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식하지 않고 공부하는 방법?

안녕하세요. 논리학, 수학철학, 언어철학 등 영미철학을 주로 공부하고 있는 철학과 학부생입니다.

이번 학기에 수강하는 강의의 과제를 하느라 드레이퍼스 & 테일러의 『실재론 되찾기』 (이윤일 역)를 읽고 있는데, "내가 철학과 학생이 맞나?" 싶을 정도로 글이 도저히 읽히지 않아서 굉장히 당황스러운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드레이퍼스 & 테일러가 비판하는 정확히 그런 관점에 너무 깊이 빠져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드네요.

그래서 질문은...영미철학 계통의 텍스트들에만 익숙한 사람이 『실재론 되찾기』 같은 글들을, 혹은 후설, 하이데거, 가다머 등의 계열의 철학들을 재미있게 공부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같은 경험을 하셨던 선배님들이 계시다면, 혹은 해당 분야를 전공하시는 선생님들이 계시다면, 조언을 얻고 싶습니다.

딱히 영양가 없는 투정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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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이퍼스와 테일러의 논의는 대륙철학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영미철학 내부의 맥락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후설, 하이데거, 가다머를 통해서 접근하시기보다는, 콰인 이후 분석철학의 발전 경향을 염두에 두시면서 읽으시는 것이 더욱 좋을 거라고 생각해요.

콰인이 한편으로는 "On What There Is" 같은 논문을 통해 분석철학에 형이상학을 새롭게 도입한 인물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Two Dogmas of Empiricism"이나 "Ontological Relativity"를 통해 분석철학 내부에서 (대륙철학과 유사한 형태의) 아주 급진적인 형태의 주장들을 제시한 인물이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콰인을 통해 오늘날 '분석적 형이상학'과 '신실용주의'라는 완전히 상반된 것처럼 보이는 사조가 동시에 성립했다고 할 수도 있죠.

드레이퍼스와 테일러의 논의도 신실용주의에서 파생되어서, 신실용주의와 대륙철학 사이의 연결점에 근거를 두고서 전개되는 논의입니다. 그래서 영미철학을 배경으로 공부하셨다면, 후설, 하이데거, 가다머의 철학을 직접 읽으시기보다는, 콰인으로부터 시작되어서 데이비슨과 셀라스로 이어지는 계열의 철학을 읽어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게다가 이쪽 계열의 인물들은 모두 논리학, 수학철학, 언어철학에 한 획을 그은 철학자들이기도 하니, 공부하시는 분야와도 연결점이 있을 거예요. (실제로, 저 책의 역자이신 이윤일 교수님도 더밋, 퍼트남, 데이비슨 같은 영미철학자들을 전공하신 분이세요.)

W. V. Quine, "Two Dogmas of Empiricism, From a Logical Point of View, Second Edition, New York: Harper & Row, 1961, 20-46. (윌러드 밴 오먼 콰인, 「경험주의의 두 가지 도그마」, 『논리적 관점에서』, 허라금 옮김, 1993, 35-66.)
W. V. Quine, "Ontological Relativity", The Journal of Philosophy, Vol. 65(7), 1968, 185-212.

D. Davidson, "On the Very Idea of a Conceptual Scheme", Inquiries into Truth and Interpretation : Philosophical Essays, Oxford: Clarendon Press, 1984, 183-198. (도널드 데이비슨,「개념적 도식이라는 바로 그 생각에 대하여」, 『진리와 해석에 관한 탐구』, 이윤일 옮김, 나남, 2011, 295-318.)
D. Davidson, "A Coherence Theory of Truth", Subjective, Intersubjective, Objective, Oxford: Clarendon Press, 2001, 137-153 (도날드 데이빗슨, 「진리와 지식의 정합 이론」, 『주관, 상호주관, 객관』, 김동현 옮김, 느린생각, 2018, 268-301.)

W. Sellars, Empiricism and the Philosophy of Mind, 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 1997.

R. Rorty, Philosophy and the Mirror of Nature,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78; 리처드 로티, 『철학 그리고 자연의 거울』, 박지수 옮김, 까치글방, 1998.
R. Rorty, Consequences of Pragmatism,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리처드 로티, 『실용주의의 결과』, 김동식 옮김, 민음사, 1996.

H. Putnam, Reason, Truth and Histor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1; 힐러리 퍼트넘, 『이성, 진리, 역사』, 김효명 옮김, 민음사, 2002.
H. Putnam, “Realism with a Human Face”, Realism with a Human Face, J. Conant (ed.), Cambridge, Massachusetts, and London, England: Harvard University Press, 1990, 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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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대륙철학 계열의 논의들도 살펴보고 싶으시다면,

를 추천드립니다. 이 책들을 읽으실 때 주목하셔야 할 '포인트'가 있다면, '실증주의(positivism)'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어요. 콰인의 철학이 그의 스승 카르납으로 대표되는 20세기 전반의 '논리실증주의(logical positivism)' 혹은 '논리경험주의(logical empiricism)'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것처럼, 후설과 그의 계승자들의 사유도 '실증주의'를 공격한다는 점에서 맥락을 같이 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그 두 사조가 얼핏 다른 것처럼 보이는 것에 비해 사실 아주 공통적인 목표와 성향을 지닐 수 있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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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 이런 누추한 질문에 귀한 답변이... 정말 감사드립니다.

제 생각보다 현대 분석철학적 논의와 연관이 훨씬 깊은 글이군요. 이러한 배경 없이 읽기 시작해서 더 읽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과제로 고통받고 있는 수업이 후설~하버마스를 다루는 수업인지라 대륙철학 계열의 논의도 곧 (학기말 시험을 위해) 다시 살펴봐야 하는데, 추천해 주신 자료들 참고하여 열심히 공부해 보겠습니다.

공부에 도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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