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본질에 대한 여섯 가지 질문: 맥다니엘의 『존재의 파편화』 제9장

원글: 잡념과 공상 : 네이버 블로그

9. 1. 도입

‘본질’이라는 개념은 ‘양태적 본질(modal essence)’과 ‘엄격한 본질(strict essence)’이라는 서로 다른 두 가지 개념으로 다시 구분될 수 있다. 존재물의 양태적 본질이란 그 존재물이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실존한다면(if it exists in some way or other) 필연적으로 예화해야 하는 속성들이다. 존재물의 엄격한 본질이란 ‘그 존재물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what it is to be that entity)’를 정의하기 위해 포착되어야 하는 속성들이다. 가령, 철수가 실존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예화해야 하는 속성들과 영희가 실존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예화해야 하는 속성들은 상당 부분 겹칠 수 있지만, 철수를 ‘철수’라는 고유한 개체로 만들어주는 속성들과 영희를 ‘영희’라는 고유한 개체로 만들어주는 속성들은 거의 겹칠 수 없다는 점에 주목하자. 전자의 속성들이 바로 철수와 영희의 양태적 본질이고, 후자의 속성들이 바로 철수와 영희의 엄격한 본질이다. 이제 맥다니엘은 이러한 정의를 바탕으로 ‘양태적 본질’과 ‘엄격한 본질’이라는 개념이 ‘실존’, ‘존재의 양태’, ‘존재의 방식’이라는 개념과 맺고 있는 관계를 자신의 존재론적 다원주의를 바탕으로 탐구하고자 한다. ‘본질’이라는 개념을 ‘실존’이라는 개념으로부터 근거지으려 하는 시도가 맥다니엘의 작업에서 주로 이루어진다.

9. 2. 모든 것이 엄격한 본질을 지니는가?

엄격한 본질 개념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모든 존재물이 엄격한 본질을 지닌다고까지 생각해야 할 필요는 없다. 엄격한 본질 개념에 대한 오늘날 옹호자들은 모든 존재물이 엄격한 본질을 지닌다는 입장을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전제하는 경향이 있지만, 정작 아리스토텔레스, 아퀴나스, 수아레즈 등 철학의 역사에서 엄격한 본질 개념을 옹호한 거인들 중 대부분은 모든 존재물이 엄격한 본질을 지닌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맥다니엘도 ‘명목상의 존재자’는 엄격한 본질을 지니지 않는다는 입장을 취한다. 그는 크게 두 가지 논증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제시한다.

―첫 번째 논증: 엄격한 본질이 형이상학적으로 근본적이라고 가정해 보자. (제5장 제7절에 따라) 근본적 속성이나 근본적 관계가 완전히 실재적인 존재자에게만 귀속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엄격한 본질 역시 완전히 실재적인 존재자에게만 귀속될 수 있다. 그러나 구멍, 그림자, 균열 등 명목상의 존재자들은 완전히 실재적인 존재자가 아니다. 따라서 명목상의 존재자는 엄격한 본질을 지닐 수 없다.

―두 번째 논증: 엄격한 본질이 형이상학적으로 근본적이지 않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나 (네이선 와일드만의 논증을 따라) 대상이 엄격하게 본질적인 속성을 지니는 것은, 대상이 양상적으로 본질적인 속성을 지니고 그 속성이 완벽하게 자연적인 속성일 경우, 그리고 그 경우에만이라는 점을 고려하자. 또한 (제5장 제7절에 따라) 완전히 실재적인 존재자만 완벽히 자연적인 속성과 관계를 지닌다는 점을 고려하자. 이러한 두 가지 전제가 결합되면, 완전히 실재적인 존재자가 아닌 명목상의 존재자는 완벽히 자연적인 속성과 관계를 지닐 수 없다는 점에서, 명목상의 존재자는 엄격한 본질을 지닐 수 없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9. 3. 사물의 엄격한 본질에 대한 진리가 그 사물의 실존을 함축하는가?

본질이 실존에 과연 선행한다고 할 수 있는지, 혹은 어떠한 의미에서 선행한다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철학의 역사에서는 다양한 논쟁이 있었다. 대상에 대한 참된 본질론적 주장들의 논리합을 그 대상의 ‘총 명제적 본질(total propositional essence)’이라고 일컬어 보자. 맥다니엘은 이러한 본질에 대한 세 가지 관점을 구분한다.

―데카르트적 관점: 아비첸나,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마이농 등에 따르면, 대상 x에 대한 참된 본질론적 주장은 x가 가능적으로 실존한다는 것을 함의한다. 따라서 그 주장은 x가 현실적으로 실존하지 않더라도 참일 수 있다. 가령, 아담에 대한 본질론적 주장은, 아담이 세상에 현실적으로 창조된 시점에서도 참이었지만, 아담이 신의 관념에 가능적으로만 존재한 시점에서도 참이었다.

―가능론적 관점: 에지디우스 로마누스 등에 따르면, 대상 x에 대한 본질론적 주장은 x가 가능적으로 실존한다는 것을 함의할 뿐만 아니라, 그 x가 ‘가능적 실존(possible existence)’이라는 존재의 방식을 지닌다는 것을 함의한다. 즉, 이러한 관점은 데카르트적 관점에 ‘현실적 실존’과 ‘가능적 실존’이라는 구분을 추가한다. 단순히 대상에 대한 참된 본질론적 주장으부터 그 대상이 가능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도출하고자 하는 시도를 넘어서, ‘본질’이 대상을 ‘가능적 존재자’로 만드는 원리이고, ‘실존’은 대상을 ‘현실적 존재자’로 만드는 원리라고까지 논증하고자 하는 것이다.

―실존론적 관점: x에 대한 참된 본질론적 주장으로부터 x가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는 주장을 도출하고자 하는 입장도 존재한다.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애초에 명제는 ‘그들이 지향하는 것(what they are about)’을 요소로 지니는 구조화된 존재물이다. 가령, 나에 대한 참된 본질론적 주장 혹은 명제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 주장이 지향하는 ‘나’라는 대상이 그 주장 속에 이미 요소로서 존재해야 한다. 나에 대한 본질론적 주장이 특정한 세계에서 존재할 수 있고 참이 될 수 있다는 것은, 그 주장이 지향하는 ‘나’라는 대상이 그 세계에서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함의한다는 것이다. (다만, 맥다니엘은 (a) 실존론적 관점이 ‘세계에서 참임(being true at a world)’과 ‘세계 속에서 참임(being true in a world)’이라는 구분을 혼동하고 있다는 점과 (b) 그 명제가 참이 되는 세계에서 명제 속 요소가 ‘특정한 존재의 양식(some mode of being)’을 지니고 있다는 전제로부터 그 요소가 반드시 ‘현실적 실존의 형식(form of actual existence)’까지 지니고 있다는 결론이 도출되지는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다.)

9. 4. 엄격한 본질은 존재물인가?

본질은 본질론적 주장의 ‘진리제조자(truth-maker)’이거나 그 주장의 참을 위한 ‘근거(ground)’라고 할 수 있다. 가령, “데이비드 루이스가 사람이라는 것이 데이비드 루이스의 본질이다(It is of the essence of David Lewis that he is a person).”라는 주장을 고려해 보자. 데이비드 루이스의 본질이 그 주장의 진리제조자이거나 그 주장의 참을 위한 근거라고 말하는 것은 합리적인 것 같다. 그러나 여기서 ‘데이비드 루이스의 본질’이 이러한 진리제조자나 근거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 정확히 어떠한 존재물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입장이 갈라진다. 맥다니엘은 크게 다섯 가지 입장을 고려한다.

―데이비드 루이스 자신: 데이비드 루이스의 총 명제적 본질을 위한 존재적 근거는 데이비드 루이스 자신일지도 모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VII.4, 1029b1-3과 13-16이 이러한 주장을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를 지니고 있다. 또한 데카르트의 『철학의 원리』도 비슷한 방식으로 해석될 여지를 지니고 있다.

―데이비드 루이스의 적절한 구성 요소: 데이비드 루이스가 일종의 ‘형상질료적 구성물(hylomorphic compound)’이고, 그 구성 요소 중 하나가 ‘실체적 형상(substantial forms)’이라고 가정해 보자. 또한 어떠한 대상이든지 그 실체적 형상을 지닌다면, 데이비드 루이스와 질적으로뿐만 아니라 수적으로도 동일한 대상이 된다고 가정해 보자. 데이비드 루이스의 적절한 구성요소인 바로 이러한 실체적 형상을 데이비드 루이스의 본질이라고 보는 입장도 존재한다. 다만, 실체적 형상을 본질로서 받아들이는 입장은 대상이 ‘하나의 실체적 형상’만을 지닌다고 볼 것인지, ‘다수의 실체적 형상’을 지닌다고 볼 것인지에 따라 다시 구별되기도 한다.

―데이비드 루이스에게 귀속되는 속성들의 집합: 맥다니엘은 데이비드 루이스에게 귀속되는 속성들의 집합을 데이비드 루이스의 본질이라고 주장하는 입장이 얼핏 보기에 그다지 유망하지는 않다고 평가한다. 그는 총 명제적 본질이 참이기 때문에 속성들의 집합이 총 명제적 본질에 대응하는 것이지, 속성들의 집합이 총 명제적 본질의 존재적 근거이기 때문에 속성들의 집합이 그 본질에 대응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그는 속성들의 집합을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입장을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는다. 속성들 일반이 필연적 존재자들이라고 상정하고, 속성들의 집합들 일반이 참된 본질론적 주장의 존재적 근거라고 상정할 경우, x가 실존하지 않더라도 x에 대한 총 명제적 본질은 참일 수 있는 상황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신의 정신 속에 있는 데이비드 루이스에 대한 관념: 맥다니엘은 전통적 유신론에서처럼 신의 정신 속에 있는 대상에 대한 관념이 대상의 본질이라고 주장할 경우 흥미로운 결론이 도출된다고 지적한다. 전통적 유신론에서 신은 아무런 부분으로도 나누어지지 않는 절대적으로 단순한 존재자이다. 우리는 신의 정신을 ‘단지 이성에 따른 구분들(mere distinctions of reasons)’을 통해 ‘단지 이성에 따른 존재자들(mere being of reason)’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지만, 신의 정신이 실제로 ‘관념들’이라는 부분들로 나누어지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신의 정신 속에 있는 관념’이라고 일컫는 사물이란 단지 ‘명목상의 존재자’일 뿐이다. 대상의 본질을 신의 정신 속에 있는 관념이라고 주장하고, 그 관념이 명목상의 존재자라고 주장하는 입장은, 그 본질이 형이상학적으로 근본적이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해야 한다. 물론, 이러한 결론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a) 신의 정신 속에 있는 관념이 아니라 신이 사물의 궁극적인 존재적 본질이라고 주장하거나, (b) 형이상학적 단순성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도 부분전체론적 단순성을 받아들이는 대안적 신 개념을 제시하여 그 결론을 회피하고자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독자적 존재물: 본질이 독자적인 존재물이라는 입장을 선호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본질이 어떠한 존재물인지 설명하고자 하는 다른 입장들이 모두 실패할 때에야 비로소 본질이 독자적 존재물이라는 입장이 받아들여질만 하지만, 결국 ‘독자적 존재물’이라는 개념은 본질에 대해 더욱 명확하게 설명하기보다는 우리가 본질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을 말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학의 역사에는 이러한 입장을 바탕으로 흥미로운 논의를 전개한 아퀴나스, 에지디우스 로마누스, 아비첸나 같은 인물들이 있기도 하다. 그들은 사물의 실존이 아직 사물의 본질에 귀속되기 이전에도 사물의 본질이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독자적 존재물’로서 미리 존재하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별히, 맥다니엘은 아비첸나의 입장이 매력적이라고 평가한다. 그는 아비첸나처럼 ‘본질’을 독자적 존재물로 상정한 상태에서 ‘실존’ 혹은 ‘존재의 양태’가 그 본질에 귀속된다는 입장을 지지한다. 혹시 우리가 독자적 존재물로서 ‘본질’을 일종의 ‘속성’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우리는 ‘실존’ 혹은 ‘존재의 양태’를 본질에 귀속되는 속성으로서 일종의 ‘고차적 속성’이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 맥다니엘의 입장이다.

9. 5. 존재의 양태만으로 엄격한 본질이 완전히 규명되는 사물이 있는가?

우리는 실존과 본질이 분리되지 않는 존재자를 떠올려 볼 수 있다. 물론, 전통적 형이상학에서는 ‘그러한 존재물은 존재하는가?’라는 실존에 대한 물음과 ‘그 존재물의 본질은 무엇인가’라는 본질에 대한 물음이 엄격하게 분리되었다. 그러나 존재자가 서로 다른 존재의 양태를 지닐 수 있다는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그 존재자가 지닌 존재의 양태가 곧바로 그 존재자가 지닌 본질이거나, 그 존재자가 지닌 본질이 곧바로 그 존재자가 지닌 존재의 양태인 존재자를 상상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맥다니엘은 이러한 존재자로 고려될 수 있는 두 가지 후보를 검토한다.

―현존재: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본질이 현존재의 실존에 놓여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현존재로서 우리 자신이 유한하고, 체화되어 있고, 사회적 개체이고, 규범적 그물망에 박혀 있는 방식으로 살아간다는 분석을 제시하면서, 우리가 이러한 존재의 방식을 벗어나서 다른 본질 따위를 지니고 있지 않다고 지적한다. 여기서 맥다니엘은 현존재가 지닌 존재의 방식인 실존(Existenz)을 ‘E’라는 제한적 양화사로 표현해 보자고 권유한다. 또한 그는 ‘E’라는 제한적 양화사가 등장하는 문장과 내포적으로 동치인 문장을 무제한적 양화사와 ‘F’, ‘G’, ‘H’라는 술어를 통해 표현해 보자고 권유한다. 가령, “Ey(x=y)”처럼 실존론적 양화사가 사용된 문장은 “Fx&GxHx”처럼 무제한적 양화사가 사용된 문장과 내포적으로 동치라고 가정해 보자. 이제 우리는 하이데거가 제시하는 현존재 분석론이란 바로 현존재가 지닌 존재의 방식인 E를 ‘적합한’ 술어들인 ‘F’, ‘G’, ‘H’로 기술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무엇이 ‘적합한’ 술어들인지 말하기 위해서는 술어들을 통해 형성할 수 있는 논리합 중에서 무엇이 가장 형이상학적으로 자연적인지에 대한 논의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현존재 분석론에 대한 맥다니엘의 해석이다.

―신: 스콜라적 형이상학은 신이 지닌 존재의 양태에서 실존과 본질의 분리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물론, 신이 지닌 존재의 양태는 오직 신에게만 귀속되지만, 우리는 그 존재의 양태를 명료화할 수 있는 특별한 방식을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맥다니엘은 신이 지닌 존재의 방식을 ‘D’라고 표현해 보자고 권유하고, “필연적으로, Dx(x=y)는 Cy일 경우 그리고 그 경우에만이다.”라는 명제를 만족시키는 속성들의 가장 자연적인 논리합을 ‘C’라고 표현해 보자고 권유한다. 이러한 조건에서 우리는 왜 ‘선함’은 신의 본질인 것과 달리, ‘2+2=4인 그러한 것임’은 신의 본질이 아닌지를 구분할 수 있다. C는 결국 스콜라 형이상학에서 신적 속성들의 목록에 대응할 것이기 때문에, ‘선함’은 C에 속하여서 신의 본질로 인정될 수 있을 것인 반면, ‘2+2=4인 그러한 것임’은 C에 속하지 않아서 신의 본질로 인정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맥다니엘은 본질과 실존이 분리되지 않는 존재자의 개념이 비정합적이지는 않다고 인정하면서도, 그 존재자의 개념만으로 그 존재자의 실존을 도출하고자 하는 시도는 비판한다. 즉, 그에 따르면, 특정한 대상의 본질과 실존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는 그 대상이 실존한다는 존재론적 논증을 정당화하기에는 부족하다. 설령, (현존재나 신처럼) 그 대상의 본질이 그 대상의 실존을 통해 근거지어진다고 하더라도, (a) 그 대상의 명제적 본질이 그 대상이 실존한다는 명제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 보장되지 않는 이상, 그리고 (b) 그 명제적 본질이 필연적으로 참이라는 것이 보장되지 않는 이상, 그 대상의 본질과 실존일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 대상의 실존을 위한 존재론적 논증에서 그 자체만으로는 별다른 역할을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9. 6. 엄격한 본질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존재로 환원될 수 있는가?

존재자의 본질이 존재자가 지닌 존재의 양태에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본질이 존재의 양태로 모두 환원될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불러일으킨다. 즉, 현존재나 신 같은 몇몇 존재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자들의 본질이 그 존재자들이 지닌 존재의 양태라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본질’이라는 개념 자체를 ‘존재의 양태’라는 개념으로 근거지어야 할지도 모른다. 존재자가 지닌 존재의 양태를 명료화하는 작업이 존재자가 지닌 본질을 정의하는 작업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맥다니엘은 본질을 존재의 양태로부터 근거지으려 하는 이러한 시도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여 제시한다.

―온건한 시도: 몇몇 본질을 존재의 양태로부터 근거지으려 하는 시도를 떠올려 보자. 가령, 속성은 본질적으로 실체에 의해 예화되어야 하는 존재물이지만, 실체가 본질적으로 속성을 예화해야 하는 존재물인 것은 아니다. 속성과 실체가 지닌 본질 사이의 이러한 차이는 그 두 존재물이 지닌 존재의 양태 사이의 차이로부터 근거지어질 수도 있다. 즉, (제2장에서 제시된 것처럼) 속성은 다항적 존재의 형식(polyadic form of existence)을 지니고, 실체는 절대적 존재의 양태(absolute form of existence)를 지닌다는 사실이, 속성과 실체의 본질에 대한 사실을 결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a) 본질 바깥에 있는 존재의 양태로부터 본질이 결정된다고 말하는 것이 좋은지, (b) 본질 안에 있는 존재의 양태를 통해 본질이 명료화된다고 말하는 것이 좋은지는 열린 문제이지만, 어느 쪽을 선택하든지 존재의 양태는 본질을 통해 근거지어진다고 할 수 있다.

―야심찬 시도: 모든 본질을 존재의 양태로부터 근거지으려 하는 시도를 떠올려 보자. 맥다니엘은 크게 두 가지 가설을 바탕으로 이러한 시도의 가능성을 떠올려 본다. 즉, 그의 첫 번째 가설에 따르면, 개체의 본질에 대한 사실은 본질에 대한 더욱 ‘일반적인 법칙’에서 부분적으로 근거지어진다. 또한, 그의 두 번째 가설에 따르면, 본질에 대한 더욱 일반적인 법칙은 관련된 ‘존재론적 범주’ 혹은 ‘존재의 양태’에서 다시 근거지어진다. 물론, 이러한 가설이 ‘참’인지와 ‘정당한’지에 대해 맥다니엘은 별다른 논증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두 가설을 받아들일 경우, 모든 본질을 존재의 양태로부터 근거지으려 하는 야심찬 시도가 성립할 수도 있다는 것이 맥다니엘의 요점이다.

9. 7. 사물이 자신의 존재의 양태(혹은 존재의 양태들)를 지닌다는 것이 언제나 사물의 양태적 본질의 일부인가?

존재물은 현재 자신이 지니고 있는 존재의 양태와는 다른 존재의 양태를 지닐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가정을 허용하는 입장은 존재물이 지닌 ‘자신의 존재의 양태’ 혹은 ‘현재의 존재의 양태’를 그 존재물의 양태적 본질로서 인정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하나의 존재물이 어떻게 특정한 존재의 양태를 지니다가 다른 존재의 양태를 지니도록 변화할 수 있는지가 철학적으로 완전히 분명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존재물이 지닌 존재의 양태가 변화할 수 있다는 주장은, 성체 성사에서 빵과 포도주가 예수의 물과 피로 변화할 수 있다는 주장처럼 일종의 ‘기적’에 호소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기도 하다. 여기서 맥다니엘은 존재의 양태가 변화하는 사건이 반드시 ‘기적’인 것처럼 묘사될 필요는 없다는 점을 세 가지 형이상학적 도식을 통해 지적한다.

―가능론: 현실적인 것과 가능적인 것은 가능론에서 서로 다른 존재의 양태를 지닌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단순히 현실적인 것이 어느 순간 소멸되어 단순히 가능적인 것으로 변화하는 사건이나, 가능적인 것이 어느 순간 실현되어 현실적인 것으로 변화하는 사건은 일상에서도 얼마든지 벌어진다. 우리는 현실적인 것과 가능적인 것 사이의 아주 사소하고 평범한 이행에서도 존재물이 지닌 존재의 양태가 변화하는 사건을 목격할 수 있는 것이다.

―시간에 대한 A-이론: 단순한 과거의 대상이나 단순한 미래의 대상은 현재의 대상과는 다른 존재의 양식을 지닌다. 그러나 미래의 대상이 현재의 대상으로 변화하는 사건이나 현재의 대상이 과거의 대상으로 변화하는 사건은 매 시간마다 벌어진다. 우리가 시간에서 존재의 양태가 변화하는 사건이 항상 일어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존재의 양태가 변화하는 사건을 굳이 ‘기적’과도 같은 사건이라고 상정해야 할 필요가 없다.

―내재적 질적 변화: 시간에 따라 일어나는 내재적 질적 변화를 존재의 양태가 변화하는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즉, (엘리자베스 반스의 논증을 따라) 모든 단항적 내재적 술어(monadic intrinsic predicate)가 존재의 양태에 대응한다는 입장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속성이나 사실을 도입하지 않고서도 존재이 양태를 명제의 진리제조자로 제시할 수 있다. 가령, “그 장미가 빨갛다(The rose is red).”​​의 진리제조자를 ‘빨갛게 실존하는 장미(rose existing redly)’이라고 가정해 보자. 이러한 입장은 노란 장미가 빨간 장미로 변화하는 현상이 그 장미가 지닌 존재의 양태가 변화하는 현상이라고 설명한다. 모든 종류의 내재적 질적 변화가 그 자체로 존재물이 지닌 존재의 양태의 변화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존재물이 지니고 있는 존재의 양태가 그 존재물이 지니고 있는 본질의 일부가 아니라는 주장은 존재의 양태로부터 본질이 근거지어진다는 주장을 약화시키지 않는다. (a) 존재물이 지니고 있는 존재의 양태는 각각의 세계마다 다르고 본질은 모든 세계에서 동일하더라도, 각각의 세계에서 존재의 양태는 그 세계에서 본질을 근거지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또한 (b) 몇몇 존재의 양태는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한다고 하더라도, 다른 존재의 양태는 변화하지 않는다고 강조할 경우, 변화하지 않는 그 다른 존재의 양태는 본질을 근거지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c) b-실존을 지닌 존재물은 b-본질적으로 엄격한 본질 F를 지니고 c-실존을 지닌 존재물은 c-본질적으로 엄격한 본질 F를 지닌다고 상정하면, (곧 존재물이 어떠한 실존을 지니는지에 따라 그 존재물이 어떠한 엄격한 본질을 지니는지가 달라진다고 상정하면,) 엄격한 본질이 존재물에게 양상적으로 본질적이라는 생각을 거부하는 입장도 얼마든지 성립한다.

존재물이 지닌 존재의 정도도 존재의 양태처럼 세계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우선, (a) 대물적 양상성(de re modality)에 대한 상대역 이론이 참이라고 가정한 상태에서, 서로 다른 세계 속 존재물들의 유사성으로 그 존재물이 지니고 있는 양상적 본질을 규정할 수 있다고 해보자. 다음으로, (b) 상대역 이론을 일반화하여 서로 다른 세계 속 속성들 사이의 상대역 관계가 존재할 수 있다고 해보자. 마지막으로, (c) 서로 다른 세계를 가로지르는 예화 패턴의 유사성이 속성들과 관계들의 상대역을 결정한다고 해보자. 즉, 우리가 한 세계 속 개체와 다른 세계 속 개체 사이에서 상대역 관계를 발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 세계 속 속성과 다른 세계 속 속성 사이에서도 상대역 관계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해보자. 이러한 가정을 받아들일 경우, 한 세계 속 속성과 다른 세계 속 속성 중 어느 쪽 속성이 더욱 ‘자연적’인 속성인지에 대한 평가가 성립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상대역 관계를 맺고 있는 두 속성 사이의 ‘자연성’을 비교하여 그 속성들로 이루어진 존재물의 ‘존재의 정도’를 비교할 수 있다. 한 세계의 존재물이 다른 세계의 존재물보다 더욱 자연적인 속성들로 구성되어 있다면, 그 세계의 존재물은 다른 세계의 존재물보다 존재의 정도가 더욱 높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참고

McDaniel, K., The Fragmentation of Being,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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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속성이나 본질의 차이가 반드시 존재의 차이로 반드시 이어지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맥다니엘은 속성 내지 본질의 다수성을 곧 존재방식의 차이로 여기는 듯해요. 아래 인용문에 나타난 것처럼요.

속성은 다항적 존재의 형식(polyadic form of existence)을 지니고, 실체는 절대적 존재의 양태(absolute form of existence)를 지닌다는 사실이, 속성과 실체의 본질에 대한 사실을 결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a) 본질 바깥에 있는 존재의 양태로부터 본질이 결정된다고 말하는 것이 좋은지, (b) 본질 안에 있는 존재의 양태를 통해 본질이 명료화된다고 말하는 것이 좋은지는 열린 문제이지만, 어느 쪽을 선택하든지 존재의 양태는 본질을 통해 근거지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아래에서,

존재물이 지니고 있는 존재의 양태가 그 존재물이 지니고 있는 본질의 일부가 아니라는 주장은 존재의 양태로부터 본질이 근거지어진다는 주장을 약화시키지 않는다.

라는 구절은 존재의 양태, 즉 대상의 존재함 여부에 대한 논리적 사실 및 세계 내에서 존재하는 방식으로서의 양태와, 본질적 내용이라는 형이상학적 진술을 근거지움(grounding)을 통해 결합하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나아가 이는 (제가 맞게 이해했는지 좀 헷갈립니다만) 본질이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 존재의 기저에 다른 논리적 기작이 작용한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으로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본질이 항상 존재의 양태에 좌우되거나 근거지워지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이를테면 가위는 그 본질이 이미 정해져 있고 이것이 그 존재양태를 결정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가위처럼 미리 본질이 정해지지 않은 존재입니다(적어도 하이데거에 따른다면요). 그런데 이러한 사실은 실존(Existenz)이라는 존재양태에 의해 좌우되거나 근거지워지는 것은 아니죠.

존재물이 지닌 존재의 정도도 존재의 양태처럼 세계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 한가지를 말씀드리자면...위의 구절이 시사하는 것처럼 '존재의 정도'를 구분하는 것은 맥다니엘이 (그의 저서 다른 부분에서 언급한 것처럼) 존재를 양화사들의 체계에 접근시키는 것과 모순을 일으키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오해한 부분이 있다면 부디 알려주세요. 덕분에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난해한 내용을 정리하고 올려주셔서 큰 도움이 됩니다.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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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적으로 올바르게 이해하신 것 같습니다. 다만, 맥다니엘이 제9장에서 본질과 존재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아주 명료하고 체계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보니, 저 장의 내용만으로 맥다니엘의 입장을 하나로 규정하기가 약간 어렵습니다. (맥다니엘 스스로 제9장이 '선형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쓰였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말하려는 내용이 '사변적'이고 '열린 결말'을 지니고 있다고 강조하거든요.) 아마

이 부분은 맥다니엘의 견해를 대체로 잘 요약하신 것 같습니다. 다만,

위의 요약은 다소 논쟁적인 것 같습니다. 맥다니엘이 적극적으로 "본질이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이려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물론, 맥다니엘이 주장은 결국 "존재의 양태가 본질을 결정하는 것 같다."라는 결론을 향하고 있지만, 맥다니엘이 이 주장을 아주 강하게 제시하는 것은 아닐 뿐더러, 이 주장을 위해 다른 모든 세부 논의를 조정하고 있는 것까지는 아니라서요. 또 "존재의 기저에 다른 논리적 기작이 작용한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맥다니엘은 '본질'을 '존재의 양태'로부터 근거지으려 하지만, '존재의 양태'를 다른 논리적 기작으로 근거지으려 하는 것 같지는 않아서요. (만약 ‘논리적 기작‘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제한된 양화사restricted quantifier를 염두에 두신 것이라면, 맥다니엘은 존재의 방식을 제한적 양화사로 ‘표현‘하려 한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듯합니다. ‘근거짓는다‘는 것은 킷 파인이나 조너선 셰퍼 등이 사용하는 특수한 용어이다 보니,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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