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학적 해석학에서 분석적 해석학을 향하여: 초월론적 사유에 대한 비판」(박사학위논문, 연세대학교, 2026)

저의 논문 「현상학적 해석학에서 분석적 해석학을 향하여: 초월론적 사유에 대한 비판」(박사학위논문, 연세대학교, 2026)이 RISS에 업로드되었습니다. 하이데거와 가다머의 현상학적 해석학이 직면한 난점들을 비트겐슈타인과 데리다의 분석적 해석학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내용입니다. 저는 (a) 현상학적 해석학이 칸트의 ‘초월론적 사유’를 계승하고 있다는 점을 설명하였고, (b) 초월론적 사유는 인식의 가능 조건에 대한 원본적 ‘봄’을 상정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으며, (c) 1960년대 후반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현대 해석학 논쟁에서는 원본적 ‘봄’의 가능성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지적하였습니다. 그 비판에 대해 해석학이 올바르게 대답하기 위해서는, (d) 원본적 ‘봄’에 호소하고자 하는 현상학보다도 ‘치유적 분석’을 수행하고자 하는 후기 분석철학이 해석학과 동맹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면서, (e) 비트겐슈타인과 데리다의 사유로부터 치유적 분석에 근거한 ‘분석적 해석학’을 향하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논증하였습니다.

국문 요약

1960년대 후반부터 해석학은 크게 두 가지 비판에 직면하여 자기 자신을 새롭게 정당화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첫 번째 비판은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에 대한 재발견으로부터 나타난 것으로서, 현상학의 원본적 ‘봄’을 통해 우리의 삶을 반성하여 해석학을 정초하고자 하는 시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두 번째 비판은 도넬란, 크립키, 퍼트넘의 직접적 지시 이론으로부터 나타난 것으로서, 현상학의 원본적 ‘봄’을 통해 대상의 ‘의미’로부터 대상의 ‘지시체’를 고정하고자 하는 시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그 두 가지 비판은 현상학을 토대로 해석학을 옹호하는 하이데거와 가다머의 ‘현상학적 해석학’이 오늘날 여전히 유지될 수 있는지를 고민하도록 만든다. 특별히, 원본적 ‘봄’을 통해 인식의 가능 조건에 도달하고자 하는 현상학의 ‘초월론적 사유’ 자체가 자기모순에 빠지지 않는지를 검토하도록 만든다. 본고는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해석학이 현상학보다는 분석철학과 결합하여 ‘분석적 해석학’으로서 성립할 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주장을 더욱 철저하게 전개할 수 있다고 제안한다. 초월론적 사유를 계승하고자 하는 현상학은 인식의 가능 조건에 대한 원본적 ‘봄’을 포기할 수 없고(제Ⅰ부), 원본적 ‘봄’에 호소하고자 하는 현상학적 해석학은 결국 자기모순을 극복하기 어렵지만(제Ⅱ부), 분석적 해석학은 아무런 원본적 ‘봄’에도 호소하지 않고서도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제Ⅲ부).

제Ⅰ부는 현상학이 ‘초월론적 사유’로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초월론적 사유는 ‘대상’에 대한 인식을 넘어서 그 인식의 ‘가능 조건’에 대한 인식을 수행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칸트가 인식의 가능 조건에 대한 탐구를 바탕으로 이성의 한계를 규정하고자 하는 작업을 제시한 이후로, 철학의 역사에서는 칸트의 초월론적 철학을 더욱 철저하게 계승하고자 하는 다양한 입장이 등장하였다.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 역시 칸트의 초월론적 철학을 따라 인식의 가능 조건을 해명하고자 하는 일종의 초월론적 사유이다. 다만, 칸트가 순수 수학과 순수 자연과학을 사유의 모범으로서 의심 없이 전제한 상태에서 인식의 가능 조건을 도출하고자 한 것과 달리, 후설과 하이데거는 순수 수학과 순수 자연과학으로 환원되지 않는 사유를 더욱 강조하고자 한다. 그들은 인식의 가능 조건에 대한 원본적 ‘봄’으로부터 윤리, 예술, 종교 등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수많은 사태 영역을 드러내고자 한다. ‘초월론적 사유의 원형’은 이미 칸트의 초월론적 철학에서 나타나지만(제1장), 후설의 현상학은 칸트의 초월론적 철학에서 ‘과학주의’를 제거하는 방식으로 그 사유를 급진화하고자 하고(제2장), 하이데거의 현상학은 다시 후설의 현상학에서 ‘순수 의식’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그 사유를 급진화하고자 하면서(제3장), 오늘날 현상학은 초월론적 사유를 통해 우리의 삶을 조명하고자 하는 ‘사람의 얼굴을 한 초월론적 사유’로 나아가고 있다(제4장).

제Ⅱ부는 현상학으로부터 해석학을 전개하고자 하는 ‘현상학적 해석학’이 자기모순에 빠진다고 지적한다. 해석학은 슐라이어마허와 딜타이를 통해 성서나, 법전이나, 문학을 올바르게 독해하기 위한 ‘해석의 방법론’으로 제시되었지만, 하이데거와 가다머를 통해 우리의 삶을 새롭게 사유하기 위한 ‘해석의 존재론’으로 확장되었다. 현상학의 원본적 ‘봄’에 근거하여 우리의 삶을 바라볼 경우, 단순히 성서나, 법전이나, 문학만이 해석의 대상인 것이 아니라, 모든 대상이 해석의 대상으로 드러난다는 것이 하이데거와 가다머가 강조한 주장이다. 그러나 현상학이 우리의 삶에 대한 원본적 ‘봄’을 수행하고자 하고, 해석학은 우리의 삶을 끊임없는 ‘해석’의 과정으로 기술하고자 한다면, 현상학과 해석학이 서로 결합할 수 있는지는 그다지 분명하지 않다. 현상학은 원본적 ‘봄’만큼은 순수한 사실에 대한 인식이라고 상정해야 하는 것과 달리, 해석학은 어떠한 ‘봄’도 순수한 사실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고 지적해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하이데거와 가다머는 모든 ‘봄’이 선입견을 인식의 가능 조건으로 삼아 성립하는 해석이라고 강조하면서도 정작 현상학의 원본적 ‘봄’만큼은 아무런 선입견 없이 성립하는 인식인 것처럼 묘사한다는 점에서 자기모순에 빠진다(제5-6장). 리쾨르, 바티모, 하버마스, 데리다, 투겐트하트 등 가다머 이후 해석학을 고민하는 인물들은 하이데거와 가다머의 자기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제7-8장).

제Ⅲ부는 분석철학으로부터 해석학을 전개하고자 하는 ‘분석적 해석학’이 현상학적 해석학을 극복하는 새로운 길을 열어준다고 논증한다. 초기 분석철학은 ‘검증 가능성’이라는 기준을 자명하게 상정한 상태에서 우리의 언어의 ‘참/거짓’과 ‘유의미/무의미’를 평가하고자 한 사조였지만, 후기 분석철학은 ‘검증 가능성’이라는 기준을 새롭게 검토하는 과정에서 순수한 사실이 존재한다는 입장에 대해 자주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특별히, 비트겐슈타인, 콰인, 셀라스는 우리의 언어가 수리논리학과 자연과학에 따라 단일한 방식으로 환원되어야 한다는 가정을 무너뜨려 각각의 언어가 받아들이고 있는 다양한 규칙과 각각의 언어가 받아들여야 하는 다양한 사실을 드러낸 것으로 유명하다. 아무런 원본적 ‘봄’에도 호소하지 않고서도, 각각의 언어가 받아들이고 있는 다양한 규칙을 전제로 삼아, 각각의 언어가 받아들여야 하는 다양한 사실을 결론으로 도출하는 것만으로도, (a) 순수한 사실을 발견하고자 하는 시도에 전제된 잘못된 가정을 해소할 수 있고, (b) 우리의 삶을 끊임없는 해석의 과정으로 기술할 수 있다는 것이 그들로부터 등장한 ‘치유적 분석’을 통해 밝혀진다. 해석학이 후기 분석철학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치유적 분석’의 방법을 수용하고 나면(제9-10장), 해석학은 우리의 삶을 원본적 ‘봄’을 통해 바라보고자 하는 시도를 벗어나 자기 자신을 더욱 철저하게 정당화할 수 있다는 것이 ‘분석적 해석학’이 제시하는 전망이다(제11-12장).

이번 논문은 비트겐슈타인, 가다머, 데리다 사이의 유사성을 해명한 저의 석사학위논문과도 매우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솔직히, 저는 석사학위논문을 완성하고서 수많은 후회를 하였습니다. 저의 석사학위논문의 주제는 그 당시의 제가 소화하기에는 너무 방대한 것이었다 보니, 석사과정을 졸업한 이후에 그 글을 볼 때마다 아쉽거나 부족한 부분이 자꾸 눈에 띄었습니다. 그래서 박사과정에 입학하면서는 ‘다시는 감히 그런 야심찬 주제의 글을 학위논문으로 쓰지 않으리라!’라고 혼자 다짐하였습니다. (처음 박사과정에 입학하던 시기만 해도, 저는 브랜덤의 추론주의를 바탕으로 ‘거짓’ 혹은 ‘반증’의 가능 조건에 대해 설명하는 글을 써야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지도교수님이신 이승종 교수님께서 제가 종종 드러내는 ‘야심찬’ 기획을 적극적으로 옹호해주신 데다, 저 역시 이승종 교수님의 『데리다와 비트겐슈타인』과 『크로스오버 하이데거』 등의 저서에서 드러난 대륙철학과 영미철학의 ‘크로스오버’ 기획에 매료되어서, 결국 비트겐슈타인, 가다머, 데리다를 비교하는 글을 다시 한번 학위논문으로 작성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저의 선택이 과연 올바른 것이었는지, 그리고 저의 논문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 것인지 솔직히 여전히 확신하기는 어렵지만, 개인적으로는 석사과정 시절부터 지금까지 거의 10년 가까이 고민한 주제를 드디어 어느 정도 일단락한 것 같아서 현재로서는 후련한 마음입니다. 저의 논문 앞부분에 적힌 ‘감사의 글’에는 논문을 작성하기까지의 과정이 대략적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감사의 글

학위논문을 완성하기까지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본문을 글로 작성한 것은 박사과정 학점 이수가 끝난 이후부터였지만, 내용을 머릿속으로 구상한 것은 석사과정에 들어온 이후부터였습니다. 석사과정에서 제가 쓴 첫 학술지 논문이 가다머의 언어철학과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을 비교하는 내용이었고, 박사과정에서 제가 쓴 마지막 학위논문이 가다머의 현상학적 해석학과 비트겐슈타인의 분석적 해석학을 대조하는 내용이다 보니, 지금 돌이켜 보면 저는 대학원 시절 내내 동일한 주제를 맴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과정동안 수많은 분들이 저에게 놀라운 통찰과 영감을 불어넣어주셨고, 날카로운 비판과 조언을 보내주셨고, 따뜻한 지지와 격려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분들 중에서도 학위논문을 완성하기까지 직접적으로 커다란 도움을 주신 분들께 깊이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이승종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2021년에 한국 분석철학회 대학원생분과 제12회 워크샵에서 「현상학적 해석학에서 분석적 해석학으로」라는 짧은 글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그 글은 제가 오랫동안 막연하게 떠올린 아이디어들을 어설프게 정리한 내용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이승종 교수님께서 그 글을 자비로운 시선으로 읽어주셔서 저에게 연세대학교 박사과정 진학을 권유해 주셨기 때문에, 결국 그 글을 발전시켜 학위논문으로까지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이승종 교수님께서는 박사과정 중에도 적극적으로 제 작업을 옹호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공부의 방향도 제안해주시면서 학문적 보호자의 역할을 기꺼이 맡아주셨습니다. 모든 대학원생들에게 지도교수님이 배정되지만, 모든 대학원생들이 지도교수님께 저만큼이나 큰 은혜를 입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감히 확신할 정도입니다. 제 학위논문은 이승종 교수님께서 쓰신 『데리다와 비트겐슈타인』, 『비트겐슈타인이 살아 있다면』, 『크로스오버 하이데거』, 『비트겐슈타인 새로 읽기』를 읽으면서 받은 지적 자극을 제 나름대로 발전시키고자 한 노력을 담고 있습니다. 또한 이승종 교수님의 대학원 강의들, LearnUs 강좌, 성천아카데미 강좌로부터 배운 철학적 태도를 제 나름대로 모방하고자 한 시도를 담고 있기도 합니다. 이승종 교수님께서 호의와 애정으로 제 박사과정을 이끌어주시지 않으셨다면, 저는 결코 지금과 같은 형태로 학위논문을 완성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故 김영건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김영건 교수님께서 2015년에 서강대학교 대학원에서 개설하신 ‘언어철학연구’ 강의를 통해 해석학과 분석철학이 다양한 지점에서 서로 교차하는 분야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김영건 교수님께서 작성하신 「하이데거와 분석철학」이라는 논문을 통해 분석철학의 관점에서 해석학을 정초하고자 하는 에른스트 투겐트하트와 같은 인물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제가 석사과정을 막 졸업하였을 무렵에, 김영건 교수님께서 저에게 소개해 주신 The Problem of Objectivity in Gadamer’s Hermeneutics in Light of McDowell’s Empiricism이라는 책을 통해 가다머 이후 해석학의 흐름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저는 본래 분석철학이 답답한 형식논리학에 갇힌 학문이 아닌지 의심하던 학생이었지만, 언제나 유쾌한 태도로 분석철학의 새로운 면모들을 보여주신 김영건 교수님을 통해 해석학과 분석철학을 비교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석사 학위논문에서 그 작업을 어설프게 수행하여 김영건 교수님께 드렸을 때, 교수님께서 “논문 줘서 고마워. 그런데 왜 이렇게 짧게 썼냐? 좀 더 길게 쓰지.”라고 웃으면서 말씀하시고, 본인의 블로그에 논평까지 써서 올려주셨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제 박사 학위논문은 의도치 않게 매우 긴 글이 되어버렸지만, 이제 학위논문을 드릴 김영건 교수님께서 세상에 계시지 않아 마음이 아픕니다.

박병준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석사과정에서 서강대학교 철학과의 박병준 교수님께 지도를 받았습니다. 석사과정 1학기의 어느 날 박병준 교수님과의 면담 시간에 제가 가다머와 비트겐슈타인을 함께 비교해 보면 흥미로울 것 같다는 의견을 말씀드리니, 교수님께서는 그 두 인물이 모두 ‘놀이(Spiel)’라는 개념을 중요한 모티프로 삼고 있다고 알려주시면서 제가 떠올리는 작업을 구체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방향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실제로, 박병준 교수님의 조언은 제가 첫 학술지 논문을 작성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 석사 학위논문을 작성하는 데도 발판이 되었고, 결국 박사 학위논문을 작성하는 데까지 길잡이가 되어주었습니다. 그 당시에 제가 해석학과 분석철학 어느 쪽도 제대로 아는 것이 없는 학생이었다는 점을 떠올려 보면, 대학원 새내기의 야심찬 기획을 박병준 교수님께서 관대하게 받아주셨다는 것이 놀랍기만 합니다. 또한 박병준 교수님의 대학원 강의들을 통해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과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매우 꼼꼼하게 읽을 수 있었던 것도 저에게는 잊지 못할 경험이었습니다. 그 시절에 텍스트를 읽은 경험이 지금까지도 제가 철학을 공부하는 데 있어 커다란 자산입니다. 제 학위논문을 이루고 있는 밑바탕에는 박병준 교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내용들이 여전히 스며들어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밖에도 학위논문에 다양한 비판과 조언을 보내주신 심사위원분들과 학위논문에 지지와 격려를 베풀어주신 학우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이윤일 교수님께서는 초고의 내용에 대해 메일로 매우 자상하게 의견을 전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비문과 맞춤법과 오탈자까지도 날카롭게 짚어주셔서, 학위논문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제가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서동은 교수님께서는 칸트와 하이데거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제Ⅰ부 제4장의 내용에 다양한 통찰과 영감을 불어넣어주셨습니다. 조대호 교수님께서는 하이데거에 대한 텍스트 분석을 더욱 철저하게 다듬을 수 있도록 지도해주셨습니다. 주재형 교수님께서는 제Ⅲ부 제12장의 내용에서 제가 명확하게 해명하지 못한 부분들을 다시 들여다 볼 수 있도록 이끌어주셨습니다. 서강대학교 철학과의 김진희 선배님, 서강대학교 철학과의 서한얼 씨, 워릭대학교 철학과의 김주용 씨, 성균관대학교 철학과의 김인태 씨는 학부 시절부터 지금까지 철학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언제나 든든한 동료로서 저를 응원해주었습니다. 게이오기주쿠대학교 철학과의 정민재 씨는 석사시절부터 함께 비트겐슈타인, 크립키, 맥도웰을 공부하면서 저의 작업에 깊은 관심을 보내주었습니다. 조지아주립대학교 철학과의 유시원 씨와 본대학교 철학과의 박민수 씨는 저에게 언제나 수많은 지적 자극을 일으켜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아내 김지아는 박사과정동안 정서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저를 항상 지탱해주었습니다. 모든 분들께 제 마음을 하나하나 상세하게 표현하기에는 저에게 허락된 지면이 너무나 짧다는 것이 아쉬울 뿐입니다.

저의 논문은 ‘분석적 해석학’으로 나아가는 한 편의 글이기도 하지만, 서로 다른 12개의 글 모음이기도 합니다. 저의 논문을 구성하는 각각의 장(章, chapter)들은 따로 떼어내어 읽더라도 이해에 무리가 없는 방식으로 쓰였습니다. 물론, 저의 논문이 ‘박사학위논문’인 만큼, 제가 논문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전공자가 아닌 분들이 읽기에는 매우 전문적이기도 하고, 각각의 장들이 맺고 있는 관계도 논문 전체의 구조를 염두에 두고서 체계적으로 작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논문 전체를 읽지 않으시더라도, 각각의 장들에서 이루어지는 개별 논의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그 장들만 살펴보셔도 그 논의에 대한 하나의 완결적 이해를 얻으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령, 칸트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석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제4장만 읽으셔도 되고, 현대 해석학 논쟁의 동향에 대해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제7장만 읽으셔도 됩니다. 특별히, 각각의 장들 중에서 제가 좀 더 신경을 써서 작성한 장들은 제3장, 제8장, 제12장입니다.

―제3장은 후설의 현상학과 하이데거의 현상학을 비교합니다. 저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현상학’ 항목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후설과 하이데거가 쓴 네 벌의 초고들과 두 인물이 주고받은 편지들을 세밀하게 추적하면서 현상학에 대한 그들의 입장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구분하였습니다. 성서학을 취미로 공부하면서 배운 엄격한 본문 비평을 방법을 철학 텍스트 분석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구상한 장이다 보니, 여기서 이루어지는 후설과 하이데거에 대한 독해는 대륙철학에서 일반적으로 이루어지는 텍스트 독해보다도 방법론적으로 훨씬 탄탄하다고 자부합니다.

―제8장은 투겐트하트의 분석적 해석학을 소개합니다. 투겐트하트는 하이데거의 마지막 제자 그룹에 속한 인물이자 독일 철학계에 분석철학을 최초로 소개한 인물이라, ‘현상학’과 ‘분석철학’ 혹은 ‘해석학’과 ‘분석철학’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주목할 만한 철학자입니다. 그러나 투겐트하트에 대한 연구는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국외에서도 그다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투겐트하트의 아리스토텔레스 연구나 투겐트하트의 하이데거 비판 같은 지엽적인 주제에 초점을 맞출 뿐, 투겐트하트가 제시한 ‘분석적 해석학’의 전체 면모를 파악하지 못합니다. 투겐트하트의 분석적 해석학은 (로티가 지적한 것처럼,) 대륙철학과 영미철학 양쪽을 가로지르면서 전개되다 보니, 그 두 진영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대단히 복잡하고 난해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투겐트하트의 분석적 해석학이 지닌 전체 면모를 최대한 체계적으로 해명하고 비판적으로 평가하려 하였습니다. 제가 얼마나 투겐트하트를 잘 소개하였는지는 다른 연구자들을 통해 검토되어야 하겠지만, 적어도 투겐트하트를 제가 독해한 것만큼 체계적으로 독해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일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제12장은 기술주의와 지시주의 사이의 논쟁을 분석적 해석학의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저는 대학원 초년생 시절 하버마스가 쓴 『진리와 정당화』와 라폰트가 쓴 『해석학적 철학에서의 언어적 전회』를 읽고서 커다란 지적 충격을 받았던 경험이 있습니다. 두 인물은 도넬란, 크립키, 퍼트남의 지시주의를 받아들여 하이데거와 가다머의 현상학적 해석학을 ‘관념론’과 ‘상대주의’라고 비판합니다. 그들의 비판이 과연 얼마나 정당한지를 차치하고서라도, 저는 그들의 비판이 무서울 정도로 강력하다고 느꼈습니다. 크립키가 제기하는 ‘양상적 논증’, ‘의미론적 논증’, ‘인식적 논증’이나 퍼트넘이 제기하는 ‘쌍둥이 지구 논증’은, 단순히 현상학과 해석학만 공부해서는 제대로 고민할 수 없는 문제들을 간결하면서도 정확한 방식으로 짚어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논의를 그대로 이어 받아 그 문제들을 현상학과 해석학에 직접 제기하는 하버마스와 라폰트의 논증도, 마치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들어오는 어퍼컷처럼, 현상학과 해석학에만 매몰되어 있던 제 정신을 얼얼하게 하였습니다. 그들의 비판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가 꽤 오랫동안 저의 공부 과정을 형성한 중요한 고민거리들 중 하나였습니다. 특별히, 과거의 저는 지시주의 자체를 완전히 거부하는 방식으로 그들의 비판에 대응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과 달리, 현재의 저는 지시주의를 수용하면서도 하이데거와 가다머의 중심 통찰을 얼마든지 옹호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제안하고자 하는 ‘분석적 해석학’이 바로 분석철학의 방법과 비판을 수용하여 해석학을 새로운 방식으로 옹호하려는 시도인 만큼, 지시주의와 해석학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부분은 저의 논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상학, 해석학, 분석철학에 관심이 있는 다양한 분들이 이번 논문을 읽으시고서 피드백을 보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400쪽이 넘는 박사학위논문을 다른 분들께 읽어주셨으면 하는 바람 자체가 무리한 줄은 알지만, 오랫동안 고민하면서 쓴 글이다 보니, 이 글이 단순히 데이터 더미로만 남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폭넓은 독자 층을 확보하고 싶은 만큼, 몇몇 장들은 보강하고 번역해서 국제 학술지에 투고해 보려는 계획도 있습니다. 물론, 저의 학위논문은 저의 자기만족을 위해 쓰인 것이고, 저의 자기만족에 다른 분들이 반드시 어울려주어야 할 의무가 없다는 사실은 언제나 잘 자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저의 논문이 다루는 인물과 주제가 다양한 만큼, 각각의 내용에 대해 공격을 받을 만한 여지도 그만큼 다양하다는 것도 인지하고 있습니다. 다른 분들이 저의 논문에 관심을 보이지 않거나, 저의 논문에 혹평을 한다는 것으로 제가 세상에 대해 불평을 쏟아놓는다면, 저는 제가 쓴 고작 학위논문 한 편에 지나치게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우스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다만, 어딘가에는 저와 비슷한 관심과 의견을 지닌 분들이 있지는 않을지, 그리고 그분들이라면 제 학위논문도 흥미롭게 읽어주시지는 않을지 하는 막연한 기대를 품는 것은 저에게도 허용되지 않을까 합니다. (이승종 교수님께서는 종종 제가 학위논문으로 고민할 때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글을 써라.”라고 매우 진지하게 조언해주셨습니다. 저는 다른 분들이 제 글을 읽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못하였지만, 적어도 저의 논문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저의 그리스도교 신앙고백과 그리스도교 변증이 은밀하게 담겨 있는 만큼,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저의 논문을 받아주시리라고 믿습니다.)

논문 다운로드 링크(RI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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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 많으셨고 대단하십니다. 배우는 마음으로 정독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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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정독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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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드립니다. 책으로 출간하시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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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올빼미 스터디 업로드 용도로 사용했던 유튜브로 박사 논문으로 소규모 강연(?) 발표회를 해도 좋을 것 같아요. 이를 시작으로 올빼미 고인물 유저 중에 박사를 밟고 있는 몇 분들도 이어서 박사를 따시면 축하 겸으로 발표를 하면 좋은 전통이 될 것 같네요. 저는 오백 만년 뒤에나 딸 것 같지만 :j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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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멋지네요.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꼭 정독해보겠습니다 설레네요:face_holding_back_tears::+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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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안녕하세요,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현재 제가 있는 곳에서는 riss 접근이 안 되는데(원문 보기를 눌러도 하얀 창만 뜨네요 흑...) 혹시 pdf를 받아볼 수 있을까요? 메시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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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Academia.edu에도 논문을 올렸는데, 아마 아래 링크에서 다운받으실 수 있을 거예요!

https://www.academia.edu/173638750/현상학적_해석학에서_분석적_해석학을_향하여_초월론적_사유에_대한_비판_From_Phenomenological_Hermeneutics_towards_Analytic_Hermeneutics_A_Critique_of_Transcendental_Thinking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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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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