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에 대한 오해 - 존재의 동적/시스템적 이해

지난 글에 이어지는 SEP 둘러보기 시리즈 입니다.

지난 번 언급했던 오해들 중 또 한가지 제가 가졌던 오해는 존재자-존재 담론을 관념적 존재-이데아 식으로 해석했던 것에서 왔다고 언급드렸는데요. 저는 이전까지 이러한 방식으로 하이데거의 존재 담론을 'A 의 B에 대한 이해' 로서 이해했었습니다. 그렇기에 여전히 하이데거의 철학이 관념론 vs 초월론의 담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고 생각했었지요.

이번에 SEP를 읽으며 느낀 건,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A의 B에 대한 이해' 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다시 메타적으로 바라볼 때 얻는 이해를 포함하는 담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즉 하이데거의 존재론 중 일부(일부라고 표현한 이유는 이 설명은 현존재에 국한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인 현존재의 존재론은 현존재가 존재자를 파악하는 방법을 관찰함에서 얻을 수 있는 존재에 대한 이해인 것이지요. SEP 에서 인용한 Mulhall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물론 여기서 Mulhall 은 보편적인 존재론까지 확산시켜 해석한 것 같지만, 저는 아직 거기까지는 동의가 되지않네요.)

Because we are the beings that understand being, by starting with an inquiry into human existence we can acquire an understanding of what it is to understand Being; and since what is understood in an understanding of Being is indeed Being, to grasp the constitutive structure of that understanding … will be to grasp the constitutive structure of that which is thereby understood. (Mulhall 2013: 18)

이 때 존재라는 단어는 너무 저에게 정적이라 이해하는 데 혼란을 주었기에, '존재' 대신 '이해' 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도식을 그려봤습니다.

'이해' 라는 대상을 이해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해' 라는 대상을 이해하려면 먼저 나-현존재 가 '이해' 라는 것을 이해하는 내용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대상과 상호작용하며 알 수 있는 이해 입니다. 그러나 현존재로서의 우리는 이러한 이해하는 과정을 한발 짝 떨어져 메타적으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이해를 어떠한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는가 를 보면서 말이죠. 다시말하면 이는 '내가 무언가를 이해하는 시스템' 에 대한 이해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존재에 대한 1차적 이해담론 - Ontic sciences 와 이러한 구조들을 탐구하는 2차적 이해담론 - Ontological inquiries 는 구분되어야 하는 것이 됩니다. SEP 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Heidegger also draws a distinction between being and entities, and thus between ontological inquiries and ontic sciences.

다시 맨 처음으로 돌아가보겠습니다. 저는 하이데거의 철학이 존재자-이데아 담론으로 여겼었다 말씀드렸는데요, 이 관점은 지금 돌이켜보니 1차적 이해담론인 Ontic sciences 에만 국한되어 있었다 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관점은 결국 하이데거가 '존재'라는 단어를 존재, 존재자, 현존재 등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했다는 지점을 서포트합니다. 하나의 용어인 '존재' 를 Ontic sciences 와 Ontological inquiries 에서 모두 혼용해서 사용할 경우, 너무 헷갈리기 때문입니다.

결국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있어서, 존재를 자꾸 발견가능성이 있는 하나의 정적인 대상 - 이데아 로 치부한다면 하이데거의 철학을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존재'라는 단어가 시스템/시스템을 가능하게 하는 힘/흐름 혹은 가능성 등 동적인 모습으로 해석될 때 하이데거의 철학을 더 풍성하게 맛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P.S 사실 글을 쓰면서 지운 담론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이해의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 '(대상으로서의) 이해' 에 대한 이해를 준다 라는 담론입니다. 현존재가 '(대상으로서의) 이해'를 이해하는 방식을 분석하면, 어떠한 이해시스템을 찾을 수 있고, 이 시스템은 '이해'라는 구조가 가지는 특징이기에, 대상이 되는 '이해' 역시 그러한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에 '현존재의 이해시스템'을 이해하는 것이 다시 '(대상으로서의) 이해' 를 돕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지면도 길어질 뿐더러 말 그대로 제가 이 말들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아 이정도로만 언급하겠습니드아..

전 하이데거 전공자는 아니지만 하이데거에 관심이 있는 사람으로써 댓글을 남깁니다

제 짧은 이해로는 하이데거는 A being/beings [seiende] 와 Being [Sein]의 구분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니깐 하이데거는

하지 않습니다. 대신 존재자와 존재를 나누어서 사용하지요. 영어에서는 주로 존재는 대문자를 써서 Being, 그리고 존재자는 소문자를 써서 beings 라고 쓰는 것 같습니다. 전 이 구분이 chair/chairs (a chair) 와 같은 구분과 비슷하다고 배웠습니다. 한국어에는 없는 표현이지만, 영어에서 chair과 a chair은 엄연히 다르지요. 저는 지금 a chair에 앉고 있지만 chair에는 앉고 있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의자는 a being이지만 Being은 아닌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현존재 역시 존재를 탐구하는 존재자들로 봐야합니다. 저는 하나의 현존재고, 존재를 이해하는 존재자입니다. 그게 인용구의 첫번째 문장이 말하는 바 같습니다:

(왜 여기서 being이 대문자로 써지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깐

이 도식에서도 대상으로서의 이해가 아닌 존재가 자리잡아야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존재를 바라보는 현존재들을 이해하는 것이

라고 볼 수 있겠네요.

사실 이 부분에서 하이데거의 Being과 beings가 이정도로 고유어로 쓰여야 하는지 잘 모르겠을 때가 있습니다. 하이데거의 현존재는 인식 주체들이고, Sein은 존재 개념 일반이고, Seinedes는 개별 존재자들 아닌가요?

그렇게 생각하면 하이데거가 뭔가 특별한 주장을 하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개별 존재론은 실제로 무엇이 존재하는지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철학적 존재론은 존재 개념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특이한 면이 하나 있다면 존재 개념은 인간적 (내지는, 인식 주체들에 관련된) 사실에 바탕하고….

어떤 점이 하이데거의 특별함일까요? 적어도 이 부분을 길게 설명하는 존재와 시간 서론에서는 그다지 특별함을 못 느꼈습니다. 시기를 생각건대 시대적으로 중요한 철학자이고, 중요한 문제를 명시화한 텍스트이기는 하지만요.

1개의 좋아요

다시 하이데거 "아마추어"로써 댓글을 달자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게 된 이유가 하이데거의 업적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요. 실제로 현대 철학에서의 ontological monism/pluralism 논쟁도 하이데거의 영향을 많이 받은 걸로 알고 있기도 하고요. 물론 저는 헤겔이 이 구분을 먼저 봤고, 하이데거가 헤겔로부터 그 점을 읽어내지 못하고 자기가 무언가 혁명적인 걸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라고 배우긴 했습니다.

네. 헤겔 말씀도 하셨지만, 이정도 개념 차이를 하이데거 선배 철학자들이 몰랐을까? 존재-존재자 구분을 하이데거의 업적마냥 생각할 이유가 있나? 이런 생각이 자꾸 들더라고요. 본론부의 주장들은 사실 잘 이해가 되지도, 설득이 되지도 않아서 메타형이상학의 프로토타입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계몽이 되어서 개안할지도 모르지만…!

구분을 알더라도 그 구분을 철학적인 프로젝트로 만들었다는 게 중요한 거 아닐까 싶어요. 어떤 구분을 단순히 인지하는 것과 그 구분에서 철학적인 깊이를 이끌어내고 그 구분을 철학 논쟁의 중요한 부분으로 만들어낸 것에는 큰 차이가 있으니깐요.

+) 근데 @car_nap 님은 워낙 현대 형이상학을 하시면서 '포스트 하이데거' 시대에 사셨으니 공감하시기 힘드실 수도 있겠습니다.

《에티카》 정도에서도 충분히 유사한 구분이 생각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가령 스피노자에게 우리가 일반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이라고 말하는 건 개별화된 양태들이잖아요. (스피노자가 그 구별을 존재-존재자 개념 차이로 명시하고 있지는 않지만요.) 더 거슬러 올라가면, 아리스토텔레스의 being qua being이 있고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의 문제의식이 《존재와 시간》의 그것과 아주 크게 다른 걸까요?)

근데 말씀대로 제가 역사맹이라(ㅠㅠㅋㅋ) 그 드라마틱함을 잘 못 느끼는 게 큰 것 같긴 합니다.

양태와 실체가 존재의 정도가 다르다는 것을 언급하시는 거라면 어느 정도 동의합니다 (예전에 이탈리안 브레인롯 얘기하면서 그 부분을 인용했었지요...ㅋ) 이 구분은 데카르트 세번째 성찰에도 있지요. 스피노자의 양태/실체 구분은 데카르트에게서 따온 것이니깐요. 정확히 이 이유로 historical figure을 찾기가 어렵다는 말을 지웠습니다. 지우기 전 제 글을 보셨을 수도 있겠습니다. 근데 하이데거가 데카르트를 잘 알았던 걸 생각하면 이 구분을 잘 알았을 텐데, 초기 근대에서 보는 양태/실체 구분과 하이데거의 존재/존재자 구분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한 번 프로젝트를 해봐도 재밌겠네요.

제 기억으로는 하이데거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어느 정도 되살릴려는 시도를 하는 걸로 알고 있어요. 고대 철학 때 잊혀졌던 존재에 대한 물음을 내가 되살리겠다... 이랬던 걸로 기억합니다. 가물가물하지만요.

현대 형이상학을 너무 잘 아셔서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전 (다행히도) 현대 형이상학 공부하기 전에 헤겔/하이데거를 보면서 놀랐었거든요.

아 그러게요. 하이데거 할아버지 아(리스토텔레스)빠셨죠 참…. 그렇다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1개의 좋아요

정리 감사드립니다. 말씀하신대로 제가 본문에 쓴 의도는 하이데거의 주장에 따르면 하이데거 이전의 철학들은 존재한다 라는 의미를 현존재/존재자/존재 등 각각 구분이 필요한 용어를 하나로 썼다는 점이 문제였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두번째 언급해주신 부분은, 이해 라는 부분에 원래 존재 가 들어가는데, 제게는 ‘존재’ 라는 의미가 고전적이고 정적인 의미였기에 ‘이해’ 라는 단어로 바꿔서 사유해봤습니다.

저 역시도 이러한 생각에 글 서두에서 ‘하이데거의 주장은 이전 철학자들의 주장과 무엇이 다른가?’ 라는 의문이 들었었는데요, 저에게는 존재하는 방식을 이해함으로 존재의 이해로 다가간다 는 것이 다르게 느껴진 부분이었습니다.

Studying English 라는 단어로 영어공부를 한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말씀해주신 구조에 따라 여기서 ‘나’ 는 인식주체고 Studying English 라는 단어는 개별존재자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Studying English 라는 단어에 숨겨진, 혹은 도래할 진짜 뜻은 ’영어공부‘ 라는 뜻이 됩니다. 예시는 이제 인식주체인 ‘나’ 에게 관념적으로 존재하는 개별존재자인 ’Studying English’ 가 ‘영어공부’ 라는 초월적 혹은 궁극적 존재에 다가가는지에 대한 물음이 됩니다. 누군가는 ‘Studying English’ 라는 단어에서 ’영어공부‘ 라는 뜻까지 도달가능하다 라고 할 수 있고, 누군가는 불가능하다 라고 하며, 또 누군가는 정반합의 원리로 ’영어공부‘ 라는 뜻으로 나아간다고 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영어공부’ 라는 뜻은 도래하지 않음으로 존재할 수도 있으며, 혹은 차이에 의해 계속 변화하는 의미일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Studying English 라는 뜻을 알기 위한 과정에 주목한다고 생각합니다. 단어 뜻을 알려면 먼저 알파벳부터 배워야 할 것이고, 명사와 동사의 형태 나아가 동명사의 형태를 배워가며 Studying English의 뜻이 ‘영어공부’ 라는 뜻인지 점점 알아가게됩니다. 그런데 이 인식주체는 자신이 Studying English 라는 단어를 알기 위해 했던 모든 과정들- 알파벳부터 동명사까지- 를 돌이켜보며, 그 자체가 ’영어공부‘ 임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Studying English’ 라는 단어를 이해하는 과정에 대한 이해가 ’Studying English’ 라는 존재에 대한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여전히 관념론적인것이나 과정에서 배운 존재와 목적이 되는 존재성 간의 상관성 등은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다만 저에게는 이번 기회로 위에 말씀드린 관점으로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한번 더 생각해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SEP를 즐겁게 읽고 있습니다.