들은 확증을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접근했다. 헴펠이 했듯이 연역논리학처럼 귀납논리학을 정식화하거나, 카르납이 했듯이 수학적 확률(개연성) 이론을 적용하는 것이다. 이 장에서는 헴펠 접근방식의 맥락에서 문제를 검토할 것이고, 제14장에 가서야 개연성 이론에 대해 다룰 것이다.

본격적으로 논리 경험주의가 제시한 이론의 문제를 살피기 앞서 가설-연역주의(hypothetico-deductivism)라는 일상적인 견해를 검토해보자. 가설은 그의 논리적 귀결이 옳은 것으로 드러날 때 확증된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매우 합당해보이지만 심각한 결함을 갖고 있다. 임의의 이론 T와 임의의 관찰문장 S에 대하여 T는 T or S를 함축한다. 그렇다면 모든 이론은 임의의 관찰에 의하여 확증된다. 마찬가지로 임의의 이론 H에 대하여, 이론 T가 관찰 E를 함축한다면, T&H 또한 E를 함축한다. 그렇다면 T와 양립하는 모든 이론이 T의 관찰증거 E에 의하여 확증된다.

까마귀 문제

논리 경험주의자들은 가설-연역주의의 문제를 피하면서 확증에 대한 논리적 분석을 제시하려 했다. 그러나 여전히 문제가 발생했다. 이른바 “까마귀 역설”이다.

(ㄱ) G인 F에 대한 임의의 관찰은 “모든 F는 G이다”라는 일반진술을 확증한다. 그리고 (ㄴ) 가설 H를 확증하는 모든 증거는 H와 논리적으로 동치인 모든 가설을 확증한다. 아무 문제가 없어보이는 이 두 주장은 이상한 귀결을 갖는다. “모든 까마귀는 검다”는 “검지 않은 모든 것은 까마귀가 아니다”와 논리적으로 동치이다. “검지 않은 모든 것은 까마귀가 아니다”는 흰 신발에 대한 관찰에 의해 확증된다. 그렇다면 흰 신발은 “모든 까마귀는 검다”를 확증할 것이다. 이것은 이상하다.

까마귀 문제에 대해 다수의 해결책이 제시되었지만, 여기서는 고드프리스미스가 옳다고 생각하는 두 가지 사상만을 논한다. 이들의 핵심은 모두 (ㄱ)의 부정이다. 하나는 굿(I. J. Good)이 처음 제안한 것으로, 관찰증거가 이론을 확증하는지의 여부는 다른 요인들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1) 모든 까마귀는 검은데 몹시 드물거나, (2) 대부분의 까마귀는 검고 소수가 흰데 까마귀는 흔하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 경우 검은 까마귀에 대한 관찰은 (2)의 가설을 지지할 것이다. 굿의 해결책은 제2장에서 논의한 전체론을 상기시킨다.

다음 제안은 이러하다. 검은 까마귀나 흰 신발이 “모든 까마귀는 검다”를 확증하는지 여부는 내가 그 대상의 두 속성에 대해 배운 순서에 달려 있다. 내가 모든 까마귀는 검다는 가설을 세웠을 때, 누군가 와서 자신의 가방 속에 까마귀가 들어 있다고 주장한다. 이때는 가방에 대한 조사가 나의 가설을 논박할 잠재력을 가진다. 흰 까마귀가 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반면 누군가 와서 자신의 가방 속에 검은 무언가가 들어 있다고 주장할 때, 가방을 확인하더라도 나의 가설은 논박되지 않는다. 검은 것이 대체 무엇이든 나의 가설을 무너뜨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는 그것이 까마귀라고 판명되더라도 가설이 확증되지 않는다. 흰 신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관찰이 가설을 논박할 잠재력을 가질 때에만 가설을 확증할 수 있다는 견해는 확증이 시험과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굿맨의 “귀납의 새로운 수수께끼”

굿맨은 일차적으로 확증에 대한 순수 형식적 이론이 있을 수 없음을 보이려 했다. 논리 경험주의자들은 확증의 논리적 구조 혹은 형식을 제시하려 했지만, 그러한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음 논증을 보라.

논증 1
서기 2024년 이전에 관찰된 에메랄드는 모두 녹색이었다.
∴ 모든 에메랄드는 녹색이다.

논증 2
서기 2024년 이전에 관찰된 에메랄드는 모두 녹파색(grue)이었다.
∴ 모든 에메랄드는 녹파색이다.
(녹파색: 한 대상이 녹파색이다 ↔ 그 대상이 서기 2024년 이전에 처음 관찰되었는데 녹색이거나, 그 대상이 서기 2024년 이전에 처음 관찰된 것이 아닌데 푸른색이다.)

둘은 모두 동일한 형식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논증 1은 훌륭한 귀납논증으로 보이는 반면 논증 2는 그렇지 않다. 다시 말해 두 귀납논증이 정확히 똑같은 형식을 가지면서도 하나는 훌륭한 논증이고 다른 하나는 나쁜 논증일 수 있다. 따라서 귀납논증을 훌륭한 논증이나 나쁜 논증으로 만드는 것은 단순히 그 논증의 형식일 수 없다. 결과적으로 귀납과 확증에 대한 순수 형식적 이론은 있을 수 없다.

굿맨의 비판은, 그의 일차적 목표와는 별개로,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한다. 바로 논증 2는 왜 나쁜 논증인가라는 문제이다.

먼저 떠오르는 착상은 녹파색이라는 용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귀납논증에서 나타나는 용어는 시간에 의거해 정의되어선 안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굿맨은 용어가 시간에 의거해 정의되는지의 여부가 언어상대적 문제라고 주장한다. 녹파색과 동일한 방식으로 파녹색(bleen)을 정의한다면, 우리는 녹색을 녹파색과 파녹색을 사용하여 정의할 수 있다. (녹색: 한 대상이 녹색이다 ↔ 그 대상이 서기 2024년 이전에 처음 관찰되었는데 녹파색이거나, 그 대상이 서기 2024년 이전에 처음 관찰된 것이 아닌데 파녹색이다.) 따라서 처음의 견해를 고수할 경우, 녹파색과 파녹색을 기초적 용어로 받아들이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오히려 논증 1을 나쁜 논증으로, 논증 2를 훌륭한 논증으로 이해할 것이다.

그래서 많은 철학자들은 녹색임(greenness)이 세계의 객관적 속성인 반면 녹파색임(grueness)은 그렇지 않다고 하거나, 녹색 대상들은 자연종(실재하는 유사성에 의해 통합되는 종류)을 이루는 반면 녹파색 대상들은 그러지 않는다는 식으로 속성과 집합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따라서 “훌륭한 귀납은 자연종을 드러낸다고 믿을 만한 용어들을 사용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이러한 견해는 실재하는 속성이나 자연종에 대한 오랜 논쟁으로 이끌게 된다.

16개의 좋아요

감사합니다!! 잘 읽겠습니다

4개의 좋아요

여기서 "T or S"라는 진술은 어떻게 이해해야 되나요? 이 진술은 T를 문장처럼 다루고 있지만 T는 이론이잖아요? "이론 T에 속하는 모든 문장과 더불어 문장 S는 참이다."라고 이해하면 될까요?

1개의 좋아요

녹색을 제 머릿속에 그릴 때는 그 색이 시간에 따라 달라지지 않지만, 녹파색은 특정 시각의 이전과 이후에 각각 해당하는 색을 서로 달리 그려야 돼요.


음, 그런데 해커 뉴스에서 방금 본 다음 사이트 때문에 초록색과 파랑의 구별이 별로 쉽지 않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네요.

1개의 좋아요

"이론을 나타내는 문장"이나 "관찰을 나타내는 문장"을 줄여서 "이론"과 "관찰"이라고 바로 적기도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이론은 형식논리학에서의 이론과 다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과학에서 흔히 말하는 이론이나 가설들을 생각해보시면 좋을 듯합니다. (뉴튼 법칙, 케플러법칙, 상대성이론, DNA구조, 통계적 가설 등...) 그래서 T or S라는건 결국 문장논리의 P∨Q랑 같은 것을 나타냅니다 ㅎㅎ

3개의 좋아요

약간 곁가지로 새는 의문이지만, 색채와 관련된 속성을 세계의 객관적 속성이라고 보는 철학자가 정말 많을까요? 색채 구분이 '자연종'이나 '자연의 결'에 근거하고 있다는 주장이 저에게는 좀 낯설어서요. 오히려 암스트롱처럼 실재론을 강하게 옹호했던 철학자조차 이런 주장을 거부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보니, 색깔을 세계의 객관적 속성으로 보는 입장이 과연 일반적일지 의문스러워서요.

2개의 좋아요

@YOUN 님이 말씀하신게 평소에 저도 가졌던 의문이었는데요. D.J. Chalmers의 서술을 가져와 보았습니다 ("Perception and the Fall from Eden", 2006)

[p.55] Intuitively, these properties are color properties: a phenomenally red experience plausibly attributes redness, for example. [...] One might hold that the properties attributed are physical properties: something along the lines of a surface spectral reflectance. One might hold that the properties attributed are dispositional properties, involving the disposition to cause a certain sort of experience in appropriate conditions. One might hold that the properties attributed are mental properties of some sort: perhaps properties that are actually instantiated by one’s experiences or by one’s visual fields. Or one might hold that the properties instantiated are primitive properties: simple intrinsic qualities, [...]

[p.55] Each of these views is a version of the Russellian hypothesis: we might call them physicalist, dispositionalist, projectivist, and primitivist versions of Russellianism about phenomenal content. [...] Each of these views is held by some philosophers. For example, the physicalist view is held by Tye (1995); the dispositionalist view is held by Shoemaker (2001); the projectivist view is held by Boghossian and Velleman (1989); and the primitivist view is held by Maund (1995).
[각주: The physicalist view is also held by Byrne and Hilbert (2003), Dretske (1995), and Lycan (1996). Versions of the dispositionalist view are also held by Egan (forthcoming) and Kriegel (2002). Versions of the primitivist view are also held by Campbell (1993), Holman (2002), Johnston (forthcoming), McGinn (1996), Thau (2002), and Wright (2003). See Stoljar (forth- coming) and Chalmers (2004a) for more discussion of these alternatives.]

[p.66] Here, I think the answer is clear. The view of content that most directly mirrors the phenomenology of color experience is primitivism. Phenomenologically, it seems to us as if visual experience presents simple intrinsic qualities of objects in the world, spread out over the surface of the object. When I have a phenomenally red experience of an object, the object seems to be simply, primitively, red. The apparent redness does not seem to be a microphysical property, or a mental property, or a disposition, or an unspecified property that plays an appropriate causal role. Rather, it seems to be a simple qualitative property, with a distinctive sensuous nature.

제가 이해한 것이 맞다면, 이 주장은 Primitivism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고, 차머스 본인이 지지하고 있는 직관입니다. 물론 차머스는 지각내용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다원주의적 입장이라서, 다른 입장들이 가지고 있는 직관들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지각내용에 대한 "현상학적 접근"이 보여주는 직관을 제대로 포착하기 위해서는 Primitivism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특히, "의식에 현전하는 바가 실재 자체의 속성이다" 라고 주장하고 싶어하는 실재론자들은 특히 이것을 지지할 것 같습니다.

4개의 좋아요

제가 좀 오해할 만하게 적은 것 같습니다. 원래의 취지는 많은 철학자들이 '녹색임이 세계의 객관적 속성이고 녹색 대상들은 자연종을 이룬다는 식의 견해'와 같이 속성이나 자연종에 초점을 맞추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말이었습니다. 살짝 수정해야겠네요

1개의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